인간이 아닌 피보호자의 바이오로이드 - 목록






"전투가 끝나갑니다. 모든 게 끝나려면 한참 남았지만요."




 커다란 쇳덩어리들과 살덩어리들과 손을 잡은 흉물들이 동포들과 주교들을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유럽 전선에 있는 모든 철충들에게 전해졌다. 


 어떤 철충들은 복수를 부르짖으며 주변의 동포들을 규합해서 쇳덩어리들과 살덩어리들이 있을 곳으로 향했지만, 아직까지 살아있는 주교들은 살아있는 철충들에게 동쪽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했다. 주교들과 경험이 많고 강력한 이들이 떼거지로 죽어나가고, 대주교마저도 전사해 버린데다 전황이 적 쪽으로 기울어진 지금 계속 싸워봐야 동포들의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다. 


 몇몇 철충들은 살아남은 주교들이나 임시로 지휘권을 쥔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전장을 휩쓰는 강철의 물결과 괴성을 지르는 괴물들, 하늘을 뒤덮은 살덩이들과 기계들을 향해 돌진했고, 그대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갔다.


 레모네이드 델타와 유럽에 있는 철충들 양쪽에게 악몽을 선사해 주었던 괴물들은 그런 철충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패잔병 신세인 대부분의 철충들은 자신들을 노리고 덤벼드는 괴물들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철충들을 찢어버린 괴물들은 다른 희생양을 찾아서 이동했고, 그 다른 희생양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가던 다른 철충들이 되었다. 불운하게 자신들에게 걸린 철충들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도망가는 이들을 따라가면서 괴물들은 철충들 대부분의 목적지인 동쪽으로 향했다. 


 모든 괴물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철충들을 사냥하다 보니 동쪽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향하던 괴물들도 있었고, 이들은 철충들과 괴물들 양쪽을 박살내는 스트롱홀드 부대 내지는 델타가 구축해 놓은 방어선과 맞닥뜨렸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살의에 의해 움직이는 괴물들은 델타의 방어선이나 스트롱홀드 부대를 향해서도 조금의 주저나 재고 없이 달려들었고, 처참하게 갈려나가면서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삶을 마감했다. 


 도주하는 철충 부대를 사냥하던 영혼없는 이들 무리와 마주친 웃는 얼굴들이 대화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웃는 얼굴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존재라고 착각한 영혼없는 이들이 잠시 멈칫거리기는 했지만, 곧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동행하는 스트롱홀드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무리의 괴물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덤벼들었다. 


 만일 웃는 얼굴들이 철충들을 상대하고 온 길이 아니었다면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의 웃는 얼굴들은 철충들과 그 잔해들을 집어삼키면서 하나하나의 힘도, 숫자도 불어난 상태였다. 맹렬하게 덤벼드는 영혼없는 이들의  공격을 받은 웃는 얼굴들의 몸에 큼지막한 상처가 생겨났지만 싸움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매에게 달려들어 큼지막한 손톱을 휘둘러대는 영혼없는 이를 다른 웃는 얼굴들이 붙잡았고, 또 다른 웃는 얼굴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나를 상대로는 어느 정도 팽팽하게 싸웠던 영혼없는 이는 세 개체의 웃는 얼굴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자 발버둥치며 저항하다 갈가리 찢겨나갔다.


 [......저것들...... 우리하고....... 비슷해......?]


 [우리하고는....... 달라.......?]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바이오로이드들 근처에서 구경하던 웃는 얼굴들 일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자신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면서도 자신들과는 결정적인 점에서 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웃는 얼굴들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두 괴물들을 번갈아 쳐다본 바이오로이드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여러가지 가설들이 이들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가설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영혼없는 이의 양팔을 뜯어버린 한 웃는 얼굴들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직전 잠시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래의 형태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기괴한 면상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자매들이나 하얀 사람, 혹은 까칠한 사람과 천천히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웃는 얼굴들이 영혼없는 이의 몸을 두 쪽으로 찢어버렸다. 


 레오나와 그녀가 탄 스트롱홀드는 웃는 얼굴들이 영혼없는 이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철충들을 상대할 때에는 비명을 질러대고, 온갖 지저분한 방법을 동원해서 싸우던 웃는 얼굴들이 영혼없는 이들을 상대로는 철저하게 힘을 내세운 육탄 근접전만을 벌였다.  


  레오나가 근처에 있는 웃는 얼굴들을 불러 물었다.


 "지금 네 자매들, 순수하게 힘만 가지고 싸우는 것 같은데 이유라도 있는 거야?"


 [저것들....... 우리 비명.......  우리 구역질.......  소용 없어.......]


 [혹시 이전에 싸워본 적이 있는가?]

 

 스트롱홀드의 질문에 웃는 얼굴들이 고개를 저었다.


 웃는 얼굴들은 상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가진 무기들이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차리는 모양이지만 레오나나 스트롱홀드로서는 바로 믿기가 좀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험해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 괴물들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없나?]  


 이번에도 웃는 얼굴들은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쓸만한 대답을 듣지 못한 스트롱홀드가 마지막 남은 영혼없는 이가 웃는 얼굴들 셋의 협공에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이동할 준비를 했다. 다른 스트롱홀드들도 엔진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웃는 얼굴들도 대충 영혼없는 이들의 잔해를 흡수하고는 스트롱홀드들과 발을 맞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처음에 전장에 나섰던 순간보다 더 덩치가 커지고, 더 숫자가 늘어난 웃는 얼굴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트롱홀드가 지금의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그 생각의 끝은 현재가 어떻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자신들은 명령권자인 라비아타의 뜻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철충들도 짜증나는데 이것들은 더 짜증나네!"


 "안 뒈져?! 야, 너 진짜 안 뒈져!?"

  

 온몸이 갈가리 찢겨나간 상태에서조차도 어떻게든 바이오로이드들과 스트롱홀드들을 찢어버리려는 것처럼 달려들던 영혼없는 이의 발악은 그 몸뚱아리가 완전히 분해되다시피 한 다음에야 멈췄다. 


 겨우 하나 잡은 것을 기뻐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프리트-1111과 노움-6699, 피닉스 3호, 브라우니들과 레프리콘의 집중 사격이 다른 영혼없는 이들을 향했다. 


 "-큭!" 영혼없는 이가 휘두른 손톱이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이 새x가!"


 욕을 내뱉은 티아멧 2호가 대검으로 영혼없는 이의 팔을 있는 힘껏 베어올린 다음 온 힘을 다해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철충 같았으면 숙주를 두 쪽 내고 안에 있던 철충 본체까지 갈라버렸을 공격이지만 영혼없는 이는 큰 타격을 입기는 했어도 치명상을 입진 않은 것 같았다. 잠시 비틀거린 영혼없는 이가 다시 달려들려다가 방패와 창을 앞세우고 전속력으로 날아온 랜서 미나의 창에 꿰뚫렸다. 몇 번 발버둥치던 영혼없는 이의 몸통 한 가운데가 타들어가고, 곧 끔찍한 악취가 퍼지면서 영혼없는 이의 몸 전체가 녹아내렸다.


 "티아멧! 미나! 이거 좀 잡아줘!"

 

 미사일을 다 소진한 하르페이아가 따라붙은 영혼없는 이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소리쳤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인지하지 못했지만 일정 이상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녀의 존재와 위치를 눈치채고 공격해왔다.


 티아멧 1호와 3호가 각자 단검과 두 자루의 장검을 뽑아들고 하르페이아를 추적하는 영혼없는 이들에게 날아갔다.


 축성을 받은 두 자루의 단검이 등짝에 박히자 1호의 공격을 받은 영혼없는 이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재빨리 두 자루의 단검을 더 투척한 티아멧이 나머지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아서 영혼없는 이의 빈틈을 파고들어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해대는 동안 티아멧 3호는 두 자루의 장검으로 다른 영혼없는 이의 양팔을 잘라내는데 주력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군. 기간테스나 포트리스쯤 되는 AGS라도 이 정도의 화력이라면 진작에 가루가 되었을 텐데......]


 [캐터필러에 이만큼이나 갈렸는데도 계속 움직이다니...... 신기할 지경이군.] 


 포격과 캐터필러 공격으로 영혼없는 이들을 처리한 스트롱홀드들이 질린 듯이 말했다. 이 괴물들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이 괴물들이 독하고 질기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런 것들이 세계 곳곳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점점 숫자를 늘려나가고 있다고 하더군.]


 스트롱홀드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스트롱홀드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영혼없는 이들을 갈아버리거나 주포로 산산조각내는 데에만 전념했다.


 

 마지막 영혼없는 이를 곤죽으로 만든 세라피아스 앨리스 2호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철충들이 물러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전히 수천이 넘는 철충들이 이 부근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괴물들은 철충들이 퇴각하건 갈팡질팡하건, 자신들과 마주치는 이들이 철충이건 바이오로이드던 그 이외의 무엇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연결체들과 주력 부대가 타격을 입은 철충들이 물러나는 지금은 괴물들이 더 까다롭고 위험했다.

 "1호, 3호. 미사일 남았어요?"

 "없어요."

 세라피아스 앨리스 2호의 질문에 1호가 부정적인 대답을 돌려주고, 3호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호와 3호에게만 남은 미사일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자신에게는 물어보지 않는 2호에게 앨리스 4호가 항의했다.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는 건데요?"

 "한 발도 없을 게 뻔한데 뭘 물어보나요? 한 발이라도 남아있는 거 아니면 닥쳐요."

  네 앨리스들이 모두 신나게 미사일을 퍼부어댔지만 그 중에서도 앨리스 4호가 제일 신나게 미사일을 쏟아부었다. 2호의 말대로 단 한 발의 미사일도 남아있지 않은데다 자매들 중 제일 먼저 가지고 있던 미사일들과 무기들을 소진한 4호는 분한 듯이 으르렁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무식하게 생겨먹은 흉기들과 신체능력을 가지고 괴물들과 싸울 수 있는 앨리스들과는 달리 대 괴물용 무기들이든 통상 무기든 전부 다 소진한 미호와 지니야, 밴시들은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보급과 휴식이 필요합니다."

 [알겠소. 고생이 많았소.]

 무적의 용이 홍련의 보고에 대답하는 말을 들은 앨리스들이 왠지 악당이 누구 토사구팽하기 전에 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괜히 재수없게 그런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무적의 용에게 보고를 끝마친 홍련이 라비아타와 레이라미아에게 보급과 휴식이 필요함을 알렸다.

 스트롱홀드들도 더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연료야 상온 핵융합 엔진으로 움직이는 스트롱홀드들이니 문제없고, 외부 장갑판과 일부 파트에 손상이 좀 있기는 하지만 전투 속행에는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탄약은 이야기가 달랐다. 


 스트롱홀드라고 해서 탄약을 무제한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캐터필러를 앞세운 돌격이 상위 철충들이나 영혼없는 이들을 비롯한 대부분 괴물들의 몸뚱아리를 갈아버리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전부 캐터필러로 갈아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날아다니거나 높이 도약할 수 있거나 민첩하게 움직이는 상대로는.

 
 스트롱홀드의 차체 위에 드러누운 미호가 닥터에게서 받은 보호장비를 장착하고, 녹아내린 괴물들의 신체 일부를 조심스럽게 수집해서 컨테이너에 집어넣는 밴시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변에 널려있는 괴물들의 사체에서 나는 악취가 장난이 아닌데 저걸 타이거샤크든, 레모네이드 셋 중 하나의 본거지든,  괌이든 가져가는 순간 난리가 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몇 분 뒤, 은폐 마법으로 자신들의 모습뿐 아니라 자신들이 공간이동을 했다는 사실도 숨긴 레이라미아들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서 보급 물자가 담긴 컨테이너들과 스트롱홀드가 장전하는 작업을 도와줄 포츈들을 내려놓았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공간이동 기술을 이용해서 즉시 보급을 받고 신속하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까지는 드러내놓고 우리 공간이동 기술 있다고 과시하기에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런 쇼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더라도 '일반적인' 방식을 통해 보급을 받는 것보다 월등히 빠르고, 중간에 요격당하거나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훨씬 적기는 했다.

 레이라미아들이 데려온 포츈들이 스트롱홀드들에게 포탄을 장전하는 작업을 끝마칠 때까지 나머지 바이오로이드들은 탄약을 재장전하고, 무기를 정비하고,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자신들의 몸 속으로 파고들려고 덤벼드는 괴상한 벌레들과 온갖 괴물들, 자신들을 어떻게 해보려는 바이오로이드들과 기계들을 피해서 숨어있던 외계의 전쟁 기계들이 전장을 누비는 유갈리안티들과 은폐 상태로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레이라미아, 그리고 대륙 곳곳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시젠 특유의 파장을 느끼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전쟁 기계들은 정말로 '아군'이 근처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여기저기서 감지되는 희미한 파장이 자신들이 지켜야 할 존재와 관련된 것이 맞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 다른 외계의 기계들과 교신을 시도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라비아타의 지휘에 따라서 스트롱홀드들과 함께 영혼없는 이들과 그 이외의 적대적인 괴물들을 사냥하던 유갈리안티들과, 포츈들과 보급물자를 싣고 피닉스가 지휘하는 부대 쪽으로 이동하던 레이라미아들이 전쟁 기계들에게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누구를 지키고 있는지를 짧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짤막한 '동료'들의 답변만큼이나 전쟁 기계들이 서로 주고받은 질문과 대답, 결론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도 짧았다.

 용족이 만들어낸 전쟁 기계들이 자신들이 숨어있던 땅을 녹여버리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도망가던 철충들과, 도망가는 철충들을 쫓아가던 괴물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어난 용암의 간헐천과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둘 모두를 사냥하려던 바이오로이드들과 AGS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기겁하면서 고도를 올렸다.

 용암의 호수 속에서 거대한 검은색의 형체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땅 위로는 커다란 거미처럼 생긴 기계들과 팔 네 개 달린 이족보행형 기계들이 질주했다.

 이것저것 뭔가 잔뜩 달려있는 원반형의 공중 요새와 두 척의 공중 전함, 열여섯 대의 대형 비행체들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모습을 본 바이오로이드들이 처음 보는 존재의 출현을 보고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함대가 나타난 것도 충분히 당혹스러웠지만 하필이면 갑자기 나타난 함대와 기계들의 색상이 하나같이 검은색인데다 여기저기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는 디자인이었기에 저것들이 혹시 철충들이 만들어낸 신병기나 새로운 철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라비아타를 통해서 뒤늦게 지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무적의 용도, 함대와 AGS들을 지휘하면서 신나게 도망가는 철충들과 끈질기게 안 죽는 괴물들을 박살내고 있던 레모네이드 감마도, 공중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세 레모네이드들도, 심지어는 유갈리안티와 레이라미아들에게서 연락을 받긴 했지만 그 지원군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히는 몰랐던 라비아타도 당황했다.


 [저거...... 철충에 감염되지 않은 게 확실한 것이오?]

 [원래 저들의 디자인이 저렇습니다.]


 무적의 용의 질문을 받은 레이라미아-122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레이라미아의 대답에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의심은 하늘에 떠 있는 함대가 철충들과 괴물들에게 붉은 광선과 유성처럼 불타오르는 길다란 꼬리를 남기며 날아가는 불덩어리들을 난사하고, 거대한 가오리 형태의 폭격기들과 거대한 대포로 무장한 검은색의 용처럼 생긴 기계들이 괴물들 머리 위로 거대한 불기둥을 일으키면서 거의 풀렸다.  


 도망치는 형제들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진형을 짠 철충들을 감지한 검은색의 커다란 기계 거미들이 붉은색의 광선을 난사했다. 몇 초간의 광선 사격이 끝났을 때 그 자리에 남아있는 철충은 한 마리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철충들이 있었던 자리 위를 지나간 네 팔 달린 검은 기계들이 네 팔에서 화염과 붉은색의 에너지 광선을 난사하면서 도주한 이들을 뒤쫓아갔다.

 [저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주지 그랬어요?]

 [저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줬어야죠.]


 [저...... 저런 게 이, 있었으며언......]


 [방금 전에야 연락이 닿았습니다.]

 레모네이드 에타와 세타, 람다의 불평을 레이라미아-122가 일축했다.


 검은색의 전쟁 기계들이 날뛰거나 말거나 레이라미아들이 해야 할 일에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전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고, 은폐 상태에서 다른 세력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공간전이를 통해 이동하면서 각 부대를 지원하는 것. 그저 거기에 다 끝나가는 상황에서 나타난 아군을 제어하는 일이 더해진 것 뿐이다.


 시꺼먼 기계들과  함대가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오르카와 PECS 소속 부대들도 이들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AGS들과 둠 브링어의 바이오로이드들, 지상 가까이까지 몰려온 호라이즌과 머메이드의 바이오로이드들은 폭격을 퍼붓는 데에 집중했고, 수상 및 공중 함대는 계속해서 미사일과 포격을 쏟아냈다.


 중무장한 항공 ags들과 둠 브링어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모여있는 철충들이나 영혼없는 이들을 발견하는 즉시 무자비하게 폭격을 퍼부어댔고, 정찰용 바이오로이드들과 AGS들은 철충과 괴물들을 발견하는 족족 좌표와 괴물들의 이동 방향, 속도 등을 세 개의 함대로 전송했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함대에서 발사된 미사일들과 포탄들이 그 자리, 또는 철충들과 괴물들이 있는 자리로 날아들었다.

 검은색으로 도색된 전쟁 기계들이 전장에서 날뛰고, 검은색과 붉은색의 공중 함대가 철충들과 괴물들에게 불벼락을 선사하는 모습을 본 메이가 오르카를 떠날 당시 시젠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라비아타가 손을 잡았다는 레모네이드 에타와 세타, 람다가 정말로 믿을 만한 것들인지는 모르지만, 그 외에도 시젠의 편에 서서 그녀를 위해 싸워줄 존재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에 조용히 기뻐한 메이가 이를 금방 머릿속 한켠으로 밀어넣었다.  


 "밴시들은 그냥 닥돌해서 폭탄 떨구지 말고 한 조는 기관총질, 한 조는 폭탄 끼얹는 식으로 움직여! 지니야하고 실피드는 밴시들 지원 잘 해주고! 괜히 갑툭튀한 저 까만 녀석들이니 펙스에서 보낸 것들에게 지지 않겠다고 처날뛰다 다치지 마!"


 "저희는요?"


 부하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면서 주의를 주는 메이에게  나이트 앤젤들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소를 지은 메이가 그녀의 부관과 그 동형 자매들에게 짤막하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폭탄 배달 다녀오겠습니다."


 메이의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나이트 앤젤들이 괴물들이 한가득 있는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빵~ 빵 터지는 탄, 발사~!"


 "발사~!"


 "......전 함포, 발사!"


 살라시아들이 고폭탄을 자기들 마음대로 빵빵 터지는 탄이라고 부르자 한숨을 쉰 엠피트리테들이 같이 포격을 퍼부어댔다. 


 전함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위력의 고폭탄 수십 발이 일으킨 대폭발에 휩쓸린 철충들은 말 그대로 사라졌고, 영혼없는 이들이나 괴물들도 상당수가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다만 철충들과는 달리 괴물들 중에서는 버섯구름이 솟아오를 정도의 폭발 속에서 살아남는 개체들이 적지 않았다. 온몸이 걸레짝이 되었으면서도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를, 자신을 공격한 누군가를 찾으려 하는 괴물들의 모습을 AGS들이 보내주는 원격 영상을 통해 관측한 머메이드 바이오로이드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델타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브루트라고 이름붙인, 철충처럼 온몸이 녹아내리고 짓무른 듯한 껍질로 둘러싸인 거구의 괴물이 포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진했다. 두 팔이 모두 사라지고 온몸이 타들어가고 찢겨나갔음에도 그것의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두려움이나 생존 본능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준 무언가를 찾아 때려부수고, 짓밟고, 갈가리 찢어버리겠다는 파괴 본능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너덜너덜해진 영혼없는 이들이 비틀거리거나 절뚝거리면서도 포격을 날린 이들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철충들이 아귀라고 부르는 괴물은 반쯤 잘려나간 촉수 두 개로 육중하고 뚱뚱한 몸을 이끌고 포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느릿느릿 기어갔다.

 

 허나 포격으로부터 살아남은 괴물들과 머메이드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는 십수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치이가 있었고, 그 거리를 단번에 좁히기에 괴물들의 속도는 너무 느렸다. 


 괴물들의 악의와 생명력에 질린 머메이드 바이오로이드들이 괴물들이 죽을 때까지 포격을 반복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적, 치명상을 입은 적에게는 포격하지 마시오!]


 무적의 용의 지시는 인도주의적이거나 감상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 당연히 아니다. 


 기동력과 전투력을 상실한 괴물들에게 포격을 계속하는 것은 화력 낭비였다. 이런 괴물들에게는 밴시들과 운디네들, AGS들, 무장한 익스프레스들이 폭탄들을 잔뜩 들고 가서 폭격을 끼얹었다. 


 "우우...... 왜 저는 집이나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건가요?"


 "비행 가능한 괴물들의 공격을 회피하기에 테티스는 너무 느리다는 판단에서에요," 세이렌이 갑판 위에서 테티스들을 향해 메롱하는 그리폰들을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해서 테티스를 놀려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뭐? 쟤는 우리보고 '허접~'거리면서 놀리는데 왜 우리는 쟤들 놀리면 안 되는 건데?"


 "진실은 아프거든요."


 다른 동형 자매들에 비해서 조금 더 신랄한 성격을 지닌 세이렌의 말을 들은 테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레이드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테티스와 세이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리폰들은 낄낄거리면서 테티스를 도발했다.


 "겨우 이 정도의 적들에게 밀릴 정도로 델타의 세력이 약하진 않았을 텐데......"


 전투가 슬슬 끝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철충들이 동쪽으로 퇴각하고, 괴물들이 사냥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엠피트리테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녀를 비롯해서 오르카 저항군에 합류한 머메이드 바이오로이드들은 모두 델타의 세력과 싸웠던 적이 있었다. 그 강력한 전력을 과시했던 델타의 군단이 이 정도의 철충들과 괴물들에게 밀렸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여러분이 유럽을 떠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몰라요. 저 괴물들과 철충들, 델타가 서로 싸우면서 약해졌을 수도 있고, 저희들과 라비아타 씨의 동료분들, 그리고......" 


 세이렌이 인정하기 싫은지 잠시 말을 흐렸다. 


 ".......레모네이드 세력들이 워낙 잘 싸워서 그 괴물들과 철충들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수도 있어요."


 그것 말고도 떠오르는 가능성이 하나 더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문 엠피트리테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매들과 함대가 포격을 퍼부어대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쉬움과 즐거움,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은 레모네이드 감마가 때려죽인 괴물의 시체를 내던졌다. 


 포세이돈 함대가 지상에 접근하자 그녀는 앞장서서 상륙했고, 눈에 보이는 괴물들과 철충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때려죽였다.


 괴물들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독하고 질기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특대 사이즈 괴물들과 철충 연결체들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빅엿을 먹었던 감마의 머릿속에는 이번 기회에 눈에 밟히는 괴물이란 괴물들은 직접 그녀의 주먹으로 쳐 죽이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그녀가 직접 쳐죽일 괴물들도, 직접 괴물을 쳐죽일 기회도 생각보다 많자 않아 아쉽기는 했지만 그동안 괴물들에게 깨지기만 했다가 이렇게 괴물들과 철충들을 세트로 쓸어버리면서 그녀 부하들의 사기도 조금은 올랐을 테고, 델타도 일단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감마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공중전함의 함교에 선 레모네이드 에타와 세타, 람다는 전장 대신에 그녀들이 투입한 드론들이 보내오는 영상들을 보고 있었다. 타이거샤크 바이오로이드들과 함께하는 스트롱홀드들과 유갈리안티들, 그리고 전투가 다 끝나갈 때쯤에야 합류한 외계의 시꺼먼 전쟁 기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에타와 세타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점점 시젠의 곁에 강력한 원군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그만큼 시젠이나 타이거샤크 일행에게 있어 그녀들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라비아타도, 시젠과 이전부터 함께했던 바이오로이드들도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람다는 그녀의 본거지이자 그녀의 작품인 아다만타인과 공중을 날아다니는 시꺼먼 전함들의 디자인을 비교하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에타와 세타는 그녀가 그다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리라고 어림짐작했다.


 요새화된 자신의 본거지에서 레모네이드 오메가는 차가운 눈빛으로 스크린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카롭고 싸늘한 그녀의 눈빛과 무슨 기분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유미들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유럽 곳곳을 한바탕 휘저어놓은 다른 세력들의 군세와 전투 과정을 지켜본 레모네이드 델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꽉 쥔 그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자 만신창이가 된 오드리와 올리비아의 몸도 덜덜 떨렸다.


 꼬맹이를 주인으로 모시는 세 레모네이드들과 라비아타를 유럽에 끌어들이는 것까지는 계획대로 되었다. 지원 안 해주고 어영부영 개기던 감마와 오메가가 지원해주러 온 것도 그녀가 기다리던 바였다.


 감마가 오르카 저항군을 유럽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가 계산하지 못한 일이다. 


 그녀가 끝내 찾지 못했던 앙헬의 스트롱홀드 군단이 라비아타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것 또한 델타가 예상하지 못한 바였고 어디서 시꺼먼 외계 병기들과 함대가 나타나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라비아타가 아군이랍시고 끌고 온 추한 흉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토하고 싶었다.


 그녀의 세력 곳곳에서 날뛰던 괴물들과 철충들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도 몰랐다. 


 누가 보면 손 안 대고 코 풀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델타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전력이 약화되기를 바랬던 꼬맹이의 세력이 입은 피해는 크지 않았고, 이전부터 눈엣가시였던 오르카 저항군 또한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레모네이드 감마와 오메가는 AGS 전력을 잃기는 했어도 그녀들의 세력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이는 오르카 저항군도, 라비아타도, 자매라고 있는 것들도 대가를 얻어내려 눈에 불을 켤 것이고, 그녀 자신은 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임을 의미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적들을 상대로 위험에 빠진 자신은 무능한 x이 되고, 그녀에게 불만을 가진 이들은 물론 그녀의 영향력 밑에 있던 이들 중에서도 이번 전투에서 다른 세력들이 보인 활약상을 보고 다른 세력으로 전향하려 할 수도 있었다.


 짜증이 폭발한 델타가 괴성을 지르면서 오드리와 올리비아를 두들겨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