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닌 피보호자의 바이오로이드 - 목록



"누군가에게는 퀘스트 보상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안 그래도 없는 살림살이 저당 잡힐 시간이지만요."



전투가 끝난 후, 각 세력의 주요 인물들은 화상 통신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


......하기 전에, 델타가 예상했던 대로 이번에 '도움'을 제공한 대가를 그녀에게서 뜯어내는 것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각자 그녀를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준 도움에 대한 대가를 공짜로 처리할 생각은 델타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자신을 뜯어먹으려 드는 것이 뻔히 보이는 다섯 레모네이드들에게 레모네이드 델타가 마음 속으로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어댔다. 말이 좋아서 자매고 동맹이지, 기회만 보이면 이딴 식으로 뜯어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며 자매들의 험담을 한 그녀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정작 자기도 그런 쪽으로는 다른 레모네이드들과 비교해서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과 에타와 세타, 람다를 이용해먹을 생각과 오메가와 감마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 만만이었다는 것, 이들이 손해를 입으면 입을수록 좋아했을 거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을 뿐, 에타와 세타, 람다의 얼굴에는 델타에 대한 비웃음이 여과되지 않은 채로 떠올라 있었다. 


 '살림도 안 좋으신데 잔뜩 뜯어가게 되서 어쩌죠? 하나도 안 미안하네요.'


 다른 두 레모네이드들이라고 해서 이들 셋보다 나을 건 그다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오메가의 싸늘한 눈빛은 이 지경이 된 델타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감마는 다른 넷에 비하면 좀 나아 보였지만 그녀도 이번 기회에 델타에게서 필요한 것, 가져가고 싶은 것을 왕창 가져가겠다는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이를 빠득빠득 갈던 델타의 시선이 라비아타에게 돌아갔다.

 

 어째서 앙헬 그 병x같은 새x는 이 뚱땡이 할망구에게 자기 친위대를 넘겨준 것이고, 그 망할 놈의 대포 달린 쇠상자들이 들어가 앉아있는 창고들은 왜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맬 때에는 안 보인 것이며,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 흉물들은 왜 떼거지로 이 할망구를 따라온 거냐고 마음 속으로 라비아타와 앙헬, 스트롱홀드와 웃는 얼굴들에게 욕을 해댄 감마가 잠시 헛구역질을 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흉물을 떠올린 탓이다.


 자매라고 쓰고 마지못해 유지하는 동맹이라고 읽는 것들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감마? 임신했어요?]


 "닥쳐, 이 뚱땡아!"


 그럴 리 없는 줄 알면서 조롱하는 에타에게 델타가 소리를 질렀다.


 "일부러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손 놓고 있다가 너희 발등에 불 떨어질 때가 되서야 손에 손 잡고, 온갖 떨거지들 잔뜩 끌고 온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이 따위로 지x하는 건데?!"


 [에이~ 잘 아는 사람이 왜 이래요?] 세타가 반쯤 감은 눈으로 델타를 쳐다보면서 한 글자씩 강조하듯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이 돼지 같은 x들이 진짜......"


  [저희 아가씨가 그런 저희 체형을 참 좋아해요.]


  당신네 회장은 당신의 그 빈약한 몸매와 화장 떡칠한 얼굴, 커튼과 온갖 장식으로 온몸을 미라처럼 둘둘 두른 모습을 좋아하냐는 말을 덧붙이려던 세타가 입을 닫았다. 괜히 말을 길게 하기도 귀찮았고 그 뒤에 이어질 델타의 발광을 감당하는 것은 더 귀찮았다.


 남이 보거나 말거나, 그 남이 자신들과 어떤 관계든 간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독설과 욕설을 쏟아내는 레모네이드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 통령이 라비아타를 힐끔 쳐다보았다.


 얘들 혹시 원래 이러고 노냐는 무언의 질문에 라비아타가 약간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말장난은 그쯤 하지?]


 [델타도 심기가 편치 않을테니 빨리 끝내자고. 각자 볼일 있지 않아?]


 짜증섞인 오메가의 말과 반대로 기분이 좋은 듯한 감마의 말을 들은 에타와 세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델타는 이것들이 무슨 병원균을 칵테일로 끼얹어놓고 이제와서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라면서 두 도움 안 되는 동맹을 쏘아보다 짜증이 가득한 한숨을 쉬었다.


 이제와서 뭐라 욕을 하든 뭘 하든 무슨 소용이냐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면서 애써,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 델타가 자세를 삐딱하게 만들면서 말했다.


"각자 원하는 거 불러봐."


 [항구, 시설, 자원과 AGS, 바이오로이드, 물자.]


제일 먼저 감마가 요구사항을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쓴 자원에 조금 더 더해서 주셨으면 하고, 당신이 보유한 바이오로이드들 유전자 씨앗들도 좀 부탁할게요. 유럽에 있던 옛 비스마르크 및 블라디미르 항공, 오스키퍼 재단 자산들도 좀 받고 싶고요. 아, 그리고 시젠 아가씨 및 타이거샤크와 관련해서 델타뿐 아니라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도 부탁드릴 게 있는데 말이죠......]


 [그 꼬맹이를 니네 주인으로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라비아타 세력과 괌을 너네의 유효한 동맹으로 인정해주는 것 말이지? 알았어. 하지만 회장님들에게 해드리던 대우를 너네 꼬맹이에게 해줄 거라고 기대하진 말라고.]


 감마가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자 오메가가 싸늘한 눈빛을, 델타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감마는 시젠과 관련돤 문제로 괜히 질질 끌고 싶지도 이것저것 꾸미고 싶지도 않았다. 오메가와 델타가 그녀와는 생각이 다르든 어떻든, 자기들 나름대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든 어떻든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 또한 우리가 소모한 자원에 조금 더 더해서 받고 싶소. 여기에 더해 그대가 보유한 바이오로이드들의 유전자 씨앗 및 유전자 지도,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들을 원하고, 그대 세력에 속한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 오르카 저항군에 가입하고 싶다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있다면 데려가고 싶소.]


 오드리와 올리비아를 재생산할 자원도 아끼는 마당에 이 x들도 저 x들도 자원에, 유전자 씨앗에, 이것저것 달라는 것이 많자 델타가 뒷목을 잡았다. 이것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별로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라비아타와 오메가는 서로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하라는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둘이 몇 분이 지나도록 입을 열지 않자 에타와 세타, 람다는 뭔가 자신들이 요구했었어야 하는 게 있었는데 놓친 게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았고 마리는 팔짱을 끼고 둘이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델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본 감마가 둘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괜히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말하지?]


 [......하,] 결국 오메가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네 자원 같은 건 필요없어. 유전자 씨앗도 마찬가지고.]


 오메가의 말을 들은 델타의 눈꼬리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괜히 성질 긁지 말고 원하는 거나 말해."


[유럽에 오메가 산업 소속 공장하고 기지 지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오메가의 말은 요구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를 들은 델타의 표정은 일그러졌다는 표현보다는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정도로 뒤틀렸다. 감마는 휘파람을 불었고 마리와 라비아타는 오메가답다는 생각을 했으며 에타와 세타, 람다는 어머나, 하는 감탄사를 뱉어내면서 오메가를 노려보았다.


 지금 오메가의 발언은 델타의 본진인 유럽에다 자기 텃밭을 만들겠다는 소리다. 


 델타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레모네이드들도 좋게 봐줄 수 없는 이야기다.


 내가 원하는 바는 말했으니 어디 네 요구조건이 뭔지 들어보자고 말하는 오메가의 눈빛을 무시하듯 받아넘긴 라비아타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원과 당신이 가진 유전자 씨앗들, 그리고 스트롱홀드들이 있던 격납시설들과 그 주변 지역의 소유권을 요구하겠어요.]


 델타가 헛웃음 소리를 냈고 오메가는 얼씨구, 하는 반응을 보였다. 


 자매이자 동맹이라고 있는 x도, 뚱땡이 할망구도 그녀의 본진에다 자기들 텃밭을 지으려 하는 이 상황에 대한 불쾌함을 억누른 델타가열심히 둘이 원하는 바와 그녀가 얻는 이득 및 손해를 저울질했다.


 어차피 유럽 내에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 것을 원하는 오메가의 요구를 거부하기는 힘들어 보였고, 세 변절자 뚱땡이들이 외계 생물체 꼬맹이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과 이들과의 동맹 관계를 인정하는 것 역시도 불가피해 보였다.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하면 유럽 내에 주둔한 라비아타와 오메가의 부대들로 하여금 서로를 견제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철충들과 괴물들을 막는 방패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라비아타를 에타와 세타, 람다와 한 편으로 묶고, 이들과 동맹 관계를 맺은 이상 오메가도 라비아타도 서로에 대해서 함부로 무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 동맹 관계를 무시하고 서로를 직접 위협하기에 뚱땡이들의 연합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고, 이들이 오메가를 치기에는 오메가의 세력이 너무 강대하다. 결과적으로 이들 둘이 싸워서 상잔하면 자기들만 손해이기에, 이들이 서로 사생결단을 내자고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레모네이드 오메가는 라비아타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애덤 존스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고, 그녀와 라비아타가 마음이 맞을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기에 이들 둘이 손을 잡고 델타를 엿먹이려 들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을 듯 싶었다.


 바로 그 다음 떠오른 생각은 자신이 너무 낙관적으로 그리고 단편적으로 라비아타와 오메가의 관계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라비아타도, 라비아타와 손을 잡은 세 뚱땡이들도 그녀들의 주인인 그 꼬맹이를 위해서라면, 그녀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원수와 손을 잡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처럼 오메가와 라비아타, 에타, 세타, 람다가 한편을 먹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오메가가 꼬맹이를 인질로 잡는다든가, 뭔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나 조건 등으로 네 뚱땡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가능성이지만 라비아타와 에타, 세타, 람다가 자기들이 가진 병력들과 어디선가 짠 하고 나타난 외계 병기들, 동맹을 맺은 괴물들을 끌고 오메가와 델타 둘 다 담가버리려 들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도 갑자기 땅 속에서 왠 함대와 기계 괴수들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 꼬맹이의 부모가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외계 병기들이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고, 얼마나 많은 그리고 기괴한 괴물딱지들이 꼬맹이와 라비아타, 세 뚱땡이들의 편이 될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한 델타가 자매의 탈을 쓴 협잡꾼, 깡패, 구두쇠, 뚱땡이들과 이방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한 번 훑어보았다.


 저쪽에서 원하는 것들을 말했으니 이제 최대한 깎을 수 있는만큼 깎고, 이들과 엿을 나눠먹을 수 있는만큼 나눠먹을 시간이었다.




 생떼와 빚독촉, 막말과 조롱, 말돌리기에다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기 등등,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화술들이 난무하던 시간이 끝나고 화상통신이 종료되자 라비아타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매만졌다.


 드디어 끝났다. 꼴도 보기 싫은 x 도와준다고 어느 개 같은 자식이 남긴 초중전차들을 끌고 다니면서 철충들과 괴물들을 때려잡는 것도,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서 불쾌한 분위기 속에서 머리 굴리는 것도, 들어주기조차 싫은 온갖 헛소리들을 흘려듣는 것도, 열 받은 상대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이제 남은 것은 그녀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시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언니," 앨리스 1호가 라비아타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 재수없는 x 헛소리는 신경쓰지 마세요."


 "하나도 신경 안써."


 화상 통신을 종료하기 직전에 오메가는 라비아타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말했었다.


 '네가 잘난 줄 알지? 이번 전투에서 네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었지? 네 애비가 네게 남겨준 그 커다란 칼을 가지고 벌레 새x들을 얼마나 잡았지? 그 괴물딱지들은 얼마나 잡았고? 네 라이벌하고, 너하고 붙어먹은 세 뚱땡이들하고, 네 주인이 네게 남겨준 것들하고, 네가 끌고 온 그 흉측한 잡것들이 아니었으면 네가 뭘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넌 이번에 아무것도 한 게 없어. 그저 운 좋게 네가 얻은 것들, 네 주변에 있는 것들에게 묻어간 것 뿐이야.'


 정말로 라비아타는 오메가의 말을 신경쓰지 않았다. 오메가가 말한 게 사실이기는 했으니까. 그건 별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곁에, 그리고 시젠의 곁에서 강력한 아군들이 함께 싸워줬으니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너희들도 신경쓰지 마렴."


 "네, 언니. 고생 많으셨어요."


 "너희도 정말 고생 많았어."


 앨리스들을 하나하나 안아준 라비아타가 다른 자매들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타이거샤크 바이오로이드들, 스트롱홀드들, 괴물들 그리고 외계 전쟁 병기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도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우린 왜 안 안아줘?" 볼멘소리를 한 레오나가 다가오는 라비아타를 밀어냈다. "아, 됐어. 땀내나."


  "라비아타 언니, 나 부둥부둥해줘!"


 레오나와는 달리 알비스는 양팔을 벌리면서 라비아타에게 다가갔고, 티아멧들과 랜서 미나도 라비아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안아줄까?"


 "아, 됐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닉스 3호가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묻자 이프리트-1111이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다음 순간 가만히 있던 노움-6699가 둘을 한꺼번에 끌어안았고, 피닉스 3호와 이프리트가 "야! 됐거든?"이라고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검은색의 전쟁 기계들은 유갈리안티들과 레이라미아들에게서 주의사항 및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들었다. 


 비록 만들어낸 이는 다른 이였지만 똑같이 나이아키스-위아레인 용족에 속한 이들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진 검은 색의 병기들은 이 세계에서 시젠의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라비아타와 그 일행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했고, 이들이 괌으로 갈 때 같이 가기로 했다.


 스트롱홀드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던 격납 시설들로 돌아갈 준비를 했고, 유럽에 올 때보다 숫자와 개개인의 덩치가 크게 늘어난 웃는 얼굴들은 스트롱홀드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이들이 혹시라도 스트롱홀드 격납 시설을 자신들이 사는 거주지처럼 만들 것을 우려한 라비아타와 레오나, 홍련은 이들에게 스트롱홀드들과 시설에 손을 대지 말 것을 당부했고, 웃는 얼굴들은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그녀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초대형 웃는 얼굴들은 전투가 끝났을 때 자신이 나타난 '땅굴' 속으로 돌아가서 이 자리에 없었다. 웃는 얼굴들과 레이라미아들, 세피리아크들이 게이트를 파괴해 버렸기 때문에 전투가 끝나고 나서 그 지역을 조사한 각 세력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녀들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스트롱홀드들을 유럽에다 남겨놓는 게 정말로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네. 델타는 우리 스트롱홀드들을 철충하고 오메가 막는 용도로 써먹으려 할 테고, 오메가도 이쪽을 어떻게든 이용하거나 견제할 생각 만만일텐데."


 레오나의 말에 라비아타와 홍련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오나도 라비아타가 무슨 생각으로 스트롱홀드들을 유럽에 남겨놓기로 했는지는 알고 있었고 유사시 라비아타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도 알았지만, 단지 그게 정말로 최선인지 어떤지에 대해서 견해가 다를 뿐이었다.


 "유사시에 스트롱홀드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레오나, 당신의 뜻에 따를게요."


 "나한테 일거리 떠맡기는 거지, 지금?"


 라비아타에게 항의하는 레오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발키리의 곁으로 다가간 미호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기, 발키리. 저기 저 싱글벙글들 싸우는 거 보고 기분이 어땠어?"


 미호가 스트롱홀드들 부근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뭐라고 잡담하는 웃는 얼굴들을 가리켰다.


 호기심에 웃는 얼굴들이 싸우는 모습을 녹화한 영상을 봤다가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미호의 퀭한 얼굴을 본 발키리가 머뭇거렸다.


 발키리와 레오나를 포함해 웃는 얼굴들과 함께 싸우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들 중에서 그 누구도 이들의 전투 방식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전투 중에는 신경쓰지 않았다가 전투 후에야 다시 그 광경을 떠올린 알비스와 님프가 베라가 건네는 초코바를 거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호와 함께 영상을 본 지니야들과 밴시들도 식욕이 사라진 나머지 어제 저녁과 취침 전 간식을 걸렀다. 배가 고파서 아침은 먹었지만 전날 저녁에 본 것이 자꾸 떠오른 탓에 오늘 먹은 아침식사의 양은 평소에 비해 많이 적었다.


 "음...... 특이하지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처에 웃는 얼굴들도 있고, 어찌 되었든 그 웃는 얼굴들이 큰 도움을 줬는데 나쁘게 말할 수 없었던 발키리가 약간 돌려서 말했다.


 보기에는 매우 안 좋지만 적은 확실하게 파괴하면서 개개인의 전투력은 향상시키고, 나아가 아군의 군세를 늘리는 전투 방식이었으니 확실히 효과적이다. 미호도 발키리의 평가에 뭐라고 반박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얼마나 효과적이든 간에 가능하면 웃는 얼굴들하고 같이 싸우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알비스를 한 번 안아주고, 그 다음으로는 티아멧들과 랜서 미나를 한 번씩 안아주면서 감사를 표하던 라비아타의 통신기가 울렸다. 


 그녀가 통신기를 작동시키자 오르카 메이의 얼굴을 담은 홀로그램 화면이 공중에 나타났다.


 [라비아타, 고생 많았어.]


 "고생 많으셨어요, 메이 대장. 이렇게 대화하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레오나하고 마리 통령, 칸하고 홍련도 오랜만에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어했는데, 이번에는 나 말고는 일이 너무 바쁘든지, 이 자리에 없든지 해서 말야. 말 나와서 말인데, 너 떠나고 나서 우리 면상이 어떤 꼬라지가 났는지 본 적 없지?]


 다들 화장으로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눈가는 시커멓게 변하고, 온몸의 살이 쭉 빠져서 칸 같은 경우에는 잠시나마 나이트앤젤과 비교해도 될 정도의 체형이 되기도 했다. 아브람 사령관과 동침하는 날에도 그렇고 저런 일은커녕 끌어안고 침대에 눕기가 무섭게 잠들었고 닥터가 만든 특제 에너지 드링크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닥터들과 다프네들이 일이고 뭐고 그냥 자라는 진단을 내리고는 강제로 입원실에 입원시켰을 정도로 지휘관들은 다들 일에 치이고, 피로에 찌든 나날을 지냈다.  


 설마 자기 하나 빠졌다고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무슨 대참사가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라비아타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래, 고생 많았지. 도대체 넌 어떻게 그 업무들을 다 보면서 시젠도 돌보고 전투도 나가고 탐색도 나가고 한 거야?]


 "여러분들이 계셨으니까요. 실제로 제가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지x.]


 라비아타의 말을 조금 거친 말로 부정하는 메이의 목소리와 표정에 악의는 들어있지 않았다. 

 

 [다들 잘 지내고 있지? 시젠은 어떻게 지내?]


 "많이 좋아졌어요. 새로 들어오거나 제조해서 시젠과 친하게 지내는 자매들도 있고....... 문제의 원인도 찾아내서 어떻게 손을 썼어요. 아직 완전히 이전의 기억을 떨쳐내진 못했지만...... 최소한 콘스탄챠들하고 레아들과 관련된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 극복한 것 같아요."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이야.]


 시젠이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메이가 정말로 기뻐했다. 


 비록 시젠이 아니라 사령관을 택하기는 했지만 시젠을 괴롭히는 데 참여하지 않은 것은 물론, 둠 브링어 바이오로이드들이 시젠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떠나는 시젠을 위해서 시젠에게 동정적 내지는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바이오로이드들 넷을 골라서 붙여주었으며 라비아타 일행에게 자신의 유전자 씨앗과 기억 모듈 그리고 선물까지 주었었다. 


  "고마워요, 메이 대장. 오르카에서도 당신은 제게 큰 도움을 주셨었고, 떠난 이후에도 당신과 다른 지휘관들이 준 선물들, 그리고 보내주신 자매 분들은 저와 시젠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번에도......."


 [솔직히 네가 끌고 온 스트롱홀드들하고 그 싱글벙글 웃는 애들,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그 시꺼먼 녀석들만으로도 상황 다 정리했을 것 같던데?]

 

 여담으로 웃는 얼굴들의 기괴한 전투 방식에 대해서는 메이도, 다른 지휘관들도 모두 할 말을 잃었고, 이를 녹화한 영상을 아브람 사령관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그러지는 못했을 거에요.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을지는 아무도 모르고요."


 [뭐...... 솔직히 말하면 나도 무적의 용 제독의 지휘에 따랐을 뿐이니까. 무력은 네게 확실히 밀리고 너에 비하면 못 하는 분야도 많이 있지만, 지휘나 대군을 움직이는 능력은 확실히...... 뛰어나더라.]

  

 무적의 용에 대해서 칭찬하던 메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젠이 무적의 용 제독에 대해서 그린 그림, 그거 걸작이더라?]


 ".......무적의 용 제독이 그걸 마음에 들어하던가요?"


 [물론 아니지. 무적의 용 제독은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고, 그 부하들 일부가 그 그림을 가지고 있다가 조금씩 오르카에 퍼뜨린 모양이야. 지금 닥터가 그 그림을 부분적으로나마 현실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메이의 이야기를 들은 앨리스들과 티아멧들이 일제히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적의 용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는 않은 그녀들에게 무적의 용이 시젠의 그림에 나온 것처럼 강해진다는 것은 그리 기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레오나와 미호는 무적의 용이 눈과 입에서 빔을 쏘고 칼에서 검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잠시 상상하다가 풋 하는 짤막한 웃음 소리를 냈다.


 [방금 레오나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네. 레오나 대장의 유전자 씨앗과 기억 모듈을 사용해서 제조했어요."


 [그 이외에는?]


 "발키리 님과 홍련 작전관, 미호 양을 제조했어요."


 [마리......는 솔직히 안 만들었을 것 같고.] 


 메이의 말을 들은 라비아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마리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칸하고 나는?]


 "죄송해요. 칸 님과 메이 대장은 아직까지는 제조하지 않았어요."


 [야.]


 고개를 숙이는 라비아타에게 메이가 도끼눈을 떠 보였다가 금방 표정을 원래대로 고쳤다. 비록 메이의 능력이 심판의 옥좌와 폭격기, 핵탄두를 이용한 불꽃놀이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인원이나 자원은 그리 많지 않고 전투원은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태에서 심판의 옥좌도, 폭격기도, 핵탄두도 없는 메이는 그저 입하고 머리만 살아있는 짐짝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오르카의 메이도 잘 알고 있었다. 


 [너 델타에게 자원 받아내면 나 하나 만들어. 알았어?]


 "네, 그럴게요." 


 [.......좀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나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 그러면 언젠가 또 이야기할 날이 오길 바랄게.]


 "그 때까지 부디 몸 조심하세요."


 [시젠에게 안부 전해줘.]


 손을 흔들어보인 메이가 통신을 종료했다. 


 텅 빈 허공을 쳐다보면서 메이와 라비아타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옛 동료들과 자매들이 무사하기를, 통신을 끊기 전 메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언젠가 다시 이야기를 할 날이 오기를 기원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자매들과 괴물들, 그녀의 지시를 기다리는 병기들을 돌아본 라비아타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도 돌아가 보도록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