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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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 나의 기이하고도 기괴한 손님이여.

 

죽음이란 건 참 고통스럽지. 안 그래?

 

하지만 익숙해질 거야. 그 한계를 넘게 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게 될 테니까..

 

 

 

하나만 묻을 게. 악이란 건 대체 뭐지?

 

기억을 잃어보니 여왕이 너에게 말했더군. 네 아이들이 악을 행한다 한들 받아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는 누가 판단하지?

 

네가? 아니면 내가? 혹은 그 밖의 다른 누군가가 판가름 내리는 건가?

 

넌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해. 그저 맹목적으로 너의 것을 빼앗는 걸 악이라 칭할 뿐이지.

 

네가 메이에게 행했던 것처럼.

 

 

 

상상해 봐. 너의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너를 죽인 메이를 상상해 봐. 그런 메이를 분노에 가득 차서 입으로 씹어버릴 네 아이들을 상상해.

 

그들은 선인가? 혹은 악인가?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어떻지? 그 반대인가?

 

아니며, 그들 모두가 선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선은 선과 대결하는 거지?

 

그럼 그들은 모두 악인가? 그게 맞다면 너는 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자들을 심판하지 않는 거지?

 

넌 아직 그 답을 몰라. 그러니 내가 알려줄게.

 

무엇이 선이어야 하고, 무엇이 악이어야 하는지를.

 

 

 

기억해. 나의 영예로운 손님.

 

넌 이 모든 걸 알아야만 해. 그래야만 하지.

 

 

 

왜냐하면 한 눈에 알았거든.

 

너만이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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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

 

 

 

어느 순간부턴가 난 깨어나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핵의 잔열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숨을 쉬어도 열기에 기도가 익지 않았다.

 

방사능이 피부를 갉아먹고 뼈마디를 부수는 게 느껴졌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포기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해져 가는 것뿐이었으니까.




"... 씨발..."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면서 속으로 몇 번이나 기도를 했는지 모를 정도니까.


다만, 그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하자.

 

 


“반 쪽짜리 고통이라더니... 진짜 그런가 보네.”

 

 

 

몇 번이나 죽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로그아웃이 되다 만 상태라 제대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뼈가 부서졌을 때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아마 여기까지 버틴 것도 전부 다 그것 때문이겠지.

 

말보다 발에 더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입은 그저 숨을 쉬기 위한 구멍이었다. 발가락은 검은 흙을 파내는 도구였다.

발 끝을 타고 땅의 저항이 느껴지니 그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나간 것이다.

 

하늘에 색은 진짜배기 묵빛이었다.

묵에도 등급이란 게 있다면 지금 밤 하늘은 실로 검고도 검은 최상급 묵이었을 것이다.

흙 한 줌으로 돌아갈 사람이 없으니 그들의 길을 밝힐 빛도 필요 없었고, 그 탓에 하늘은 별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수천 년 동안, 앞으로 수만 년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별들을.

 

 

 

덜컹.

 

그런데, 우린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처지였나 보다.


땅에서 무언가 두꺼운 철문을 열어 재치고 나왔다.

 

 

 

“후우... 설마 진짜로 폭격 명령을 내렸을 줄은 몰랐는데.

내부 대피소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도 죽을 뻔... 어?”

 

“... 시라유리...?”

 

 

 

그럴 리가 없잖아.

내 눈을 의심했기에 말이 헛나왔다.

 

 

 

“당... 아니, 왓슨?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죠?”

 

“나... ...”

 

 

 

근데 헛본 게 아닌가 보다.

 

 

 

“분명 핵폭발이 일어났었을 텐데? 080 내부 회선으로만 전달된 거라 어디서 도청할 수 있었을 리도 없고...”

 

“나... 잘못 본 거... ...”

 

 

 

귀에 보랏빛 소리가 들렸다.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 그에 답하기 위해 내 목의 성대를 떨었으나 갈라질 정도로 메마른 목에선 괴상한 비명 소리만 나왔다.

 

너무 많이 비명을 질러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이젠 헛것을 볼 정도로 미쳐버린 걸까.

 

하지만 진짜였다. 아니, 헛것이라도 저런 헛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잔해로 변해버린 세계에 한 그루 벚꽃이라면 꽤나 낭만적인 이야길테니까.

 

 

 

“으으, 잘못 봤냐고요? 제가 하고 싶은 소리를...

... 에잇, 일단 아래로 내려 와요. 살아있는 게 신기하니까. 정말...”

 

 

 

말이 나오질 않아 대답 대신 손을 몇 번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시라유리도 먼지를 털며 내게 걸어와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어딘가 기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발에 힘이 풀린다.

내 체충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시라유리가 잠시 휘청이더니, 이내 나를 업고 지하 방공호로 걸어갔다.

 

 

 

“제가 전에 말했죠. 이제 당신이 뭘 가지고 놀래키든 절대 놀라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이번 건 정말 놀랐어요. 정말.”

 

“... ...”

 

“이봐요, 왓슨. 제 말 들려요? 표정이 왜 그렇게...”

 

“... 나... 나... 쿠에엑!!”

 

“왓슨! 왜 그래요! 왜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그래요!!”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 되면 나와야 할 문장이 있지.

방사능 낙진에 절여지고 절여진 인간이라 남은 여생을 생체 리듬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버렸다.

 

 

 

[당신은...]

 

“흐허억...!! ... 시라유리. 조금 있다가 깨워줘... 잠깐 피곤해서 눈 좀 붙일게...”

 

“네? 아, 아니, 지금 자면 죽는 것 밖에 더하겠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죽으면 어떻게 해요!!”

 

 

 

발걸음이 빨라지는 시라유리를 보니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버틴 보람이 있었다.

이게 가짜면 뭐 어떻겠나. 톡톡톡 뛰는 달음박질이 이렇게나 귀여운데.

 

 

 

[죽었습니다.]

 

꽥.

 

“왓스으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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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간만에 뭐라도 먹으니까 살 것 같네.”

 

“진짜... 이번엔 또 뭐로 절 놀래키려는 건 가요.

심장 박동이 멎은 것까지 확인했는데 갑자기 일어나기나 하고.”

 

“... 그런 게 좀 있어.”

 

“정말이지, 당신하고 만나면 놀라운 일들 투성이네요.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똑같고.”

 

 

 

080 기관이라 적혀 있던 맨홀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엔 납으로 둘러 쌓인 작은 방공호 같은 것이 있었다.

 

비상 식량, 식수는 물론이거니와 위성 전화기, 라디오, 080 기관 인식증 등, 스파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시라유리는 그 중 가장 묽은 죽을 꺼내 그릇에 담아 끓인 다음 나에게 건넸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스레인지를 쓸 수 있는 배짱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물론 그 죽을 넘기는 것도 고된 여정이었다.

죽고 나면 신체가 완전히 리셋 되기에 방사능이 몸에 누적될 걱정은 없었으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위장은 여전히 뇌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 탓에 뭔가를 입에 집어넣으려 한 순간, 식도부터 십이지장까지 온갖 것들이 빙빙 꼬여 내 살점을 뜯어내는 듯했다.

 

 

-왓슨?! 왓슨!! 설마 죽도 못 먹는 거에요?!! 그럼 말을 했어야...

 

-무... ㄹ....

 

-네? 뭐라고요?!

 

-물 좀... 크에엑!!

 

 

... 덕분에 못 보여줄 광경을 연출하는 불상사도 일어났었지.

내 평생 입에서 헛구역질이 그렇게 많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올 게 있어야 토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있지도 않는 걸 위장에서 게워내려고 꿈틀거리는 식도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젠 뭐라도 좀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전에 죽도 못 삼킬 때는 얼마나 기겁을 했었던지... 당신보다 제가 더 땀이 났을 거에요.”

 

“하하... 미안해. 몇 번 죽고 나니까 사람 몸이 마음 같지가 않네.”

 

“그렇게 말하면 진짜 죽은 사람 데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만해줄래요?”

 

“... ... 넵.”

 

 

 

안 그래도 작은 1인용 방공호.

그 안에 다 큰 성인 한 명이 더 들어왔으니 그나마 하나 있는 침대는 나와 시라유리가 앉아있는 것만으로 가득 찼다.

 

아무튼, 이곳에 들어온 이후 난 처음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

아프지도 않고, 피부가 방사능에 썩어가는 느낌도 없었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기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떻게든 둘이서 비좁은 살림살이에 끼워 넣어 살아야 했기에 시라유리를 꼭 안고 자는 수 밖에 없었지만, 둘도 없는 휴식이었음은 분명했다.

 

 

 

“으아아... 피곤해.”

 

“핵까지 떨어진 마당에 아주 속 편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렇게 사는 방법은 저도 배우고 싶을 정도에요.”

 

“... 그냥... 이 세상에서 날 알고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마음이 놓여서 그랬나 봐.”

 

“그거, 첩보원으로서 둘도 없는 악담이란 거 아시나요?

누가 스파이 집에 들어와서 그렇게 발 뻗고 자요? 참. 대범한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없는 건지.”

 

“미안... 이젠 생각할 힘도 없어서...”

 

 

 

음식을 먹자 몸에 서서히 열이 돌았다.

힘줄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기분이랄까, 몸의 통제권을 되찾아가는 것이 이리 즐거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그렇게 몇 번을 꿈틀거리자 무언가 픽, 하고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 아, 맞다. 그거 물어본다는 걸 까먹고 있었네.”

 

“당신이 지금 까먹고 있는 게 한두 개가 아닌 거 같지만, 뭐부터 깨달으셨는지 한 번 들어나 보죠.”

 

“지금 바이오로이드들이 사람들 죽이고 다니는 거 맞아?”

 

“... 뭘 물어보시나 했더니.

네. 맞아요. 여기 핵을 떨어뜨린 것도 바이오로이드죠.”

 

 

 

시라유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라디오를 틀었다.

지직 거리는 라디오의 안테나를 찾기 위해 낡은 조명을 틀자 전류가 흐르는 소음과 함께 백열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라디오 속에선 내가 익히 들었던 내용을 읊어주는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녹음된 것이었는지 상황에 맞지 않게 이따금씩 밝고 명랑한 톤으로 말하기도 했다.

 

 

 

“흐음... 오비탈 와쳐가 이번엔 궤도 폭격을 준비 중이라 하네요.

와쳐 오브 네이쳐 소속 인원들이 항복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소용 없겠죠.

하여튼. 그쪽 대원들은 인간과 허물 없이 지낸다 들었는데 이럴 때는 방해가 되는군요.”

 

“... 그럼 시라유리도 사람을 죽인 거야?”

 

“... ...”

 

 

 

표정은 조금 착잡한 회색빛이었다.

 

 

 

“이제 와서 내숭 떠는 건 처지에 맞지 않으니... 네. 죽였어요.

그냥 여기 앉아 인간들이 내보내는 구조 신호를 역추적해 위치만 알려줬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안 죽인 게 되는 건 아니겠죠.

왜, 갑자기 제가 싫어졌나요?”

 

“... 아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

... 너희도 너희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태어나자 마자 인간을 죽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거 아냐. 다 이유가 있으니까...”

 

 

 

누구보다 인간의 틈바구니에 끼여 살았던 080 기관의 첩보원, 시라유리.

그러니 그녀가 인간을 싫어하게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냥 싫어해야만 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건 내가 간섭할 부분은 아니지만.

 

 

 

“... 하아, 원래 그런 옛날 얘기 하는 건 제 약점을 들춰내는 기분이라 영 별로인데...

...

어떻게, 들어보고 싶으신가요?”

 

“... 아냐. 해주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런 얘기 하다가 우는 애들 많이 봤거든.”

 

“이거 어디 가서 못 들을 정보란 거, 알고 계시죠?

지금 그 기회를 발로 걷어 차버리는 거라는 것도.”

 

“그게 날 구해준 사람을 괴롭게 하는 기억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 ...”

 

 

 

삑! 삐빅!

 

그 때 테이블 위에서 불규칙한 비트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긴 음과 짧은 음이 번갈아 나오는 것을 보니 모스 부호 같은 암호였던 것 같다.

다만 시라유리가 옆에 두께만 족히 30 cm는 될 법한 거대한 책을 뒤지며 해독하고 있으니 필시 보통 암호는 아니었겠다.

 

해독을 끝마치자 시라유리는 기계처럼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알파, 베타, 그 밖에 내가 읽을 수 없는 기묘한 그리스 영어가 적혀있는 라디오는 자유자재로 자신의 주파수를 바꾸며 인근 지역의 모든 방송을 순식간에 스캔했다.

그러다 한 주파수에서 멈칫, 하고 귀를 기울였는데 그 안에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아, 여기는 훗카이도 42번째 대피소다.

-어린아이와 여성들을 데리고 있다. 총 대피 인원 56명. 긴급한 구조가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여기는 훗카이도 42번째 대피소...

 

“... 찾았네요.”

 

“뭐야? 설마 사람들이...?”

 

“방금 역추적에 성공했어요. 대피소의 좌표도 확인했고요.

이제 제가 정보를 발송하면 기관에서 대원들을 보내 알아서 처리하겠죠.”

 

“자... 잠깐만, 거기엔 어린애들도 있었다고 했잖...”

 

“어린 바이오로이드라고 인간들이 봐줬던가요?

오히려 작은 덩치와 좋은 연비를 보고 좋다구나 광산에 집어 넣어 광부로 써먹었지.”

 

“... ... 그래도...”

 

“그래도는 없어요.

인간들이 저희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마지막 한 명의 인간까지도 저희를 괴롭힐 게 뻔하죠.

덴세츠 기업, 아시죠? 이번에 당신이 스캔들 터트린 그 기업. 

거기에 마법 소녀 모모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어린 아이들에게 시청률이 아주 높은 인기 프로그램이죠.

그런 걸 보고 재미있어 하는 걸 보고 저희는 ‘어린아이’라 부르고 싶지 않아요. ‘악마’라면 모를까.”

 

 

 

... 안다. 뽀끄루라는 바이오로이드의 사지를 전기톱으로 잘라내며 악을 무찔렀다고 좋아라 하는 TV 프로그램.

어린 인간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인과응보의 통쾌함을 깨닫는다. 비록 그것이 가짜 연극에 불과할 지라도 즐거우니 마냥 좋은 것이다.

 

바이오로이드의 눈에서 그 아이들을 볼 때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 좋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세뇌라도 당한 게 아닌 이상 그러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세뇌마저도 풀려버린 세계.

인간에 대한 악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게 정의가 된 시대다.

 

 

 

“... 하지만 당신의 부탁이라면.”

 

“응?”

 

“두 번 정도 더 고민해드리죠.”

 

 

 

삑.

삑.

 

시라유리가 라디오의 송신 버튼을 누를까 말까, 두 번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다가 결국 훅,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 옆의 통신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시라유리 81번. 대피소 위치 역추적에 실패했습니다.

아무래도 내부에 관련 전문가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확인. 원인 분석 후 추후에 다시 통보하도록.

 

“알겠습니다.”

 

뚝.

 

“... ... 괜찮아...?”

 

“하아... 아뇨. 전혀 괜찮지 않아요.

저기서 말하는 원인 분석이라는 게 하루 이틀 걸려서 될 일이 아니거든요.

뭣 하면 저기 있는 방독면 쓰고 직접 대피소까지 갔다 와야 할 수도 있는데... 으휴.”

 

“근데 왜 그런 걸 나 때문에...”

 

“... 전에 말했죠. 당신의 부탁이라면 두 번 정도 더 생각해본다고.

그래서 그렇게 해드렸을 뿐이에요.”

 

“...”

 

“어쩌면 아직도 친구가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요.

어느 쪽이건 바보 같긴 매한가지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공호 내의 물품들을 이리 저리 살피는 시라유리.

방독면과 여분의 정화 필터를 챙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라도 도와줄까 하여 몸을 일으켜 보았으나 다리에 쥐가 난 탓에 반절도 서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생각해보니 이 안,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나.

뭔가를 도와주려고 해도 방해만 될 것이 뻔했다.

 

기운이 나지 않았다. 몇 번 죽고 나면 사람은 그렇게 변한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가 아니라 다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인간이다.

그 탓에 조금 과하게 우울해있었던 모양이다. 시라유리가 방독면을 목에 두른 채 내 어깨를 잡으며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 하아, 당신의 멍 때리는 표정이 재미있는 광경이란 건 인정하는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면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 미안.”

 

“제 말 잘 기억하세요.

당신은 이제부터 여기서 살 거에요. 적어도 밖에 있는 방사능이 치사량보다 낮아질 때까지.

여기 떨어진 핵이 좀 특별해서 일반적인 핵보단 방사능 반감기가 훨씬 짧아요. 

막 몇 년씩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 ...”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다른 대원들이 알게 되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러 올 테니 무조건! 무조건 이 안에만 계셔야 해요.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들겨도 절대 대답하지 마시고. 나름대로 신호가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말하면 무조건 들통나거든요.

식량이랑 식수 위치는 저기 선반 위에 있으니까 조심해서 드세요. 다른 재고들은 제가 다른 곳에 숨기고 있으니까 꼭 아껴 드셔야 해요!”

 

 

 

선반 위에 통조림 몇 개가 처량하게 등불에 반짝였다.

식수도. 시라유리가 먹다 남은 생수통 몇 개가 탁자 위에 대중없이 놓여 있었다.

 

학생회장으로서의 시라유리와는 전혀 다른 080 대원으로서의 모습.

솔직히 말하면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칼로리 높은 콩 통조림이 비어있는 채로 책상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니까.

 

 

 

“그리고 라디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들지 마세요.

저기서 나오는 신호는 다른 곳의 대원들도 감지할 수 있으니까 가장 최우선으로 알고 계셔야 해요.

만약 왓슨, 당신 목소리가 라디오 너머로 들리기라도 하면 죽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

 

 

 

사람을 죽이는 것에 어째서 이리도 열성인 것일까.

왜 이리도 열심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핵 속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이기 위해 어째서 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분노일까, 아니면 복수의 숭고함일까, 이들의 행동 원리는 가히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여 타인의 삶을 앗아가려는 자들의 움직임에는 무게가 있었다.

아주 깊고 깊은, 이유 없이는 할 수 없는 짙은 무게가.

 

 

 

“... 그리고 또 뭘 알려드려야 하나...

암호 해독법? 아냐아냐, 그건 그냥 내가 하면 될 거야.

정기 연락책? ... 그것도 아냐. 잘못했다간 다 죽을 거야.

하다 못해 이런 곳에서 운동하는 법이라도 알려줘야...”

 

“... 시라유리... 괜찮아...?”

 

“... ...”

 

 

 

손으로 턱을 괸 채 말없이 고민하던 아가씨는 덥석, 내 손을 잡고는 입을 열었다.

 

 

 

“... 왓슨. 따라 말하세요.

그러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는...

...

... 080 기관 모토는 갑자기 왜?”

 

“아니, 그것도 알고 있어요? 이건 우리 기관 소속이 아니면 모르는 건데...?

... 아냐. 이젠 놀라는 것도 식상하다.

아무튼 계속 외우고 다니세요. 그러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무에서 실패한 080 대원은 자살로 생을 마감해 그들의 흔적을 스스로 끊어버려야 한다는 의미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삶 자체를 부정하는 문장.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토였다.

아마 이것이 그들의 염이겠지. 기도일 테고.

 

 

 

“앞으로, 어느 누가 여기 오려고 해도 당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똑똑똑, 제가 앞으로 세 번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릴 테니 그것에만 반응해주세요.

아니, 반응하는 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 몸 상태를 보니까 괜한 거 가르쳐주면 문제만 악화될 거 같으니.

그냥 우리 사이의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하도록 하죠.”

 

“...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내가 너에게 뭘 얼마나 해줬다고...”

 

“그런 사소한 게 지금 중요한 가요? 안 그러면 죽게 생겼는데?”

 

“... 아, 그래. 그랬지.

이렇게 오랫동안 안 죽은 게 조금 어색해서... 

... 미안.”

 

 

 

방공호 안에서 식사를 하고 한숨 돌리는 이 시간. 원래라면 못해도 다섯 번은 죽었을 시간.

방사능에 30분만 피폭돼도 뼈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밖은 인외마경(人外魔境)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 침대에 앉아 따뜻한 물을 손에 쥐고 있으니... 나도 현실 감각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모양이다.

 

그런 내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시라유리는 내 옆자리에 앉아 어깨를 팔로 감쌌다.

목에 두르고 있는 방독면이 우리 품 속에서 부스럭거렸다.

 

 

 

“하아... 당신, 지금 보니까 불쌍한 척 하는 게 제일 잘하는 거였군요?

내 평생 이런 걸 해볼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안 해봤는데.”

 

“...”

 

“당신은 저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자신에 대한 모든 걸 들통난 080 대원은 스스로 죽어야 하죠.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준 거에요.

제 호의가 영 이해가 안 된다면 그렇게라도 생각하세요.”

 

“... 고마워.”

 

“고맙긴요. 친구를 지키는 데 이유는 필요하지 않잖아요?”

 

“... 푸흡...”

 

“뭐가 웃기죠?”

 

 

 

냉철한 첩보원의 입에서 열혈 소년만화 주인공이 할 법한 대사가 나오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니, 그냥... 시라유리가 할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내 평생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하하... 

...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너 아니었으면 죽었을 지도 몰라.”

 

“그나마 지켜준 보람은 있어서 다행이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왓슨.”

 

 

 

그러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숨기고자 했던 말이 지키려는 말이 되었다.

 

선과 악이 불분명한 세계에서 무언가를 지키려는 것 하나만은 정의가 되었다.

피해자가 된 인간, 가해자가 된 바이오로이드. 

무엇으로부터 도망가야 할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적어도 어디로 도망가야 할 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친구의 품.

죽더라도 거기서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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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