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닌 피보호자의 바이오로이드 - 목록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입니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요."



  각자 갈 길을 가는 다른 레모네이드들과 오르카 저항군, 라비아타 일행의 모습을 그녀의 집무실에서 쳐다보던 레모네이드 델타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걸렸다.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웃음과는 거리가 한참 먼, 어디 두고 보자는 악의에서 비롯된 섬뜩한 미소였다.


 심하게 손상된 AGS들과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바이오로이드들이 완전히 뭉개지다시피한 두 구의 주검과 피 묻은 가구들을 치우고, 피와 오물로 얼룩진 바닥을 청소했다. 올리비아와 오드리가 끔찍한 주검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를 치우는 것도 이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새로운 올리비아와 오드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두들겨 맞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레모네이드 감마와 오르카 저항군은 각자의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중간에 서로 갈라질 때까지 무적의 용과 아브람 사령관은 레모네이드 감마와 이야기를 나눴고, 언젠가 서로와 서로가 모시는 이의 운명을 걸고 싸우게 되리라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주인과 구시대의 부활을 원하는 레모네이드 감마와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아브람 사령관은 공존할 수 없었다.


 레모네이드 감마는 만일 자신이 최후를 맞이한다면 괴물들이나 철충들에게 박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브람 사령관이 이끄는 오르카 함대와 싸우다가 죽는 편이 덜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죽어줄 생각 따위는 없다. 


 오르카 저항군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녀의 주인을 다시 부활시키고 포세이돈 사가 전 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하는 날을 열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잠시 자신이 나약한 생각을 했다며 자조한 레모네이드 감마가 피식 웃는 모습을 본 어나일레이터의 승무원들이 그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괴물들에게 함대가 작살난 이후로 그녀의 기분은 바닥을 쳤고, 그런 그녀에게 괜히 꼬투리를 잡혀서 처맞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군가가 대형 사고를 치거나 뭔가 제대로 감마의 기분을 잡치지 않는 이상 오늘은 그녀에게 두들겨 맞거나 욕을 한 사발 얻어먹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라비아타 일행의 전투 영상을 시청하던 오르카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시젠의 곁을 지켜줄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레오나와 홍련은 사령관과 시젠 사이에서 사령관을 택한 자신들과는 달리 그녀들의 기억과 성격, 외모를 물려받은 이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젠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기를 소망했다. 


 칸과 블러디 팬서는 라비아타가 자신들의 동형 바이오로이드를 만들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는 살짝 아쉬워했지만, 시젠의 곁에 적지 않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있다는 것과 그녀에게 강력한 수호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그녀가 언젠가 가족들과 만날 때까지 무사하기를 바랬다.


 안타깝게도 마리 통령에게는 시젠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그녀의 안녕을 기원할 여유가 없었다. 최근 원래의 혈색과 활기를 되찾았던 그녀의 얼굴빛은 다시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고 그녀의 눈가에는 사라졌던 다크서클이 다시 자리잡았다.


 마리 통령의 얼굴을 본 무적의 용이 그녀가 오르카 저항군에 막 합류했을 때 통령과 지휘관들의 좀비 같은 모습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장군들도, 그 부관들도, 그녀 자신도 다시 그런 모습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죽은 눈빛을 한 레드후드들과 이프리트들이 옮기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보는 무적의 용과 세이렌들, 엠피트리테들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갔다.



 에타와 세타, 람다와 라비아타 일행은 비행선을 타고 괌으로 돌아가는 척 하다가 중간에 레이라미아들과 함께 괌으로 공간이동했다.


 라비아타와 세 레모네이드들에게서 곧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시젠은 타이거샤크에 남아있던 바이오로이드들 및 컨스트럭트들과 함께 괌의 해변으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비아타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시젠이 특유의 소리를 내면서 라비아타를 향해 날아가고, 티타니아와 두 레아, 라미엘과 사라카엘, 아자젤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라비아타와 시젠이 서로를 끌어안으면서 재회를 기뻐하는 동안 시젠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일행의 모습을 살펴보던 에바가 뚱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뭔가 마법 깨나 한다는 로봇들하고 깡통로봇들 숫자가 늘어난 것 같은데 내 착각이니? 그리고 저기 하늘에 떠 있는 저것도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유럽에 다녀온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세 레모네이드들도 얼마간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늘어난 세피리아크들과 세피라가드들의 숫자와 하늘에 떠 있는 제법 우아하게 생긴 하얀색 공중 요새의 모습을 확인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자기가 생각하기에 조리있게 설명할 것 같은 이들에게 각자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아자젤이 제일 먼저 나서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어제 시젠 님의 부모님께서 또다른 편지와 더불어 약간의 지원 병력, 그리고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번에도 편지의 내용은 시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기에 아자젤도, 다른 그 누구도 편지에 적힌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부모가 자신을 곧 데리러 올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시젠도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티타니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는 했었지만.


 이번 편지와 함께 시젠의 부모가 보내온 선물은 한 대의 공중 요새와 51기의 세피리아크급 인공 마법사, 10기의 세피라가드급 직접 전투 병력들과 막대한 양의 '뀽뀽이'라는, 꼭 슬라임을 연상케 하는 외형의 음식물들이었다.


 레오나와 미호, 앨리스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저 병력들이 며칠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전투를 훨씬 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을 거라며 투덜거렸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은 나머지 바이오로이드들은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에바는 용들과 용들이 만든 무기는 타이밍 못 맞추는 데 뭐가 있냐며 디스했다.

 

 레모네이드 에타와 세타는 자신들의 공중 함대의 존재 의의가 점점 사라져 간다며 탄식했고, 람다는 그녀의 기함인 아다만타인과 용들이 만든 공중 요새와 공중 전함들의 디자인을 비교하면서 자기 혼자 절망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시젠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지원 병력 없이도 무사히 이기고 돌아왔잖아요?"


 ".......그렇긴 하지."


 라비아타의 말에 불만을 가라앉힌 바이오로이드들이 쭉 늘어선 세피리아크들의 모습을 훝어보았다. 


 지금까지 레이라미아 셋, 세피리아크 넷 이렇게 일곱밖에 없었던 마법사들이 하루 아침에 오십이 넘는 숫자로 늘었으니 닥터들이 매우 좋아했을 거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녀들의 예상대로 닥터들은 마법사들이 잔뜩 생겼고, 조금만 더 있으면 동형기 자매들도 더 생긴다면서 셋만의 작은 파티를 벌였다. 마법사들과 함께 이것저것 연구하거나 실험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고,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도 많았지만 지금까지는 그 마법사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많았는데 이제는 하고 싶은 연구도 실험도 실컷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푼 채로.


 반면에 안드바리는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자원을 잔뜩 날려먹었는데 마법사들이 몰려오고, 닥터들이 늘어나고, 바이오로이드들을 추가로 더 만들어내면 창고 꼬락서니가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잔뜩 침울해진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레모네이드 델타로부터 자원들이 들어올 거라는 이야기나 늘어난 인력들이 어떻게든 창고를 채워줄 거라는 이야기는 침울해진 안드바리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번에 도착한 지원군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라비아타가 다시 한 번 시젠을 꼭 끌어안았다.


 시젠의 부모가 지난 번보다 더 많은 병력에다 선물까지 보냈다는 것은 이들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든지, 혹은 이들이 시젠을 데리러 올 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으면서.


 시젠도 자신을 끌어안은 라비아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딘지 모를 곳에 갑자기 떨어진 자신을 돌봐주고, 주변 많은 이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멸시할 때에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던 그녀로부터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유럽에서 라비아타 일행을 도와주고 온 속삭이는 희미한 별빛을 춤추는 작은 별빛이 반갑게 맞이했다.


 도움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도 직접적으로 도와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라비아타와 그 일행이 철충들이나 괴물들과 싸울 때 자신이 그것들 근처에 있는 것처럼 철충들과 괴물들에게 약간의 속임수를 쓴 것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철충들과 괴물들은 라비아타 일행과 스트롱홀드 군단에게 약점을 노출시키거나 집중이 흐트러지면서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기회를 날려버렸고, 라비아타 일행은 전원이 큰 부상 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의 미약한 속삭이는 희미한 별빛의 힘으로는 그 이상의 도움을 줄 수도 없었고, 주려 해도 오히려 철충들과 괴물들을 자극해서 역효과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춤추는 작은 별빛은 자신을 수령할 사람을 찾아서 세계와 세계 사이를 떠돌아다니던 시젠의 부모의 편지를 잡아 시젠에게 전달했다. 시젠은 자신의 부모가 보내준 편지를 보고 기뻐했고, 편지에는 시젠이 좋아할 선물과 함께 그녀에게,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시젠과 바이오로이드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두 별의 아이들은 하늘 저 너머로 보이는 다른 세계를 쳐다보았다.


 시젠의 부모는 자기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시젠에게 편지와 도움이 될 것들을 보내면서 자신들도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젠의 부모가 아이를 찾아 이 곳에 도착했을 때쯤이면 이 세상은 성대한 개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을 지켜주는 장벽을 오만한 자들이 깨부쉈고, 태풍에 휩쓸린 이들과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어야 했을 것들이 무너진 장벽의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불순물들이 이 세상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장벽의 틈새가 메워지기 전까지 춤추는 작은 별빛의 동포들은 이 세상에 쏟아진 것들을 청소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속삭이는 희미한 별빛과 춤추는 작은 별빛은 오만한 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심연에서부터 올라온 이들이나 영혼없는 자들, 심연이나 다른 세계에서 쏟아진 불순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어리고 미약한 이들의 힘은 이 세상에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불순물들을 없애기에도, 시젠을 지켜주기에도 충분하지 못했다.


 그런 두 어린 별의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아니면 내일이 그 날이 되지 않기를 바란 두 별의 아이가 시젠 일행의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누구도 두 별의 아이가 바로 근처에 있다는 사실과 용들이 만든 전투 병기들이 이들 둘의 존재를 의식,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