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는 건물 하나를 통째로 페어리들에게 양보한 결과 삭막했던 회색 건물에 녹색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때 이른 장미덩굴을 두른 아치형 입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종자들을 가져온 식물원보다 훨씬 더 잘 꾸며진 실내정원이 들어온 손님들을 반겨주었다. 차를 좋아하는 그녀들답게 정원 한가운데에는 둥그런 티 테이블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취미의 영역이라고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실내 연못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는 동안, 하얀 차 주전자를 가져온 레아가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정말 대단해. 설마 둘 만의 힘만으로 이 짧은 시간안에 이 정도의 정원을 만들어낼 줄은 몰랐어.”

“아이 참. 부끄러워요 주인님. 아직 다 완성되지 않았는걸요.”

 

맞은편에 앉은 레아는 부끄럽다는 듯 뺨에 손을 대고선 얼굴을 붉혔다. 이게 완성되지 않은 거라면 완성된 실내정원은 대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걸까. 도저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바쁜 일상 한 가운데서도 가끔씩 녹색 식물들을 보며 마음을 치유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지. 그런 면에서 이 실내 정원은 페어리들 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에게 정말 소중한 곳이다. 앞으로 지원해달라고 하는 물품들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지원해줘야지.

 

푸르른 식물들 한 가운데 앉아 레아와 함께 느긋한 오후를 즐기며 차를 마시니 생각으로 과열된 머리가 점점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여유를 가져야한다니까. 

 

레아와 함께 차를 즐기던 도중, 꽃을 살펴보는 더치걸이 보였다. 다 헤진 광부옷 대신 앙증맞은 밀짚모자와 체크무늬 멜빵바지를 입은 그녀는 쪼그려 앉아 물뿌리개를 들고 심은 꽃들에게 물을 뿌리고 있었다. 저렇게 입고 다니니 귀여운 시골 소녀 같아 보인다. 역시 더치걸을 페어리들에게 맡긴 건 옳은 선택이였어. 레아가 차를 치우는 동안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은 나는 코끼리를 본떠 만든 물뿌리개로 군데군데 물을 주는 더치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안녕, 더치걸. 정원 일은 좀 어때?”

“레아 언니도, 다프네 언니도 상냥하게 대해줘. 꽃들도 예쁘고...햇빛도 따뜻하고. 광산 일보다 좋아. 여기에 데려와 줘서 고마워.”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지금은 꽃에 물주고 있는거야?”

“응. 지금 막 물줄 시간이거든.”

 

쭉 뻗은 줄기를 향해 물이 뿜어져 나가자 잎사귀에 숨어있던 애벌레 하나가 통실통실한 몸통을 꿈틀거리며 물을 피해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직 애벌레가 나오기에는 이른 시기 아닌가? 포켓몬중 하나의 모티브가 된 익히 알고 있는 녹색 애벌레를 보니 어린 시절 곤충채집을 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손에 나뭇가지를 집어든 나는 애벌레를 조심스럽게 톡톡 쳤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감지하자 이른 시기에 나온 애벌레는 녹색 머리에서 꺼낸 노란 뿔로 나뭇가지를 위협했지만 새가 아닌 인간인 내 눈에는 애벌레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아 귀여워보였다.

 

이 기회에 더치걸에게 곤충에 대한 걸 좀 알려줄까? 말없이 빤히 애벌레만 바라보는 더치걸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뿔을 들고 위협하는 애벌레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얘는 호랑나비의 애벌레야. 어때? 알록달록하니 귀엽지? 원래는 봄에 나오는 앤데 여기가 따뜻해서 일찍 나왔나봐.”

“애벌레? 뭘 먹고 자라는 거야?”

“애벌레니까 나뭇잎이나 줄기를 갉아먹고 살지 않을까? 어쨌든 얘는 위협받으면 이렇게 노란 뿔을 내미는데..”

“그럼 해충이네.”

 

무덤덤하게 말한 더치걸은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휘둘러 줄기를 기어오르는 애벌레를 순식간에 녹색 피떡으로 만들어버렸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벌레를 잡는 그녀의 모습에 난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캐, 캐터피!!”

“주인님? 더치걸? 무슨 일 있었나요?”

“레아 언니 말대로 잎을 갉아먹는 애벌레를 잡았어.”

 

비명을 듣고 날아온 레아는 작은 손에 묻은 녹색 체액을 보자마자 화사한 미소를 짓더니 맨 손으로 벌레를 때려잡은 더치걸을 끌어안고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참 잘했어요, 더치걸. 주인님의 정원을 망치는 해충은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해야 한답니다.”

“응, 알았어. 벌레는 남김없이 잡을게.”

 

계절을 착각해 일찍 일어난 벌레는 나비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더치걸의 손에 비참하게 끝이 났다. 이게 바로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는 건가. 벌레란 벌레는 전부 잡아 죽이겠다는 결의로 반짝이는 더치걸의 눈을 보니 조만간 식물원 안의 벌레는 종류를 불문하고 전부 씨가 마를 것 같아보였다. 

 

그럼 잘 놀았으니 이만 다른 곳으로 가봐야지. 실내 정원을 관리하는 더치걸과 레아에게 손을 흔들며 저녁 식사 때 보자는 말을 남긴 나는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포츈을 찾아나섰다. 

 

다행히 포츈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계가 있는 곳이면 항상 그녀가 있었으니까. 다만 의외의 점이라면 예상치 못한 손님이 와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애들도 다 쉬고 있는데 팬서가 왜 여기 있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처럼 낮잠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민님 오셨슴까?”

“안녕, 블러디 팬서. 여긴 무슨 일이야?”

“포츈씨에게 장비 정비 좀 맡겼지 말입니다.”

 

말을 마친 블러디 팬서는 보란 듯이 외골격을 움직이며 등에 메고 있던 활강포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저기 긁히고 낡아있던 그녀의 장비는 새로 산 것마냥 반들반들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공단 기계만 잘 다루는 줄 알았는데 무기까지 잘 다루잖아? 만능 엔지니언데? 

 

“후우..정비 마쳤거든. 탄환도 만들었으니 당분간은 문제 없을 거거든.”

“안 그래도 탄환 때문에 걱정 좀 했는데 이제 맘껏 싸울수 있지 말입니다.”

 

어깨를 붕붕 돌리는 포츈은 날 보자마자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또 블러디 팬서의 활강포에 맞춘 탄환을 생산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는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정말 다시 들어도 믿기지가 않는다. 블러디 팬서가 쓰는 탄종이 생산 라인에 없으니까 탄환을 분해한 다음, 생산 라인을 새로 만들 줄이야. 정말 어디 넣어도 확실히 할 일 해주는 만능 엔지니어잖아. 나중에 집 만드는 일도 맡겨야지.

 

엔지니어를 갈면 결과가 나온다는 옛말처럼 속으로 그녀를 갈아 넣을 생각을 한 나는 포츈의 손을 잡고 한 차례 흔들었다.

 

“팬서의 무기를 손봐줘서 고마워, 포츈. 안 그래도 팬서가 그것 때문에 고생 좀 많았거든. 네 덕에 고생하나 줄었네.”

“술 친구의 부탁정도는 쉽게 들어줄 수 있거든.”

 

술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선 누구나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법이지. 소탈하게 웃으며 이따 한잔 하자고 약속을 잡는 포츈과 블러디 팬서의 모습을 보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인원수가 별로 없는 우리에게 있어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건 매우 중요한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긍정적인 관계는 아주 좋은 징조다. 비록 만난 시간은 다르지만 벌써부터 가족처럼 친해지니 앞으로의 일이 더욱 더 기대된다. 이대로 가면 우리 모두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둘 다 오늘은 푹 쉬어. 특히 포츈. 오늘 고생 많았잖아?”

“민님은 항상 쉬라고 하시지 말입니다. 오늘 전 한 거 없지 말입니다.”

“할 일이 생길 날이 올 수도 있잖아? 그 때까지 힘을 비축해두는 셈 치자.”

 

피식 웃으며 팬서의 어깨를 살짝 툭 치자 팬서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미소 지으며 팔을 푸는 포츈과 함께 대피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둘이서 즐기는 술자리를 방해할 수는 없지. 어느새 친해진 두 명의 뒷모습을 바라본 나는 그녀들이 지하로 내려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있을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로 들어가자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보이는 레프리콘이 부스스한 머리를 빗으로 빗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레프리콘은 빗을 내팽개치고선 자리에서 헐레벌떡 일어나 내게 깍듯이 경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례할 필요 없다니까 항상 그런다니까. 레프리콘 입장에서는 상급자에게 보이는 당연한 태도겠지만 정작 군과는 관련없는 내 입장에서 그녀에게 경례를 받으면 쓴웃음만 나왔다.

 

“오, 오셨습니까, 민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브라우니를 깨우겠습니다.”

“아냐. 갑자기 와서 미안해 레프리콘. 브라우니는 그냥 자게 내버려둬.”

 

옆 침대에 누워있는 브라우니를 깨우려하는 그녀를 만류한 나는 브라우니가 자고 있는 침대 귀퉁이에 앉아 레프리콘과 눈을 마주했다. 

 

“레프리콘, 요즘은 어때?”

“요즘은 어떻냐는 말씀은..”

“생활의 질이라던가..뭐 식사라던가..앞으로의 계획이라던가.”

“그런 건 전혀 문제없습니다. 민님이 잘 챙겨주시잖아요.” 

 

만족한다는 거구나. 다행이다. 아직까지 부족한 인프라와 무작정 밀어붙인 계획에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작게 미소 짓는 레프리콘에게 웃어준 나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침을 질질 흘리며 잠을 자는 브라우니의 입가를 살살 닦아주었다. 생소한 손길이 입가에 닿은 탓인지 깊게 잠에 빠져있던 브라우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게슴츠레하게 뜬 브라우니의 눈이 드러났다. 

 

“헤헤. 민님 오셨슴까. 좋은 오후임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브라우니는 나른하게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내겐 귀여워보였지만 레프리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눈이 위로 슬며시 치켜올라갔다. 

 

“브라우니. 낮잠 시간은 이미 지났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괜찮아. 오늘은 할 일도 없으니 푹 자. 이따 저녁식사시간에만 맞춰서 일어나면 돼. 피곤하면 레프리콘도 더 자도 돼.”

“전 브라우니를 챙겨야 하니까요. 깨어있겠습니다.”

 

틱틱대면서도 항상 브라우니를 챙기는 그녀의 모습은 훌륭한 언니의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둘은 사이가 좋구나. 여전히 변치않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손을 들어 브라우니의 이마를 몇 번 쓰다듬어주자 브라우니는 이마에 닿은 내 손을 붙잡더니 다짜고짜 뺨을 가져다 대었다. 

 

“헤헤.. 언제봐도 민님은 자상하시지 말임다. 저희를 아껴주시고..소모품처럼 대하지 않으시고.. 그 날 민님을 따라간 건 제 최고의 선택이었지 말임다.”

“내가 너희를 소모품처럼 대할 리가 없잖아? 전부 내 가족같은 애들인데. 특히 넌 내 동생같아 보여.”

“전 인간분들의 가족은 잘 알지 못함다..그래도 민님이 가족이라고 말해주시니 기분 좋지 말임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인지 브라우니는 뺨까지 붉혀가며 손에 뺨을 비벼댔다. 멸망 전의 인간들은 대체 얘네들을 어떻게 취급했기에 가족이란 말을 듣자마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안타까운 마음에 괜히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레프리콘에게 남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니 그녀 또한 얼굴을 붉히면서도 잠자코 내 손에 자신의 머리를 맡겼다. 블러디 팬서가 동갑내기 털털한 친구 이미지고, 레아와 포츈이 믿음직한 누나 이미지라면 다프네와 더치걸, 그리고 이 둘은 내 동생 같은 느낌이다. 그녀들과 같이 철충을 잡아왔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최대한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고 싶은 것이 지금의 솔직한 내 마음이다. 

 

그녀들의 체온을 느끼며 그녀들을 쓰다듬던 도중,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오늘의 방송을 알리는 재즈가 흘러나왔다. 오늘 시작 곡은 'My way'구나. 오후를 시작하기에는 정말 좋은 곡이지. 조만간 탈론페더에게도 뭐라도 하나 해줘야겠다. 방송을 오래 해야하니 안마의자라도 하나 구해다줘야 할까? 아니면 목마르지 말라고 음료수라도 잔뜩 챙겨줘야 할까? 

 

나중에 방송실에 있을 그녀에게도 한번 가 봐야겠다. 그녀에게 필요한 게 뭔지 정도는 알아봐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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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죽이고 싶은 편두통과 10선중이라 글 쓸 짬이 잘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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