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오르카호의 사령관은 생기를 잃어갔고, 이내 자리에 몸져눕게 이르렀다
닥터, 아자즈, 컴패니언, 배틀메이드를 비롯한 바이오로이드 모두가 그를 다시 일으키고자 노력했으나 사령관은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만을 응시하면 매번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자신은 세계의 진실을 알아버렸다고.
도무지 이전처럼 돌아갈수가 없다고.

실제로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충의 위협도, 별의 아이조차도 더 이상은 없었다
하다못해 천하의 펙스조차 조용히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함교부터 갑판, 사령관실에 이르기까지 오르카의 모든 공간에선 무거운 침묵과 종종 들려오는 흐느낌만이 존재했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것일까,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모두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전 통령 라비아타에게 부탁했다.
길고도 긴 줄에 바이오로이드, 철충, 마리오네트를 비롯한 펙스 콘소시엄 모든 세력이 묵묵히 서 있었다
모두가 더 이상 싸우지도 다투지도 않고, 그저 나지막히 적으로 만났던, 주인으로 만났던, 믿음직한 연인으로 만났던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듣고 조용히 떠나갔다

 그렇게 길고 긴 줄이 끝을 보일 무렵, 가장 마지막에 서 있던 인물은 다름아닌 슬레이프니르, 누구보다도 빠른 이가 지금은 줄의 마지막에서 사령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사령관실의 침대에 한때 그녀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누구보다도 칭찬을 갈구했던, 육신과 영혼 가슴의 두근거림까지 모든 처음을 가져간던 남자가 잠잠히 누워있다.
"고마워. 마지막까지 있어줘서."
남자는 나지막히, 하지만 따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한때 짖궂게 굴, 펭귄, 뗑컨이라면서 놀리던, 그리고 삐진 그녀의 볼을 간지럽히며 기분을 풀어주던 활기참은 더 이상 남지 않았으나
한결 수척해진 그의 얼굴엔 여전히 순수한 미소가 남아있었다.
그래. 슬레이프니르 자신도, 사령관 본인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었다.
무겁디 무거운 공기, 복도에서 흐느끼는 이들의 목소리, 조용히 째깍거리는 시계소리가 마지막을 재촉한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니?"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남성이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선 몸을 일으켜 슬레이프니르를 꼭 껴안았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아아. 그의 팔 안에 미약한 떨림이 느껴진다.
바닥에 흘린 눈물이 점차 강줄기로 변해간다.
그녀의 눈물 어린 손에, 사령관의 편지 하나가 쥐어졌다.
펼친 종이엔 삐뚤어진 필체로, 하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한 문장이 쓰여져 있다.
-모든 이들에게 자유를. 나 최후의 인간으로서 이 땅에 약속하겠다.

"모두에게 이걸 전해줘. 슬레이프니르는 누구보다 빠르니까, 할 수 있겠지?"
안긴 두 사람 사이에, 심장의 고동이 점차 느려져간다.
이내 한 사람 정도로 박동이 잦아들자, 더 이상 남성은 숨을 쉬지 않는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너무나도 사랑했던 이들에 둘러쌓여 고된 삶을 끝마친 것이다.
손때 낀 책상에 놓인 고인의 태블릿의 검은 바탕엔 Account Deleted, 이 문구 하나만이 잔혹하리만치 떠올라 있다.

 슬레이프니르는 사령관을 고이 눕혀두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비로소 그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더 이상 남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상위복, 상위복, 상위복
세상의 가장 큰 별이 졌도다
그 역시 더 이상 육신에 매인 이가 아니며, 이 세계 역시 곧 미지의 공간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비록 잔혹하긴 하나, 이로서 모든 이들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하얗게 번져가는 세상 속, 가련하고도 날쌘 제비는 생각했다.
언젠가 다른 세상에서 만나자고.
설령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대에게 안기고 싶노라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눈물을 훔치자
이내 세계가, 영영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