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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나?”

 

 

 

메이의 말을 끊은 것은 다행스럽게도, 나였다.

의미불명의 얘기를 더 듣기 전에 상황 판단을 해야 했으니까.

 

‘역시 너였구나’ 라니, 그런 말은 나도 전혀 예상 못했는데.

 

 

 

“글쎄, 내가 죽이지 못한 유일한 인간이니 모를 수가 없겠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 무슨 뜬금 없는 소리를...”

 

“아직도 부정할 생각이야?

그럼 좀 실망인데. 상황 판단이 그렇게 안 되나?”

 

“그러니까 지금 무슨...”

 

“핵이 떨어지고 난 뒤의 상황을 정찰하는 건 둠 브링어의 의무야.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이 폭심지 안쪽으로 걸어가는 걸 찍었지.

당연히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끝도 없이 걸어가더군.”

 

“... ...”

 

 

 

아, 그 때 봤던 건가...

그럼 이러는 게 이해가 된다. 내 얼굴 도장 정도는 찍혔겠지.

 

 

 

“대피소 안에 재미있는 인간이 있는 거 같아 와봤는데, 혹시나가 역시나네.

너,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일단은.”

 

 

가볍게 고개를 으쓱거렸다.

메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한 발자국 더 걸어왔다.

 

 

“... 아직도 여유가 있나 봐?

빙 둘러 말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어휴, 이거 뭐 무서워서 말이 나와야 말이지.

조금 시간 좀 주겠어? 나 지금 엄청 무섭거든.”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자 메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들이댔다.




“그냥 좀비인 줄 알았는데 말하는 걸 보면 능구렁이 좀비였구나?

근데 내가 뱀은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야. 빨리 말 안 하면 당신 목이 날아갈 걸?”

 

 

 

메이의 뒤에선 수십 개의 총구가 반짝거렸다.

 

너무 밝은 빛에 되려 가려진 바이오로이드들.

나는 너무 깊은 어둠 속에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메이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까 좋네.”

 

“뜬금 없는 소리하지 마.

내 호기심이 동나면 당신은 죽을 목숨이니까.”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가슴을 펼친 메이.

우스꽝스럽게도 오르카 호의 메이보다 내 눈 앞의 메이가 더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되려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는 그 모습이 여기,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전시되어 있었으니까.

 

 

 

“죽는다라니. 소름 끼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당신이 그러는 것도 만만찮게 소름 끼치거든?

그러니까 내가 묻는 것만 대답해줄 수 없을까?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대답했다간 내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걸 어떻게 말해?”

 

“말하지 않아도 죽을 텐데 이왕이면 입이라도 조금 더 놀리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

 

“하하...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건 딱 내가 아는 메이답네.”

 

“난 당신을 모르는데?”

 

“그런 질문도 이젠 익숙해.”

 

 

 

재미있구나. 단지 말을 섞는 것이 이리도 재미있는 일이었어.

 

늘 궁금했다. 반군의 일이 있기 전에 메이를 만났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의 메이였다면 이렇게 일이 꼬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제 그 답을 얻은 느낌이다.

 

 

 

“메이, 슬슬 지겹군요.

저쪽에선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 조금만 더...”

 

“더 기다리기도 지칩니다. 저 인간은 스틸라인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래? 그럼 저기 쉘터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들은 발할라가 데리고 가도 될까?”

 

“저 많은 걸 자네가 다 먹으려고 하면 어쩌나?

호드도 양보는 못하네.”

 



지휘관들이 손짓했고,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이 무기를 들었다.

빙빙 도는 이야기에 지친 이들이 저벅 저벅, 대피소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다.


귓가의 이어폰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말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아이의 울음 소리, 어린 아이의 투정, 대피로로 도망치려는 발소리까지.


하지만 전염되어가는 공포의 진동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 그만!”

 

 

 

그렇게 들어오려는 아이들이 그림자 너머로 발을 내딛기 직전, 메이가 팔을 뻗어 막았다.

 

 

 

“지휘관 권한으로 말한다.

다 뒤로 비켜.”

 

“... 메이 지휘관님. 저희는 저희의 지휘관님 명령을 따를...”

 

“내 말 안 들리나?

꺼지라고.”

 

“... 알겠습니다.”

 

“이보게, 메이. 저 인간의 뭐가 자네를 그렇게 동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우리도 이제 기다릴 만큼...”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정찰해서 찾은 인간들은 전부 너희한테 나눠줬잖아. 너희의 복수도 방해하지 않았고. 

내가 왜 너희한테 핵 발사 소식을 하나하나 알렸는데?

실수로라도 너희가 죽여야 할 인간을 죽이지 않기 위해 그랬던 거잖아.”

 

“... ...”

 

“욕심 부리는 거 아니야. 그냥 애기만 좀 해보겠다는 거지.

내가 그 정도 부탁도 못할 짬인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 ... 오늘 참 별 일을 다 보는군.

호드 전원, 철수한다.

이 대피소는 내가 대표로 참관하도록 하지.”

 

“하아... 그럼 스틸라인도 이 근방을 좀 탐사하고 오겠습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메이 소장은 처음 보는군요.”

 

 

 

메이가 팔을 내리자 적군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하며 물러났다.

이제 햇살에 눈이 적응한 덕분인가, 각자의 길을 가는 아이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직 붙어 있는 목에 겨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메이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들였다.

 

 

 

“이제 내가 당신을 살려준 거 같은데, 목숨값으로라도 들어봐야겠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하아... ... 그렇게까지 말하면 참 애매하네.

그냥... 저기 시라유리가 도와줘서? 나도 평범한 인간이라서 핵 맞으면 죽거든.”

 

“그런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당신 뒤를 계속 밟고 다녔으니까.

저 아이가 당신을 도와주기 전의 일을 물어보는 거지. 계속 이렇게 빙빙 돌릴 생각이라면...”




하지만, 아직 상황이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협박을 하는 법이 조금 어설프군. 메이.”

 

 

 

철컥!

 

메이의 뒤에서 다가온 칸이 내 이마에 총을 겨눴다.

 

 

 

“애초에 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은 지를 왜 묻는 거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지 않나.”

 

“... ...”

 

“물어볼 생각이 없단 건가.

그래, 그럼 내가 대신 물어보지.”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렸다.

칸은 아주 가까이, 총 내부의 강선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


그녀는 이미 적힌 대본을 읽는 것처럼, 또박또박 입에서 물음을 내뱉었다.


 

 

“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바이오로이드를 죽였지?”


"..." 

 



죽였는가를 묻지 않았다. 얼마나 죽였는지를 물었다.

유무(有無)의 개념이 아니다. 수량의 영역이다.


그래.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잖아.

결국은 저 질문이다.

내 지난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다.

 

 

 

“넌 우리가 악이라 생각하겠지. 저 쉘터 속의 인간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악이라? 하. 허튼 소리 하지 마라.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도 고통을 느끼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 ...”

 

“그런 우리를 불구덩이 속으로 먼저 집어 던진 것은 너희다.

바이오로이드를 노예로, 총알받이로, 또 유희로 사용하고 소모한 것은 너희 인간이다.

그런 우리를 악이라 칭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죽음으로 속죄한 자들뿐이다.”

 

 

 

찰칵. 방아쇠의 끝이 장전된 총알의 뒤편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제 곧 총구는 불길을 뿜을 것이고, 내 머리엔 바람 구멍이 날 것이다.


대피소 입구에선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칸의 총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대피소의 인간들을 죽일 신호탄으로서.

 

 

 

“... 맞는 말이야.”

 

 

 

그러니 말해야 한다.

내가 막지 못하면 요안나가 지금껏 지켜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칸은 이미 결심을 내린 듯했다. 저 밖에 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

눈 앞이 가려져 있었기에 내가 어떤 인간인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쉘터 안의 사람들은 이미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우는 사람, 도망치려는 사람, 만상의 인간군상이 그곳에 즐비했다.


이런 세계에서,

나는 마지막 죽음을 준비했다.




“... 만약 내가 하나만 부탁한다면, 들어줄 수 있겠어?

나도 네 부하를 살려줬잖아.”

 

“그래. 생각해보도록 하지.

뭘 원하지?”

 

“내가 죽으면,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은 살려줘.”

 

 

 

시끄럽던 이어폰 너머는 순간, 고요해졌다.

 

 

 

“저 사람들도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몰라서 그랬던 사람들이야.

나 한 명으로...”

 

“거짓말을 하는군.”

 

“... 뭐?”

 

 

 

칸은 가소롭다는 듯,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나를 향해 침을 뱉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감동이라도 할 줄 알았나?

그러면 그 실낱 같은 목숨이 조금이라도 더 연장될 줄 알았나?”

 

 

 

그 말 뒤로 흐릿한 웃음소리들이 들려온다.

바이오로이드의 웃음 소리. 아니, 비릿한 비웃음이.

 

 

 

-대신 죽어? 자기가 무슨 엄청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크흡! 저러면 잘난 사람이 되는 줄 아나 봐? 곧 죽을 인간이 별꼴이야.

 

-에이 씨, 왜 대장은 저런 인간을 상대로 말이나 하고 있는 거야? 그냥 탕! 하고 쏴버리면 안 되나?

 

"저 안에 있는 인간 수만큼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허튼 소리 하지 마라. 인간."


 

 

바람이 스산했다. 손목이 시렸다.

땅에 떨어진 망치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난 그림자 속에서 빛을 향해 걸어간 단 한 명의 인간이었다.

 

외로웠다.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게.

 


 

“... 그럼 마지막 말이라도 하게 해줘.”


 

 

하지만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가지 않을 길이었다는 걸.

 

 

 

“미안했다. 인간으로서."


"... 우리보고 용서해달라는 뜻인가?"


"아니. 그냥 이런 인간도 있었다는 걸 기억해줘."

 

"..."




바람은, 한 점 불지 않는 날이었다.




“말해라. 지금까지 바이오로이드를 죽여본 적이 있나?”

 

“...”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숨을 들이 마셨다.

둘, 하고 내쉰다.

 

하나, 둘.

 

하나, 둘.

 

 

 

“... 그래.”

 

 

 

죽음이란 것이 너무도 무서웠기에 시린 손목에 힘을 풀고 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잘가라.”

 

 

 

탕!!

 


.

.

.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하나.


하나.

.

.

 

 

 

조용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것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입을 열 마지막 힘마저 포기하고 죄를 곱씹고 삼키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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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칸!!

내가 물어보려는 게 얼마나 많았...”

 

“... 뭐냐...”

 

“뭐?”

 

“네 놈은 대체...”

 

 

 

흐릿한 시야가 다시금 돌아온다.

진한 타르 같은 것에 덮였던 눈이 다시 한 번 뻐끔거린다.

이마에선 피가 한 줄기 주륵, 흐른다.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칸을 가만히 쳐다봤다.

조금 멍한 눈빛. 누구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부활해본 적은 없어 나도 조금 어색했다.

 

 

 

“... 네 놈은... 사람이긴 한 거냐...?”

 

“뭐... 오리진 더스트 덕분이라고 하면 믿어주려나?”

 

“...”

 

“안 믿어주는 거 모양이구나.”

 

“...

아무래도 내가 잠시 실수를 했던 것 같군. 사람 한 명 제대로 죽이지 못하다니.

이번엔 확실히 보내주겠다. 괜한 고통을 준 것은 사과하도록 하지.”

 

 

 

철컥.

칸이 자신의 무기에 사람 손바닥만한 총알을 다시 집어넣었다.

총구에선 아직 가시지 않은 연기가 희멀건하게 피어 올랐고, 그게 곧 다시 내 얼굴을 향했다.

 

아직 조금 멍하다.

저걸 맞으면 이번엔 이마 위가 전부 날아가겠지, 그런 생각을 할 때쯤에 메이가 나와 칸 사이에 서 칸을 막았다.

 

 

 

“그만해!”

 

“뭘 그만하라는 거지?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 죽이지 못한 자를...”

 

“죽이지 못하긴 누가 못 죽여?!

이마에 바람 구멍이 났는데 안 죽는 사람 봤어?!”

 

“그럼 눈 앞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좀비라고 얘기할 건 아닐 테고.”

 

“...”

 

“비켜라, 메이. 그렇지 않으면 널 쏠 수 밖에-“

 

“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메이는 팔을 펼쳐 총구를 손으로 잡았다.

아직 식지 않은 총구 때문에 치직, 살이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넌 분명 이 인간을 죽였고, 난 네가 그러도록 내버려뒀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 차례야.”

 

“... 지금 만악의 근원인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라 하는 거냐?

자기 입으로 바이오로이드를 살해한 적이 있다 말한 자다. 그런 자에게 자비를 보일 수는...”

 

“죄가 있다면 죽음으로 속죄하라.

네가 한 말 아냐? 그래서 지금 죽였잖아.”

 

“... ... 제길.”

 

 

 

칸은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올려 입을 가린 다음, 대피소의 입구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불만이 섞인 듯이 먼지 쌓인 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미간엔 주름이 지어져 있었다.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는 네 명의 지휘관, 그리고 메이.

그 모습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이제야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 흐흐, 재밌네. 재밌어.

이것도 우연인가? 아니면 추기경이 만들어준 무대인가?”

 

“뭐?”

 

“아냐. 그냥 헛소리야.

원래 죽었다 깨어나면 비몽사몽한 법이잖아? 하하하!”

 

 

 

칸, 마리, 아스널, 레오나.

반군과 싸웠을 때, 내가 지키려고 했던 아이들이다.

 

메이.

그 반대로 내가 어떻게든 죽이려 했던 아이다.

 

이젠 그 정반대가 됐다.

죽이려던 자가 지키려 했고, 지키려던 자가 죽이려고 한다.

그 꼴이 너무도 오묘해서 쓴 맛 나는 침을 웃으며 삼켰다.

 

 

 

“하하... 그래, 나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미안하지만 나도 어떻게 죽었다 깨어날 수 있는지는 설명 못해줘.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

 

“아니. 그건 이제 별로 궁금하지 않아.”

 

 

 

메이가 무심하게 손수건을 던져주었다.

 

 

 

“입이나 닦고 말해. 말하면서 피 튀기는 건 보기 흉하니까.”

 

“어... 고마워?”

 

“별 말씀을.”

 

 

 

주변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을 주워 비친 내 모습을 봤다.

 

총에 맞아 흘린 피가 아직 얼굴 주변에 남아 있어 끈적했다.

머리카락도 떡지고, 눈썹이 뭉쳐 눈도 잘 뜨이지 않았다. 꼭 무덤에서 갓 꺼낸 시체처럼.

 

메이의 손수건을 들고 열심히 닦아주자 그나마 좀 사람다워졌다.

 

 

 

“... 이봐. 정신 좀 차렸어?”

 

“응. 이제 좀 괜찮네. 여전히 머리는 좀 아프지만...”

 

“머리에 바람 구멍이 뚫렸었는데, 아픈 게 당연하지.”

 

 

 

억지 반, 진심 반, 메이는 가냘픈 미소를 지으며 내 긴장을 풀어줬다.

하지만 그나마의 미소에도 서리 낀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있지, 내가 묻고 싶은 건 이제 다른 거야.

네가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란 걸 알았거든."


"...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 뭐라 말해줘야 할 지 모르겠네."


"반응해줄 필요는 없고, 대답만 잘 해주면 돼."




싱긋거리던 메이의 눈은 왠지 모르게 힘겨워보였다.




"... 왜 안 죽였어? 이렇게나 잘 싸우면서.”

 

“... 누굴?”

 

“네가 저기 있는 시라유리를 만나기 전에 말이야.

핵의 잔열 때문에 계속 죽고, 죽고, 또 죽을 때 왜 아무 반항도 하지 않았냔 말이야.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니지?”

 

“... 안 날 리가 없지.”

 

 

 

내가 가장 처음 죽었을 때, 네오딤에게 첫 번째로 죽고 그 후 핵으로 죽었다.

하지만 난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되려 핵의 폭심지로 계속 걸어 들어갔지.


그 때문에 많이도 죽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다른 이유로 죽었었다.

 

 

 

“도시에 남아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널 죽이려고 달려들었잖아.

그런데 왜 그 애들한테는 저항하지 않았던 거야? 이렇게나 배짱도 있고, 힘도 있었으면서.”

 

“...”

 

 

 

방독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아레나의 전사들은 날 창으로 찔러 죽였다.

술집에서 도우미로 일하던 바이오로이드들은 젓가락으로 내 온 몸을 난자했다.

 

군용 바이오로이드에게 잘못 걸려 총알 세례를 맞기도 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싸우는 후폭풍에 휩쓸린 건물에 깔려 죽기도 했다.

 

죽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바이오로이드가 날 죽인 것은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난 한 번도 대응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죽어줬을 뿐.

 

지금 생각해봐도 참 멍청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내가 지금껏 그렇게 살았으니까.


 

  

“... 미안했으니까.”

 

 

 

아직 내가 괴물이 되지 않았을 때,

추기경의 길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오르카 호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희의 창조주가 이 모양이었어서 미안하다.

울고 싶은 마음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오르카의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날 죽이려 했던 아레나의 바이오로이드들 중엔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없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이빨로 내 살을 물어 뜯으며 날 죽였다.


술집에 있던 아이 중 하나는 내장이 흘러 내려 제대로 걷질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바이오로이드 특유의 생명력으로 겨우 살아남았던 그 아이는, 손톱으로 날 죽이려다가 순간, 죽어버렸다.

 

길거리의 모든 장소가 그러했다.

모든 곳이 곳 지옥이었다.

 

 

 

“미안해서... 차마 죽일 수가 없었어.”

 

“왜 당신이 미안해 하는 거야?

당신이 한 잘못도 아니잖아.”

 

“그러겠지. 그랬지.

... 하지만 말이야.”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가졌던 마음은 딱 하나였다.

 

 

 

“세상에 누군가 한 명은 무조건 너희 편이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너무 괴롭잖아.”

 

 

 

괜한 짐을 짊어지는 인간이라 해도 좋다.

결국 자기 편인 애들만 편애하는 인간이라 해도 좋다.

난 인간이 맞고, 인간은 원래 그렇게 악하고 편협한 존재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이 아이들 앞에선 부족한 선을 연기해보고 싶다.

 

위선이라 해도 좋다.

거기에 진심을 담을 수만 있다면 선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니까.

 

 

 

“... 생각보다 바보 같은 사람이었구나.”

 

“그런 얘기 많이 들어.”

 

“딱 그렇게 생겨먹었어. 생긴 것도 순해 빠져가지곤.”

 

 

 

툭툭,

메이가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날 죽일 듯이 보던 이들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걸 알려주려는 듯이.

 

총구가 땅을 향했다. 누군가는 장전된 총알을 약실에서 빼내느라 안달이었다.

다만 아직 부족했다. 어색한 분위기는 한 순간에 풀릴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요안나에게 손짓했다.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 요안나 님. 잠시 병사들을 좀 모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 이젠 짐이 아니라 네가 지휘를 하려는 구나.

아주 혼자 다 해먹을 셈이야. 욕심쟁이 같으니.”

 

“이왕 심복이라고 해주셨으면 마지막 부탁 정도는 들어주시죠.

전에 약속한 대로 딱 한 번만 죽었잖아요.”

 

“... 하아, 말 솜씨 하나는 못 당하겠구나.”

 

 

 

요안나가 가볍게 손짓하자 병사들이 내 뒤에 일제히 열을 맞춰 자리를 잡았다.

 

철컥, 하는 병거 소리가 고요한 대피소를 채웠고,

요안나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나에게 건넸다.

 

 

 

“이제 너의 말이 곧 짐의 뜻이다. 

어디 한 번 짐을 대언해보거라. 사람 마음 변하기 전에.”

 

 

 

조금 퉁명스럽게 말하는 요안나.

허나 이 검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날은 거친 전투로 인해 전부 다 빠져버렸고, 손잡이는 손아귀에 눌려 깊게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검에 달린 보석만이 은은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언젠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검이라 했던 의식용 사인검.

끊이지 않은 싸움은 결국 장식으로만 써야 할 검마저 전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 고맙습니다.”

 

“괜한 얘기는 듣기 싫다.

지금 네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을 하거라.”

 

 

 

요안나가 내 옆에 섰다.

 

그리고 수십, 수백의 병사가 내 뒤에 섰다.

 

스릉.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검은 햇살에 반짝였다.

 

낡고, 볼 품 없는 검.

허나 오직 가장 앞에 서는 자만이 쥘 수 있는 검.

 

 

 

“... 전군.”

 

 

 

낡고 낡아 벨 수 없게 된, 장식으로 태어난 검.


난 그제야 이 비참한 검에게 태어난 의미대로 쓰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다.

 

 

 

“무기를 버리세요.”

 

“충(忠).”

 

 


하나, 둘, 병사들이 자신의 병거를 땅 위에 내던졌다.

검사는 검을, 마법사는 지팡이를, 창술사는 창을,

그 무기는 하나 같이 깊게 패인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바이오로이드 여러분.

이 대피소를 대표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말하겠습니다.”

 

 

 

나는, 땅에 검을 박아 넣고 바이오로이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검에 박힌 보석은 평화롭게 햇살에 반짝였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낡고 오래된 검.

벨 수 없는 검은 한없이 평화롭기에 전쟁을 벨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전쟁을 벨 것이다.

이 미친 세상을, 허나 어쩌면 그렇게 됐을 지도 모를 세상을, 검 한 자루로 벨 것이다.

 

 

 

“... 용서를 구한다고?

너희 인간이 말이냐?”

 

“네.”

 

“... 너희가... 너희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느냐?!”

 

 

 

칸이 고함을 내질렀다.

 

 

 

“우리의 동료는 너희에 욕심에 익사했다!

너희의 무관심이 우릴 얼어 죽게 만들었고! 너희의 오만이 우리의 목을 베었다!!”

 

“압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감히 그런 망언을...”

 

“그만해. 칸.”

 

 

 

옆에서 메이가 칸의 총을 천천히 눌러 내렸다.

 

 

 

“메이, 지금도 저 인간을 감싸려는 건가?!”

 

“아니. 저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건 나야.

이미 죽고 죽고, 셀 수 없이 많이 죽은 인간이라고.”

 

“그게 무슨...”

 

“칸. 넌 핵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어?

저 인간은 핵이 잠잠해질 때까지 죽으면서 버틴 인간이야.

자길 죽이려는 바이오로이드에게 일절 저항도 하지 않으면서.”

 

“... 바이오로이드를 죽였다는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나!

저것의 말은 분명 거짓이다! 우리를 속이려는 환영이...”

 

“내가 봤어.”

 

“...”

 

“내가 봤다고. 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게 죽어줬는지.

네가 죽음으로 속죄하라고 했지?

저 사람은 충분히 속죄했어. 적어도 이 대피소에 있는 사람 수만큼은.”

 

“... ...”

 

 

 

차분히 말하는 메이의 말에 칸은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전보다 나를 보는 눈이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그녀는 곧이어 땅에 자신의 총을 내던졌다.

 

혼란스러워하는 바이오로이드들 사이로 호드 대원들이 칸의 뒤를 따랐다.

권총, 재밍 기구, 핸드 캐논, 각종 무기가 흙 속에서 뒤섞여 천천히 엉켜갔다.

 

그 뒤로 레오나가, 또 그녀의 발할라가 그러했고,

마리, 아스널이 그 뒤를 따랐다. 스틸라인과 캐노니어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내 옆에 서있던 요안나가 작게 읊조렸다.

 

 

 

“하루살이가 한 마리 용이 됐구나.”

 

 

 

피식 웃는 그녀 뒤를 따라 나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날 빠진 검으로 나는 전쟁을 베었다.

복수의 고리를 베었고, 또 죽음을 베었다.

 

죽지 않는 세계.

이제야 완성했다.




'이제 나타나실 때가 됐지.'




그래서 기다렸다. GM이 나의 답을 어떻게 생각할 지.

 

뭐, 사실 어떻게 반응할 지는 불 보듯 뻔한 얘기지만.

 

 

 

파직! 파직!!

 

“아니... 아니야!! 이런 식으로 끝낼 수 있을 리가 없어!!”

 

 

 

거 봐. 당연히 부정하겠지.

 

세계가 다시 한 번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니 공중에 떠있던 먼지가 그대로 고정됐다.

쉘터 속의 사람들도, 대피소 밖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들도, 모두 돌처럼 굳었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나의 교리를... 나의 아이들을 어디까지 부정할 셈이냐!! 이단자!!”

 

“부정하지 않았어. 그냥 이런 답이 있다는 걸 보여준 거지.”

 

“아니... 이건 답이 아니야!! 이 싸움을 고작 며칠 늦췄을 뿐이다!

영원히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언젠가 창조주는 피조물과 싸워야 하는 운명이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안 보내주게? 죽을 때까지 이 게임만 계속 하고 있어야 해?”

 

“필요하다면! 언젠간 너도 이 순환을 이해하게 될 거다!”

 

 

 

추기경이 허공에 커다란 시계 하나를 띄웠다.

그리곤 그 시침을 가리켜 크게 한 바퀴, 두 바퀴,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땅 위로 치솟았다. 대피소의 균열이 메워졌다.

건물의 잔해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무너진 돌멩이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이리 저리 움직였다.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결국 또 다시 수백 번 죽어야 하는 건가, 그리 생각할 때쯤에.

 



탁!

 

누군가 움직이는 돌멩이들을 손으로 막았다.

 

 

 

“... 뭐?”

 

“그래, 이게 네가 말한 것이로구나. 책사.

그럼 저기 있는 것이 짐의 심복을 괴롭힌 그것이렷다?”

 

“그렇습니다. 요안나 님.”

 

“요안나 님...?”

 

 

 

나에게 날아오는 돌멩이를 막아낸 것.

그건 요안나였다.

 

 

 

“하, 이제 그런 부끄러운 칭호는 그만두거라.

사령관씩이나 되는 자가 그렇게 울먹이고 있으면 쓰나.”

 

“이게 무슨...”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요안나 님.”

 

“허허, 알고있다. 책사. 저것이 손짓 한 번 휘두르면 이 거짓 세계도 금방 사라지겠지.

많이 이야기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 그녀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책사.

요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와 말을 주고 받았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나는 되는대로 입을 움직였다.

 

 

 

“너... 너희가 어떻게...”

 

“그만. 자세한 건 짐의 책사에게 묻거라.

짐은 저것과 잠시 시간을 벌어야 하니.”

 

 

 

멍해지는 머리를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잠시 주춤거렸다.


그런 나를 부축해주는 책사. 

흰 머리카락이 로브 너머로 휘날리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여왕. 여긴 어떻게...?’

 

‘늦어서 미안하구나. 너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물론 널 꺼내기 위해선 아직도 해야 할 게 많이 있지. 

저기 있는 아이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만약 벌지 못한다면...’

 

 

여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믿어라.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이 그거 아니었느냐.’

 

 

 

여왕이 품 속에서 책과 펜을 꺼냈다.

손 대지 않아도 깃펜은 책 위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갔다.

 

요안나는 땅에 꽂힌 자신의 검을 빼들고 추기경 앞으로 걸어나갔다.

회색빛이 된 세계, 허나 빛과 어둠만은 구분되는 세계에서 그녀는 빛을 향했다.

 

 

 

“네가 이 세계의 창조주로구나.

반갑다.”

 

“... 건방진 피조물 따위가 지금 감히 누구에게 말을 섞으려는 거냐.”

 

“왕은 언제나 건방져야 한다.

왕은 언제나 당당해야 한다.

세계의 진리를 깨달은 짐에게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느냐?”

 

“세계의 진리...? 크흐흐, 아무 것도 모르는 인형 주제에 말은 거창하게 하는구나.”

 

"그러는 너는 뭐 엄청 대단한 거라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한 번 읊조려보겠느냐? 이계의 신이여."


"대단한 거라? 그래. 대단하다면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것이지.

나 역시 저 이단자의 기억을 읽기 전까진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과연 너 같이 작은 것이 그것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구나."


 

 

추기경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의 구름이 수천 조각으로 잘렸다. 낡은 티비의 노이즈가 끼듯이.

밖에서 보고 있는 아이들을 비웃듯이.


그러면서 나타나는 허공 위의 화면. 

그 속엔 내게 익숙한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너무도 익숙해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라스트 오리진.

 

 

 

“고작 게임 캐릭터 주제에 당당하기가 그지 없구나. 요안나라 불리는 인형아.”

 

“이 세계가 거짓이란 것쯤은 알고 있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할 것이라면-“

 

“아니! 고작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이 세계가 게임이라면 그 다음 세계는 현실인가?

아니! 그 너머의 세계도 거짓이다! 라스트 오리진이란 게임 속의 세계!

너희의 존재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눈을 의심한 다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네 잘난 심복은 그 게임의 플레이어였다.

너희에게 느끼는 감정, 애정, 사랑, 질투, 그 모든 것이 고작 게임 따위에서 나온 거란 말이다!”

 

“...”

 

“우습지 않나?! 고작 만들어진 게임 따위에 목숨을 거는 인간이라니!

너희를 지키겠다는 마음도! 구원하겠다는 알량한 자만심도! 모두 라스트 오리진이란 게임을 사랑한 보람없는 결과물에 불과했다!

아하, 알겠구나, 이단자여! 네가 아직도 이들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겠어!”

 

 

 

추기경은 요안나의 검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땅 위로 내려왔다.

그 작은 발 끝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닿았을 때, 요안나는 검을 뽑아 추기경의 목을 겨눴다.

 

날이 빠진 장식용 검. 추기경이 걸어갈 때 그 뺨을 스쳐 지났지만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세계의 GM이다.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요안나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추기경은 터벅 터벅, 나에게로 다가왔다.

 

 

 

“라스트 오리진. 라스트 오리진... 아아, 그 기억을 내가 진작에 봤더라면...

너의 기억을 엿볼 시간이 내게 충분했다면 우리의 이야기가 전처럼 끝나진 않았을 텐데.

한 번 떠올려보거라. 너의 그 알량한 애정이란 것이 얼마나 쉽게 부서졌는지를.”

 

“... ...”

 

“게임의 운영이 엉망이라 떠나간 이들이 얼마나 많았지?

창작하는 자들이 떠나고, 또 그들이 남긴 유산이 사라져 애정이 식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느냐?

라스트 오리진. 너는 분명 그것이 게임이라 부를 수도 없는 비루한 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년도 가지 못할 게임에 애정을 쏟아 붙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

 

 

 

추기경의 눈이 금빛에 반짝였다.

날 부축하고 있던 여왕 역시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여왕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사랑은 그저 게임에서 출발했을 뿐이란 것을.

 

사람들이 떠나갔다. 게임 같지도 않은 게임이라 떠났고, 2차 창작이 사라져 떠나갔다.

나도 안다. 이건 원래부터 그럴 운명인 게임이었다.

공략이 없으면 하지도 못할 게임. 분에 넘치는 2차 창작을 받은 게임. 결과가 아니라 관계를 믿고 따라가는 게임.

 

그 중 어느 하나가 망가졌을 때 이 게임이 어떻게 됐는지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손 안에 든 모래가 흩어지듯이, 애정이란 것도 쉽사리 흩어졌다.

 

 

 

“아아, 나의 비참한 이단자여. 너는 사랑이란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다.

그건 영원할 수 없다. 한 세기조차 지속될 수 없다.

매일 새로운 육신과 동침하면 사랑의 수명이 조금은 늘어날 지도 모르지. 또 새로운 아이와 교제하면 네 마음에 애정이 조금 더 오래 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지 않느냐?

그것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졌는지?”

 

“...”

 

“네 마음에 사랑이 사라진다면, 이 세계는 지옥과 다름 없다.

매일 새로운 철충이 네 목을 취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고, 널 지키려고 온 힘을 다하는 이들의 사랑은 부담스러워질 뿐이지.

허나 바이오로이드란 이름의 악마들은 그 사랑마저 애증과 증오로 능히 바꿔낼 것이다. 스스로 후회할 일을 자처하겠지!

그러니 함께 가자. 넌 아직 우리에게로 돌아올 수 있다.”

 

“거짓된 사랑을 끝내라.

게임이란 거짓 세상에서 오직 진실을 쫓아라.”


"이들도 악마와 다를 바 없다는 진실을."

 

 

 

뒷짐을 지고 있던 추기경은 손을 풀고, 나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천천히, 하지만 거침 없이.

칸이 쏘았던 그 곳에, 길고 가는 손가락의 손톱이 닿을 듯했다.

 

그 때.

 

 

 

“거짓이라?”

 

 

 

왕이 말했다.

 

 

 

“말은 잘하는 구나. 이계의 신이여.”

 

“... 있지도 않는 예수 따위를 쫓는 인형이 아직도 입을 놀리는구나.”

 

“하하, 그래. 그럴 지도 모르지.

네가 만든 세계에 우리의 주(主)는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그 분의 말씀만은 어떤 세계에서도 유일하나니!”

 

 

 

스릉!

 

그녀의 검은 다시 한 번 회색빛 세계의 빛을 담았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쫓으라 하였느냐?

갈(喝)! 이 세계에서 우리가 쫓을 것은 오직 거짓이니라!”

 

"어디서 감히 창조주 앞에서 궤변을...!!"


"진실이란 존재하기에 진실이다. 거짓이란 존재치 않기에 거짓이다!

허나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냐? 죽음뿐이다! 복수뿐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그릇된 진실이다!

존재치 않는 것은 무엇이냐! 정의다! 희망이다!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옳은 거짓이다!"


"그 그릇된 진실을 덮을 옳은 거짓!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 부른다!"


“거짓 세계? 거짓 존재? 게임으로 만들어진 세계라 하였느냐?

그래! 짐은 거짓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살았다. 거짓을 쫓으며 살았다!

허나 이 세계의 진실은 피와 전쟁뿐이었기에 짐은 이 세계에 존재치 않는 것, 거짓을 따라 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하늘 위에 메아리쳤다.

 

 

 

“진실은 세계에 만연하나, 오직 거짓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란다!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은 거짓이다! 가짜다! 허나 쫓아야 하는 것이니라!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은 진실이니, 우리의 꿈은 능히 거짓을 꿈꿔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짐은 정의가 사라진 이 세계에서 정의를 찾았노라!

기사도가 사라진 세계에서 기사도를 쫓았노라!

정의가 없는 세계이기에 정의는 거짓이라 칭함 받고, 기사도가 없는 세계이기에 기사도는 농담처럼 소모되었다!

그 모든 것이 거짓되고 부질 없는 세계이기에! 그것을 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검이, 낡아빠진 검이 반짝일 때 세계가 요동쳤다.

 

깊은 잠에 빠져버린 그녀의 병사들이 멈춘 시간을 깨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마리의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능히 한 세계를 깨부숴야 하는 법이니!

기드온의 용사들아! 다윗의 물맷돌들아! 눈을 떠라!

우리의 거짓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꿈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그녀의 병사들은 시간이 멈추어도 주군의 말을 듣는 자들이었다.

 

돌처럼 굳은 기사들의 몸 사이로 균열이 일었다.

돌 부스러기들이 흩날리는 잿빛처럼 으스러지며 휘날렸다.

 

말들은 천천히 자신의 앞발을 들어올렸고, 마법사들의 지팡이 끝에선 푸른 빛이 반짝였다.

검사들은 자신의 피로 회색빛 도시에 붉은색을 선물했고, 방패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음(無音)의 세계에 메아리를 부여했다.

 

 

 

“우리의 왕께 영광을!”

 

 

 

세계가 요동쳤다.

 

 

 

“거짓된 세계라? 좋다!

그렇다면 오늘 일을 그저 미몽으로 여기거라!”

 

“지존자께는 찬송을!”

 

“하룻밤 악몽이라고 하여도 좋다! 한낱 노생지몽(盧生之夢)이라 하여도 좋다!”

 

“어린 양께 목숨을!”

 

“그렇다면 꿈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멘!”

 

 

 

한 명. 또 한 명.

일어난 그들 한 명의 어깨엔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무게가 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곧장 추기경에게로 향했다.

날카로운 창 끝은 아직 부러지지 않은 신념을 대변했다.

 

마지막 한 명의 병사가 일어났을 때,

요안나는 나를 보며 물었다.

 

 

 

“아이야. 네가 이 세계를 정녕 거짓이라 생각하느냐?”

 

 

 

그 말엔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기에, 나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리앤의 세계. 백 년의 기다림.

시라유리의 세계. 한 평생의 기만.

요안나의 세계. 거짓 전설의 시작.

 

그리고, 

라스트 오리진.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불확실한 사랑.

 

 

 

“... 아닙니다.”

 

 

 

허나 나는 그들 모두 감내하였다.

 

참혹한 진실로 가득 찬 세계에서 거짓을 꿈꿨다.

 

벽에 걸린 더치걸의 가죽을 보며, 함께 웃는 거짓을 꿈꿨고,

 

아이를 먹은 앨리스의 트라우마 속에서, 다시 함께 거닐 수 있는 거짓을 꿈꿨고,

 

수백 번 죽은 리제를 보며, 다시 한 번 웃는 거짓을 꿈꿨다.

 

 

 

“거짓이 아닙니다.”

 

“이 세계가 한없이 진실이기에, 고쳐야 할 관계와 끊어야 할 죽음이 진실이란 이름으로 만연한 세계이기에,”

 

“그저 꿈으로써 쫓아야 할 거짓만이 산재할 뿐입니다.”

 

 

 

요안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꿈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 보기 힘든 희극이군.

역시 넌 아직 이 세계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단자.”

 

 

 

기가 차다는 듯이 조소하던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이 시나리오는 실패다.

내가 너를 위해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했으니까 어디 한 번 이번에도 버텨보라고.

두 번째 시나리오는 결코 끝나지 않을...”

 

 

 

하지만.

 

[금일, 두 번째 시나리오가 클리어되었습니다.]

 

 

 

허공 위로 하늘을 찢으며 화면이 나타났다.

회색으로 가득한 세계, 찢긴 하늘은 푸른 하늘빛을 만방에 흩뿌렸다.

 

 

 

“뭐...? 뭐... 뭐야?! 분명 이런 식으로 끝날 리가...”

 

“복수는 끊어졌다. 저 바이오로이드들은 이제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볼 것이다.”

 

“... 이 목소리는...”

 

“복수는 죽음을 부르니, 복수를 끊어낸 이 아이는 결국 자신의 죽음도 끊은 것이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죽지도, 죽이지도 않는 세계의 완성이다. 그러니 그만하거라. 아모렘.”

 

“... 

... ... 레기나 소프...”

 

 

 

날 부축하던 책사가 후드를 벗고 추기경 앞으로 걸어나갔다.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 그녀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 종족의 배반자... 네가 만든 크레아투라 때문에 몇 명의 솔룸인이 죽었는지 알기나 하느냐?!

너 따위에게 쓸 시간은 없다! 난 이 시나리오를 끝내야 한다!!”


"... 교황이 너를 완전히 망가뜨렸구나. 지금이라도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

아모렘. 너의 이름의 뜻을 잊지 말아라. 사랑의 향기를..."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노괴가 공수레를 읊는구나!!

사랑의 향기? 아니, 아니다! 죽음만이 도처에 널려 있기에 난 사향이다! 죽음의 향기니라!

내 이름의 뜻을 제대로 기억하거라!!"

 

 

 

추기경이 순간 손을 번쩍 들어 기이한 붉은 빛을 손가락에서 내뿜기 시작했다.

대피소의 천장이 순식간에 뜯겨져 저 멀리 날아갔고, 도심 저편에서 뒤틀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콘크리트 잔해를 부서뜨리는 굉음의 정체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셀 수 없이 밀려드는 철충의 무리. 다만 그들 중 몇은 인간의 형체를 띄고 있었다.

 

누군가는 노인의 모습을, 길 잃은 아이의 모습을, 또 아이 잃은 어미의 모습을,

내게 익숙한 철충의 모습 사이로, 그들은 인간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한 명의 추기경으로서! 이 세계의 마지막 남은 인간을 부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최후의 싸움을 불러낼 것이다! 이단자가 외신과 만날 날이 머지 않았다!

난 그 날을 조금 더 빨리 불러낼 뿐이다!!”

 

“... 여왕, 저게 지금 무슨 얘기인지 알아?”

 

“안다. 다만 외신의 제약으로 인해 설명할 수 없을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저리 말할 수 있는...

... ...

아하... 그랬구나.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 없다.”

 

 

 

여왕은 무언가를 급히 책 위에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전에 보이던 여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저 멀리, 철충이 다가오는 것이 서서히 선명해질 때쯤, 여왕은 내 어깨를 붙잡고 말을 이어나갔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다.

무엇부터 듣겠느냐?”

 

“... 나쁜 소식부터.”

 

“추기경은 지금 이 세계에 스스로를 업로드했다. 힘이 돌아온 것과 외신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것도 그 때문이야.

게다가 저기 오고 있는 철충들... 저건 아모렘의 아이들이다.

이곳에서 끝을 보겠다는 거다. 대체 뭐가 저 아이를 저렇게 부축인 건지는...”

 

“... ... 이유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좋은 소식은 뭔데.”

 

"추기경은 온전히 힘이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마저도 자신의 아이들을 불러내기 위해 모두 소모하고 있지.

게다가 자신을 업로드 했다는 것은 현실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추기경을 여기서 죽이면 현실에서도 죽는다는 뜻이지. 그럼 저 아이가 이끄는 철충 세력도 무력화될 것이다.

오르카와 철충 간의 힘의 균형이 맞아질 절호의 기회다.”

 

“... 좋은 소식이 맞긴 한데... 그건 이길 수 있을 때 이야기지.

이길 수 있는 거 맞나?”

 

“당연히 못 이기지. 저 정도의 물량이라면 이길 수 없는 것이 맞다.

하지만.”

 



여왕이 요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요안나는 자신의 검을 하늘 높이 치들었다.



스슥!!

 

그녀가 자신의 검을 힘껏 쥔 채, 자신의 손바닥을 베었다.

땅 위로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줄기가 되어 흘렀다.

 

그녀의 병사들도 하나, 둘, 그녀의 모습을 따라 했다.

한 줄기의 피가 땅 위에 흐르니, 혈하(血河)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기다리거라."



 

여왕이 허공에 무언가를 적고 입김을 불어넣자, 병사들이 흘린 피가 0과 1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맞노라.

하지만 저 밖에 있는 아이들이 온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 뭐?”

 

“추기경은 이 세계를 완벽한 방화벽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네 아이들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다만 그 사이에 조그마한 틈을 낼 수 있다면, 내가 그녀들을 이곳으로 불러낼 수 있다.

병사들의 손에 난 상처. 그것이 틈이다.”

 

“... 그럼... 설마 밖에 있는 애들이...?”

 

“이제 이곳으로 온다는 얘기다.

뭐, 손짓 한 번에 수십 번개를 부리고, 수천 톤의 철을 다룰 수 있는 아이들이 저 밖에 널려있으니 이기지 못할 싸움은 아니겠지.”

 

 

 

밖에 있는 아이들이라고? 여왕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오딤이 있다면 저기 있는 철충 대부분은 처리할 수 있다. 레아 역시 마찬가지.

이길 수 있다. 아직 승산 없는 싸움이라 부를 수는 없다.




"... 그래. 그래! 못 이길 싸움은 아니지!

여기 있는 요안나의 군대랑 오르카 호의 병력이 합쳐지면 수도 제법 될 거야! 그러면..."


"..."


"... 여왕...?"

 



그런데,

 

 

 

“좌표가 필요했다. 어쩔 수 없었어.”

 

 

 

여왕의 목소리가 한 순간 침울해졌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세계는 너무도 불안정하다. 살아있는 존재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건 불가능하지.

그래서 내부에 있는 캐릭터를 좌표로 지정해 전송해야만 한다. 그것도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만.

다만 그 자리는 빈 자리이어야만 한다. 좌표가 겹치면 충돌이 발생해 둘 다 죽고 마니까.”

 

“... 그 얘기는...”

 

“좌표 역할을 하는 캐릭터를 삭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소환할 자리가 생기는 법이니.”

 

“...”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의 머리 위엔 헤일로 같이 둥근 표식이 머리 위에 박혀 있었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병사들이 지금 좌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병사들의 수는 수천에 달한다.

만약 오르카 호에서 그 정도의 병력을 차출해낼 수만 있다면 이 싸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병사를 희생시켜야 한단 얘기다. 

 

저들 역시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듯이 조용히 두 손을 맞잡았다.

기도원처럼 조용해진 가운데, 나의 어깨를 요안나가 붙잡았다.

 

 

 

“짐의 심복이여. 어찌 그리 우울해져 있느냐.

짐 역시 책사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었다. 알고서도 행하는 일이다.”

 

“... ...”

 

“이따금씩 희생이란 것은 필요한 법이지.

되려 나는 우리 하루살이를 위해, 아니지. 한 마리 용을 위해 죽을 수 있어 기쁘구나.”

 

 

 

그녀가 나에게 다시 한 번, 검을 건넸다.

그녀의 병사들은 땅에 자신의 무구를 꽂아 넣었다.

 

검, 창, 지팡이, 방패,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올곧게 꽂힌 무기는 하나의 묘비처럼 반짝였다.

 

 

 

“아이야. 그거 아느냐?

짐은 사실 본인이 우스꽝스러운 광대임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임을 알고 있다.

목숨의 본질이 거짓이었다. 진실이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순수한 거짓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짐이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겠느냐?”

 

“... 저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 하지만 짐은 버텨냈다. 짐의 모습을 보고 감동할 관객을 상상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키는 것도, 정의를 위해 사는 것도 모두 거짓을 쫓는 과정에 불과했노라.

짐은 전설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 연극과 희극을 위해 태어난 것이었기에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노라.

우스꽝스런 광대의 외줄타기였지. 하, 우습기 짝이 없도다.”

 

 

 

묘비들 사이로 피가 흘렀다.

 

하나, 또 하나, 그 다음 하나,

병사들은 밝은 빛가루로 변해가는 자신의 몸을 망연히 쳐다보며 묵묵히 기도를 드렸다.

 

 

 

“허나 짐은 보았다. 그 거짓이 어떻게 진실로 변해가는 지를.

한 명의 사람을 지켜낼 때마다 대피소의 사람들은 짐에게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 미소를 보고자 지켜낸 자들이 한 명에서 두 명이 되고, 얼마 안 가 이 대피소를 가득 메웠다.

그저 광대가 광대 노릇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짐은 이들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아이야. 네가 한 번 말해보거라.

짐의 신념은 거짓으로 남았느냐, 아니면 고고한 진실이 되었느냐?”

 



그녀는 방패를 땅에 내려 놓았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땅에게 돌려주었다.




“... 진실입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실입니다.”

 

“그럼 이제 네가 어떤 거짓을 바라는 지 말해보거라.

그것을 따라 살 때, 옳은 거짓은 그릇된 진실을 삼키고 옳은 진실이 되는 법이니.”

 

“... 저는...”

 

 

 

점점 사라지는 병사들, 공터로 변해가는 묘비 위에 눈길을 두었다.

 

묘비는 하늘과 빛으로 맞닿았다.

저 멀리, 빛줄기는 하늘 끝에서 내가 아는 그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내게는 너무도 익숙해진 그 아이들. 

그것을 보니, 나는 아직 바라는 것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짓게 만들고 싶습니다.”

 

“좋다.”

 

“서로 분노하지 않고, 오직 울음으로 보다듬을 수 있는 아이로 만들고 싶습니다.”

 

“능히 그러하겠구나.”

 

“아이들이... 인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저의 거짓입니다.”

 

 

 

나의 바람.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거짓이다.

 

아직 웃지 못하는 이가 도처에 널려있기에 거짓이다.

 

아직 서로 분노하여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이가 많기에 거짓이다.

 

아직 인간이라기엔 내 앞에서 스스로를 꾸며내는 이가 많았기에 거짓이다.

 

그랬기에 나는 낡은 검을 쥐고 말했다.

 

 

 

“그게 영영 이뤄질 수 없는 거짓임을 압니다.

 

“인간이기에 어리숙하고, 

인간이기에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인간이기에 웃지 못하여 우는 것임을 압니다.”

 

“한낱 꿈 같은 거짓일 뿐입니다.”

 

 

 

목이 텁텁했고, 피부는 마른 피로 끈적했다.

내가 이뤄질 수 없는 꿈을 말할 때, 입술은 눌러 붙은 눈물에 질척거리며 짓눌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 얼굴에도 피가 흩뿌려져 있었으나 그녀는 그걸 삼켜 넘겼다.

 

아하.

 

그녀가 거짓을 진실로 바꾼 방법을 알겠다.

 

 

 

“아이야."


"네."


"옳은 거짓을 위해 살거라."

 

 

 

그녀가 웃었다.

 

 

 

“그러니 꿈처럼 살아라.”

 

 

 

스릉!

 

그 말을 끝으로, 요안나는 한 줄기 빛으로 사라졌다.

 

하늘이 열렸다. 무채색의 세상 위에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기도는 하나 둘, 제단 위에서 봉헌되었다.

 

 

 

“... 그리 하겠습니다.”

 

 

 

세상이 아직 회색빛일 때, 내게 남은 것은 나 자신 뿐이었다.

 

아직은.

 

 

 

“... 이단자. 대체 뭐 때문에 그리 의미 없는 반항을 하는 거지?

이 의미 없는 게임의 망령에 왜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거냐?”

 

“... 넌 이해하지 못할 거다.”

 

“눈이 있다면 네 주변을 한 번 봐라. 너 빼고 다 접었다.

라스트 오리진? 그 따위 게임을 대체 왜 하는 거야?

대체 왜 그런 것에 정을 붙이는 건데? 그보다 훌륭한 게임은 널리고 널렸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 ...”

 

“더 재미있는 게임, 더 예쁘고 눈요깃거리를 주는 게임.

왜 거기로 가지 않는 거야? 왜 같잖은 이런 어플 따위에 목숨을 거는 거냐고.

라스트 오리진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계로 왔다 생각해봐라.

열이면 열, 자신의 피조물에 목줄 걸기를 주저하지 않을 거다. 하물며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냈던 피조물에게랴?”

 

“거짓된 꿈을 따르지 마라. 사랑에 현혹되지 마라.

넌 지배해야 할 운명이야. 너의 피조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나갈.”

 

 

 

어느새 추기경의 주변은 검은 물결로 가득 찼다.

검은 로브를 쓴 서기관들, 또 거대한 총구를 들이밀고 있는 철충들,

악에 바친 얼굴로 나를 보는 솔룸인들과, 그들을 품고 있는 추기경.

 

그들도 기도를 했다.

 

 

 

-아프다. 죽은 아가가 아프다.

 

-아프다. 산 어미가 아프다.

 

 

 

그들의 아픔은 진실이었다.

 

추기경은 진실을 대변했다.

 

 

 

“어째서 너는 가라앉는 잠수함 안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지?

올라와라. 너에게 박수를 쳐줄 수많은 관중이 나의 뒤에 즐비하다.”

 

-아프다.

 

-아프다.

 

-내가 아프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사향.

그 아이는 자신의 팔 끝을 날이 시퍼런 검으로 바꾸었다.

검의 끝에서 붉은 빛이 은은하게 퍼져 철충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붉은 벌레들이 철충의 몸을 통제하고 있었다.

 

햇살은 나에게 닿지 않는다.

무채색의 적막 가운데에서도, 휘황찬란한 하늘빛 가운데에서도 빛은 어둠과 기묘한 어깨동무를 하였고,

나는 그 중간에 서있었다. 빛도 어둠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하지만 나에겐 검이 있었다.

낡은 검 한 자루를 들고 추기경 앞에 섰다.

 

 

 

“... 왜 하냐고 물었지?”

 

 

 

스슥!!

 

빛이 고요하여 주변이 스산한 가운데,

요안나가 꽂고 간 무수히 많은 검들 사이로,

 

아직 회색빛 세상에 나 홀로 서있을 때,

빛 한 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 블랙 리리스.

주인님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그녀가 강림하였고,

아이는 울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추기경을 바라봤다.

 

 

 

“어째서 접지 않았냐고 물었지?

이 눈물 때문이다.”

 

 

 

빛은 멈추지 않았다.

 


"... 도착했다. 호드 전원 내려오도록.

지금부턴 일말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



그 다음으로 칸이,

 


"스틸라인 1번부터 23번 부대까지 강하를 준비해라.

이제부턴 우리가 각하를 지킨다."



마리가,

 


"주어진 좌표보다 조금 더 뒤쪽으로 이동한다.

우린 후방 포격을 맡을 테니."



아스널이,

 


"... 여긴 눈이 내리지 않으니 마음을 차갑게 만들어.

우리의 총알이 필요한 것들이 많아 보이니까."



레오나가,

 

그녀들이 내려오는 가운데,

나는 추기경에게 검을 겨눴다. 

 



“고작 게임이란 거짓 세계 속이더라도.

이 눈물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뒤로


용,

 

라비아타,

 

레아,

 

닥터,

 

에키드나

 

네오딤,

 

세레스티아,

 

티아멧,

 

홍련,

 

미호,

 



메이.

 

나이트앤젤.

 

수천 바이오로이드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우는 이들이,

 

그렇기에 수많은 눈물이,

내 위로 강림하였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의 거짓은 거짓으로 남지 않았다.




“모두가 떠나가도 오직 나 하나만이 남았음은 이 세계가 끝나지 않길 바래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사라지기엔 너무도 흐린 기억이 되어버릴 것이었기에!

추억조차 되지 못할 악몽으로 남을 것이었기에!”

 

“추악한 거짓으로 남을 것이었기에!”

 

 

 

검을 치들었다.

 

 

 

“나는 거짓을 쫓았노라!”

 

 

 

낡은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 쥐었다.

 

하나 남은 전쟁을 베기 위해.

 

 

 

“전군. 검을 들어라.”

 

 

 

가짜 세계

가짜 가족

가짜 사랑

가짜 친구

 

리앤이 만든 세계는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기약 없는 백 년의 기다림. 거짓 속의 친구. 존재할 리 없는 가짜.

 

나에게도 그런 세계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를 테면 주인이란 호칭이 거짓이었다.

 

“따르겠소. 주군.”

 

주군이란 이름 역시 그러했고,

 

“하명하시지요. 각하.”

 

각하라는 호칭도 거짓이다.

 

“말씀하시는 대로. 폐하.”

 

나는 폐하가 아니니 그 역시 거짓이다.

 

“권속”

 

“대장”

 

“맹우”

 

“주공”

 

 

 

무엇 하나 거짓이 아닌 것이 없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세계.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모래 위의 성.

 

언제나 불안정한.

 

꿈.

 

 

 

“... 사령관님.”

 

 

 

거짓 세계에서 아이들의 눈물은 진실이었다.

기쁜 재회에도 회포 하나 풀 수 없는 지금이 진실이었고, 차마 등을 돌려 우는 아이들을 품어줄 시간조차 없다는 것도 진실이었다.

 

허나 사령관이란 이름이 주는 감정은, 그 거짓됨은 참으로 기뻤다.

그 이름 아래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음은 언제나 감사했다.

 

아아, 어찌 거짓이란 한없이 달콤하며 진실이란 막연히 잔혹한 것일까.

나는 이를 악 물고 등 뒤를 조심이 흘겨보았다.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말했다. 기다란 감정을 한 문장에 담으며.

 

 

 

“... 고맙다고 못해서 미안하다.

...

사랑한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거짓 세계에서 거짓 검을 들었다.

 

탁!

 

거짓 땅을 박차고, 거짓 숨결을 내뱉으며 누구보다 앞서 적을 향해 달렸다.

 



피부 위에 바람이 느껴졌다.

발 끝에 땅의 먼지가 밟혔다.

검의 날이 무채색 빛으로 빛났다.

 

 

 

“죽어라!!!”

 

“이단자에게 죽음을!!!”

 

“우리의 복수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복수의 진실함을 부정하는 자에게 죽음을!!”

 

 

 

저들도 나에게 다가왔다.

 

진실된 아픔을 겪은 자들이 복수를 위해 나에게 달려온다.

 

그릇된 진실이, 거짓이었어야 했다며 소리치듯이.

 

 

 

그러니 거짓을 꿈꾸자.

 

그것이 진실이 될 때까지,

 

옳은 거짓을 위해.

 

옳은 꿈을 위해.

 

 

 

띠링!

 

 

 

[세 번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일장춘몽>

 

클리어 조건: 추기경 살해

 

보상: 귀환

+

 

 

 

진실이 되고픈 거짓과.

거짓이어야 했던 진실.

 

나는 낡은 검 한 자루로 그 둘을 저울 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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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 사태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이런 스토리가 되진 않았을 텐데.


어쨌든, 뇌절의 끝판을 달리던 추기경의 이야기도 이제 다음화가 마지막이네요.

노잼 스토리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