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났다.



레모네이드 세력은 규합되어 오르카 호 세력에 합류하였고,


그 많던 철충들은 씨가 마르고 보이는 족족 도망부터 가버리는 겁쟁이가 되었으며,


별의 아이는 철충들이 패배함과 동시에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인류 멸망 후, 내가 이끄는 오르카 호에, 세계에 평화가 다시금 찾아왔다.


나의 다음 목표는 간단했다. 여러 명의 닥터를 추가 생산하고, 그 아이들의 기술력을 이용하는 것.


추가 생산은 닥터가 항상 노래부르듯이 말하던 '기술적 특이점'이 발현될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했을 때, 내가 내린 첫 번째이자 마지막 명령은....



...신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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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은 남반구의 어느 섬.


내게 있어 많은 휴양지 중 한 곳으로, 아담한 오두막 하나, 창고 하나로도 꽉 찬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작은 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섬에 특히 애착이 간다.


정확히는, 이 곳을 관리하는 총 지배인과 같은 인물---


"끄악"


"낚싯대 여깄습니다, 주인님."


바닐라 A1. 줄여서 바닐라라고 불리는 '바이오로이드였던' 이녀석 때문이다.


그녀는 상당히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로, 내면의 감정보다는 겉의 가시를 더욱 드러내는 타입의 여자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지휘관과 주요 인사들을 제외한 보통 바이오로이드 치고는


인간에 준하는 수술을 굉장히 빨리 받은 편에 속하는데, 아마 저 성격을 더욱 잘 숨길 수 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녀가 애착이 가는 이유, 간단하다.


"낚싯대는 던지는 게 아니잖니?"


"크흠. 실례, 어디서 얼굴이 오징어같다는 표현을 쓴다고 들었기에, 그저 농을 던진 것 뿐입니다."


"그럼 넌 내가 못생겼다는 소리야?!!"


재밌으니까.


"읏..농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보더라도, 내가 급발진하듯 그녀의 어깨를 꽉 잡으니 흠칫 놀라는 행동은 물론,


애써 고개를 돌리고는 있지만 죄책감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더 그녀를 놀리고 싶어진다.


"저번에 나랑 했을 땐 너무 멋지다고, 주인님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그, 그 얘기가 왜 지금 나오는 거에요?!"


이렇게 얼굴이 벌게지며 고개를 정면으로 홱 돌리며 부정하는 모습이, 놀리기 참 좋다.


특히 그 수술을 받고 나서는 감정표현이 더 풍부해진 듯 하다.


"..아니면, 설마 장난을 치시는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으악! 너! 방금 내 아들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런데 갑자기, 바닐라의 목소리에 한기가 풍겨오더니


내 아랫도리에 불길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고자가 된 몸이야 갈아끼우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무섭다고..


본능적인 공포도 있지만, 지금은 이 신체가 제일 마음에 든단 말이지.


"흥, 장난에 더 짓궂은 장난으로 받아치셨으니, 응당 받았어야 할 업보입니다."


어쨌든,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한 닥터들이 만들어낸 기술로, 바닐라는 인간이 되었음에도 계속 이렇게 내 시중을 들고 있다.


뭐 인간이 되었다 한들 기본적으로 바이오로이드는 피조물인지라, 완벽한 인간과는 달리 바이오로이드의 특징들도 남아 있다.


더딘 노화를 대표적인 예시로 생각하면 된다.


"..아, 아무튼 하려던 거나 계속 하시죠."


"안그래도 그럴려고 했어."


그렇게 나는, 낚시용 벤치에 앉아 낚싯대를 던졌다.


......


여러 매체에서, 낚시에 대해 이런 얘기가 자주 나오곤 한다. 낚시는 나 자신의 싸움이라고.


참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낚싯대를 던진 지 10초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느껴지는 이 지루함.


금방이라도 다시 바닐라를 놀리고 싶어진다.


그래도 이번에는 낭심을 걷어차이는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 조금은 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볼까.


"...그러고 보니, 벌써 많은 일이 일어났네."


"그러네요. 주인님께서 인류 재건을 선포한 지도 3년이 지나갔으니."


"다른 애들한테 뭐 들은 건 없어?"


"가끔 익스프레스님께 주문받은 물건을 받을 때 몇 가지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그래. 벌써 내가 인류 재건을 선포한 지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잠시 자리에 물러나 한 발짝 멀리 그녀들을 관찰하고 있다.


즉 이렇게 낚시를 하는 것도 그 맥락 중 하나라는 말씀.


몇몇 큰 문제야 지휘부에서 내게 다이렉트로 메시지를 꽂아주겠지만,


사소한 문제들이 훨씬 많을 테니,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최고니까.


절대로 그동안 뭐 빠지게 움직였으니까 쉬려고 내뺀 게 아니다. 절대.


아무튼, 바닐라는 익스프레스에게 전해들은 몇 가지 이야기를 말해줬다.


아시아, 특히 멸망 전 중국 대륙은 아직도 철충 잔존세력들을 소탕 중이라는 것,


체르노빌, 후쿠시마를 포함한 방사능에 오염된 지대는 격리 조치 후 정화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것,


그 외에도 알파와 감마를 제외한 레모네이드들이 나를 두고 암투를 벌인다던가,


지독한 인간혐오에 걸린 무소속 바이오로이드 집단이 구 인류의 문화재를 훼손한다던가..응?


"...이거, 생각보다 큰 사안들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오르카 호 애들이 나한테 보고를 해준 적이 언제였지?


어제? 1주일 전? 한달? 1년?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나야 하는데!! 나야 할 텐데!!


설마 얘네들 혹시..?


"...나, 또 일에서 해방당한 거야..?"


"..아마도요. 기둥서방님."


안 돼!!! 제발!! 제발 하나님!! 아 아니 아자젤..아니, 빛이었나..? 누구든!


녀석들..또 나를 어떻게든 쉬게 하려고 이런 짓을..! 마음은 고맙지만, 고맙지 않아..


어쩐지 알파와 아르망이 날 너무 쉽게 보내준다 했다. 이런 제기ㄹ..어푸후룽훓!!!


"......"


나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바닐라는 타이밍 좋게도 대야에 담긴 미끼통을 들고는 내 얼굴에 직격시켰다.


"무슨 생각하시는지는 대충 알 것 같지만, 그런 못난 얼굴은 집어치우시죠"


"...고맙다."


"뭘요."


...그래, 내 얼굴에는 떡밥과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있긴 하지만, 덕분에 머리가 조금은 차분해졌다.


뭐..스스로 생각해 봐도, 엄청 고생하기는 했잖아? 솔직히 눈뜨자마자 웬 아가씨들이 살려달라고 비는 걸 덥석 받아든 것에서부터


그녀들, 나아가 지구를 구하긴 했으니.


하여간 이놈의 일 중독 같으니라고. 잠시라도 나를 편하게 할 생각 따윈 없는건가?


"흠흠..아무튼, 별 일은 없는거지?"


"글쎄요. 암투 건에 관해서는 여러 소문들이 돌고 있더군요.


가령 엡실론 님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운석 궤도를 이쪽으로 틀겠다며 협박을 했다던가,


제타 님은 타 레모네이드 세력에 국가멸망 수준의 제재를 가했다던가,


아, 특히 델타 님은 정도가 심하셔서 이미 수 차례 오르카 내에서 회의 중 난동을 피우시곤 했습니다."


얘 지금 일부러 이러나? 왜 자꾸 내 가슴 속의 욕구를 끓어오르게 하는 거지?


아니 그보다도, 걔네들이 그렇게까지 나를 두고 싸웠다는 말이야?


처음에 섹스로 혼내준다고 수십 번 절정 할당량 채울때까지 해대서 머리가 헤까닥 돌았나?


"끄으으...아악! 모르겠다!"


"그럼 마저 하던거나 하시죠. 미끼통 다시 가져다 드릴까요?"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고 꿀꿀할 땐 그걸 하는 수 밖에..


나는 곧바로 일어서서, 바닐라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니. 낚시는 됐어. 더 중요한 게 있잖아?"


"......"


역시, 나의 매력에 아무 말도 못하는군 그래.


지금 이게 자기 하고싶은 대로 사는 난봉꾼 아니냐고?


뭐 어때. 그동안 난 그 지독한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우리 바닐라.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하지만, 바닐라의 대답은 내 예상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싫어요."


"그래, 이제 오빠만 믿...으, 응? 뭐라고?"


"저는 주인님의 시중을 드는 메이드일 뿐이지,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몸을 내어주는 그런 헤픈 여자가 아니라고요."


바닐라의 독설들 중에서도 꽤나 충격적인 발언.


나 역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동시에 차분해졌다.


그녀는 이제 인간만을 봉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 판단을 가진 엄연한 인간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 잊고 말았다. 애초에 나 이외의 인간은 본 적이 없었기에 인간과의 대화나 의사소통은 잘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은 다르게 다가가야 했다.


그 생각에, 나는 숙연해진 채 고개를 푹 떨궜다.


"...그, 그렇게 충격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미안."


바닐라는 내 반응에 조금 당황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사과는 제대로 해야지.


"...전 그저, 주인님께 좀 더 경각심을 가지라는 의미로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앞으로도, 인간님들이나 저와 같이 인간이 된 분들을 자주 만나시게 될 것 아닙니까?


주인님이 무례하시다는 뜻은 결단코 아니지만, 혹시나 무의식적으로 나온 발언이 다른 분들께 상처를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 차원에서 제 나름대로 경고를 드린 거에요."


그래. 말투에서 알듯이, 바닐라는 그녀 나름대로 엄청 신경써주고 있는 거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다. 그럼. 내가 그걸 잘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내가 바닐라에게 더욱 미안해 해야 한다.


일부러 심한 말을 해야 할 정도로, 내 섬세함이 부족했으니.


"..알았어. 정말 미안해, 바닐라."


잠시 그녀를 쳐다 보니 얼굴이 붉어져 있었지만, 이건 넘어가기로 했다.


또 잘못 말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되니까. 암.


"알면 됐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직 인류재건 프로젝트를 하실 때가 아니잖아요..시술받은 지 3일밖에 안 돼셨으면서.."


인류재건은 뭐..바닐라도 알고 있을 테니 그건 됐고,


시술이라면..확실히 사흘 전에 리제에게 피임 시술을 받은 적이 있긴 한데..


오르카 호에서 시술받은 사실을 바닐라가 어떻게 알았지? 그것도 날짜까지 정확하게?


설마...언제 피임을 하고 언제 효과가 다 되는지 전부 외우고 있는 거였어..? ...얘가 진짜!


"크흑..! 바닐라!! 사랑한다!!!"


"윽?! 갑자기 그렇게 넘어뜨리시면 어떡합니까!"


바닐라는 나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살짝 밀어내는 시늉에만 그쳤다.


그 말은..이 정도는 괜찮다는 소리겠지?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써 주다니...! 진짜 감동이야.."


"그걸 아시는 분이 이렇게 밖에서..최소한 할거면 안에..히익?!"


오냐. 니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난 그대로 바닐라를 덥석 들어올려 공주님 안기를 시전하며 오두막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홍당무처럼 빨개진 그녀의 얼굴이, 햇빛을 받으니 더욱 눈부셨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한 가지 다짐했다.


앞으로 다른 애들에게도, 이런 귀여운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도록 더 잘 해주자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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