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을 들으면서 읽는 건 어때?)




"각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다급한 무전소리가 사령관실에 울려퍼졌다.


무전에서 느껴지는 다급함과 공포, 그리고 슬픔.


하지만 사령관은 무전에 응할 겨를이 없었다.


오르카 호는 적으로 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사령관 각하! 어서 가십시오!"

 

마리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사령관이 손을 내밀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적을 향해 몸을 던졌다.


"주인님 어서요!"


리리스는 굳어버린 사령관을 재촉하며 자리를 피했다.



둘은 쉴 새 없이 뛰었다.


숨이 턱턱 차오르지만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리리스가 발걸음을 멈추자 사령관은 뒤를 돌아보았다.



피비린내와 연기로 뒤덮힌 복도.


눈을 감지도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 브라우니.


그런 브라우니를 껴안고 눈을 감은 레프리콘.


피로 붉게 물든 얼굴의 뽀끄루 대마왕.


말 없이 쓰러진 콘스탄챠의 곁에서 슬피 짖는 보리.


처참하게 부셔진 스파르탄 캡틴.


검게 그을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알프레드.


시야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


사령관은 말 없이 주변을 훑었다.


-주인님...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무전 소리.


사령관은 바닥에 떨어진 무전기를 잽싸게 집어들었다.


"리제! 어디야! 몸은 무사한 거야!?"


-기뻐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헉헉 소리를 내며 리제는 힘겹게 숨을 고르더니,


-사랑해요... 주인님... 정말 사랑해요... 아니... 사랑했어요... 무사하시길... 바라요...


사령관과의 마지막 대화를 고백으로 마쳤다.


"스토커! 스토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대답없는 메아리.


다리에 힘이 풀린 리리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굵은 눈물 방울이 뺨을 적셨다.


"그대여!"


다급한 목소리가 사령관 앞을 막아섰다.


"아스널!"


평소와 같이 당당한 미소를 짓는 아스널.


관통된 흉부 사이론 붉은 피가 주르륵 쏟아져내렸다.


그리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정신 차려!"


어루만져보아도, 꽉 껴안아보아도, 흉부를 손으로 압박해봐도,


아스널은 평소처럼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끝까지 내게 근심 거리만 주는 구나."


그리고는 사령관의 뺨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항시 그대가 눈을 감고 그 다음 날 죽길 바랬건만."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 채 숨이 멎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이런 시련과 고난, 역경이 닥친 걸까...


내가 조금 더 힘이 있었더라면...


내 목숨을 바꿔서라도 모두를 지킬 수 있었다면...


사령관은 바닥에 주저앉아 절규했다.



"주인님! 피하세요!"


리리스의 다급한 외침에 사령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연기가 걷히자 리리스는 바닥에 쓰러졌다.


왼 팔이 뒤틀리고 오른 발은 심한 화상을 입었다.


"왈랄랄루!"


괴기한 모습의 형체가 사령관의 앞에 섰다.


알 수 없는 괴음이 복도를 울렸다.


"주인님... 어서 피하세요... 제가 여긴 어떻게든..."


바닥을 기며 사령관에게 다가오는 리리스.


하지만 괴물은 리리스에게 일격을 가했다.



"주인님!"


리리스의 절규.


사령관의 복부엔 큰 구멍이 생겼다.


피가 넘쳐흘러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왈랄랄루!"


알 수 없는 괴물의 외침.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는 리리스.


사령관은 리리스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미안해... 이런 사령관이어서... 이런 주인이어서..."


그리고 사령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령관님."


낯 익은 목소리.


사령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수고했어요, 아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에바와 에이다가 사령관을 내려보고 있다.


상처와 통증이 계속되는 사령관.


숨을 헐떡이며 에바와 눈을 맞췄다.


"당신은 대단했어요. 적대적인 바이오로이드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AGS마저 전부 규합했으니까요.

게다가 원수같은 철충과도 손을 잡으려 노력했다는 점도 말이죠."


에바는 사령관을 살포시 끌어안았다.


"별의 아이 군단이 오르카에 닥칠 진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에바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사령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래도 사령관님께서는 끝까지 전투를 함께 하셨습니다. 유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에이다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령관은 그저 알고 싶었다.


자신이 산 건지, 죽은 건지.


"당신은 죽지 않았어요."


에바의 말에 사령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


어서 빨리 돌아가서 모두를 지켜낼 수 있다면...


사령관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사령관님께서는 다시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지금까지 사령관님께서 겪었던 일은 전부 시뮬레이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령관은 귀를 의심했다.


에바는 차분하게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철충은 고지능 생명체를 찾아 온 우주를 찾아다녔다.


온 우주를 파괴하려는 별의 아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그러던 도중 몇몇 선발대가 우연히 지구를 발견했다.


하지만 철충은 고문 못지 않은 실험을 당했고,


대화로 협상하려던 철충들은 인간의 잔혹함에 절멸을 결정.


그렇게 인류는 종말을 맞이했다.



에바는 철충의 의도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시뮬레이션을 통해 여러가지 가능성을 시험해보았다.


남편 '애덤 존스'와의 유전자로 만든 둘째 '아벨'이 사령관으로서 성과를 거두면서 여러 시나리오를 주입했다.


그리고 이번 시뮬레이션이 사령관에게 있어 마지막 시뮬레이션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다가오는 별의 아이, 그리고 온 우주의 멸망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은 모두 가상 세계.


자신과 함께 했던 모든 인연은 허구.


사령관은 충격에 빠졌다.


"미안하다고 하진 않을게요. 우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도... 당신이 겪었던 이 경험이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 믿어요."


사령관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에이다는 사령관을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는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입니다. 사령관님께서는 잘 해나가실 거라 믿습니다."


사령관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붉어진 코에선 콧물이 흘러 에이다의 뺨에 묻었다.


"모두의 인연을 다시 한번 이어주시길."


그리고 에이다는 사령관의 눈을 감겨주었다.




"살아났나? 눈을 껌뻑거리는데? 숨도 제대로 쉬는 것 같아."


"휴, 다행이야. 이분이 명령만 내려 주시면 우리도 이젠 제대로 싸울 수 있을 테니..."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눈을 뜬 사령관.


알 수 없는 두 여성이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괜찮긴 한 거야? 그러니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분명히 기억이 없을 거라고 했잖아."


금색 빛을 머금은 단발의 여성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고는 미간을 구기며,


"이상한 명령이라도 내리면 어쩌지?"


걱정스러운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럴 리야 있겠니? 그리고 기억이 없어도 괜찮아. 

적어도 파괴 명령만 내려 주셔도... 싸움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안경을 쓴 여성은 희망에 찬 목소리로 단발의 여성을 달래주었다.


"너흰 누구야...?"


고통 때문일까?


사령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안경을 낀 소녀가 무릎을 꿇었다.


"반갑습니다. 인간님. 전 가정경비용 바이오로이드 콘스탄챠, 

그리고 이 아이는 기동공격용 바이오로이드 그리폰이라고 해요."


뭔가 익숙한 이 상황...


복잡한 감정이 사령관의 마음을 스쳤다.


"그리폰, 너도 인사해야지?"


"흥, 미리 말하지만 이름 함부로 부르면서 친한 척 할 생각은 하지마. 

난 다른 애들처럼 인간만 기다리진 않았으니까."


"그리폰? 그건 인사가 아니잖니? 다시... 제대로 하자. 응?"


사령관의 숨이 거칠어졌다.


눈이 빨개지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인님...? 저희가 잘못했나요...? 죄송해요..."


"저...저기... 인간...? 백프로 진심이 아니었단 말이지... 미안해... 우... 울지마..."


"죄송해요... 주인님... 제발 울지 말아주세요... 저희가 더 잘할 게요... 

서글프게... 세상을 다 잃으신 것 처럼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식은 땀을 흘리며 안절부절하는 그리폰.


주인의 눈물에 슬퍼하며 가슴을 부여잡는 콘스탄챠.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은 사령관은 다짐했다.


다신 이 인연을 놓지 않겠노라고.


반드시 모두를 지켜내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