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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났다. 죽음도 끝났다.

 

이제 저 아름다운 노을빛을 감상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늘이 치직, 부드럽게 짓이겨졌다. 구름을 바라보기가 마땅치 않다.

 

세계가 무너진다. 우리를 밖으로 내쫓아내듯이.

 

 

 

“왓슨... ...”

 

 

 

하지만 아직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을 옆으로 물린 채, 나는 내 친구에게로 다가갔다.

 

 

 

“몸... 괜찮은 거죠...?”

 

“... ... 시라유리.”

 

“혹시 다치거나 하지는...

... 하하... 이런 분들 옆에서 싸웠다면 다칠 리가 없는 건데 내가 또 무슨 말을...”

 

“너는...”

 

“농... 농담이었어요. 얼굴에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하네요!

잘생긴 얼굴에 흠이라도 나면 안 되는 건데... 하하... ...”

 

 

 

시간이 흐르고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여기 있는 시라유리였다.

 

이 아이의 시간에서는 아주 찰나에 불과한 이전, 워울프와 싸웠을 때의 상처로 시라유리는 비틀거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눈을 뜨니까 주변에 이상한 바이오로이드들이 가득한데.

 

하지만 아이는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로 달려왔다. 당황할 법도 했을 텐데.

 

 

 

“왓... 왓슨은 농담 같은 거 잘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대신 이렇게라도 농담 하는 거에요. 나 이제 그거 잘해요... 이제는...”

 

“... ...”

 

 

 

나는 철충의 시체로 쌓아올린 산 위에서 터덜터덜 내려왔고,

시라유리는 반대로 올라왔다. 힘겨운 숨을 헐떡거리며.

 

나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 안았다. 내 친구가 웃고 있었으나 그게 거짓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짓 웃음이라면 응당 가려줄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농담... 농담이었는데...”

 

 

 

그래야 거짓 속에 숨겨진 울음이 터져 나오는 법이니.

 

 

 

“나... 나 그냥... 아직 부족한 학생이라고 할게요.

농담 잘한다고 하지도 않을 게요. 그러니까 더 알려주면 안 되나요...?”

 

“... ...”

 

“바보 같은 개그라도 좋아요. 손가락으로 볼을 찔러주는 것도 좋아요.

그러니까 그냥... 그냥 하나만이라도 더...”

 

 

 

“... 사령관. 시간이 없소.”

 

 

 

용이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비록 여왕이 버텨보겠다 했지만 세계의 버팀목이었던 추기경이 죽은 지금은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소.

너무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소. 마음의 준비를...”

 

“... 용.”

 

“...”

 

“게임 속에 캐릭터와 이별하는 게 슬픈 건 바보 같은 일일까?”

 

 

 

하늘이 찢긴 너머에는 0과 1의 행렬이 즐비하였다.

당연하게도, 그 배경은 검은색이었고, 숫자는 초록색으로 빛났다.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클리셰. 너무도 뻔하디 뻔한 클리셰라서 눈물이 났다.

내 품 안에 있는 아이가 우는 것조차 그런 뻔한 클리셰라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별에 슬픈 것이 어찌 뻔한 일인가.

마음을 주고 받았던 것과 떨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걸 어찌 클리셰라 할 수 있겠나.

 

 

 

“... 아니.”

 

 

 

용이 대답했다.

 

 

 

“바보 같은 슬픔이 있다면 천재 같은 슬픔은 또 따로 있겠소?

슬픔에 거짓과 진실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소.”

 

“...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날 보러 온 아이들은 서로를 둘러다 본 다음, 손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하늘로 빛이 하나 둘, 점점 늘어갔고 아이들이 천천히 현실로 돌아갔다.

 

주변이 적막해진다.

 

 

 

“마음 같아선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서 당장 데리고 나가고 싶으나... 아직 못 다한 얘기가 많이 있겠지."


"..."


"그러니 우린 먼저 나가보겠소.

이곳이 불안정하긴 하나 접속하고 있는 오르카 대원들이 로그아웃 되면 접속률이 줄어드니 서버에 드는 무리가 조금은 줄어들 것이오.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하고 오시오.”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린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내 눈 앞에 펼쳐진 빛의 기둥이 너무 많았고,

 

 

 

“울고 싶다면 참지 마시오.”

 

 

 

아주 많았다.

 

가상의 캐릭터. 가상의 세계.

핸드폰 화면 너머로 그것에 웃고 울었던 나날이 참으로 많았다.

 

이제 나는 또 다른 가짜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용이 하늘 너머로 사라진다.

 

세계가 고요했다.

나는 가만히 시라유리를 안았다.

 

 

 

“... 난 분명 내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하는 거 싫다고 했는데...

왓슨은 기억도 못하겠죠.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대단하기는 무슨... 그냥 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야.”

 

“보고 싶은 게 많다고 해서 많은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저도 보고 싶은 거 많았고, 하고 싶은 거 많았어요.

이제는 전부 다 쓸모 없는 게 돼버렸지만.”

 

 

 

마치 심술이라도 난 듯이, 시라유리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마구 부볐다.

그녀가 눈물을 닦아낸 탓에 옷이 조금 축축해졌다.

 

 

 

“... 힘들어?”

 

“... ... 흥.”

 

 

 

그리곤 한 번 더 폭, 하고 안겨왔다.

 

 

 

“그럼 안 힘들까요?

내가 알고 있던 세계는 전부 다 가짜였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걸 아는 기만자였다는데?”

 

“하하... 그, 그래도 그걸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잖아...

그랬다간 내가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한테까지 숨겼다는 건 좀 화가 나요.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친구가 하는 말에 미친놈 소리를 했을까 봐?”

 

“... 미안합니다.”

 

 

 

폭, 하고 안기면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한 번 폭,

하고 안겼다가 삐지는 일이 생기면 다시 한 번 폭, 얼굴을 부딪혔다.

 

울다가 또 웃다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가 또 베시시 웃다가,

학교에서 만났던 기억에 어색해하고, 술집에서 내 목을 겨눴던 일에 조금 미안해 하다가,

방공호에서 함께 안고 잤던 일을 부끄러워하고, 눈 앞에서 내가 죽었던 것에 다시 한 번 화를 내다가,

 

그랬고, 그랬다가, 또 그러했다.

얼마 간의 시간을 함께 하였고 마냥 길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린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참 많았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말 대신 이마를 서로에게 부딪히는 것으로 대신했다.

 

 

 

“... 왓슨.”

 

 

 

그렇게 수십 번을 이마를 맞댄 채로 시라유리가 입을 열었다.

 

 

 

“울지 마요. 나는 고작 해야 게임 속에 인물일 뿐이잖아요?”

 

“... 하지만 슬픈 걸.”

 

“슬프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이니까 하는 거지.”


"내가 듣고 싶은... 말... ..."

 

 

 

시라유리의 눈이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싱긋, 웃으며 눈동자가 내게서 모습을 숨겼다.

 

 

 

“제가 학생회장이었던 건 기억하시죠?

학생회 일을 하다가 봤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핸드폰 게임을 참 좋아했어요.”

 

 


가짜 세계 주제에 NPC들은 참 입체적이란 말이지.

 

시라유리는 그렇게 불평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그 친구의 생일이었던 날, 그 애가 하던 게임에서 그런 말이 흘러 나오더군요.

‘생일 축하해. 내 가장 사랑하는 누구누구 씨.’

그걸 듣고 바보처럼 웃고 있던 그 애가 참 오글거렸죠. 처음에는.”

 

“... ...”

 

“하지만 이제 왜 그 친구가 그걸 듣고 웃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 애, 학교에선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었거든요. 집안은 부유하지만 부모에게 관심도 못 받았고.

생일 축하는커녕 생일인 걸 아는 사람이 스파이였던 저를 빼곤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그거였겠죠.

생일 축하해.”

 

 


시라유리는 멀찍이 떨어진, 폐허가 된 한 장소를 바라보았다.

 

한 때 벚꽃 나무로 가득했던 곳, 하늘에서 만화 속 한 장면처럼 벚꽃잎이 흩날리던 곳.

 

그리고,

나와 시라유리가 맨 처음 만났던 곳.

 

학교.

 

 

 

“그렇다면 왓슨. 당신이 저 같은 게임 캐릭터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뭘까요?

당연히 그거겠죠.

‘우리는 괜찮다. 우리를 잊고 가도 우린 늘 행복할 거다.’

당신 같이 사랑에 쉽게 빠지는 사람은 그런 말을 듣고 싶을 거에요. 마음이 너무 여리니까.”

 

“... 시라유리...”

 

“왜요. 너무 훌륭한 추리라 눈물이 나나요?

그래도 나 나름 080 기관의 우수 대원이었다고요. 고작 81번 밖에 안 되긴 했지만.”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낸 후, 시라유리가 내 눈가를 부드럽게 비볐다.

 

흐른 눈물을 닦아준 것이었다. 닦고 난 후에도 내 눈을 살며시 눌렀던 것은 흐를 눈물을 닦아주려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닦아줘야 할 눈물이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아서.

 

 

 

“... 왓슨. 울보 왓슨.”

 

“...”

 

“... 난 솔직히 당신이 울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에겐 함께 있을 친구가 많이 있겠지만, 나에게 친구는 당신 한 명뿐이었으니까요.”

 

“... ...”

 

“하지만 욕심이겠죠. 그러니까 저는 그냥,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줬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하는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 당신은 울지 말라는 내 말만 기억하면 되요.

... 그러면 되요. 그러면... ...”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떨려왔다.

가녀린 손가락이 울고 있었다. 그 탓에 내가 흘린 눈물은 손수건 너머로 떨어졌고, 그 틈으로 나는 보았다.

 

 

 

“... 그러니까... 그냥 다 잊어버리세요...

다아... ... 전부...”

 

 

 

우는 시라유리의 얼굴을.

 

 

 

“저랑 같이... 함께 다녔던 건... 다 나쁜 기억들뿐이었잖아요...?

타 죽고... 맞아 죽고... 피 흘려서 죽고... ... 죽고... 죽고...

... 계속 죽은 기억들뿐이잖아요...

...”

 

“... 시라유리.”

 

“그러니까... 흐윽... 흑...

... 잊어요...

나란 사람... 아니, 캐릭터가 있었다는 것도 다 잊고 가세요...

그게 당신에게... ... 더 좋을 테니까...”

 

 

 

그녀는 계속 울었다. 그 어느 때보다 서럽게 울었다.

서러움에 복받쳐 내 눈물을 닦고 있었다는 것도 잊었다. 


눈물은 이제 그만 닦기로 마음 먹었다.

서로 껴안는 것만으로도 팔이 부족했기에 우리는 그저 서럽게 울었다.

 

 

 

“흐윽... 흑, 미안해요... 그냥 농담 취급하려고 했는데...

그냥 그러면 안 울 수 있을 거... 같았는데... 흐윽.. 흐으윽...”

 

“... 괜찮아. 괜찮아. 울어도 돼.”

 

“흐으으... 흐윽... 흑... ... 그래요. 농담이에요. 이거 전부 그냥 질 나쁜 농담이에요...

우는 것도 전부 다 왓슨 놀리려고 하는 거고, 이렇게 꼴사납게 안기는 것도 놀리려고 하는 거에요. 

흐윽... 흑... 흐으... ...”

 

“... ...”

 

“나도... 나도 꿈이 생겼어요...!

왓슨을 언젠가 다시 보는 꿈...! 죽고 다시 일어나면 그 땐 왓슨이 웃으면서 깨워주는 꿈...

그래 줄 거죠...? 말도 안 되는 꿈이지만 꿈처럼 살라고 했잖아요... ...”

 

“... 시라유리.”

 

“그러니까 나 정말 열심히 살게요...! 힘들어도 꾹 참으며 살 거고, 울고 싶어도 안 울면서 살게요...!

내 꿈에서 나는 왓슨이랑 같이 웃으면서 행복하게 지낼 거니까 꿈처럼 살 거에요. 그러려면 웃으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웃으면서 살게요. 웃으면서...

... 웃으면서... 흐으윽... 흐윽... 으윽...”


"... ..."

 

 

 

이별. 그건 아마 내가 아는 단어 중 가장 가볍게 쓰이는 것일 것이다.

 

아프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시리고 저릿한 마음의 요동이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 커다란 감정을 두 마디의 짧은 단어 안에 봉인하였다.

 

 

 

“이별하고 싶지 않아요...! 보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흐으... 으으으...!! 흐아아아아!”

 

“내가 어떻게 보내요! 어떻게 웃으면서 보내냔 말이에요!

이제 죽을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데! 밤새 다른 사람들한테 죽을까 떨지 않아도 되는데 어떻게!”

 

 

 

하지만 고작 두 단어였기에 이별이란 감정은 쉬이 봉인을 뚫고 우리의 마음을 찌른다.

너무 느슨한 봉인이었을까, 오늘따라 그 단어를 만든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시라유리는 내 옷자락을 와락 움켜 쥐었다.

옷주름이 늘어진다. 그럴수록 내 어깨가 무거워진다. 옷을 타고 무게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무게이기에 이토록 가벼운 아가씨가 이리도 무겁게 느껴지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웃으면서...? 잊고 살아가라고...?

게임... 이라고...? 웃기지 마요! 내가 이렇게나 아픈데, 이 마음이 이렇게나 두려워하는데 그게 어떻게 게임이에요?!

나 감정을 숨기는 건 자신 있었어요! 그런 교육은 지겹도록 받아봤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건... 이건... ...”

 

 

 

‘죽지 말아라. 부탁이니 제발 아무도 죽지 말아라.’

 

모든 임무에서 습관적으로 했던 말이었다.

 

‘죽지 마라. 죽으면 내가 너무도 아플 테니까.’

 

어떤 숭고한 사명이 있기에 그랬던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군가를 영영 보지 못할 것이란 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질 수 없을 것이란 게 두려웠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죽지 말라 하였다. 죽지만 않으면 이별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도 게임에 불과한 건가요! 내가 느끼는 것도 전부 유희에 불과했나요!

그게 아니라면 날 놀리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고, 그게 맞다면 아둥바둥 살아온 내 삶에 화가 나요!

하지만...! 하지만... ...”

 

“... ...”

 

“... 이젠 화를 낼 사람도 사라졌군요...”

 

 

 

여기, 죽지 않아도 이별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 미안해요. 조금 꼴불견이었죠.

이러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 ...”

 

“그... 그래도 이렇게 하니까 조금은 진정이 되네요.

그거 아세요? 저 살면서 이렇게 화내 본 적 없었어요. 그냥 쓸모 없는 에너지 낭비라 생각했으니까.”

 

“... 나는... ...”

 

“그래요. 제가 맞았네요. 화를 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몰랐거든요. 에너지 낭비 맞아요.

대신... 쓸모 없진 않은 것 같네요...”

 

 

 

시라유리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은 후,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은은한 낙화의 향기. 눈물의 잔향이 맴도는 뺨에는 향긋한 벚꽃의 내음이 풍겼다.

 

그녀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거짓 웃음이었고, 하얀 거짓말이었다. 허나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적어도 이제 뭘 해야 할 지는 알겠어요.

시간도 없는 마당에 이렇게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겠죠. 저도 준비한 게 있다고요.”

 

 

 

그녀는 내게 안긴 채,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조각을 꺼냈다.

 

다 번진 잉크로 읽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메모.

하지만 시라유리는 이미 수 차례 읽어봤던 것처럼 능숙하게 쪽지를 읊었다.


쪽지의 종이는 이미 오래 전에 씌여진 것처럼 낡아있었다. 


 

 

“내 친구. 왓슨.

... 글쎄, 이렇게 글을 쓰려니까 뭐부터 써야 할 지 애매하군요.

난 분명 뭔가 벅찬 마음에 볼펜을 쥐었는데, 쓸만한 메모지를 찾다 보니 어느새 흩어져버렸어요.

그냥 그 마음이 불현듯 떠오른 건 친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겠네요.

 

친구.

친구.

친구.

참 멍청한 단어라 생각했는데, 자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까 멍청하다고 하기가 꺼려져요.

토모 양과는 잘 화해하셨나요? 싸우고 있던 모습을 제가 봤었는데. 친구끼린 그렇게 싸우기도 하나 보군요.

저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아요. 왓슨과 싸운다니, 내키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요?

다만 당신 농담을 듣다 보면 이따금씩 울컥울컥 화가 올라오긴 하더라고요. 차라리 제가 하나 만드는 게 좋겠어요.

 

... 쓸 게 없으니 잡담만 느는군요. 기관에 있을 땐 이럴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 밖에는 보름달이 떠있어요. 광공해도 없다 보니 별도 아주 많이 있고.

당신은 밤하늘 보는 걸 좋아하나요? 전 할 일 없을 때 가끔 밖을 봐요. 밤 공기는 선선해서 기분이 좋거든요.

 

콩 통조림을 어떤가요? 저는 껍질 부분은 벗겨서 먹고 있어요. 질겨서 이빨 사이에 끼면 기분이 나쁘거든요.

이런 곳에서 적적하게 살다 보면 물병 마시는 것도 신경 쓰이기 마련이죠. 전 옛날 습관 때문에 입을 떼고 먹는 편인데 당신은 좋다고 벌컥벌컥 마시죠.

그런 모습이 조금 바보 같을 때가 있어요. 내가 물에 독이라도 타놨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지 몰라.

 

... 생각해 보니 물어보고 싶은 게 참 많았네요.

청소할 땐 어디서부터 하죠? 옷을 갤 때는 왼쪽부터 접나요, 아니면 오른쪽부터 접나요?

좋아하는 여자는 어떤 스타일이죠? 긴 생머리를 좋아하나요? 아니면 묶은 머리를 좋아하나요?

옷은 어때요? 치마? 아니면 바지? 나중에 둘이 같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 옷가게부터 들려야겠어요.

 

...

... 쓰려다 보면 끝이 없겠군요. 이러다 책 한 권 다 쓰겠어 아주.

아무튼 마음이 심숭생숭한 건 이런 것들 때문이에요. 별로 중요한 정보도 아닌데 왜 이렇게 궁금한지.

나중에 당신에게 이 메모를 꼭 보여줄 날이 오면 좋겠어요.

 

왜 굳이 당신에게 보여주려고 하냐고요? 그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인데.

... 뭐, 당신한테 말 못할 게 뭐가 있겠나요.

적어도 이 감정에 대해서 당신은...”

 

“... 저보다 아는 게 많을 테니까요.

...

... 그런가요? 왓슨? 정말 저보다 아는 게 많나요?”

 

 

 

빼곡히 적힌 메모는 흙먼지와 눈물로 얼룩이 져있었다.

구겨지고, 찟겨지기까지 해 나는 시라유리가 읽어주기 전까지는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모의 끝에 다다를 수록 차분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것이다. 화를 내지 않고 이 시간을 조금 더 지혜롭게 사용하기 위해.

 

그런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무심코 꽉 끌어안았다.

꺅, 외마디 비명마저도 귀엽게 땅 아래로 떨어졌다. 

분분한 낙화. 유명한 한 시의 구절과 같이.

 



"... 시라유리."


"네에. 여기 있답니다."


"시라유리... ..."


"어디 안 도망갈 거에요. 내가 내 친구를 놔두고 어딜 가겠나요?

그래도 이렇게 숨도 못 쉴 만큼 세게 끌어 안기니까 기분은 좋네요. 후후."


"... ..." 

 

“저는 말이죠, 사실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란 거.

정말 제가 당신을 그저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이 모든 희생을 해주진 않았겠죠.

하지만 하지 않으면 못 배기겠더군요. 당신을 볼 때마다 뭐가 그리 간지러운지 제 손이 막 나가더라니까요? 안 도와주면 속이 갑갑하고.

웃기지 않나요? 참 왓슨은 매력덩어리라니까.”

 

“... ...”

 

“으... 묵묵하긴 여전하군요. 그냥 농담 한 번 해본 건데.

그래도 당신보단 잘 하죠? 매력덩어리지만 농담은 못하는 우리 왓슨 씨.”

 

 

 

시라유리. 그녀는 그간 참아왔던 것을 폭발하듯이 내 어깨를 품어 안았다.

생존에 쫓겨 서두르는 것이 아닌 은은하게,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서서히, 나비 같은 손짓으로.

 

하늘이 화창한 어느 봄날에도 꽃잎은 떨어진다. 내 앞의 그녀가 그러했다.

 

 

 

“친구... 맞아요. 제가 본 수많은 인간 관계 중 그것만큼 불안한 것이 없어요.

왓슨의 말대로 그건 천재일우의 행운이 없으면 유리보다 쉽게 부서져버리죠.

하지만 저는 행운이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진짜 친구로 남는 사람들에겐 행운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점이 있거든요.

ㅅ과 ㄹ로 이뤄진 말. ㅏ가 두 개 들어가고, 마지막에 받침으로 ㅇ이 들어가는 그거.

그 공통점이 뭔지는 왓슨도 알고 있겠죠. 다만 서로에게 말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지.”

 

“... 그랬지.”

 

“후후, 부정하진 않는군요.”

 

 

 

그녀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이 아이와 말할 시간이 분초를 다투고 있었기에 나는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을 꺼내려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내가 입을 떼려고 했을 때,

 

 

 

“사랑...”

 

“쉿.”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빙그레 웃는 그녀의 웃음엔 숨겨진 칼날 같은 것이 있었다. 너무도 시라유리다운.

 

 

 

“있지, 전에 당신이 알려준 세토우치란 아이를 기억하나요?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거래용으로 당신이 제게 말한 한 오타쿠 남학생의 이야기.

두 명의 여학생에게 대시를 받고 있다던 그 애.”

 

“알... 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남학생에게 고백을 했다는 건 알고 있나요?

제가 수풀 뒤에서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얼굴이 빨개져서 어버버 대더군요.

뭐, 결국 사귀기로 했으니 해피 엔딩이겠죠?”

 

 

 

그녀는 나를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는 내 무릎 사이에 쭈구려 앉은 다음, 장난끼 넘치는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태까지 봤던 그 어떤 눈빛보다 복잡한, 눈동자가.

눈물 자국에 속눈썹이 축 늘어졌고, 눈가가 빨개져 안쓰러울 지경이었으나 빙그레 웃는 호선이 매력적인, 형언할 수 없는 눈이었다.

 

 

 

“당신은 지금껏 많은 사랑을 받았을 거에요.

어쩌면 저보다 말솜씨가 좋은 사람들에게 달콤한 고백을 들었을 지도 모르죠.

그래서 저는 제가 아는 가장 전략적인 방법을 쓸 거에요.

능숙하지도 않고, 야릇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당신 마음에서 잊히지 않을 방법을.”

 

 

 

내 이마가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로 몇 발자국, 움직인 뒤 내게 읽어주었던 메모를 곱게 접어 편지처럼 만들었다.

 

흙먼지가 가득 묻은 옷. 교복.

학교에서나 입을 그 옷을 입고 너는 내게 고개를 숙인 채 편지를 건넸다.

 

 

 

“저랑 사귀어주시겠습니까?”

 

 

 

빙그레 웃는 미소 속에 숨긴 칼날.

너는 나에게 고백해주었다.

 

사귀다. 그것이 연인 관계를 묻는 것인지, 아니면 친구 사이를 묻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별로 상관 없었다. 우리에겐 그 둘이 별 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 ..."



 

하늘이 진다. 둥글게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난 한평생 고백 같은 걸 받아본 적 없었고, 시라유리 역시 고백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어색하고 어리숙한 두 바보들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그런 가운데 나는 마지막 햇살이 지기 전, 너의 편지를 받았다.

 

 

 

“... 그래. 사귀자.”

 

 

 

그리고 대답했다.

절대 잊지 못할 달콤한 고백에게.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가요?”

 

 

 

너는 순박한 표정으로 물었고,

 

 

 

"... 당연하지.”

 

 

 

나도 그런 표정에 어울리는 대답을 했다.

 



"그렇게 애매한 대답은 뭐에요~ 세토우치를 보니까 좋아서 막 끌어 안고 그러던데."


"우린 이미 안고 있잖아. 더 세게 안았다간 내 친구 등뼈가 부러질까봐 무서워서 그래."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서 죽는 것도 꽤나 낭만있는 일 아닌가요?"


"그나마 있던 낭만도 사인이 척추 골절이라면 다 사라지겠다 임마."


"농담 한 번 한 걸 가지고 째째하게 구시기는."


"농담으로라도 그러고 싶진 않네요. 난 그냥 꼬옥 안고만 있어도 힐링이 되거든."




해가 서쪽 하늘에서 저문다. 떠나는 해는 자신의 마지막 빛 한 줄기를 시라유리의 미소를 밝히는데 썼다.

 

그 빛이 채 다 가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라유리와 이마를 맞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때까지, 한계까지 가까워진 우리 사이로 조그마한 소리가 났다.

 

쪽.

 

그녀가 고개를 비틀어 내 입을 맞췄다.

 

 

 

우리의 1일.

어쩌면 이 세계에서 보내는 마지막 1일.

 

어쩌면,

가장 특별한 1일.

 

그 날 우리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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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금 부끄럽네요. 고백하는 거.

이런 걸 어떻게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러는 시라유리는 맨 정신으로 한 거 아니었어?”

 

“저야 어차피 이따가 죽을 사람이니까 반쯤 정신 놓고 한 거죠.

아, 이것도 농담이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지 마세요. 아셨죠?”

 

 

 

아직,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

마지막 키스를 하며 사라지는 두 남녀, 세상에서 가장 애틋하고 슬픈 이별.

그런 소설 같은 이야기는 없었고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서있었다.


그러는 꼴이 서로 어색해 시라유리는 눈물 자국을 훔치며 내 볼을 쿡쿡 찔러댔고, 나도 똑같이 그렇게 해줬다.

 

서로의 볼이 얼마나 말랑말랑한 지 시험이라도 해보는 듯이, 우린 하염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하다 보면 웃음이 난다. 흘린 눈물이 무안해지게 웃음이 난다.

 

그래도 우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 어때요, 왓슨. 방금 같이 고백하고 나서 싹 하고 사라지면 참 멋있을 텐데, 현실이란 게 참 녹록치가 않아요. 그쵸?”

 

“그러게... 늘상 느끼는 거지만 이 세계는 소설 같은 게 아니란 말이지.

그래도 그래서 다행이잖아. 방금 키스한 거로 만족하라 했으면 나 아마 며칠 동안은 미친 사람처럼 지냈을 걸? 

내가 워낙 마음이 여리고 또 욕심도 많잖니.”

 

“욕심 많은 사람치곤 며칠은 조금 소박하네요. 후후.

저도 욕심이 많은 친구라 헤어지고 나면 왓슨이 일 년 정도는 미쳐있길 바랬거든요.”

 

“그럼 한달 정도로 봐줘. 일 년 동안이나 미쳐있으면 오르카 전체가 미쳐 돌아갈 거야.

안 그래도 내가 몇 달씩 없어서 난장판이 됐을 텐데. 쓰레기 분리수거는 제대로 했을라나 모르겠다.”

 

“그럼 밖에선 그거 청소하고 있을까요?”

 

“아마... 그럴 지도 모르지? 이제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애들도 고생이겠다... 평소에 잘 치우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아까까지 용맹하게 싸우셨던 분들이 빗자루 들고 복도를 청소할 모습을 생각하니까 조금 웃기긴 하네요.

특히나 검을 네 개씩이나 들고 계셨던 분이 그러시는 건 뭐랄까, 조금... 안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나요?”

 

"... ..."


 

 

확실히 눈매가 날카로운 용이 빗자루를 들고 자기 방을 쓸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미소가 나오긴 한다.

 

검도 네 자루나 들고 있다면 빗자루도 네 개씩 들고 청소할까? 만약 그렇다면 같이 있을 세이렌이 고생 꽤나 하겠다.

 

 

 

“... ... 그나저나, 이 세계는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행여나 제때 로그아웃 못하면 왓슨도 같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죠?”

 

“아니. 닥터가 메시지 보내준 거 보니까 서버가 다운될 때 알아서 로그아웃 되게 나온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조금 많이 아쉽네요.

아예 여기에 납치해버려서 영영 못 나가게 만들고 싶었는데.”

 

“으으... 으스스한 소리 하지 마. 나 진짜 무섭단 말이야.”

 

“저 원래 질투심 많은 여자에요. 모르셨어요?”

 

“모르는 건 아니지만...”

 


치직! 치지직!!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겠지.”

 

 


그 때, 균열 사이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리고 왓슨은... 쿨럭, 나랑 같이 밖에 나가야 하거든?

너 같은 여자한테는 절대 못 주지... 쿨럭...!!”

 

“리... 리앤?”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툭, 하고 떨어진 리앤과 누군가.

그녀는 그 누구에게 부축을 받으며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 여왕 같지만 여왕 같은 몸매는 아니었다.

조금 더 어린, 고등학생 소녀 같은 아이.

 

 

 

“... 카르디아? 너는 또 왜 여기 있어?”

 

“... 금방 나갈 거니까 분위기 깨는 사람 본 것처럼 얼굴 찌푸리지 마세요. 사령관님...

나 진짜 여왕님 때문에 무슨 고생을 했는지 말도 못할 정도라니까.

솔직히 여기 와서 환대는 못 받더라도 따뜻한 인사 한 마디 정도는...”

 

“그만그만그만. 너 또 말 많아진다. 말 많아져.”

 

“... 칫. 알겠어요. 학원 로맨스 물 찍고 계신 두 분 방해한 건 사과드릴게요.”

 

“그런 사과를 바랬던 건 아닌데...

... 아, 근데 리앤은 어떻게 찾아온 거야?”

 

 

 

투덜거리던 카르디아가 부축하고 있던 리앤을 내게로 건네면서 말을 이어갔다.

 

 

 

“추기경이라면 이 서버 어딘가에 리앤 님을 숨겨놓을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여왕님이 밖에서 어그로를 끌었고, 사령관님이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이곳저곳 눈에 밟히는 곳은 전부 다 뒤져봤죠. 결국 이렇게 찾아냈고.

혹시라도 클리어 보상이 제대로 안 나올까 봐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조렸는데... 그런데 사령관님은 그런 것도 모르고... ... 우이씨.”

 

“... ... 죄송합니다.”

 

“됐네요.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때 가서 다시 사과하세요.

나 지금 왕창 삐졌으니까.”

 

“... 나중에? 그럼 지금은 어디 다른 데 가려는 거야?”

 

“말했죠. 방해 안 하겠다고.

 

 

 

어째 전보다 조금 더 감정적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 농담이에요. 뭐 이런 걸 가지고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그러세요? 설마하니 내가 진짜 그런 거로 삐졌으리라고.

대신 어디 간다는 건 진짜에요. 여왕님이 짐 싸라고 명령했거든요. 세바스토폴 쪽에 일이 있다고 하셨던가?

아무튼 그거 전부 다 사령관님 때문이에요.”

 

“나...? 나는 왜?”

 

“지금이야 좀 어수선하니 모르시겠지만, 지금 죽이신 추기경은 교황의 첫 번째 추기경이에요.

그만큼 애정을 많이 받은 추기경이죠. 그걸 애정이라 불러야 할 지는 모르겠다만...

뭐, 아무튼 제 1 추기경이란 이름답게 휘하 세력도 다른 두 추기경을 합친 것보다 훨씬 컸어요.

그런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철충 세력 중 거의 절반은 길 잃은 벌레가 돼버렸다 봐야죠. 교황이 있으니까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그나마 다행... 이네. 철충이 그만큼 약해진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그게 여왕이랑 무슨 상관인데?”

 

“이 틈에 제대로 판을 뒤엎어 보자는 거죠. 여왕님이 교황과 제대로 담판을 짓기로 하고 가셨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같이 가서 싸워야죠. 사령관님이 제대로 준비가 될 때까지.”

 

“그러니까 뭔 준비를...”

 

“외신과 맞설 준비를.

아, 이 이상 말 못해요. 그거 말했다가 여왕님이 어떻게 됐는지 보셨죠? 나는 말 안 할 거에요. 바보는 아니라서.”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지익 닫는 시늉을 하던 카르디아가 눈길을 시라유리에게로 돌렸다.

 



"... ... 어라?"




마치 흥미로운 꽃을 본 벌처럼 어슬렁거리며 다가간 카르디아는 눈을 반짝거리며 시라유리를 쳐다봤다.

 

 

 

“... 역시, 여왕님이 사람 하나는 잘 고르셨다니까.”

 

“어... 혹시 누구신지... ...”

 

“아, 저는 카르디아라고 하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평범한 벌레에요.

추기경이니 뭐니 하는 누구처럼 음침하게 읽는 건 아니고 그냥 어렴풋이 색만 볼 수 있는 거니까 안심하세요.”

 

“어... 예... 알겠습니다...”

 

 

 

시라유리의 표정을 보던 카르디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짜 어쩌다 이런 사람이 여기 떨어졌나 몰라.

천운도 이런 천운이 없어요. 정말.”

 

“... 칭찬이야?”

 

“칭찬이냐고요? 물론 칭찬이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엄청 좋아하는 거를 싫어하게 만드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엄청 싫어하는 걸 좋아하게 만드는 거죠.

사령관님은 지금 둘 다 했으니 박수가 절로 나올 수 밖에요.”

 

 

 

카르디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 과거를 들먹였다.

어째 조금 어색해져서 나는 말없이 시라유리를 끌어 안았다.

 

 

 

“으으, 아주 꿀이 떨어지네. 꿀이 떨어져.

저 같은 방해꾼은 그럼 서둘러 사라지도록 하겠습니다~”

 

 

 

지직.

 

카르디아가 능숙한 솜씨로 공간을 열어 젖혔다.

붉게 열린 포탈, 리멘. 그 너머로 성큼 뛰어 들어갔고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떠나버렸다.

 

 

 

“술 한 잔 마실 시간 정도는 될 거에요.

편히 있다가 나오세요.”

 

“... 술? 저건 또 무슨 소리래?"


"글쎄... 그냥 적당히 인사 하고 나오라는 말 아닐까...?"




흐린 기억 이벤트의 마지막, 주인공은 리앤과 함께 술 한 잔을 하며 죽은 친구를 기렸다.

아직 나에게도 그럴 시간이 있다, 카르디아는 그런 의미에서 말을 남긴 듯했다.


여하튼,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내 양 어깨는 은근하게 짓누르는 손으로 무거워졌다.

내 친구들은 말 대신 손으로 하는 걸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왓슨, 너 또 아는 여자 있었어?

애들러에, 워울프, 다프네, 팬텀, 레이스, 게다가 티아멧... ... 어휴. 내가 진짜 골이 땡긴다 골이 땡겨.”

 

“왓슨... 저도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머리 속에 쏟아질 거 같은데 그건 말하고 가야겠어요.

당신 발이 넓다는 건 알지만 여자 내력이 그렇게 화려해서야 되겠나요? 나중에 아주 치정 싸움 나겠네. 싸움 나겠어.”

 

 

 

리앤과 시라유리,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보기 드문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어...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됐어가 아니라...! 

... ... 하아, 됐다. 그러다가 선상 칼부림 나면 알아서 해.

내가 갈 오르카 호가 저런 곳이란 걸 알았으면 조금은 생각해볼 걸 그랬네.”

 

“어머, 지금 누구 앞에서 배부른 소리를 하시는 거죠, 토모 양?

그럴 거면 그냥 제가 대신 나가게 해주세요. 저는 왓슨이 다른 여자랑 사겨도 아무렇지 않게 안아줄 수 있으니까.”

 

“뭘 넘겨? 

하하, 우리 시라유리, 못 본 사이에 되게 능청스러워졌네? 아까까지 치정 싸움이니 뭐니 하던 애가 그런 농담도 할 줄 알고 말이야.”

 

“후후. 칭찬 고마워요. 여기 ‘제’ 왓슨 덕분에 말솜씨가 제법 늘었죠.”

 

“흐흐흐, 이 능구렁이가 어디서 수작을 부리는 걸까? 

‘내’ 왓슨이 농담 못하는 건 또 어디서 알아서 그런 헛소리를...”

 

 

 

그러고 보니, 둘은 기관에서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리앤의 몸을 하고는 있지만 리앤 자체가 원채 토모와 닮은 모델이었기 때문에 시라유리도 눈치껏 상황을 파악했던 것 같다.

역시 현장에서 뛰던 요원이라면 요원이랄까... 등골이 조금 오싹해졌다.

 

 

 

“’내’ 왓슨이 열심히 싸우고 있는 동안 뒤에서 활만 깔짝이니까 시절 좋았지?

이제부터 우리 왓슨을 지키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어여 편히 쉬어.”

 

“호호, 무슨 그런 천인공노할 말씀을?

그러는 토모 양이야말로 제가 활이나 깔짝이는 동안 어디서 뭘 하고 계셨을 지 모르겠네요?

게다가 정체 모를 여자에게 부축이나 받아서 오는 꼴이라니. 그런 연약한 분께 ‘제’ 왓슨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 애가 언제부터 니꺼였데?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원래대로였으면 왓슨한테 총이나 쏘다가 퇴장할 엑스트라였어.”

 

“거짓이더라도 진실이 될 때까지 꿈꿔라. 왓슨이 해준 말이죠?

엑스트라가 주인공이 될 때까지 열심히 살았으니 이젠 저도 엄연한 주인공이랍니다.”

 

“아니, 진짜...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툴툴 투정을 부리던 리앤이 나를 껴안고 있던 시라유리 틈을 비집고 몸을 끼워 넣었다.

벚꽃 향기 속으로 그리운 사무실의 냄새가 들어오니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시끄러운 얘기가 멈추지 않는다. 시답잖은 평범한 하루의 이야기도 친구와 함께 하니 굉장한 토크쇼가 된다.

이제 곧 사라질 누군가도, 또 나와 함께 떠나갈 누군가도 덩달아 싸우고, 웃고, 떠든다.

서로 떨어져라, 먼저 나가버려라, 말투는 험악하게 할 지라도 결국은 나를 보면서 웃음을 지어준다.

 

달빛 아래에서 환하게, 너희 둘은 나를 끌어 안아 줬다.

내가 수백 번 죽으면서 보고 싶었던 단 하나의 장면. 너희는 그렇게 나를 살려주었다.

 

 

 

“자, 일단 앉자. 계속 서있기도 힘들단 말이야.”

 

“그러게요. 누구랑 다르게 저는 계속 왓슨을 지켜주고 있어서 다리에 힘이 풀려버릴 것 같아요.

왓슨, 조금 부축해줄래요?”

 

“저게 또 어디서 여우짓을...

... 에휴, 됐다. 너그러운 내가 봐줘야지.”

 

“후후, 그래요. 저는 이제 왓슨이랑 영영 떨어질 사이니까 양보 좀 해주길 간청할게요?”

 

“... ... 그런 말은 일부로 안 한 건데...”

 

 

 

리앤이 나와 시라유리의 어깨를 꾹 눌러 바닥에 앉혔다.

건물의 잔해가 널려있던 탓에 앉다가 엉덩이에 작은 돌무더기 하나가 끼여 있어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놀란 시라유리의 표정과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죄책감을 표현하는 리앤. 둘의 표정은 참 걸작이었다.

 

그렇게 고통이 가셨을 때쯤, 리앤이 찢긴 균열 틈으로 손을 집어 넣어 뭔가를 하나 꺼냈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했더니, 잘 포장된 햄버거였다. 

셜록과 내가 맨날 먹었던 그거.

 

 

 

“자, 먹어. 달도 보름달이라 예쁘고 별도 반짝이는 날이라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하긴 한데, 취했다가 또 무슨 투정을 부릴 지 모르니...”

 

“어머, 제 것도 있나요?”

 

 

 

리앤이 꺼낸 햄버거는 3개였다.

 

 

 

“그럼 내가 쪼잔하게 굶길 줄 알았어?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아니야. 검은 액체 뚝뚝 떨어뜨리는 괴물 때문에 성격이 조금 사나워지긴 했지만.”

 

“괴물이라 하면... 추기경이란 자를 말하는 거겠죠? 저기 쓰러져 있는.”

 

“그래. 그 애에 비하면 너는... 에휴. 그나마 낫지.

내가 저 놈한테 납치된 이후에 죽어가는 왓슨을 보면서 얼마나 눈물이 났던지.”

 

“그런 걸 굳이 봐야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 미친 놈이 나보고 보라도 온 사방에서 다 보여줬는데 어떻게 해. 나도 안 볼 수 있었으면 당연히 안 봤겠지.

내가 만든 게임이 이런 식으로 소비될 거 같았으면 만들지도 않았을 거야.”

 

“저런...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군요.”

 

“... 네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니까 조금 소름 돋는데?”

 

“아뇨. 진심이에요.

저는 왓슨이 죽는 모습을 고작 해야 한 번 봤는데 토모 양은 수십, 수백 번을 본 거잖아요?

그런 걸 가지고 농담할 만큼 가벼운 여자는 아니랍니다.”

 

“... ... 햄버거나 먹어.”

 

 

 

둘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서스럼 없이 잡담을 떠들었다.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숨길 게 없어서 그런 걸까, 잔혹한 진실이래도 깨달은 사람들은 쉽게 속을 터놓고 사는 법이었다.

 

그러는 둘을 보며 햄버거를 한 입 물었다.

 

축축한 빵, 질긴 패티, 자극적인 소스의 향,

돈이 없어 셜록과 함께 자주 먹었던 햄버거의 맛은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웠다.

 

 

 

“... 왓슨, 울어?”

 

“왓슨, 괜찮나요? 무슨 일 있어요?”

 

“... ...

... 아니... 그냥 너무... ...”

 

 

 

소완이 이런 음식을 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포티아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내가 먹을 수 있는 마지막 햄버거였다.


마지막, 흐린 기억이었다. 추억이었다.

 

 

 

“... 너무 그리워서...”

 

“... ...”

 

 

 

게임 속에서 주인공은 리앤과 함께 운치 있는 달빛을 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우린, 작별 인사 하기도 마땅찮은 우린 이렇게 멸망한 세계 속에서 햄버거를 씹었다.

 

술의 맛은 은은하다. 눈을 감고, 코로 숨을 들이 마셔야 기어코 숨겨진 깊은 향이 올라온다.

하지만 햄버거는, 그냥 먹으면 된다. 먹고, 씹고, 혀 위에서 터져 나오는 맛을 단순하게 맛보면 된다.

 

내가 그랬다. 너무 단순하게 살았고, 단순하게 깨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다. 죽을 뻔했고, 죽었고, 영원히 죽을 뻔했다.

 

씹고, 씹고, 또 씹었다. 햄버거가 입 안에서 눅눅해질 때까지 씹었다.

하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느껴지는 맛 뒤에 숨은 무언가를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단순히 앞에 있는 것만을 쫓다가 잃을 뻔했던 것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 나도 먹어봐야지. 왓슨이 울 정도로 맛있는 거면 하나 더 가지고 올 걸 그랬어.”

 

“저도 한 번 먹어볼게요. 살면서 이런 인스턴트 음식은 먹을 일이 없었는데.

 

 

 

이를 테면, 내 눈 앞에 둘이 그러했다.

이 둘을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얼굴은 바보처럼 만신창이가 되어간다.

 

그러면 양 눈을 가려주는 손이 있다.

익숙하기에 그리운 손이 있다. 

 

 

 

“왜 바보 같이 먹으면서 울기나 하고 그래, 왓슨.”

 

“그래요. 우리 같이 먹은 콩 통조림 같은 걸 생각해보면 햄버거 정도는 만찬이잖아요. 그렇죠?”

 

“... 바보들... 이런 게 뭐가 맛있다고... ...”

 

 

 

상추인지 뭔지 모를 야채는 소스에 절여져서 질겼다.

빵은 잘 뜯기지도 않고, 고기는 소스로도 가려지지 않는 누린내가 난다.

 

그래서 다른 걸 먹여주고 싶었다.

더 맛있는 걸, 더 많이,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주고 싶었다.

 

 

 

“맛있다고 하지 말고... 맛없다고 하라고. 그래야 다른 걸 사줄 거 아냐... ...”

 

“... 왓슨.”

 

“... ...”

 



그래도 너희는 말했다.




“이건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잖아.”

 

 

 

달빛이 흐뭇하게 내려온다.

 

 

 

“왓슨.”

 

“... ...”

 

“우린 왓슨과 함께 먹을 수 있어서 먹는 거에요.”

 

 

 

밤하늘의 구름은 음영처럼 흐릿했다.

 

 

 

“밖에 있는 분들도 이걸 보고 계시겠죠?”

 

“그럼 왓슨에게 이런 걸 먹이고 있는 우리가 미워 보이겠네. 나 밖에 나가면 맞아 죽는 거 아닌가 몰라.”

 

“설마 그러실까요?”

 

“왜, 바이오로이드라고 천사는 아니잖아? 나만 해도 왓슨 옆에 알짱거리는 너한테 뒷담하고 그랬는 걸.

게다가 내 친구 애들러는 그럴 뻔했다고. 설마 지금도 그런 방에 틀어 박혀 있진 않겠지.”

 

“애들러?”

 

“왜, 내 친구 중에 그 나이트앤젤 한 명 있잖아. 바람처럼 왔다가 치트키처럼 사라진 친구.

주변에서 한 명이라도 살갑게 굴어줬으면 그렇게 삐딱하게 변하진 않았을 텐데.”

 

“아하, 그런 분이 있다는 걸 잠시 봤던 기억이 있네요.

그 분도 밖에서 온 분이었나요? 이거 왠지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드는데.”

 

“애들러? 우리 보여?

혹시 우리보고 손가락질 하는 분들이 옆에 계시면 안부 좀 전해줘. 이 햄버거 은근 맛있는 거 알잖아. 우린 맛있는 걸 준 거야. 알지?”

 

“그런가요? 그냥 싼 맛인 것 같은데요.”

 

“싼 만큼 그리운 맛이지.”

 

 

 

마치 그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떠드는 것처럼, 리앤과 시라유리는 내 앞에서 하염없이 이야기했다.

 

그 둘의 표정엔 약간의 어색함이 서려있었다. 약간인 만큼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이 보기에 내 표정은 그런 어색함을 감내해야 할 만큼 엉망이었던 것 같다.

시라유리는 손수건을 들고, 리앤은 와이셔츠의 옷 소매를 올려 붙여서 내 눈을 닦아주고 있었으니까.

 

 

 

“왓슨.”




너희는 내 눈을 닦아주며  말했다.



 

“우리는 그냥 당신과 함께 있으면 좋은 거에요.”

 

“햄버거 맛이라던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거지.”

 

“우리도 맛있는 게 뭔지 알아요.”

 

“이왕이면 분위기 좋은 곳에서 먹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여기 남아서 이렇게 함께 웃고 떠들고, 옛날에 먹었던 음식을 다시 추억하는 건.”

 

“일 분이라도 왓슨과 함께 있기 위해서야.”

 

 

 

둘은 조용히,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니 차마 햄버거를 입에 다 넣지 못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할 다른 친구가 눈 앞에 아른거렸으니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그 친구가. 

 


 

“이보게, 왓슨. 또 혼자서 그런 걸 먹고 있는 건가?

이왕 먹을 거면 같이 먹지 그러나. 이번 사건 잘 터져서 돈도 짭짤하게 벌었는데.”

 

‘... ... 잘 지내냐, 셜록.’

 

“그럼 못 지내겠나? 난 일생일대의 업적을 이뤘다네! 바로 자네 때문에!

그런데도 만족 못하면 그건 욕심쟁이지. 내가 좀 속물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비뚤어지진 않았네!”

 

‘... ... 멍청한 녀석...’

 

“난 내 삶에 제법 자부심을 느낀다만.”

 

‘그냥 좀 요령껏 살지 그랬어. 세상에 나쁜 기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냥 좀... 평범하게 살지 그랬어.

그러다가 죽었잖아. 바보 같은 놈...’

 

“... 그럴 지도 모르지.”

 

 

 

셜록이 내 눈 앞에 쭈구려 앉았다.

 

 

 

“하지만 말이다. 친구.

그랬다간 자네랑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 ...’

 

“난 편히 살지 못해서 아쉬운 게 아니다.

내 친구들과 더 오래 살지 못해서 아쉬운 거지. 늙어서 내 잘난 친구 엉덩이 한 번 차는 게 소원이었는데.”

 

‘... ... 크흐흐.’

 

“그러니까 질질 짜지 말고 어여 가게.

적어도 자네 마음 속에는 내가 있지 않겠나? 뻔한 대답이긴 하지만 그게 정답일 때도 있는 법이지.”

 

 

 

그리 말하곤 스륵, 사라진다.

죽은 사람이기에 그렇게 흩어진다. 멸망해가는 세계이기에 우린 그렇게 사라졌다.

 

또는 죽을 사람이라.

옆에 있는 시라유리를 흘겨 보았다.

 

 

 

“...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면 예뻐서?”

 

“... 맞아. 예뻐서.”

 

“하하, 그래요. 내가 농담을...

... ??”

 

“예뻐서 봤다. 예뻐서.”

 

 

 

난 진담인지 뭔지 모를 농담을 던졌고, 시라유리는 베시시 웃으면서 뺨을 붉혔다.

 

처음이었다. 내 농담에 당황하는 시라유리는 본 것은.

 

 

 

“... 정말이지. 이런 능구렁이 같은 사람은 옆에 딱 붙어서 감시해줘야 하는데.

...

... 생각해보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요. 나도 영상 편지 하나 남겨야겠어요.”

 

“방법? 무슨...”

 

“저 밖에 있는 시라유리 양.

제 얘기를 듣고 있나요?”

 

 

 

시라유리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겠죠?

아무래도 저는 밖에 못 나갈 것 같으니, 저를 대신해서 왓슨, 아니, 당신의 사령관님을 잘 지켜주세요.

꼭 저보다 나은 친구가 되어주셔야 해요. 아셨죠?”

 

 

 

그녀는 다시 한 번 나를 보았고, 울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웃고 있었다. 더 이상 슬픔에 허우적대는 그녀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뭐라고 대답할 지 뻔하겠군요.

못하겠다. 나 같이 음습하고 스파이 노릇이나 잘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친구는 무슨 친구냐

맞아요. 우리는 음습하고 음흉한 짓 잘하는 바이오로이드죠. 하지만 당신 사령관님은 생각보다 허술해서 은근 쉽게 마음을 열어요.”

 

“가끔은 기관에서 만들었던 콩 통조림도 먹여보세요. 그럼 좋다고 게걸스럽게 먹을 걸요? 껍질 걸리는 건 신경도 안 쓰고.

물 마시는 건 또 어떻고요? 벌컥벌컥 잘 마시니까 원하면 최음제나 수면제 같은 걸 넣어서 먹여보세요.

아 참, 청소를 할 때는 꼭 옷 개는 것부터 하는 사람이니까 알고 계시고.

옷은 주머니가 있는 부분부터 접어요. 뭔가 감추는 게 많은 사람의 특징인데, 제가 이 정보를 얻으려고 얼마나 관찰하고 다녔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에요.”

 

“수저보단 젓가락을 잘 쓰고, 하루에 끼니 한 번 정도는 걸러도 상관 없고,

밤에 잘 때 보니까 묶은 머리를 하고 자는 것보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려 놓으면 더 자주 껴안아요. 

여자가 주변에 그렇게 많아도 생머리는 참 좋아하더군요.

안길 때는 품 안에 와락 안기는 걸 좋아하고, 키스할 때도 분위기 잡고 하면 처음부터 혀를 넣진 않는 젠틀한 남자니까 한 번 대시 해보세요.

그 이상의 야릇한 데이터는... 아직 경험 부족이라 말하기게 애매하네요. 후후.”

 

 

 

한 마디, 또 한 마디,

시라유리의 입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건 하나의 유언이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삶을 이어나가 주길 바라는 한 하루살이의 말. 친구를 위한 말.

 

 

 

“전 왓슨과 처음 만났을 때 활을 겨눴었어요.

최악이었죠. 진짜 그 이상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으니까 적어도 당신은 저보다 훨씬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거에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줘요.

행복하세요. 왓슨이나, 저나,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자기가 행복해지도록 노력하세요.”

 

“그래야 왓슨도 행복해질 테니까. 이 바보는 주변에 침울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못 웃는 병이 있나봐요

아무튼, 행복해지라고 하는 거니까 이 비싼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뿌리는 거에요. 

이 정보의 가치, 당신이라면 알겠죠?”

 

 

 

하늘의 별이 알겠다는 듯이 반짝거렸다.

멈췄던 균열도 어느새 다시 열리기 시작했고, 버틸 만큼 버틴 세계가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일렁였다.

 

나와 리앤의 몸은 서서히 밝은 빛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라유리는 아니었다. 검게 변하는 세계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그 속에서 반쯤 남은 햄버거를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래요. 왓슨. 아니, 어딘가에 있을 우리의 사령관님.

이렇게 떠날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어요.”

 

“... ...”

 

“그래서 이별하는 날이 되면 당신이 슬퍼해주길 바랬어요. 하지만 동시에 슬퍼하지 않길 바래기도 했죠. 

어느 하나가 진실이면 다른 하나가 거짓이니 제 꿈은 모순 덩어리였군요. 바보 같게도.”

 

 

 

리앤은 내 등을 누르며 먼저 하늘 위로 올라갔다.

덕분에 나는 아직 땅에 내 발을 붙일 수 있었다.

 

시라유리가 햄버거를 땅에 떨어뜨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이별하게 되는 날, 게임 속 캐릭터가 당신에게 잘 가라 인사해줄지, 아니면 가지 말라며 붙잡을 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 모든 캐릭터가 결국에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을 거에요.”

 



시라유리.

너는 나를 대신해 숨을 들이마셨다.


길게, 그리고 더 깊게,

하나의 꽃봉우리가 최후의 숨을 내셨다.




“이왕 갈 거라면 잘 가세요.

사랑하는 내 친구.”

 

“... ... 사랑해.”

 

“저도요.”

 

 

 

세계가 흐릿해졌다.

하늘이 검게, 0과 1로 순환한다.

나를 마지막으로 붙잡은 아이의 손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햄버거 향기만 흐릿하게 남은, 어떤 벚꽃의 이야기.

베드 엔딩으로 끝날 그 이야기 끝에서 벚꽃은 마지막으로 한 번, 화사하게 피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흐린 기억은,

아주 선명한 한 장의 꽃잎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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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어쩌면 오늘.


이왕 갈 거라면, 잘 가세요. 사령관님.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