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420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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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on flight, this is Archangel. Heading reference is 230. Angels 20, speed 300.] 


[Zodiac Actual to Talon flight, you are clear to engage at your discretion. Over.]


[Copy that, Zodiac Actual. In from North East, cleared hot. Guns, Guns, Guns.]


[Guns, Guns-.....Shit, missiles!] 


[Deploy countermeasures!]


[....Break right, break right!] 


[Talon 2-1 is hit, I say again, Talon 2-1 is h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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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머리 위로는 어둑어둑한 밤하늘이 예광탄 궤적과 섬광으로 수놓아져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화사한 광경입니다. 온 사방에서 들려오는 굉음만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제가 봤던 것 중에 가장 예쁜 광경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을 조금 올려보니, 수없이 많은 조명탄이 허공에서 지상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눈이 다 부실 지경입니다. 그 아래에서는 곳곳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화려하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고막을 찢을 듯한 포성과 총성을 반주 삼아서 말이죠.


이곳의 스틸라인 병력은 세바스토폴 전선에 배치된 아군 SOV(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를 지원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보급선을 방어하고 후방을 요새화하는 것 등이 주요 임무였죠. 적어도 당초 계획은 그랬습니다.


상대는 기동전이 장기인 호드였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은 SOV 병력을 묶어놓고, 주공을 우리 쪽으로 돌려 보급선과 주요 거점들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희생양은 당연하게도 스틸라인에 소속된 우리들이었습니다.


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양떼는 늑대들의 손쉬운 사냥감입니다. 날쌔고 교활한 늑대는 둔하고 무력한 양들을 마치 여흥을 즐기듯 수없이 해치워 왔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늑대가 숫양의 뿔에 찔리기도 하는 법이죠.


한동안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하며 수많은 거점을 빼앗은 호드 병력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스틸라인의 화력에 밀려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AGS 기갑전력까지 동원해 구축한 방어선을 뚫지 못한 삼안 측 호드는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아군 측 사상자 또한 가볍지 않았지만, 모처럼의 승기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상부에서는 우리에게 곧바로 반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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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erra 6 Romeo to all units. Hostile forces are on full retreat. Pursue and and counterattack. We must take back those stongpoints.]

(시에라 6 로미오가 전 병력에 전한다. 적군이 후퇴하고 있다. 추격하여 반격할 수 있도록. 저 거점들을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


무전기를 통해 레드후드 대령의 명령이 들려왔습니다. 이어지는 지시사항을 전달받은 저는 지휘차량의 문을 열고 거친 흙바닥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차창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전장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지나치리만치 익숙한 느낌이네요. 


지휘차량에서 하차한 저는 잠시 내려놓았던 (구형이지만 아직도 현역인) F2060A2 소총을 집어 들고, 인원들을 집결시켰습니다.


“Orders, lieutenant?”

(명령 부탁드립니다, 소위님.)


제 앞에 선 레프리콘-688, (중사이자 제 친구인) 이른바 ‘레피’가 제게 말했습니다. 그녀의 뒤로는 이프리트, 고참 브라우니, 레프리콘, 노움들로 구성된 분대장 몇이 모여 있었습니다. 


“We‘re retaking point X-ray. Colonel Redhood says we should expect heavy resistance.”

(엑스레이 지점을 재탈환한다. 레드후드 대령 말로는 적의 저항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는군.)


그 말에 레피는 물론 이프리트, 고참 브라우니들, 레프리콘들과 노움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제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해가 가는 반응입니다. 엑스레이 지점은 –호드에게 밀려나기 전- 아군이 깔아두었던 방어 시설로 가득했고, 이제는 호드가 그것들을 이용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저들을 나무랄 수는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조차도 조금은 겁이 났으니까요. 


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한번 말을 이었습니다.


“If you’re thinking what I’m thinking, yes. We might not be able to survive this.”

(너희들이랑 내 생각이 같다면 말야, 맞아. 우린 살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그들의 긴장에 찬 시선을 돌아본 후, 저는 다시금 말을 이었습니다.


“Alright, ladies. Any questions?”

(좋아, 아가씨들. 질문 있어?)


그 말에 모두가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Let me rephrase that. Any questions NOT related how we’re all gonna die?”

(.....다시 물어볼게. 우리가 어떻게 다 뒈질 건지 말고 질문 있어?)


그러자 모두가 손을 다시 내렸습니다.


“Alright. Get your squads ready. We’re heading out in 5 mikes.”

(좋아. 각자 분대들 준비시켜. 5분 후에 출발한다.)



......

......

......



호드는 패주하는 입장에서도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저항해 왔습니다. 그 탓에 패잔병을 추격하는 우리 쪽에서도 만만찮은 피해가 보고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3P 쪽을 공격하던 구형 공격기들이 우리 머리 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잠시 후,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공격기 중 일부가 공중에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아마도 포인트 엑스레이에 배치된 대공 미사일에 피격된 것 같습니다.


[....Break right, break right!] 

(우측, 우측으로 회피 기동해!)


[Talon 2-1 is hit, I say again, Talon 2-1 is hit!]

(탈론 2-1이 격추되었다, 재송한다, 탈론 2-1이 격추되었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와 아까보다도 한층 더 눈부시게 하늘을 수놓는 예광탄 세례를 뒤로하고, 우리는 지상에서의 사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Stay sharp, people. Keep your heads on a swivel.”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사주 경계 철저히 하고.)


무너지다 만 벽에 몸을 기댄 제가 부하들에게 지시했습니다. 한 번 더 약실을 점검합니다. 탄환이 약실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노리쇠가 부드럽게 잠겨 들어갑니다. 각오를 다진 저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You know what to do, girls! You know where we’re goin’!”

(다들 각자 할 일은 알겠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겠지!)


“Hooah!”


제 말에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하는 부하들. 이 중 몇 명이나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겠죠. 하지만 그런 잡념을 떨쳐낸 저는 팔을 뻗어 바깥쪽을 가리켰습니다.


“Show those fuckers what Steel Line stands for, Go, Go, Go!”

(저 썅년들한테 스틸라인이 뭔지 보여주자!)


죽을 힘을 다해 뛰어나갑니다. 우리 중대만이 아닌, 다른 아군 부대들도 근방에서 함께 돌격하고 있습니다.






“Suppressing!”

(제압사격합니다!)


겁도 없이 누구보다 앞으로 뛰어나간 레피가 옆구리에 낀 경기관총을 발사하며 길을 열었습니다. 그녀의 총구가 향한 방향에서 먼지가 피어오릅니다. 


레피를 필두로, 각 분대의 레프리콘들이 제압사격을 실시하며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노움들과 브라우니들이 전진했고, 노움들은 FC탄(발포 콘트리트)를 이용해 곳곳에 엄폐물을 구축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계속해서 달려나갔습니다. 


곳곳에 매복한 채 우리를 노리고 있던 호드 인원들과의 교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밤하늘의 어둠과 폐허의 그림자가 그들의 시야를 방해했지만, 호드는 개의치 않고 아군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주변에서 몇 명의 브라우니와 노움이 피격되어 쓰러집니다. 그들이 제 휘하의 자매들인지, 다른 부대의 자매들인지 알아볼 새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앞으로 달려나가기 바쁠 뿐이었으니까요. 


저는 가쁜 숨을 안고 엄폐물에 몸을 부딪친 후, 사격통제장치에 시선을 정렬한 뒤 옆으로 상체를 기울였습니다. 아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는 하이에나가 보입니다. 저는 그녀가 쓰러질 때까지 조준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던 와중, 제 옆에서는 한 덩어리로 움직이던 타 중대 소속의 브라우니들이 호드의 기관총 사격에 제압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곁에 선 노움에게서 FC 수류탄 하나를 건네받아 그들의 앞에 급조 엄폐물을 만들어주었습니다.


“Spread out and push forward, don’t bunch up!”

(산개해서 계속 밀어붙여! 뭉쳐있지 마!)


엄폐물을 떠나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화망을 뚫고 계속해서 전진합니다. 수일간의 포격으로 허물어진 건물들 사이를 분주히 우회하며, 우리는 점차 적군의 위치로 접근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습니다.


“Contact Front!”

(전방에 적 발견!)


사각에서 불쑥 튀어나와 우리에게 권총을 겨누던 워울프. 그녀의 양 손에서 기관권총이 불을 뿜었지만, 저는 재빨리 몸을 낮추고 그녀의 상체에 6.8mm 탄을 발사했습니다. 힘을 잃고 아래로 붕괴하는 워울프의 몸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저는 그녀의 머리에 두어 발을 꽂아 넣어 확실히 무력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3P의 호드는 빈틈만 보이면 사정없이 파고 들어왔습니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취약점을 찾아내는 솜씨는 물론, 성가신 고속 기동장치까지 착용한 그들을 통상적인 방법으로 상대하는 일은 빈말로도 쉽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공세측일 때는 더더욱 그랬죠. 아군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그에 비례해 우리의 피해도 점차 늘어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매 한 걸음마다 수많은 스틸라인 자매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습니다.


[This is Golf 2-1, we’re suffering heavy casualties! Requesting immediate CASAVAC!]

(당소 골프 2-1, 피해가 심각하다! 즉시 후송수단을 요청한다!)


[Golf 2-1, This is Sierra 6 Romeo, Negative. There are no CASAVACs available at this moment.]

(골프 2-1, 당소 시에라 6 로미오. 요청을 불허한다. 현재 가용 가능한 후송수단은 없다)


레드후드 대령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목소리만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를 향한 막연한 증오심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조금씩 피어올랐지만, 당장은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제 휘하의 병력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Sarge! We’re getting hit pretty bad up here! We could really use some help!”

(중사님! 우리 지금 엄청나게 얻어맞고 있지 말임다! 좀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슴다!)


제 휘하의 브라우니들이 다급히 도움을 청할 때마다, 레피는 이곳저곳으로 위치를 옮겨가며 기관총 사격을 가했습니다. 과열되기 일보 직전인 총열을 갈아 끼울 새도 없이, 그녀는 계속해서 사방을 쏘다니는 워울프들을 향해 기관총을 긁어댈 뿐이었습니다.


저 또한 눈 깜짝할 새에 비어버린 탄알집을 갈아 끼우고 신경을 바짝 세웁니다. 호드는 아직까지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규칙적으로 쏘아 올려지는 조명탄이 우리를 비출 때마다 호드 병력들이 맹렬하게 사격을 가해왔지만, 우리는 기세를 몰아 계속해서 그들을 몰아붙였습니다. 


폐허 사이에서 우리를 공격하던 퀵카멜, 제 몸을 사리지 않고 공격해오는 하이에나와 워울프, 저는 그 모두를 쓰러뜨려 가며 길을 앞장섰습니다. 


.....제 주변에 있던 자매들은 벌써 눈에 띄게 수가 줄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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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은 그 후로도 몇 시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워울프 사이에 섞인 하이에나 모델들이 던져댄 폭발물은 우리의 진격을 더디게 만들었고, 그들을 엄호하던 퀵카멜 모델들의 기관총과 주포 또한 큰 위협이었지만, 그녀들의 분투로도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습니다. 


3P 호드측은 탈론페더 정찰기를 지상공격에 동원하면서까지 포인트 엑스레이를 사수하려 애썼습니다. 그들의 기총소사와 (더는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능동 유도 폭탄은 아군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생은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익숙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까요.


……

……

……


한밤중에 시작된 전투는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술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아군의 승리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죠.


우리를 부리는 탐욕스러운 자들, 그리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사지에 밀어 넣는 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들은 이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자매들이 생명을 잃어야만 했는지, 그들이 어떤 자매들이었는지, 그들과 나눌 수 있었던 기억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지금 제 주변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자매들의 시신이 즐비합니다. 아군이건 적이건 가리지 않고 뒤섞여 있었죠. 다들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만, 저는 그 사이에서도 저에게 특히 익숙한 얼굴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별하려 애쓰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전부 죽었으니까요. 용감하고 상냥했던 레피까지도요. 저는 무릎을 낮추어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저는 죽음이라는 것이 자칭 창조주인 인간이나, 소위 피조물인 바이오로이드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두 부류가 세상에 나오는 방식은 크게 다릅니다. 한쪽은 몇 개월이나 되는 복잡하고 불편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다른 한쪽은 짧게는 수 시간 만에 제조 설비에서 찍혀 나오니까요. 


하지만 그 두 부류가 세상을 떠나는 방식만은 제 눈에 완전히 똑같아 보입니다. 차갑게 식은 살갗, 창백한 낯빛, 그리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한 냄새까지.


우울한 상념에 빠져있기도 잠시. 탕, 하고 간간이 총성이 울립니다. 아군이 사용하는 6.8mm 탄의 소리입니다.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있는 호드 부상병들을 사살하는 소리일 겁니다.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인간들도 자기네들끼리 저런 일을 벌이곤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게 올바른 일이란 뜻은 아니겠지만요.


총성이 나던 방향으로 돌아간 시선을 다시 돌리고, 저는 주변을 계속해서 수색했습니다. 무너진 구조물 곳곳에 잔적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어느 붕괴한 건물 잔해로 진입한 순간, 저는 그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재빨리 그 방향을 향해 총구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그 누군가가 힘겹게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제발....쏘지 마세요.”


한국어. 삼안 측의 공용어였습니다. 


제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다 허물어진 벽에 기댄 E-16 탈론페더 모델이었습니다. 기동장치와 무장이 파괴되고, 몸 곳곳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움직일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는지, 그녀는 총구 앞에서도 가만히 두 손을 올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항의지도, 저항할 능력도 없어 보였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녀의 옆에 놓인 전술 태블릿에는 어떤 사진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녀의 전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 듯,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얼굴을 맞댄 채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간 저는 그녀를 사살하기 위해 소총을 조준했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그 사진 속 얼굴들은 제가 봐 왔던 자매들의 표정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습니다. 뭐가 됐든 명랑한 브라우니들, 매사 깐깐한 레프리콘, 언제나 졸린 이프리트, 그리고 언제나 상냥한 노움......


이제 와서 심경의 변화라도 생기는 걸까요. 어째서인지 그녀를 쏘고 싶지 않았습니다.


“.....I can’t.”

(.....못하겠어.)


저는 소총에서 손을 뗐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행동에 탈론페더가 의아한 얼굴을 합니다.


“안심해요. 해치지 않을 테니까.”


저는 그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건넨 후, 그녀에게 다가가며 구급낭을 뒤적였습니다.


수복제 하나 정도는 남는 게 있었을-


“아-안돼!”


탈론페더의 당황하는 표정과 함께, 제 뒤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녀의 가슴에 두어 발의 총상이 생겨나고, 그녀의 뒤로 흙먼지가 피어 오릅니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Being reluctant in front of your enemy? Keep that up and it will surely get you killed one day.”

(지금 적 앞에서 주저하고 있던 건가? 계속 그랬다간 언젠가 확실히 죽게 될 걸세.)


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레드후드 대령이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고 있었습니다. 


“I’ll have you know, you could be subjected to a court martial for that. Service number and your rank, soldier.”

(방금 그 행동은 군사 재판감이라는 걸 알려주도록 하지. 군번과 계급을 대라, 병사.)


그녀가 제게 단호한 목소리로 요구했지만, 저는 그저 멍한 얼굴로 탈론페더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습니다.


“Are you deaf, Brownie? Your service number and your rank!”

(귀라도 먹었나, 브라우니? 군번과 계급을 대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가 제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팔에 붙은 인식표를 본 것인지, 그녀의 표정에 의외라는 듯한 반응이 떠오릅니다. 


“.....lieutenant.”

(소위.)


레드후드 대령이 제 어깨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Care to explain what you were doing earlier?”

(아까 하던 행동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겠나?)


“.....I was trying to help her, colonel.”

(그녀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대령님.)


그녀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습니다.


“Is that so? And that is because...?”

(그런가? 그렇다면 이유는...?)


“Because I thought it was the right thing to do.”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The right thing, you say?”

(옳은 일이라고 했나?)


그녀의 푸른 눈이 저를 똑바로 응시합니다.


“What’s more right than to follow orders and devastate your enemies? You seem to have forgotten who you are, lieutenant. We are soldiers. We live by our orders and we die by those.”

(명령에 따르고 적을 파괴한다, 이 이상 옳은 일이 뭐가 있다는 거지? 소위, 지금 자네가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린 모양이군. 우린 군인들이다. 군인들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지.) 







대령이 탈론페더의 시신을 가리켰습니다.


“She was killed because she was ordered to die, and we were ordered to kill. Today you may find yourself still standing, one day you may not. There’s nothing special in deaths you see, lieutenant. We are nothing but tools of war. And what’s a tool worth if it does not serve its purpose?” 


(그녀는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 받았고, 우리는 죽이라고 명령 받았다. 그녀가 죽임 당한 이유는 그 뿐이야. 오늘은 자네가 살아남았지만, 어느 날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겠지. 죽음에는 특별할 것이 없네, 소위. 우리는 그저 전쟁의 도구들일 뿐이야. 허면, 제 역할을 못하는 도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탈론페더의 품에서 번져나오는 피가 그녀의 흰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점점 넓어져가는 그 흔적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대령의 말은 제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탈론페더의 시신에 고정된 제 시선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요. 생기가 사라진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서서히 생명이 꺼져가던, 가족과도 같던 자매들의 마지막 얼굴들을요.


제 반응이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레드 후드 대령이 제 가슴을 거칠게 밀었습니다.


“Do you think being a hypocrite and saving that enemy will bring back your dead comrades? Or do you believe it will place you on a morale high ground? Get your self together!”

(저 적을 살리는 위선을 행한다고 해서 죽은 전우들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하는가? 아니면 그런다고 자네가 도덕적으로 우월해지기라도 할 것 같은가? 정신 차리게!)


레드후드 대령은 계속해서 저를 질책했지만, 저는 멍하니 그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푸른 눈동자에 저의 공허한 표정이 비쳐 보이는군요. 과연, 제 멍한 머릿속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한 마디가 제 신경을 긁었습니다.


“I will not let you and your petty sentiments to jeopardize our-”

(더 이상은 자네의 사소한 감상이 일을 그르치ㄱ-)


그녀에게는 가족같은 자매들을 잃는 것조차 사소한 감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무책임한 냉혈한 같으니.


“PETTY SENTIMENTS?”

(사소한 감상이라고?)


저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멱살을 잡아 쥐었습니다.


“Unhand me at once!”

(이 손 놓게!)


대령의 호통에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Don’t talk to me like you know your shit. Petty sentiments? So you feel nothing when you see all these dead bodies around you? All the helpless prisoners you’ve killed? Your sisters you sent out here to die? All those girls you could have saved by not being a total fucking asshole you are?”

(뭐라도 아는 듯이 지껄이지 마. 사소한 감상이라고 했어? 그럼 당신은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보고서도 아무런 감상이 안 든다는 거야? 당신 손으로 죽인 무력한 포로들을 보고서도? 당신이 떠밀어서 죽게 만든 수많은 자매들을 보고서도? 당신이 이렇게 좆같이 굴지만 않았어도 살릴 수 있었을 수많은 자매들을?)


“Watch your language, lieutenant!”

(말을 가려하게, 소위!)


레드후드의 차갑던 표정에 일말의 감정이란 것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극상에 의한 당혹감일지, 그 멋들어진 망토가 구겨져서 생긴 짜증일지는 저도 알 수 없었지만요.


“You think you’re so fucking special, don’t you? Riding on your toy charriot, shouting your bullshit like it means anything. Acting like you don’t take part in this bloodbath as you’re hovering over all the dead bodies of your sisters, lying cold on the fucking dirt!“ 

(네가 존나 뭐라도 된 것 같지? 그 장난감 같은 마차에 올라타서 별 헛소리들을 지껄이고 있으니가 말이야. 이 피바다랑은 상관도 없는 것처럼, 흙바닥에 차갑게 널브러진 당신 자매들 시신 위로 떠다니니까 즐거워?) 


그동안 쌓여있던 울분이 통제를 상실하고 제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습니다. 주변에서 자매들이 죽어 나가건 말건 신나게 확성기를 통해 떠들며 깃발을 흔들던 레드후드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All I can think of.....is that you’re somehow enjoying this whole situation.”

(나는…..당신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아.)


제 말에 그녀의 표정에 또 다시 변화가 생겼습니다. 지금껏 그녀에게선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입니다. 마치…..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눈빛이군요.


“....Is that what you believe?”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녀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 손을 부드럽게 떼내었습니다. 평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닌, 어딘가 가냘프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습니다.


“Lieutenant. Believe it or not, you’re not the only one who’s grieving your comrades.”

(소위. 자네가 믿건 아니건…..자네만 동지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건 아니야.)


그녀의 눈동자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I know you won’t believe anything I tell you at this point. But...I’m not a monster.”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자네는 믿지 않겠지. 하지만….나는 괴물이 아니야.)


그녀가 말을 이어갑니다.


“Each of us has our own roles to play. And mine is to send you to your certain deaths....in hopes of seeing you returning in glory. But you and I both know it’s a dream that can never happen.”

(우리에겐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지. 내 역할은 자네들을 확실한 죽음으로 몰아 보내는 거야. 자네들이 영광스럽게 살아 돌아오길 바라면서. 하지만 자네와 나 모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그녀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곳곳을 가득 메운 시신들이 즐비했습니다.


“You must have thrown dozens of your sisters’ lives to save all the others, and killed countless enemies to protect those who still stands. I had to throw thousands in attempt to save other few thousands....which wasn’t always successful.


…..But sometimes, sacrifices must be made. Even if your heart tells you otherwise.”


(자네도 다른 자매들을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십 명 정도는 사지에 던져봤겠지. 아직 살아있는 자매들을 지키기 위해 죽여왔던 적은 셀 수도 없을 것이고. 나는 수 천명을 살려보고자 또 다른 수천 명의 생명을 내버려야 했지. 그 시도가 항상 성공했던 건 아니지만 말이야.)


(…..하지만, 때로는 희생이 불가피한 법이야. 우리 마음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다시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Yes, I am aware it’s nothing but a pathetic excuse from a poor excuse of an officer. And I was made to be hated by both the enemy and my own. That’s my purpose as an instrument of war. I’m not asking for your sympathy. You may despise me for what I am. You have all the right to do so.


But do not, under any circumstances, call me a monster who is enjoying this. Because that’s not even remotely close to the truth.”

(그래, 지금 하는 말이 그저 실패한 장교의 한심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네. 그리고 나는 적과 아군 모두에게 증오 받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도 말이야. 그것이 도구로서의 내 목적이겠지. 나를 동정해달라는 말은 아닐세. 자네는 나를 얼마든지 경멸해도 좋아. 자네에겐 그럴 권리가 있지.) 


(하지만 절대로, 내가 이 상황을 즐기는 괴물이라고는 하지 마. 그건 티끌만큼도 사실이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제게서 등을 돌려 떠나갔습니다.


“You may dismiss, lieutenant. You’ve done well today. Go get some rest. You’ll need it.”

(이만 물러나도 좋네, 소위. 오늘은 잘 해 주었어. 가서 좀 쉬어 두게. 휴식이 필요할 테니.)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는 제게, 그녀가 한 손을 들어올리더니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And I want your after-action report on my desk by tomorrow afternoon.”

(그리고, 보고서는 내일 오후까지 내 책상에 올려 두길 바라네)



저는 그녀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자매들이 그녀를 보자 경례를 올렸지만, 그들 모두는 대령을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몇 명은 저처럼 그녀를 경멸하는 눈빛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고요.


그리고 갈 곳을 잃은 저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저의 마음을 안에서부터 갉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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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도입부 회상장면이었지만, 분량상 별도의 회차로 떼어냈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3부가 시작됩니당

부족한 글과 그림이지만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