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의 움직임이 멈춘 조용한 새벽.

누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심한 표정과 목소리를 하며 그가 눈 앞에 있는 한 소녀를 향해 말을 꺼냈다.

붉은 색과 하얀색이 적절히 섞여 있는듯이, 마치 어디에서 나올법한 종교인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금발의 소녀는

이미 그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 없이 고갤 끄덕였다.


"...뭐야. 알고 있었던거야?"


소녀가 고갤 끄덕이자 방금까지 무심했던 표정을 지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는 달리 소녀의 표정은 한 없이 어두워지기만 했다.


깊은 심해 속에 들어와 있는 오르카보다도 더욱 깊은 어둠을 느낄 것만 같은 표정을 한 채

소녀는 제대로 입도 열지 못한 채, 떨면서 말을 꺼냈다.


"폐하... 어째서.. 숨겨두고 계셨나요.."


책을 쥐고 있는 손이 떨려왔다.

항상 밝게 빛나고만 있을 것 같은 불빛도 같이 떨려왔다.

아름답게 빛나는 금발도, 붉은 옷도, 얇은 팔 다리도 전부.

두려움이나 공포라도 느끼고 있는 듯이 모든 것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떨려오는 아르망을 보며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이런거 밝혀봤자 좋을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폐하.."


편안해보일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는 그를 보자 아르망은 더 말하지 못했다.

사실, 아르망도 그가 숨겨야 하는 것을 숨겨야만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르망은 오르카에 오고 난 뒤로 줄곧 사령관을 보좌하며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가 볼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정보를 직접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도 빠르게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안하다. 너에게 할 수 있는게.. 이 것 말고는 없어서."


그렇다고 아르망이 뛰어난 지능을 사용해 모든것을 예측하고 막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처럼, 그가 홀로 떠안고 있는 이 사태처럼. 그녀가 알고 있어도 절대로 대처할 수 없는 일도 존재했다.


아르망은 자신의 무력함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무게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고 앞으로 더 짊어질 수 밖에 없는 무게를 아르망은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무게를 자신이 대신 짊어질 수 없고 오히려 무게를 더욱 늘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막을 수 없는 '예정된 미래'였기에..


지금 아르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한 개도 존재치 않았다.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폐하가.. 그런 말을 하시는건가요.."


자신에 대한 무력함과 분노, 앞으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두려움과 상실감

그가 없어지면 닥치는 미래에 대한 폭력적일 정도의 공포.. 모든 감정이 뒤섞여

검은색이 되어버린 아르망의 마음은 그녀의 몸이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상태로 변했다.


그리고 동시에 감정이 격해진 아르망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고 주저 앉은 채로 말했다.


"이건.. 폐하의 잘못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고통받는것은 폐하가 되어야만 하냐고요!"


 항상 따듯하고 이성적이던 아르망이, 사령관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지략을 사용하며 그를 놀라게 했던 그 똑똑했던 아르망이

지금 모든것을 내던지고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르망이 이 사실을 알기 전부터 모든 것을 끌어안고, 짊어지고 있었던 사령관은 아르망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하지 않아도 일은 생겨났고 그 일이 일어난 후에 대한 모든 무게는 자신이 짊어져야하는 고통을

최소한 단 하나라도 바꾸려 했지만 손을 써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을, 앞으로 있을 두려움과 공포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울고 있는 아르망에게로 향했고 그대로 아르망을 품에 넣었다.


"너 만큼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어.. 난 너희들을 위해 살기로 했으니까.."


"폐하께서.. 폐하께서 저희들을 위해 살기로 하셨다면..! 흐윽.. 먼저.. 폐하 자신의 안위부터.. 챙겨주세요..! 폐하가 없으면 저희들은.. 저는..!"



"더는 버티지 못해요.. 부디.. 폐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 된 아르망의 말이 그의 귀에 닿았다.

품 속에 있는 아르망은 이젠 스스로를 끌어안지 않고 그의 옷을 잡고 그의 품 안에서 그를 위해 울고 있었다.

아무리 아르망이 무력감을 느껴도 공포를 느껴도 모든 것은 사령관이 짊어질 무게.


그 무게를 견딜 사령관을 위해 이제 이전과는 다른 모습만을 보일 사령관을 위해 아르망은 눈물을 흘렸다.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는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러니 폐하.."


"..미안하다."


"..!! 폐하!"


"다시 말할게. 난 너희들에게 이 고통을 주고 싶지도 않고 느끼게 해주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난 너희들에게 처음부터 구해질 때부터 너희들을 위해 살기로 했어. 그 따듯했던 미소와 앞으로 있을 행복을 위해 살기로 했었다고. 그러니까 아르망.."



"나를 위해 울지 말아줘."


아르망이 듣기에는 아주 날카롭게 아파오는 말을 한 뒤, 사령관은 품 안에 있는 아르망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선 엄지손가락으로 흐르고 있는 아르망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이젠 아르망의 온 몸이 품에 올 수 있게 끌어 안았다.


"너희들이 날 지키는 것처럼, 나도 아르망을 지킬게. 이 무게는.. 내가 짊어져야하는 거야."


"흐윽.. 폐.. 하..! 폐하..! 폐하..!!"


"....응. 여기있어."


그렇게 아르망과 사령관의 늦은 새벽은 떠오르는 밝은 태양빛과 함께 사라져갔다.

그가 이제부터 짊어져야할 거대한 무게.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