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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우리들은 행복해졌다


 용의 성채(Dragon hold).


 한반도 남부 다도해 부근에 세워진 그 플랜트는 오르카가 개척한 플랜트 가운데 가장 큰 곳이었다. 몇 개의 섬들을 연결해 커다란 인공 섬을 만들고, 그 주변의 땅들을 개척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반년 남짓. 그리고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곳은 용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다.


 세상에, 용의 성채라니. 중세 로망스 문학도 아니고.


 대장 회의 시간이 불현듯(?) 난입한 LRL이 ‘용이 있는 성이니 용의 성채가 당연하지 않겠느냐, 권속!’이라 외친 한마디가 결정타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 뒤 사령관이 던진 장난스러운 표결에 용을 제외한 전원이 한 표를 던지며 그게 정식 명칭으로 채택될 줄 또 누가 알았겠고……. 아무튼 그 용의 성채에서는 지금 축제 준비가 한창인 듯 시끌벅적했다.


 개중엔 조금 다른 의미로 시끌벅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스틸라인, 주목!”


 “주모오옥!”


 복창하는 스틸라인 대원들을 둘러보는 연대장 레드후드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독수리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아니 평소 이상으로 더 번득이고 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겠지. 표정 관리라면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 이프리트 병장마저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다는 가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연신 싱글벙글 웃는 브라우니와 그런 브라우니를 옆에서 뒤에서 쿡쿡 찌르며 안절부절 못하는 레프리콘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는 노움과 실키, 등 뒤의 낮은 웃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이를 득득 갈고 있는 임펫……. 단상 위에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는 레드후드의 마음속엔 자기만이라도 중심을 철저히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더욱 확고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임펫 원사.”


 “승리, 원사 임펫!”


 “오늘이 무슨 날이지?”


 “제1회 오르카 추수감사절입니다, 연대장님!”


 “음. 잘 말해주었다.”


 설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 과연 누가 있겠냐마는, 레드후드는 굳이 다 아는 사실을 임펫에게 말하게 하고선 다시 좌중들을 훑어봤다.


 “임펫 원사의 말대로, 오늘은 영광스러운 오르카의 제1회 추수감사절이다. 과거 인간님들께서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며 지낸 명절이지. 그럼 우리는 어느 분께 감사를 올려야겠는가?”


 “사령관님이십니다아아!”


 아마 조금만 더 분위기가 풀어져 있었더라면 이쯤에서 휘파람과 환호가 들렸으리라. 그러나 지금 레드후드 앞에서 그런 짓거리를 하느니 차라리 타이런트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게 훨씬 안전하다는 걸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중 몇몇 브라우니들은 진짜 그것도 모르는 모양인지 입을 오므렸지만, 비지땀을 흘리며 예의주시하던 레프리콘과 이프리트에 의해 그런 시도는 모두 무산됐다. 천만 다행히도 말이다.


 “그렇지. 이렇게 우리 저항군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다들 한자리에 무사히 모여 오늘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모두 사령관님의 솔선수범과 대장님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날을 위해 바쁜 일정을 소화해준 스틸라인의 모두에게도 심심한 감사는 표하는 바이다.”


 레드후드는 엄격하긴 해도 헛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몇 주 분량의 정찰과 소탕 작전, 물자 수색 등을 단 2주만에 소화하느라 스틸라인은 물론이요 오르카의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 뼈와 살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대수겠는가, 지금 오르카 최대의 축제가 코앞에 있는데!


 하늘도 이날을 굽어살피셨는지 날씨는 이보다도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가을의 한때였다. 하늘은 높았고, 저 너머에서는 웃음소리와 공연 리허설을 준비하는 유쾌한 소리와 함께 맛좋은 음식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겨 오고 있었다.


 “하지만.”


 꿀꺽


 물론 그렇다 해도 이 연설을 끝까지 하겠다는 레드후드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폭풍우나 눈보라 따위도 그녀의 훈련 의지를 꺾지 못했는데, 겨우 음식 냄새나 약간의 환호성 ‘따위’가 그녀의 의지를 꺾을 가능성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었다.


 “우리 스틸라인은 오르카 유일의 육군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전력이다. 물론 오늘을 위해 몇 차례나 안전에 안전을 기했지. 허나 만의 하나, 아니 억의 하나의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알겠나, 제군들? 스틸라인의 정신이 무엇인가!”


 “우리는 서서 죽는다아아!”


 오해를 살까봐 조금 첨언하자면, 지금 레드후드는 축제 전 당부 사항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철충이나 펙스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니라.


 “그래, 우리는 서서 죽는다! 맨 처음 싸움에 임하는 것도 우리고, 마지막으로 전장을 나오는 것 역시 우리 스틸라인이다! 각자 사령관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개인화기는 휴대할 것! 분대장과 간부들은 정기 보고에 특히 신경 쓰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아아앗!”


 훈련 때도 이 열의의 반만큼이라도 보여주면 좋을 것을. 레드후드는 악을 쓰는 건지 복창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브라우니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선 한마디 작게 내뱉고 단상을 내려봤다.


 “…해산.”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꾹꾹 억눌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함성.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는 레드후드의 등 뒤에선 연신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칠면조! 그거 진짜 새가 노움 상병님 가슴만 하다던데 사실임까?! 오늘 그거 먹을 수 있는 거지 말임다!”


 “아하하, 브, 브라우니가 표현이 독특하네요…….”


 “야, 브라우니! 너 이 새끼, 너 아까 휘파람 불려고 했지?! 너 오늘 기필코 내가 조지고 만다!”


 “흐히힉?! 이, 이프리트 병장님! 건 오햅니다, 오해!”


 “오해는 새끼야, 니 입이 오해고!”


 “참으세요, 이프리트 병장님……!”


 도망치는 브라우니와 달려드는 이프리트. 그리고 그걸 말리느라 진땀 빼는 노움과 레프리콘. 일단은 평화로운(?) 그 광경을, 마리를 비롯한 대장들은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나의 입에서 이죽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온 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아주 일장 연설을 하네. 누가 보면 축제가 아니라 전면전이라도 하러 나가는 줄 알겠어? 왜, 구운 칠면조가 포크랑 나이프 들고 어디 먹어볼 테면 먹어보라고 덤빌까봐 겁나?”


 “흠, 레드후드 연대장이 조금 열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 그렇다고 조심을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누가 조심을 하지 말재? 하더라도 요령 있게 하자는 거지.”


 슬쩍 들춘 레오나의 치맛자락 아래로는 예의 그 권총이 허벅지 홀스터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파란 가을 하늘과 잘 어울리는 흰색의 드레스. 거기에 옷과 잘 어울리는 하얀색의 넓은 챙 모자까지. 그야말로 평소의 전투복과는 다를 바 없는 마리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뭐 다른 대장들도 재주껏 편한 옷차림이었지만 말이다.


 “저 봐, 다른 부대도 전부 편한 차림이잖아.”


 “난 이 차림이 가장 편하다. 게다가, 아무리 각하께서 경계 인원도 없이 모두 참석하라 하셨어도 누군가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으니 말이지.”


 “어휴, 아니……. 그래, 그게 좋다면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는 레오나 옆에서 예상치 못한 기습처럼 누군가 불쑥 말했다. 칸이었다.


 “언짢게 듣지 마라, 마리. 레오나는 네가 안 꾸미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것뿐이니까.”


 “언짢기는 무슨. 레오나 대장의 솔직하지 못함은 정평이 나 있다네.”


 “저기요. 중간에 이상한 말 좀 집어넣지 말아 주실래요, 칸 대장님?”


 “실례. 통역에 실수가 있었나?”


 “…….”


 레오나가 얼굴만 붉히며 할말을 잃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자기가 군복을 입고 있는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듯 마리는 킬킬거렸다. 칸과 다른 대장 역시 그랬고 말이다. 졸지에 웃음거리가 된 레오나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사령관은? 모처럼 꾸몄는데 어디 있는 거야?”


 “아까까지 저쪽에 계셨다. 어디, 오드리랑 얘기하고 계시던데…….”


 “오드리? 용 대장이 아니라?”


 “용 대장이라면 저쪽에 있군. 하긴 자기 거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곳에서 축제가 열리니 신경이 쓰이겠지.”


 “…….”


 레오나의 눈에 공연용 무대 앞에서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용이 포착됐다. 덤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아르망이 다른 일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말이다. 용과 아르망이 저기 있다는 건, 적어도 사령관이 그녀들과 밀회 따위를 즐기러 모습을 감춘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잘난 사령관은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별로 안 좋은 의미로. 흡사 기분 좋게 잘 자다가 바닷속에 처박혀 깬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선 찬바람이 쌩하고 날 정도로 일어섰다.


 “난 가볼 테니 알아서들 잘 놀아.”


 “어딜?”


 “흥미가 식었어. 방에 가서 쉴래.”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칸이었다.


 “이해를 못 하겠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가?”


 “못 하겠으면 하지 마. 그리고 이 손 놔.”


 “사령관이 안 보여서 삐지기라도 한 건가?”


 “그 멍청이가 어디서 뭘 하건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이 손 놔. 짜증 나니까.”


 하지만 칸은 레오나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표현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칸도 레오나 이상 가는 쇠고집이었다. 괜히 둘이서 의외라고 할 만큼 죽이 잘 맞는 게 아니었다.


 “사령관을 믿어라, 레오나.”


 “…….”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는 무엇보다도 레오나의 불안감 한가운데를 겨냥한 말이었다.


 “사령관의 성격을 모르나? 애초에 이곳, 용의 성채에서 이 축제를 열자고 제안한 게 사령관이었다. 무슨 수가 있겠지.”


 “아하, 네 눈알에는 저 모습이 무슨 수가 있는 걸로 보이나 봐?”


 굳이 레오나가 가리키지 않아도 칸 역시 저쪽에 있는 용과 아르망을 본 참이었다. 둘 다 숨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둘의 사이가 그날 이후로 진전이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뻔했다.


 “수를 낼 거면 진작에 냈어야지. 얼굴도 비치지 않고 저게 뭐 하는 짓이야? 다같이 하하호호 웃다가 적당히 화해하자고 하면 뭐라도 될 줄 아는 거야? 실망이야. 엄청나게 실망이라고.”


 “침착해라. 사령관은 바보가 아니다.” 칸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정정했다. “아니 바보가 맞긴 하지. 하지만 어리석진 않다.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제 손으로 자기 여자들에게 상처 줄 정도로는.”


 “하, 상처 주지 않을 정도로는 어리석지 않다고? 얼마 전 그 꼴이 났는데도 그 말이 나와? 혹시 그때만 골라서 어디 다녀오셨어요, 칸 대장님?”


 “내 말은, ‘이 이상’ 상처 줄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는 뜻이었다.”


 “말꼬리 감추고 빠져나가는 건 그야말로 신속하기 그지없네?” 레오나가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사령관 변호나 실컷 해. 그런다고 너한테 눈길 하나 줄 거 같아? 나나 너나…….”


 “레오나.”


 칸이 조용히 레오나의 말을 끊었다.


 “진정해라.”


 “…….”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레오나를 담담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까와 같이, 담담하게.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고 사령관을 믿어라.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령관은 용과 아르망을 아낄 테니 말이다.”


 “…….”


 레오나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울지 마라.”


 칸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령관은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용도, 아르망도. 그리고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욕심쟁이니까.”


 “…….”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운 표정 지을 필요 없다. 아르망의 모습에…널 투영시킬 필요도 없고 말이다.”


 자기 속마음을 가장 들키기 싫은 사람이 자기 속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레오나는 그 이중적인 기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릴 수 없었다. 가면으로 가려놓은 불안감, 그 민낯을 보이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사령관을 믿어라, 끝까지. 아직 축제는 시작도 안 했다.”


 “…속상해.”


 “속상하겠지. 나도 그 기분 잘 안다.”


 레오나의 손에서 완전히 힘을 뺐다. 그제야 손을 놓은 칸은 계속 그녀를 다독였다.


 “일 끝난 다음에 사령관 골려 줄 궁리나 해라. 그편이 네게 더 어울리니까.”


 “…….”


 등을 돌린 채 레오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꼭 쥔 가녀린 손, 떨리는 고운 어깨.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칸은 그런 그녀의 등을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레오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레오나.”


 “5분만 기다려. 화장 고치고 올 테니까. 그리고…….”


 잠깐 멈춰 선 레오나는 칸이 겨우 들을 정도로 작고 빠르게 말했다.


 “조금 전에는 미안해. 본심이 아니었어.”


 과연 레오나라고 해야 할까.


 “사과를 참 못하는군.”


 “…동감이다.”


 거침없이 오르카로 향하는 레오나의 등을 바라보며, 칸과 마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실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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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령관은 손도 안 대고 여자를 울리는 놀라운 재주가 잇음니다


칸 대사가 맘에 드는군요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