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귀인, 아직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화방녀가 재의 귀인에게 나지막히 물어왔다. 


재의 귀인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고운 두 손으로 품고 있는 작은 불씨, 불을 일으키기는 커녕 더 이상 날릴 재조차 없는 저 초라한 태초의 불씨.


불을 일으킬 장작도 불씨를 품을 재도 남지 않은 불씨는 화방녀의 품속에서 꺼져가며 세상의 종말을 알리고 있었다. 


검붉은 색으로 타오르고 있던 하늘이 빛을 잃고 밤에 삼켜져 갔다. 


두 다리로 서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아 재의 귀인은 재가 수북히 쌓인 대지에 쓰러졌다. 


털썩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재들이 허공에 날렸다. 오랜 여정의 고단함에 대한 증표처럼 먼지와 때가 잔뜩 껴있던 그의 갑옷 안으로 재들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왕이시여, 찬탈자가 되어 주십시오.'

 

론돌의 유리아, 재의 귀인은 괜히 그녀가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망자의 왕이 되어 달라고 했었던 유리아. 몸에 어두운 구멍이 생길 때마다 흘러넘치던 그 힘에 재의 귀인은 혹해버렸고 알겠다고 답했었다. 


그러나 왕들의 화신을 쓰러뜨리고 태초의 불을 눈 앞에 두었을 때 그는 화방녀를 태초의 화로로 소환했다. 


요엘이 주었던 어두운 구멍들. 그것들은 이제 그의 몸에 없다. 화방녀에게 어둠을 거둘 힘을 주었고 눈동자를 주어 태초의 불을 거두게 했다. 


몸에서 흘러넘치던 힘들을 모두 잃어버렸고 론돌의 세력에게 습격도 당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재의 귀인은 이성과 감정이 이끄는 선택을 했고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이제는 너무 무거워져버린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가 재의 귀인의 눈을 가려갔다.


그는  쓰러진 채로 화방녀에게 손을 뻗었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녀에게 닿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떨고 있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이 그녀에게 닿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팔이 무기력하게 떨어졌다. 눈꺼풀이 재의 귀인의 눈을 완전히 가림으로서 화방녀를 두 눈에 담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화방녀...아름다운 화방녀...


어쩌면 추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들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제사장, 그곳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들, 눈동자를 건네고 바뀌었던 그녀의 말.


아득한 회상에 잠기며 재의 귀인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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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러 면에서 많이 지쳐있었는데 글이나 쓰면서 위로 받으려고 돌아왔습니다. 6월 7일에 입대를 하기 때문에 그 전에 완결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