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모를 쓴다 = 거지런을 뛴다랑 같은 이야기라 사령관은 항상 고생하는 애들이 너무 고마운거지. 그래서 거지런을 뛰고 돌아온 아이한테는 그게 끝나면 최대의 편의를 봐주고 하고싶다고 어리광 피우는거 대부분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예를 들어 자원이 부족해져서 찐조가 312를 일주일 뛰고 온다? 그러면 계획이 다 끝나고 돌아와서 쉴 때가 되면 사령관은 찐조가 해달라는대로 진짜 뭐든 다해줌. 안아달라면 안아주고, 밥 먹을때 아 하면 먹여주고, 투정부리면 뭐든 받아주고, 씻겨달라고 하면 씻겨주고, 밤 중에 안아달라고 하면 안아줌. 안전모 쓴 기간의 1/3만큼의 날짜는 휴가기간으로 정해서 진짜 비상사태가 터지지 않는 이상 사령관한테 뭐든 요구해도 사령관이 받아준다는 보장이 생기는거지.


그 이후의 오르카는 완전히 달라지는거야. 이제 안전모는 더 이상 고생의 상징이 아니야. 안전모를 쓰기만 하면 해당 인원은 그게 끝나면 사령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상 포상의 의미로 뒤바뀌기 시작하는거지. 대표적인 거지런 주자인 찐조, 하르페이아, 티타니아는 사령관에게 안전모를 받을때는, 사령관이 너무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대충 표정관리 하면서 틱틱대지만 사령관실을 나가는 그 순간 안전모를 마치 훈장처럼 쓰고서는 콧대를 높이 세우고 도도한 발걸음으로 굳이 출격장 가는 길을 최단루트가 아닌 멀리 돌아가는 길을 통해 나가며 자랑해.


문제는 거지런만큼 계급이 철저하게 나뉘는 전투는 없었다는거지.


예를들어 앨리스같은 아이는 거지런을 뛰기에는 무척 부적합한 아이라 그녀가 안전모를 받는 날은 아직까지 없었어. 하지만 그녀 눈에는 너무 하찮아서 가치조차 없어보이던 린티는 쏠쏠하게 안전모 쓰고 다니는 날이 있다는거야. 그녀가 노오란 안전모를 쓰고 콧대 높이 오르카를 활보하며 출격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 안에서 질투가 마구 끓어올랐어.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이해하고 있었지. 자신은 제대로된 전투면 몰라도, 소위 '거지런'이라는 분야에서는 활약할 수 없다는걸.


그렇게 알게모르게 안전모를 받는 빈도로 오르카 내에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해. 안전모를 자주 받는 특권계층, 그녀들에게 열심히 아부해서 대신 안전모를 받기 위한 차상위계층, 그런 그들의 아귀다툼을 바라보며 손가락만 빨 수 밖에 없는 불가촉천민, 혹은 이런 상황 자체에 딱히 흥미를 두지 않는 평민 등. 이런 상황에 쐐기를 박는 상황이 오는데, 이런 상황에 관심 없던 더치걸 하나가 자기는 자기 안전모에 나름 애착이 있고 꾸미길 좋아했기에 사령관에게 자주 출격하는 인원에게 아예 안전모를 하나 주는게 어떻냐고 말하는거야.


사령관은 처음에는 반대했어. 사령관이 보기에 안전모를 임시로 지급하는거라면 모를까 아예 줘버린다? 이건 마치 대놓고 놀리는, 악독한 구인류의 짓거리와 비슷하게 보였지. 하지만 더치걸한테 그 이유를 듣고나니 사령관 입장에서도 그런가? 싶었어. 특히 일에 중독된 사령관 입장에선 안전모에 애착이 간다, 그거 나름대로 꾸미고 싶다, 이런 발언이 남일같진 않았지. 그래서 안드바리에게 물어보니 안전모는 차고 넘친다는거야.


그래도 좀 뭐한 느낌이 든 사령관은 자주 나서는 거지런 주자들한테 한번씩 확인해가며 안전모를 주기로 했어. 하지만 사령관이 그 이야기를 하자마자 대부분의 거지런 주자들은 안전모를 달라고 말했지. 사령관은 아! 이거 꾸미고 싶어하는게 당연한 거구나, 그게 여자애들의 감상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지. 안전모를 지급 받는다는건 그녀가 안전모를 배급받을 정도로 자주 전투에 나서는, 그래서 사령관의 애정을 듬뿍, 자주 받을 수 있다는 상징으로 변했고, 이제 그녀들은 자기 방에 아주 자랑스럽게 안전모를 꾸며두었어. 물론 자주 거지런에 나가면서도 '나는 언제든 받을 수 있는데 굳이 남한테 자랑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비틱질 하는 인원도 있긴 했지만, 거꾸로 그런 비틱질이 통할 만큼 압도적으로 자주 불리는 거지런 주자란 사실을 잔인할 정도로 선언하는거나 마찬가지였지.


이렇게 오르카 호에는 안전모를 통한 계급사회가 형성되버렸어. 처음에는 더치걸의 고생의 상징, 구인류의 악독함을 증명하는 물건이었던 것이, 이후에는 계급의 상징이자 훈장으로 변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물건은 물건일뿐,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는 것, 그리고 계급이란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어. 이는 이후 벌어진 반격런의 난에서도 알 수 있듯 구성원은 바뀌더라도 계급 자체는 존속했다는 사실로 더 공고해지지. 이후 광역기와 반격기의 사상분쟁은 다음 전시품에서 배울 수 있을거야.


-오르카 박물관, 사령관이 처음 발견한 더치걸의 안전모 장식품에 쓰여진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