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츈과 그렘린이 휴식을 마쳤으니 이제 벽 너머 폐허에도 변화를 줘야한다. 천재 엔지니어인 포츈이 마을 재건 계획을 설계하고 그렘린이 AGS들을 통솔해가며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폐허를 밀고 공터로 만들어 재개발을 시작해야한다. 저 넓은 공터를 어떻게 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공단에서 도심으로 진출할 교두보이자 공단을 지킬 완충지대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곳임만큼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개척 방향을 어디로 잡냐인데.. 가장 좋은 건 역시 요새화시키는 거겠지. 병력이 주둔할 주둔지를 건설하고 초소와 함께 임시로 건축한 벽으로 주변을 두른 다음, 울산항에서 가져온 군수물자들과 군수공단에 남아있는 병기들을 이용해 방어 진지를 건축하면 여기만큼은 아니어도 철충이 돌아다니는 바깥쪽보단 상대적으로 안전한 거처를 만들 수 있겠지. 필요한 콘크리트는 삼척 주변에 있는 콘크리트 공장에서 가져오면 되니까. 

 


계획에 단점이 있다면 요새화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인데..유능한 포츈과 그렘린이 있고, 작업용 AGS들도 잔뜩 있다지만 AGS들의 대부분은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되고 있어서 가용가능한 숫자는 3할 정도 밖에 안 되는 데다가 콘크리트로 안전한 벽을 만들려면 적어도 2~3년은 족히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본적인 방어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가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철충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 시키는 꼴이 되고.


 

“고민이 많으신가 보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벽 위에 털썩 주저앉은 채 머리만 북북 긁고 있는 내 옆으로 홍련이 다가왔다. 털썩 주저앉은 내 팔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킨 그녀는 내 옆에 서서 벽 너머의 폐허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까운 곳입니다. 그대로 놔두기에는 넓은 부지를 버리는 셈이고 부지를 이용하자니 철충이 걱정이군요.”


“정확히 봤네. 생각 같아선 저길 요새화시키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걸릴 것 같아서.” 


 

제대로 요새화 시킨다면 상관이 없지만 계획이 일그러지면 단순히 죽 쒔다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만약 저길 요새화시키려다가 실패라도 했다간 애먼 땅에 낭비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 셈이 되고 그 대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우릴 덮칠 것이다. 실패가 곧 생존의 실패와 직결되는 지금 세상에서 선택을 잘못했다간 나 하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화를 입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행운이 따라줘서 마구잡이로 짠 계획이 다 맞아떨어져서 문제가 없다지만 만약에 실패하기라도 했다간..상상도 하기 싫다.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고, 경영에 대한 지식도 없는 내 선택 하나에 모두의 미래가 달려있다니. 하다못해 조상님처럼 한 나라를 지탱한 엄청난 천재인 것도 아니고 그냥 갓 20살 먹은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인데. 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에 숨이 턱 막혀온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민님은 그동안 잘해오셨습니다.”


“잘하긴. 운빨이 겹치고 겹쳐서 잘한 것처럼 보이는 거지.”

 


잘하긴 무슨, 거의 다 운빨이나 다름없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여정은 운빨에 운빨이 겹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평해에서 남하하는 터널 안쪽에 있던 철충들의 습격은 철충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서 수월히 물리칠 수 있었고, 잠깐 쉬기 위해 들어간 폐가에서 운 좋게 블러디 팬서를 만났다. 

 


목적지인 공단 안 대피소는 운 좋게 내 종손자를 위해 만들어진 대피소라 DNA 일치 범위 안에 있어서 운 좋게 가족으로 인식되어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우연히 발견한 종손자의 유해 속에서 찾아낸 검은 카드로 코 하나 풀지 않고 공단을 손에 넣은 건 물론이고 그 안에서 훼손되지 않은 유전자 씨앗을 발견해 페어리를 복원시켰다. 그리고 복원시킨 페어리 중 하나인 오베로니아 레아는 우연히 하늘 위에서 우릴 찍던 오르카 호 소속 탈론페더를 데려와 의도치 않게 오르카와의 연줄을 만들어주었고, 결과적으로 그 연줄이 날 휩노스 병의 마수에서부터 구했다. 그리고 이제는 오르카 호 저항군이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얻었다.

 


이 모든 일들은 능력을 발휘해 계획을 짜서 차근차근 풀어나갔다기보단 조금이라도 삐끗했다간 바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버릴 만큼 위태로운 외줄 타기와도 같았다. 만약 터널 안에서 습격해온 철충의 숫자가 많았더라면? 폐가에서 블러디 팬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레아가 페더를 그냥 보내주었다면? 자신에게 되물어 볼수록 나로썬 손 쓸수 없는 문제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나 운빨로만 살아남았네. 한 번만 일어나도 평생 운을 다 썼다고 할만한 운이 겹겹이 겹치자 이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조상님처럼 국가를 떠맡을 능력이 있던 것도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세상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단순히 운이 끝내주게 좋았을뿐더러 날 따라주는 그녀들이 월등히 뛰어나서지,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내가 한 일은 없어. 대부분 너희가 한 거지. 난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옅게 미소 지은 얼굴로 내게 다가온 홍련은 내 어깨 위에 부드럽게 두 손을 올리더니 보호소가 있는 곳을 슬쩍 턱으로 가리켰다. 

 


“블러디 팬서에게서 들었습니다. 여기에 들어온 민님은 이틀 동안 휴식을 가진 다음, 그녀와 함께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미래를 계획했다고요.”


“그건 맞지. 그대로 눌러앉으면 나태해지니까.”


“그리고 저 또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 대피소는 확실히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합니다. 멸망 전 제가 본 고위 계층의 저택도 저 곳보단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비축된 물자 또한 네 사람이라면 충분히 몇 년은 가만히 있어도 넉넉하게 살 만한 물자들이였죠.”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멸망 전 이곳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냥 홍련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민님은 저곳에 머무르며 현실에 안주하며 사치를 부리는 것 대신, 힘들지만 미래를 계획하는 쪽을 택하셨죠. 일행을 늘리기 위해 공단을 다시 가동 시키고, 생존자를 구출하고 물자를 모으기 위해 직접 일행들과 함께 철충과 싸우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저 또한 그런 민님 덕분에 지금까지 안전하게 살아올 수 있는 거겠죠.” 


 

잠깐 말을 멈춘 홍련의 손이 내 머리 위로 향했다. 거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차분히 정리해 준 그녀는 입꼬리를 곱게 올리고선 말을 이어 나갔다. 

 


“민님은 단순히 운이 좋으셨다고 말하시지만 그 운이 올 수 있었던 건 바로 민님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준비해 놓으셨기에 기회를 잡으실 수 있으셨죠.”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 울렸다. 처음으로 타인에게 인정받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헛짓거리가 아니었다는 안도감까지 들었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부담감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부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를 손으로 몇 번 매만진 나는 살포시 미소짓는 홍련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홍련. 내가 3살만 더 어렸더라면 눈물 질질 짜면서 고맙다고 매달렸을 텐데.”


“위로나 상담이라면 언제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힘들면 찾아갈게.”


“그럼 이제 돌아가실까요? 리리스씨가 지금 막 민님을 찾고 계시 답니다.”


“주인님~~!!”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더니 타이밍도 좋네. 저 멀리서도 선명히 들리는 리리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와 홍련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열 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 명의 비밀이 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비밀 하나 정도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사람인 바이오로이드 또한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매주 금요일, 해가 지고 달이 뜨는 한밤중이 되어 대부분의 인원이 잠드는 시간이 오면 공단 지하에 위치한 대피소에서는 주인인 제갈민 몰래 지휘관끼리의 술 잔치가 열린다. 원래 목적은 포츈과 블러디 팬서가 가진 술자리였지만 지금은 브라우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잠든 사이, 몰래 빠져나온 지휘관들끼리 회포를 풀 겸, 주인인 제갈민 몰래 가지는 사교장이 되어 버렸다.

 

 

붉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업무 때 입고 다니는 정장 대신, 속옷을 입고 있지 않은 몸이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끈나시 원피스 차림의 홍련은 맥주로 목을 적시며 그녀의 지휘권자인 제갈민과 오늘 했던 대화를 모인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민님이 심적으로 많이 부담감을 가지고 계시기에 제가 좀 위로해드렸습니다.”


“흠, 그가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걸. 내 눈에는 적은 인원수로 잘 꾸려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거 아마 민님 조상분 되는 사람 때문에 그럴검다. 민님 말로는 동아시아권에서 엄청 유명한 책사였다고 했는데..누구였더라..”


“언젠가 그를 찾아가 한번 달래줘야겠군. 침실에서 말이지.” 

 


편한 탱크탑 차림을 한 블러디 팬서와 아스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츄리닝 차림을 한 리리스는 조용히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주인님을 달래줄 기회를 뺏기다니. 순식간에 경쟁자가 둘이나 늘어버렸다. 레아 하나도 거슬렸는데 아스널에다가 홍련까지 늘다니. 

 


게다가 홍련은 대놓고 애정을 표시하는 앞의 둘과는 달리, 관심 없는 척하면서 자상한 얼굴을 하고 슬금슬금 들어오니 제갈민의 애정을 그 누구보다 갈구하는 리리스 입장에서는 더욱더 거슬렸다. 

 


진열장에서 술을 하나 꺼낸 리리스는 유리잔에 술을 담고선 단번에 들이켰다. 그녀는 모르지만 그녀가 마시는 술은 원래 주인이 알면 유골이 담긴 꽃병에서 다시 뛰쳐나올 만한 비싼 술이었다. 


 

비싼 양주로 리리스가 화를 식히는 사이, 파견 온 스틸라인의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얼떨결에 생활복 차림으로 끌려온 레드후드는 한숨을 쉬며 블러디 팬서가 직접 까준 캔맥주를 손에 들었다. 


 

이런 자리는 임펫이 좋아하는 자리인데. 이런 사적인 자리는 스틸라인의 부관에게 어울리는 자리라고 볼 수 없다. 물론 그녀도 살아있는 사람인지라 1년 365일 군기 바짝 든 자세로 있는 건 아니지만 각 부대에서 한 가닥하는 지휘관들끼리 사령관 몰래 사적인 모임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는 편히 있고자 저희가 몰래 마련한 자리니까요. 게다가 내일은 주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레아의 권유에 이기지 못한 레드후드는 오늘 딱 하루만 마시기로 마음 먹은 뒤, 들고 있는 캔맥주를 들이켰다. 역시 스틸라인답게 호쾌하게 잘 마신다는 아스널의 칭찬이 그녀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주었다. 


 

공단에 대한 각종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오던 도중, 군수사령관인 제갈민의 이야기가 나왔다. 술자리의 단골 이야기 중 하나가 연애와 이상형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모인 공단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제갈민의 이상형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없는 사이 혹시 진도를 나갔냐는 리리스의 질문에 이 자리에서 가장 오래 제갈민과 함께 한 블러디 팬서는 내심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제갈민은 멸망 전 인간들과는 달리 그녀들을 인간처럼 대해줄뿐더러 살갑게 대해주긴 하지만 가족으로써 잘 대해주는 거지, 이성으로써 잘 대해준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건 없었슴다. 사적으로 터치하는 일도 없고..”


“그런가요? 그러면 브라우니양이나 레프리콘양에게 물어봐야 하나..?”


“그 둘도 아마 모를검다. 리리스씨도 민님이 걔네 대하는 거 보셨잖슴까. 완전 동생처럼 대하지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 주인님이 보시던 야한 잡지를 찾아냈답니다.”

 


제갈민의 이상형을 상상하는 모두를 향해 뜬금없이 폭탄선언을 한 레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잡지 하나를 그녀들에게 보여주었다. 잡지를 레아의 손에서 뺏어든 리리스는 눈을 치켜뜨고 잡지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머리에 뿔을 단 낯간지러운 복장을 하고 있는 늘씬한 여성의 사진을 표지로 한 잡지는 여러 번 손이 탔는지 군데군데 구겨져 있었다.


 

“주인님께선 리리스양과 같은 연하가 아닌 아무래도 저와 홍련씨 같은 연상의 여인이 취향이신 것 같네요.”


 

저라는 말에 묘한 악센트를 넣은 레아는 시선을 마주한 리리스를 향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리리스 또한 미소에 미소로 받아쳤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후후, 누가 연하라는 건가요? 제가 컴패니언의 맏이라는 점을 잊은 건가요? 주인님을 위로해드리는 것 정도는 저도 쉽게 할 수 있어요.”


 

말로는 여유롭게 레아의 말을 받아쳤지만 잡지를 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잡지 표지 모델을 죽어라 쏘아보던 리리스는 손에 든 잡지를 아무렇게나 식탁 위에 던져놓았다.


 

“애초에 이 잡지가 주인님이 보시던 잡지라는 법은 없잖아요? 전 레아씨와는 달리 주인님과 항상 잠자리까지 함께 하는 걸요. 주인님이 하시는 일은 제가 전부 알고 있답니다.”


“어머나, 그런가요? 하지만 이건 브라우니양이 남자 화장실에서 발견한 잡지인걸요.”


“그놈 그거 함부로 민님 물건에 손대다니, 언젠가 한번 날잡아서 혼내겠슴다.”



공단에서 유일하게 제갈민 혼자 사용하는 남자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그 잡지가 제갈민의 것이라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순박한 브라우니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으니. 

 


레아와 리리스가 묘한 기싸움을 하는 동안, 아스널과 홍련, 그리고 레드후드는 표지에 나온 바이오로이드를 빤히 바라보며 그녀들 멋대로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흠, 채찍과 가죽옷이라. 아무래도 군수사령관은 그를 지배해 줄 여인을 원하는가 보군. 최대한 그의 취향에 맞춰주는 수밖에. 다음에 바깥에 나가면 채찍을 찾아봐야겠어.” 


“아무리 그래도 민님에게 채찍이라니..전...”


“말씀중에 외람되지만 잡지에 모델 되시는 분은 ‘뽀끄루’라는 분이십니다. 잡지에는 이렇게 나왔지만 여리고 착한 심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죠.”


“호오, 오르카에는 별별 자가 다 모여있나 보군. 그 쪽의 사령관은 어떻지? 여인관계는 어떻게 되나?”

 


갑자기 사적인 질문을 해 오자 레드후드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비록 공단과 오르카가 동맹관계고 오르카에 대한 질문은 아는 선에서 얼마든지 답해줄 수 있었지만 사령관의 여인 관계 같은 사적인 질문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약을 맺은 바이오로이드의 숫자가 두자리 수가 넘어간다던가, 그와의 동침을 위해 바이오로이드들끼리 동침 순서까지 정한다는 이야기는 스틸라인의 부관인 그녀입장에서는 선뜻 말하기 힘든 이야기다. 하다못해 같은 인간인 군수사령관이 물어봤다면 답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스널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던 레드후드는 결국 애매모호하게 둘러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저희 오르카 호의 목적은 인류 재건입니다. 그 목적에 따라 사령관님도 ‘밤’낮없이 오르카호의 ‘모두’와 함께 열심히 노력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군. 인류재건을 위해 ‘밤’낮없이 ‘모두’와 노력한다는 거지?”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묘하게 붉어진 레드후드의 얼굴과 밤과 모두라는 묘한 단어에 힘이 실린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하려던 말을 알아들은 아스널은 마시던 맥주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선 당당한 걸음걸이로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개선문을 지나는 승전장군과도 같은 당당한 모습을 보자 홍련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아스널 준장, 어디에 가시려는 겁니까?”


“사령관과 함께 인류재건을 하러 간다. 우리의 동맹인 오르카 호는 인류재건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데 우리만 이렇게 뒤처질 수는 없지.”


“잠자는 상대를 억지로 덮치는 행위는 강간이라는 점은 알고 계시죠?”


“우리들 중 표지의 여인과 가장 조건이 비슷한 건 바로 나지 않나. 여차하면 작전관도 함께 해도 좋다만. 그대도 연상이니 연상에게 지배당하는 걸 원하는 사령관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저, 저는 민님이 좋다면 괜찮지만..”

 


만약 제갈민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스트레스를 못 이겨 위염에 걸렸을 만한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은 아스널은 손목을 붙잡은 홍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말 그의 침대에 뛰어들 기세로 출구로 향했지만 그녀보다 한 발 앞서 레아와 리리스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둘의 앞을 막아섰다. 같은 삼안 출신이라 그런지 서로 투닥거리다가도 견제할 상대가 생기면 누구보다 죽이 잘 맞는 둘이었다. 

 


“거기 그 둘. 대체 뭘 꾸미시는 거죠? 경호대장인 절 앞에 두고 주인님을 겁탈하려 하다니. 제법 담이 크시군요.”


“주인님의 취향이 연상이라곤 해도 그런 행위는 주인님이 원하실 때 해야 한답니다. 억지로 하는 건 못써요.”

 


사실 그녀들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잡지의 주인인 제갈민은 뽀끄루라는 바이오로이드가 그려져 있는 표지가 아닌, 잡지 안에 실려있는 지도를 본 것이라는 점을. 하지만 아스널을 포함한 바이오로이드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표지만 보고 멋대로 제갈민의 취향을 결정지었다.

 

어느새 술자리는 빠져나가려는 아스널과 그녀를 막으려는 두 맏이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정작 그 아수라장을 제공한 원인 중 하나인 제갈민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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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스택 하나 더 추가. 


그리고 홍련은 업무중에는 냉정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주인공이 원한다면 동침 기쁘게 해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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