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멸망한 세계에서도 오르카호의 사령관이 멸망 전 인류의 명절에 맞춰 부대원들에게 휴식을 주듯이 우리 공단 또한 엄연한 빨간 날인 설날을 기념하며 전 인원에게 삼일간의 휴식을 줬다. 가래떡이 없어서 떡국을 만들어 다 같이 먹지는 못했지만, 고기로 떡국의 빈자리를 메꿨으니 설날을 기념하는 식사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정확한 음력 날짜를 몰라 대충 2월의 2주째를 설날로 대충 정하고 쉬라고 한 나는 지하 대피소로 들어가 한동안 잊고 있던 종손자의 유해를 가지고 올라왔다. 생각 같아선 아무리 못난 놈이였어도 결국 같은 혈육이기도 하니 예를 갖춰 제사를 올리며 장례를 치뤄주는 것이 큰할아버지로써의 도리겠으나 제사에 중요한 향도 없는데다가 무엇보다 이런 놈에게 제사를 올려주고 싶지는 않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악행을 저지르고 물밑작업으로 모은 재산으로 주지육림을 즐긴 대가로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은 놈이다. 동생인 석이 손자가 아니었더라면 장례고 뭐고 정체를 안 순간 뼛다구를 바다 속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웃어른이 유해를 챙겨 마무리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여겨야지.


 

“다음 삶은 착하게 살거라.”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추를 매단 꽃병이 유해를 담고 수면 아래로 사라지자마자 옆을 지키던 리리스가 들고 있는 청주의 뚜껑을 따 수면 위에 쏟아부었다. 걸치적거리는 쓰레기를 투기하는 것과 같은 장례식의 참관자라고는 내 경호를 맡은 리리스와 스노우페더, 그리고 뭐하나 궁금해서 찾아온 아스널과 홍련이 전부고, 고인에 대한 애도 같은 것도 없었다. 우는 이라곤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전부였다. 생전 삼안 내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이자, 제갈씨 65대손의 결말을 애도하는 장례식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장례식도 끝났으니 이제 할 일을 해야지. 나머지 애들은 쉬는 날이지만 난 정기적으로 받아야 할 보고가 있으니까. 꽃병이 가라앉은 바다를 향해 손을 몇 번 턴 나는 라디오 타워에서 흘러 나오는 철 지난 재즈를 들으며 사무실로 향했다. 


 

일단 지도를 봐야 뭐든 할 수 있었기에 난 사무실로 향하기 전, 잡지를 찾기 위해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선반을 열었지만, 잡지가 꽂혀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잡지에 발이 달려 날아갔나? 이게 왜 없어? 


 

혹시 다른 애가 가져갔나? 여기가 남자 화장실이긴 하지만 가끔씩 화장실이 급한 브라우니나 다른 애들이 이용하곤 했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열린 선반 문을 닫고 나온 나는 혹시 몰라 입구에서 기다리는 리리스에게 잡지의 행방을 물어봤다. 


 

“저기, 리리스.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데 저기 화장실 선반 안에 있는 잡지 혹시 본 적 있어?”


“그런 여인에겐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주인님. 리리스가 더 잘 모실 수 있거든요.” 

 


잡지에 행방을 물어봤는데 왜 날 모신다는 대답이 나오지?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잖아. 피자집 가서 피자를 시켰는데 갑자기 주인장이 옆 라인에 있는 중국집 탕수육이 맛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대답인데. 

 


리리스가 왜 저런 대답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잡지의 행방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건 확실하구나. 대체 왜 잡지를 가져갔는지는 모르지만 잡지를 내놓으라고 하면 왠지 큰일이 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리리스도 그렇고 아스널의 눈빛도 그렇고..유일하게 정상인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스노우페더뿐이다.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쓸데없는 대답을 하는 그녀와 붉은 입술을 혀로 한 차례 쓰윽 핥는 아스널, 그리고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기 시작하는 홍련을 한 차례 빤히 바라본 나는 잡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메모해 놓은 내용들이 좀 아깝긴 하지만 지도는 많으니까. 

 


쇼파에 앉아 라디오 타워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비운 나는 휴일 때문에 미뤄놨던 보고들을 받아보았다. 

 


수많은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한 홍련의 보고서는 언제봐도 정말 훌륭하다. 작전뿐만이 아니라 행정업무에도 능한 그녀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우리 모두는 서류의 파도 속에서 헤엄치고 있겠지. 


 

“고마워 홍련. 알아보기 쉽게 정리해줘서.”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였습니다.”


“그럼 아스널. AA캐노니어의 보급상태는 어때? 포탄 보급이라던가..”


“포탄이라면 그대가 걱정할 필요 없다. 마을을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많으니. 거기다가 공단에서 주기적으로 생산되는 양까지 합하면 몇 달간은 문제 없다.”


“그건 정말 다행이네. 혹시나 부족할 것 같으면 말해줘.” 

 


오르카호처럼 공군 해군을 포함한 다채로운 부대가 모여있지 않고 소수의 육군 위주인 우리 공단에서 공격과 수비 양쪽으로 활약할 수 있는 데다가 뛰어난 화력으로 적들을 쓸어버리는 AA캐노니어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부대원들의 물자야 준장인 아스널이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만 그녀에게 맡기기만 하는 것보단 이렇게 가끔씩 입으로 직접 듣는 쪽이 훨씬 더 안심이 된다. 


 

“오르카에 제공하기로 한 지원물품들은 전부 생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주 쯤에 오르카 측에서 추가 지원병력을 보낼 겸 화물선을 보내겠다는군요.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럼 일주일 후에 2번 도크를 비워놔야겠네. 포츈에게 전달할게.”


“그리고 이건...스틸라인을 통솔하는 레드후드 연대장의 의견입니다만..식사시간을 좀 줄여야 할 것 같다고 하는군요.”

 


식사시간을 줄이라고? 선 넘었네. 안 그래도 쓸데없이 훈련을 하는 레드후드 덕분에 힘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스틸라인인데 거기서 식사시간까지 줄이면 걔네는 언제 쉬냐? 미안하지만 초밥 먹고 싶다는 소원은 들어줄 수 있어도 식사시간을 줄여달라는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 

 


여기 식사 시간이 어때서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절을 해도 일단 대화를 하고 그녀를 납득 시켜야 이후의 일이 편해지기에 난 스노우페더에게 부탁해 그녀를 불러왔다. 걸음걸이 하나하나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레드후드는 오자마자 큰 목소리로 경례를 올렸다. 


 

“승리! 대령 레드후드,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경례는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죽어라 말을 안 듣는 그녀의 행동에 턱을 벅벅 긁은 나는 의자에 앉은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따라주었다. 

 

“훈련중에 불러서 미안한데 식사시간을 줄이고 싶다고 들어서. 이유라도 좀 알 수 있을까?”


“스케쥴에 따르면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시간이 각 각 두 시간이나 됩니다. 특히 점심 식사 이후에는 낮잠 시간 1시간이 더 추가되죠. 휘하 인원들을 잘 챙겨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휴식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빡빡하게 살던 150년전의 스케쥴에서 벗어날 겸 지중해 바닷가 스타일의 스케쥴을 도입했는데 블러디 팬서도 그렇고 레드후드도 그렇고 군인 출신들의 눈에는 좀 불만이 큰가 보다. 낮잠 시간도 원래 두 시간이었지만 블러디 팬서가 이러면 애들 군기 다 달아난다고 난리를 쳐서 한 시간으로 줄였는데 레드후드는 점심시간을 줄이라고 한다. 아스널은 말 안하지만 휘하의 비스트헌터도 우려하고 있고. 


 

“레드후드. 150년 전에는 말이지. 깜빵에 있는 죄수들도 점심시간 한 시간은 보장받았어. 하다못해 사람 찌르고 감옥에 가 있는 놈들보다는 대우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 그러면 하다못해 낮잠 시간이라도 줄여주셔야 합니다.”


“밥 먹고 바로 뛰면 옆구리 땡겨서 안 돼.”

 


그런데 얘는 왜 날 찾아온거지? 팬서의 휘하에 있는 브라우니라면 모를까, 레드후드가 속한 스틸라인 부대는 오르카 소속이라 오르카 호 사령관의 지시를 따라야 할 텐데? 내가 줄이지 않는다고 해도 레드후드 재량으로 식사 시간을 줄이고 낮잠 시간을 없앤다면 나로서는 그녀를 제지할 만한 수단이 없다. 있어봤자 오르카 호 사령관에게 레드후드를 제지해 달라고 탄원 메일을 보내는 것 정도겠지.

 


얘는 그런 사실을 알고 내게 말하는 걸까?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는 레드후드를 향해 난 사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레드후드, 그쪽은 오르카 소속 부대잖아. 내가 줄이지 말라고 해도 네 재량으로 줄인다면 내 입장에서는 널 막을 방도가 없어.”


“크흠..이건 월권행위일 수도 있겠지만 군수사령관님 소속의 두 병사의 사기문제 때문에..”

 


아하,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다른 소속이여도 스틸라인 병사가 게으르게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는 거구나. 걔네 둘이 스틸라인 출신이긴 하지만 소속도 다른데다가 엄연히 홍련의 지휘 아래 있는데 이건 월권이 맞네. 걔네 둘의 행동은 홍련과 그녀의 부관을 맡아준 블러디 팬서가 신경 써야 할 문제지, 레드후드가 신경 쓸 만한 문제는 아니다. 

 


“이쪽 브라우니양은 이쪽이 신경 쓸게요. 레드후드씨는 그쪽 브라우니양을 신경 쓰시는 게 어때요? 그쪽 브라우니 소원을 들어주다가 주인님께서는 손가락까지 다치셨는데.”

 


딱 잘라 말하기보단 그녀들의 상관인 홍련과 상의해보라는 식으로 좋게 좋게 돌려 말하려고 할 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블랙 리리스가 먼저 선수를 쳐 버렸다. ‘우리 브라우니를 다른 소속 바이오로이드가 까는 건 용납 못한다!’라는 가족애에서 한 행동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레드후드의 월권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리리스가 한 말은 레드후드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저희 브라우니 병사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는 알려 드릴 수 있답니다. 초밥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어요. 후후, 어찌나 순수하시던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김밥을 드시고 싶다고 하시네요? 아쉽지만 여기는 분식집이 아니여서요. 그런 소원은 한 번으로 만족해 주세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레드후드를 향해 소원함에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김밥을 먹고 싶다는 글씨가 쓰여있는 쪽지를 들고 쏘아붙인 리리스는 내게 고개를 돌려 잘했냐는 듯 미소 지었다. 차마 그녀의 미소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나는 고개를 숙였다. 벌어진 입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리리스, 넌 방금 레드후드 휘하의 병사들을 입으로 죽인 거야. 


 

“하하핫. 그래도 괜찮지 않나. 우리 사령관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 한 행동이니 대령은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그리고 그런 솔직함이야말로 병사들이 갖춰야 할 덕목 아닌가?”


“준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녀보다 높은 계급을 가진 로열 아스널은 호쾌하게 웃으며 그런 마음가짐도 중요하다는 말로 애써 소원을 적은 브라우니를 보호해주려고 했지만 레드후드의 목소리는 이미 낮게 깔려있었다. 쪽지를 손에 쥔 레드후드가 저 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 휘하의 스틸라인 병력들은 지옥 훈련에 빠져 버릴 것이다. 최소한 저 쪽지를 적은 브라우니는 지옥행 확정이다.


 

“당분간 훈련을 계속해야겠습니다. 방어 훈련 뿐만이 아니라 체력 훈련과 공격 훈련도 병행하려고 합니다만..”

 


날 바라보는 레드후드의 눈동자 안에선 뜨거운 불길 하나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를 꽉 악문 레드후드는 금방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휘하의 스틸라인 병사들을 굴리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매우 미안하게도 내게는 그녀를 막을 권한이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레드후드. 내겐 네게 명령할 권한이 없어. 오르카 호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거대로 하면 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수사령관님.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한 인사와 함께 레드후드가 나가자마자 그녀의 목소리가 공단을 쩌렁쩌렁 울렸다. 철 지난 재즈음악을 뒤로 할 만큼 쩌렁쩌렁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 안에는 순수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런 모습을 보니 블러디 팬서를 깐깐하다고 평가한 내가 다 미안해진다.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오르카호 브라우니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미안하다, 오르카 호의 브라우니야. 내게는 레드후드에게서 널 지켜줄 권한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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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도 아닌데 시에스타까지 있는 공단. 그리고  오르카 호 브라우니 뒤지게 구르는 거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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