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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은 교회로 데려다 놓은 다음, 난교의 흔적으로 난자한 풀밭으로 돌아왔다.

 

전보다 깔끔해진 것을 보니 리앤이 대충 치우고 간 듯하다. 시간이 시간이니 자기도 오르카 호 애들이 올 걸 맞이하러 간 거겠지.

 

결국 남은 것은 설거지거리 조금과 담요로 몸을 가린 채 부끄럼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는 발키리였다.

 

 

 

“가... 각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 그럭저럭. 이미 해가 중천인데 그런 얘기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그... 그렇죠... 제가 말솜씨가 좋지 않아서...”

 

“발키리가 원래 좀 그런 경향이 있지. 예전에도 나한테는 날카롭게 말했잖아.”

 

“예전... 예전 얘기는 조금...”

 

“나랑 발키리가 할 얘기가 그거 말고 더 있어? 나 버리고 도망쳤으면 그 정도 감수는 해야지. 후후후후후.”

 

“... 으아아아아아...”

 

 

 

옛날 생각을 하면 부끄럽긴 한지, 발키리는 담요로 얼굴을 가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이란 게 원래 반응이 찰지면 괴롭히고 싶어지는 나쁜 존재거든.

 

 

 

“자아~ 그럼 이왕 나온 김에 한 번 터놓고 얘기해볼까?

예전에 나한테 사상자 보고서 보여주면서 뭐라고 했더라아?

크흐흠.”

 

 

 

이런 건 원래 조금 목소리를 진중하게 고쳐주는 편이 좋다. 일부로 헛기침 한 번 뱉어준 다음에,

 

 

 

“’각하께서 오르카 호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면 꽤 값진 선물이 될 겁니다.’ 였던가?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난 그게 정말인 줄 알았지 뭐얌?”

 

“으아아아아아...!! 각하 제바아알...!”

 

“그거 말고 다른 게 또 뭐 있었지?

‘저는 그저 각하께 더 많은 것을 알려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라던가,

‘죽음은 늘 갑자기 옵니다.’ 라던갘ㅋㅋㅋ”

 

“각하! 각하! 제바아앙알!!”

 

 

 

통. 통.

 

발키리의 이불킥은 오늘도 힘이 넘치는구나.

 

 

 

“’주금은 늘 급짜기 오빈다~’

아아, 이거 아주 오금이 저리는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발키리 양?”

 

“으아아아아아아...!!!”

 

“아, 내가 진짜 도의적인 차원으로 참고 있었는데, 이거 리앤하고 아자젤한테 말해줘야겠다.

이 지옥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참 사령관한테 애들 시체 사진 보여주면서 네 탓이오 네 탓이오 했던 걸 말해주면 어떻게 될~까~?”

 

“제가... 제가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잖습니까아아!!

으브브 으브브 으브브브브브브”

 

“어디 보자. 아자젤은 몰라도 리앤한테 말해주면 반응이 제법 볼만 하겠는 걸?

‘뭐 그런 미친년이 다 있어?’ 하고 말하지 않을까 싶은뎈ㅋㅋㅋ”

 

“안들려안들려안들려안들려안들려안들려...”

 

“들린다. 들린다. 잘 들린다아.”

 

“안 들립니다. 안 들립니다. 안 들립니다. 안 들립니다. 안 들립니다.”

 

 

 

사색이 된 얼굴로 발키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렇게 놀리는 맛이 좋은 애는 알비스 같이 어린애들 이후로 처음이었는데, 이거 중독될 것만 같다.

 

역시 발키리. 마성의 여자다.

 

 

 

“왓슨~ 거기 있지? 우리 이제 출발한다.”

 

 

 

 

한창 재미 좀 보고 있을 찰나에, 패널로부터 리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이쯤 해야 할 것 같다. 리앤이 오르카 호에서 사람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이제라고? 저기 애들 오는 거 보이는데?”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누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갔나 보네. 헤헤헤.”

 

“... ...”


 

 

이왕 전화를 해줄 거면 빨리 좀 할 것이지, 벌써 저 언저리에 애들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발키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이 아가씨를 내 등에 업었다.

 

놀리는 거에 면역이 없는지 발키리는 여전히 담요로 푹 뒤집어 쓴 채 나를 향해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

 

 

 

“... 각하 덕분에 앞으로 제 이불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솔직히 발키리 혼자 있을 때도 이불킥 여러 번 찼잖아. 안 그래?”

 

“삐이이...”

 

 

 

원래 이런 일들은 앙금이 남지 않게 다 풀고 가야 하는 법이다.

 

오르카 호에 가면 이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텐데 적어도 나랑은 다 풀고 가야 하지 않겠나?

 

언뜻 보기엔 장난꾸러기처럼 무지성 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렇게 놀리는 것에도 다 뜻과 의가 있는 것이다. 엣헴. 그렇고 말고.

 

 

 

“자, 저기 애들 온다. 이제 만날 준비 해야지.

리앤은 먼저 오르카로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우리만 가면 돼.”

 

“알겠습니다...”

 

“왜. 걱정돼?”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걱정하고만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

적당히 긴장 정도만 하고 있어. 내가 있잖아.”

 

“... 그건 믿음직스럽군요.”

 

 

 

두근거리던 발키리의 심장이 차차 잦아들었다.

 

한결 고요해진 주변 공기. 나도 덩달아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길고도 긴 악연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될까, 나는 너를 받아줄 준비가 되었는데 아이들은 어떨까,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이 내 눈 앞에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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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달링. 못 본 사이에 얼굴이 기름칠 좀 했나보네.”

 

“살쪘다는 말일 돌려서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나 좀 슬퍼질 거 같은데.”

 

“살 좀 찌는 게 어때서? 몸만 건강하면 됐지.

그리고 달링은 좀 찔 필요가 있어. 전에 깨어나고 나서 봤을 땐 아주 뼈만 남아 있었단 말이야.”

 

“그랬나? 하도 정신이 없었어서.”

 

“그럴 만도 했지.”

 

 

 

오르카에서 온 일행 중 가장 선두에 있었던 건 레오나였다.

 

아니, 레오나를 필두로 한 발할라 대원들이었다. 샌드걸, 베라, 님프, 알비스, 안드바리까지.

 

모두 여름철 풀 향기를 한껏 즐기러 나온 사람들마냥 귀엽고 예쁘게 옷을 꾸미고 나왔다.

 

 

 

“... 달링.”

 

“응?”

 

“알만 한 사람이 왜 그래? 우리가 맨 먼저 온 걸 보면 알 거 아냐.”

 

“아, 그렇지.”

 

 

 

나는 등에 업고 있던 발키리를 천천히 땅에 내려주었다.

 

다리 한쪽이 잘려 비틀거리는 발키리는 내 도움 없인 가만히 서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어깨를 빌려준 다음에서야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땅을 딛고 일어섰다.

 

그 모습에 발할라 대원들이 놀란 숨을 내뱉었다. 그나마 나이가 있는 대원들은 그걸 손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물론,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발키리를 쳐다보았다.

 

 

 

“... 발할라.”

 

“... 예. 대장님.”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오늘은 휴일이니까 어디 가서 놀고 있어도 혼내지 않을게.”

 

“... 알겠습니다.

가자. 알비스. 언니가 오늘은 같이 놀아줄게.”

 

“하... 하지만 발키리 언니...”

 

“아니. 조금만 있다가.”

 

 

 

님프와 베라, 샌드걸이 능숙한 솜씨로 알비스와 안드바리를 데리고 교회 쪽으로 걸어갔다.

 

덕분에 조금 조용해진 풀밭엔 나와 발키리, 레오나만 남을 수 있었다.

 

 

 

“...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레오나 대장님.”

 

“아니. 안녕 못 했어. 특히나 누구 때문에.

자기 독단으로 온갖 개짓거리를 다 하고 말없이 도망친 누구 덕분에 한동안 발할라에 대한 대우가 엉망이었지.”

 

“... ...”

 

“저... 레오나. 첫만남부터 굳이 그렇게 말할 것까진...”

 

“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야.”

 

 

 

레오나가 성큼 성큼 발키리를 향해 걸어나갔다.

 

다리 한쪽이 잘린 발키리는 내 어깨에서 미끄러지듯 땅으로 주저 앉았다.

 

앉아있는 발키리, 서있는 레오나.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둘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발키리.”

 

“... 네.”

 

“재미있었어? 혼자 그렇게 도망가버리면 재미있었냔 말이야.”

 

“...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도망갈 거였다면 끝까지 갔어야 할 것이지, 왜 구차하게 이 교회에 남아서 삶을 연명하고 있었어?

먼저 못 갈 미련이라도 남아 있던 건가?”

 

“... ...”

 

“... 야 레오나. 너 말이 조금 심하...”

 

“아니.”

 

 

 

레오나가 손을 뻗어 나를 저지했다. 눈은 여전히 앉아있는 발키리를 향해 있었다.

 

 

 

“일어나. 사령관의 도움을 받지 말고.”

 

“...”

 

 

발키리가 일어나려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의족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42번.

 

발키리가 땅을 딛고 서는 시늉이라도 하기까지 걸린 회수였다.

 

 

 

“다시 앉아.”

 

“... ...”

 

 

발키리가 앉았다.

 

 

“일어나.”

 

 

하지만 일어서지는 못했다. 첫 번째 일어섬에 너무 많은 힘을 쓴 까닭이었다.

 

 

“일어나.”

 

“다시 일어나.”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발키리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허리에는 식은땀이 가득 차올라 짙은 남색빛을 띄었다.

 

하지만 레오나의 얼굴은 변함 없이 담담했다.

 

 

“다시 일어나라.”

 

 

그렇게 다시 한 번 일어나기까지 52번.

 

그리고 또 다시 일어나는 데에 68번.

 

마지막으로 일어나기에 86번이 걸렸다.

 

 

 

“... ...”

 

 

 

한 번쯤은 대꾸할 법도 했지만,

 

발키리는 말없이 땀을 흘렸다.

 

묵묵히 하나 남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혔다.

 

 

 

“... 바보 같은 녀석.

넌 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변하질 않는구나.”

 

“... ... 대장의 명령이니까.”

 

“내가 유연하게 생각하라 몇 번이고 말했지.

결국 네 고생은 네가 사서 한 거니까 원망하지 말고 따라 와.”

 

“... 알겠습니다.”

 

“발키리, 내가 도와줄...”

 

“아니. 사령관은 손 대지 마. 자기가 자른 다리인데 지가 고생해 봐야지.”

 

 

 

레오나는 퉁명스럽게 말을 끊고 오르카를 향해 걸어갔다. 발키리 역시 레오나의 뒤를 향해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차마 보고 견딜 수 없어 땅에서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손에 쥐어주었다. 비틀거리며 걷는 것은 레오나 한 명으로 충분했으니까.

 

둘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흐르는 듯했다. 하기사, 레오나나 발키리나, 나보다 서로를 더 오래 봐왔을 테니 뭐가 있더라도 있긴 하겠지.

 

멍하니 오르카를 향해 걸어가는 둘을 바라보던 찰나,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 그러고 보니... 자기가 자른 다리라고 했던가...?

레오나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야 리앤 님이 이곳과 오르카를 오가며 말씀해주셨거든요.”

 

 

 

불쑥, 옆에서 노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잇! 깜짝이야!”

 

“후후, 참으로 오랜만에 폐하의 얼굴을 뵙습니다.”

 

“... 아르망...

내 생각은 또 어떻게 읽은 거야...”

 

“제 연산 모듈은 이제 아주 쌩쌩하답니다. 그거면 대답이 됐을까요?”

 

 

아르망이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 ... 역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좀 무섭다니까.”

 

“미래는 읽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저 조금 머리를 굴려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일 뿐이죠. 정확도가 아주 조금 높긴 하지만?”

 

“그거 기만이야. 임마.

그런데 여기는 왜 왔어? 아르망이 여기까지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어찌 그런 차가운 말씀을 하십니까? 저, 아르망이 이유가 있어야만 폐하를 뵐 수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 ...”

 

 

 

사향 때의 일 이후로 추기경 공포증이 생겼거든... 이라 말은 못하겠지.

 

 

“... 그러셨겠군요. 

왜 하필이면 철충에도 저와 같은 이름의 계급이 있을까요...”

 

 

... 그냥 속으로 생각한 거 뿐이었는데.

 

 

“폐하의 생각은 이 아르망이 손바닥 보듯이 전부 다 보고 있답니다.

앞으로 제 이름에 추기경이라고 붙이는 분하고는 절교해야겠군요. 아니, 추기경이라는 흔적도 앞으로는 싹 다 치워버리겠습니다.

이 머리에 쓰는 비레타도 아예 불에 태워...”

 

“야, 야야야야야야, 그러지마!”

 

“...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예 빨간 옷들도 전부 다 분쇄기에 갈아버리려고 했는데.”

 

“야야, 그러면 내가 진짜 뭐 무서워서 그러는 거 같잖아!”

 

 

 

얘 앞에서는 생각 하나도 함부로 못하겠다. 하여튼 바이오로이드들 중에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애들이 너무 많다니까...

 

... 그래. 아예 다른 생각을 하자. 이를 테면... 아르망이 여기 왜 왔는지 같은 거. 이유가 뭘까...

 

 

 

“이유가 있어야만 폐하를 보러 올 수 있는지, 아까 여쭤봤습니다.”

 

“... 내 생각 읽지마.”

 

“힝.”

 

“그리고 이왕 읽을 거면 끝까지 읽어. 네가 이렇게 밖에 나오는 일은 엄청 드문 일이잖아.

그러니까 놀라는 거지.”

 

“... 뭐, 폐하를 생각해서 나왔다고 하면 적당하겠군요.

레오나 대장이 발키리 부관에게 왜 이리 박하게 대하는 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러게?”

 

 

 

아르망의 말을 들은 뒤에야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옛날 일에 대한 복수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레오나 성격상 그런 유격 훈련 같은 짓을 좋아서 시켰을 리는 없다.

 

처벌을 하겠다고 하면 깔끔하게 총 한 방 쏘고 말 애지, 구차하게 저런 걸 시킬 애가 아니란 말이다.

 

 

 

“그냥... 옛날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을까? 레오나도 발할라의 대장이니까 먼저 나서서 처벌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모든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셨겠죠.

그랬다면 발키리 부관이 느낄 수치심과 죄책감도 어마어마 했을 테고요.”

 

“... 그럼 왜 저런 건데?”

 

 

 

아르망이 조용히 책을 펼쳐 노란 홀로그램을 뛰웠다.

 

거기엔 녹화된 영상이 지직거리며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오나의 모습이었다. 수십 번씩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발할라의 대장으로서 그 때의 일을 대신 사죄하겠습니다.

 

-부탁입니다. 발키리를 다시 받아주세요.

 

 

“이건... ...”

 

“리앤 님이 교회에서 발키리 부관을 보았다고 알려주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레오나 대장은 한시도 쉬지 않고 오르카 호를 돌아다니며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레오나가... ...?”

 

“말로 설명해드리는 것보단 직접 보시는 편이 좋겠죠.”

 

 

 

나는 말없이 몇 분이나 영상을 쳐다보았다.

 

스틸라인의 숙소에서 브라우니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숙였기에 족히 수백 번,

 

호라이즌 대원들을 불러 발키리의 잘못으로 사상자가 나왔던 것을 사죄했기에 또 다시 수백 번,

 

숙이기를 다시, 또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평생 하늘 앞에 부끄러웠던 적 없던 당당한 발할라의 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 ...”

 

 

말없이 셈을 했다.

 

1953번.

 

그녀가 절한 회수였다.

 

 

 

“지금의 오르카에는 여러 대원분들이 계시죠. 발키리 부관이 저지른 일조차 모르시는 분이 태반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레오나 대장을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자들만을 직접 골라 사과하고 부탁했습니다.”

 

“발키리를 다시 받아달라고.”

 

“... 그랬구나.”

 

“만약 레오나 대장이 정말로 발키리 부관이 미웠다면 그런 처벌을 내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것이겠죠. 자신도 한때 똑같은 처지였으니까.”

 

 

 

아직 영상이 끝나지 않았지만 아르망은 자신의 책을 덮었다.

 

은은한 홀로그램의 잔향이 노란 가루로 남아 허공에서 흩어졌다.

 

 

 

“레오나 대장은 현실을 본 거겠죠. 오르카 호에서 발키리 양이 폐하의 도움만 받으며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어느 누구라도 그녀를 쉽게 도와주진 못하겠죠. 당분간은 그녀 홀로 서야만 할 겁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절벽으로 내던져야지요.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게 익숙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암사자들이 사는 방법은 원래 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 내가 도와줄 수는...”

 

“힘들겠지요. 리앤 님의 VR 세계에서 데리고 갈 대원들을 뽑는 것만으로도 온갖 얘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 내가 사령관 노릇을 하기엔 너무 심약하다 했던가? 그래. 사령관이란 자리가 원래 늘 이런 식이다.

 

누구 편들면 안 되고, 누구 편애하면 안 되고, 공명정대하며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 자리.

 

그러기에 죄가 명명백백한 발키리를 보살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사령관으로서는.

 

 

 

“그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는 걸까? 하다 못해 밥이라도 내가 가져다 주면...”

 

“폐하를 식사 배달원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오르카 전체를 뒤져 봐도 없을 겁니다.”

 

“그... 그럼 면담이라도...”

 

“폐하의 면담이 이름만 면담인 데이트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 ...”

 

 

 

그 때 아르망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연필이었다.

 

 

 

“... 폐하. 작은 게임을 하나 해볼까요?”

 

“무슨 게임?”

 

“제가 제 책을 바닥에 내려 놓을 테니, 폐하께서는 연필을 책 위나 바닥 위, 둘 중 원하시는 곳에 내려 놓으세요.

그럼 제가 연필이 어디에 있을 지 말해보겠습니다. 물론 제 예측을 먼저 듣고 올리셔도 됩니다.

제 예측이 맞으면 폐하의 승리, 아니면 저의 승리입니다.”

 

“뭐야 그게... 그럼 그냥 듣고 반대로 두면 되잖아.”

 

“한 번 해보시지요. 저는 연필이 바닥 위에 있을 것 같습니다.”

 

 

 

아르망은 뭔지 모를 말을 하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게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뻔히 다 알고 질 생각은 없다.

 

조용히 소리가 나지 않게 아르망의 책 위에 연필을 올렸다.

 

 

 

“자, 이제 눈 떠봐.”

 

“어머, 연필이 책 위에 있군요? 폐하의 승리입니다.”

 

“... 이게 대체 뭐하는 게임인지 모르겠는데 뭔지 말이라도...”

 

“지금은 말이죠.”

 

 

 

아르망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가렸다.

 

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절벽 위. 우리는 그곳에 서있었다.

 

... 잠깐만. 바람?

 

 

 

“자.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폐하.

보다시피 연필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지요? 저의 승리입니다.”

 

“... 그러네.”

 

 

 

선선한 바다 바람이 연필을 굴려 책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연필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풀밭 위에 놓여 있다.

 

 

 

“오늘은 바람이 제법 있었죠. 해도 쨍쨍하고.

그러면 땅은 가열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해풍이 더욱 강하게 붑니다.

제가 바닥에 있을 거라 말씀 드린 건 괜히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제가 책 위에 놓여 있을 거라 말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연필이 혼자 책 위로 올라가진 않을 테니까요.”

 

“... 그게 무슨 의미야?”

 

“폐하.”

 

“응.”

 

“어찌 눈 앞의 패배를 보고만 계십니까?”

 

 

 

아르망은 내 손을 쥐어 연필을 잡게 만들었다.

 

그리곤 다시 책 위에 연필을 놓았다. 놓고 더욱 힘을 주어 꽉 잡았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게.

 

 

 

“모든 연필은 결국 떨어지게 됩니다. 그건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지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리 꼭 쥐고 있다면, 하다 못해 떨어지는 지 아닌지 지켜보기만 한다면 연필을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발키리 부관을 위해 해주실 수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는 것. 허나 지켜보는 것이 방관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아셨을 겁니다.”

 

“연필이 떨어지려 한다면 손을 뻗을 테니까요.”

 

 

 

아르망이 내 손을 놓은 다음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깊고 짙은 푸른 눈. 눈은 하늘과 바다, 그 중간의 수평선 어딘가를 닮았고, 담았다.

 

 

 

“사랑하시기에 그저 지켜보는 것이 쉽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랑에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 없는 사랑은 절제와 중용을 모른 채 마냥 불타오르기 마련이니까요.”

 

“... 절제라...”

 

“부디 지혜로운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는 사랑은 여름 한 철의 매미 울음소리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니까.”

 

 

 

쪽.

 

아르망이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라지다니, 안 될 말이죠! 저희는 폐하와 백 년, 천 년 사랑해야 하잖아요!

발키리 부관이나 레오나 대장만이 아니라 오르카에 있는 전부와!”

 

“... 그래야지. 무조건 그래야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너희는 언제나 나를 가르쳐주는 구나.

 

 

 

“일어나세요. 폐하. 이제 집으로 돌아가실 때입니다.

폐하를 위해 새로 단장한 집으로.”

 

 

 

아르망이 나를 데리고 언덕을 넘어 천천히, 풀밭을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절벽 위에서 해안가를 바라봄에 커다란 잠수함 한 척이 거기 부유하고 있었다.

 

짙은 남색이 깊은 심해를 닮은 잠수함.

 

 

 

“어서오세요. 폐하의 집에.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마음이 한결 가볍다.

 

사향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숙제를 푼 기분이었다.

 

 

 

“... 그래.”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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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재미 있었나.”

 

 

 

레오나가 발키리에게 물었다.

 

 

 

“... ...”

 

“내가 원망스럽겠지. 사령관 도움도 받지 말고 일어나라 앉으라 개고생을 시켰으니까.”

 

“아닙니다...”

 

“왜?”

 

“대장님이 정말 저를 미워하셨다면 그런 짓을 시키지 않으셨을 테니까.

이마에 총알이나 한 방 쏴주셨겠죠.”

 

“... ...”

 

 

 

레오나가 걸음을 멈췄다.

 

 

 

“... 여행은 재미있었나?”

 

“아뇨. 재미없었습니다. 혼자 지 다리 지가 자를 정도로 미쳐있던 년이 뭔 재미를 느꼈겠습니까?

그냥...”

 

“그냥?”

 

“... 후회하면서 살았던 거죠.”

 

 

 

콰직!

 

발키리가 쥐고 있던 나무 막대기가 부러졌다. 그 충격에 발키리가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레오나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 ... 왜 잘랐어.”

 

“안 그러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이미 미쳤던 게 아니고?

내가 다리 잘리고 뭔 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알잖아.”

 

“알죠. 대장 휠체어를 밀어주던 게 저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러니까 잘랐던 겁니다. 만약 정말로 미쳐버려서 제가 뭔 짓을 했는 지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잘린 다리를 보고서라도 기억할 수 있게.”

 

“... 진짜로 미쳤었구나.”

 

“그랬을 지도 모르죠.”

 

 

 

발키리는 자신이 입고 있던 담요를 살펴보았다.

 

막대가 부러지면서 담요에 걸렸던 것인지, 담요 일부가 거칠게 뜯겨 있었다.

 

사령관이 직접 입혀준 옷. 왠지 모르게 그의 향기가 서려있던 것 같았다.

 

레오나가 발키리 앞에 쭈구려 앉았다.

 

 

 

“있지, 요즘 오르카 호는 네가 알던 때와 많이 달라.”

 

“안에 백화점도 생겼고, 자원 탐색 임무는 귀찮은 소일거리 수준이 됐지. 오메가인지 뭔지 하는 년 덕분에 자원 걱정이 사라졌거든.”

 

“동침 일정도 한 번 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한 달은 족히 기다려야 해. 네가 가기 전에는 동침은커녕 사령관 방에 들어가려던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야.”

 

“... 좋은 나날이군요.”

 

“좋은 나날이지... 좋은 날이야.

... 더 이상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기도 힘들 정도로.”

 

 

 

레오나는 땅을 향해 한숨을 내셨다. 

 

숨결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

그 악마 같은 인간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것보다 지금의 사령관에 열광하는 게 더 중요한 시절이지.”

 

“... 그럼...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조용히 씹어 삼키는 거지. 사령관이 만든 좋은 나날을 망치지 않도록.”

 

“... ...”

 

 

 

사람들의 분위기라는 건 너무도 쉽게 흔들린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합류한 인원들, 그 밖에 다른 여러 경로로 오르카에 온 바이오로이드들 역시 그만큼 쉽게 흔들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들 역시 똑같이 사랑해준다. 그러니 어찌 과거의 일을 꺼낼 수 있겠나?

 

 

 

“이젠 다들 익숙해지고 있어. 그 때 얘기 꺼내봤자 공감 받기는커녕 핀잔만 들을 게 뻔하니까.

그러니까 너도 알고 있어. 이 오르카엔 이제 그 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 ... 어떻게... 어떻게 그리 넘겨버릴 수...”

 

“참는 거지. 우리가 잘하는 건 그거잖아.”

 

 

 

사령관은 그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웃을 수 있는 나날이 계속되길 원했다.

 

그러니 모두가, 그 악마를 경험하지 못했던 대원들도 웃을 수 있는 오르카를 만들기 위해 대원들은 노력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 과거를 사령관과 함께 눈물로 삼키며.

 

 

 

“... 발키리. 자신 있어?”

 

“무엇이... 말입니까...?”

 

“오르카에 있는 대원들이 널 받아줄 거라 믿을 자신이 있냐고.”

 

“... ... 솔직히...”

 

“...”

 

“솔직히... 없습니다. 저는 각하를 이전 사령관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만들 뻔한 죄인 아닙니까.”

 

“...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겠지.”

 

 

 

레오나가 툭, 하고 발키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대장...?”

 

“역시 내가 오길 잘했지. 아니면 뭣도 모르고 오르카로 갈 뻔했잖아.”

 

“무슨... 뜻입니까...?”

 

“잘 들어라, 이 답답한 부관아.”

 

 

레오나가 발키리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주었다.

 

 

“마음 편히 하고 와라. 우리 중 너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쓰다듬었다는 얘기다.

 

 

“아, 이렇게 말하면 좀 어폐가 있으려나? 확실히 용 참모총장한테 사과할 땐 분위기가 좀 험악해지긴 했지.”

 

“그... 그게 무슨...”

 

“정말 내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밖을 싸돌아다니느라 머리가 나빠졌나?

내 부관치곤 영 아닌데.”

 

“그... 그런 얘기가 아니란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오르카에 있는 분들이 저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말했지. 이제 우린 그 때의 일을 잊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 악마를 경험했던 사람들도 이젠 소수가 됐단 얘기야. 비교적 소수지만.

일종의 동질감 같은 걸 느낀다는 거지.”

 

“아... ...

... 아...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대우를...”

 

 

울먹이는 발키리를 향해 레오나가 가볍게 웃어보였다.

 

 

“발키리.”

 

“네... 넵?”

 

“그 옛날에 우리 먹여 살렸던 자원을 벌어왔던 게 누구였지?”

 

“그... 그건 다른 모든 분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고 할 때 대신 그 몫까지 찾아왔던 사람은?”

 

“... ...”

 

“고층지대를 다니다가 10번도 넘게 떨어졌던 사람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르카를 위해 움직였던 사람은 누구지?”

 

“... ... 저는... ...”

 

“우린 전부 다 그걸 기억하고 있어.

알잖아. 아무리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때 일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지옥이었다는 걸.”

 

 

 

레오나가 발키리를 살며시 품어주었다.

 

땀에 흠뻑 젖은 발키리의 옷이었지만 레오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발키리.”

 

“흐윽... ... 흑..."


"이제 집으로 가야지."


"... 흐으으... 흐아아아아...!!!”

 

 

 

시력을 잃은 한쪽 눈으로, 발키리는 눈물을 흘렸다. 흐르고 흘러 펑펑, 홀로 떠돌며 울지 못했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사령관이 받아주었다. 자매들이 용서해주었다. 구천을 떠돌던 발키리에게 그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었을까?

 

그랬기에 그녀는 하염없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을까?

 

모두에게 지옥이던 그 때, 홀로 담담히 자원을 가지고 왔던 그녀야말로 발키리였다고.

 

전사들을 발할라로 이끄는, 천사의 날개짓이었고, 


구원이었다는 걸. 

 

 


발키리. 그녀가 발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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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 이불킥 결국 넣었다

레오나랑 만나는 것도 넣었고 아르망은 오늘도 치트키였다

기억력 좋은 사람이라면 옛~~날에 아르망이랑 레오나랑 얘기했던 거랑 똑같다는 거 알고 있을 지도?


암튼 이제 스토리 진행 갑니다

다음은 델타 조지는 스토리일 듯. 감히 마트료시카 자폭 부대 같은 거 만들면서 애호를 방해한 죄가 크기 때문에 끝이 좋을 지 어떨지는... 몰?루

감마도... 몰?루


추천은 언제나 글쟁이에게 힘이 됩니다.

오늘 연참한 것도, 발키리 이불킥 씬도 전에 추천 많이 받았던 거 신나서 넣은 거에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