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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해요, 폐하.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나도 사랑해, 아르망.”


 나는 손으로 아르망의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 널 향해서 맹세했어. 나도 누군가에게 가장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아무리 내가 힘들고 괴로워도,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한다면 물러서지 않고 서 있을 거라고. 그 맹세 덕분에 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어. 별의 아이와의 싸움 때도, 그 이후의 고난이 몇 번이나 닥쳐왔을 때도.”


 “폐하…….”


 “난 약해, 아르망.”


 눈물 젖는 눈으로 날 바라봐주는 아르망의 모습을 보며, 난 다시 한번 고백했다. 그런 아르망도 예뻤다. 언제나 아르망은 예뻤다. 그날 이후로 단 한 순간도, 아르망이 예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난 누가 날 지탱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약해.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저만으로는, 안 되는 거고요?”


 “그래. 너만으로는 안 돼. 난 용에게도 구원받았으니까. 미안하지만, 내 삶은 너희가 사이좋게 반씩 나눠서 가져갔으면 좋겠어.”


 “세상에, 뻔뻔스러우셔라. 어쩜 요 며칠 새에 이렇게까지 뻔뻔스러워지실 수가 있으세요?”


 “…뭐, 요 며칠 새에 낯짝이 많이 두꺼워졌긴 해.”


 “풉.”


 아르망은 가볍게 웃고선 내 얼굴을 쓰다듬던 손을 갑자기 딱 멈췄다.


 찰싹


 “아얏.”


 “소리가 좋네요. 중독될 거 같아요.”


 그렇게 작은 손은 내 양쪽 뺨을 살짝 쳤고,


 주우욱


 “아야야…….”


 “두꺼운 주제에 신축성은 좋네요.”


 얼얼한 뺨을 만져주는 대신, 양쪽으로 죽 잡아당겼다. 그런 아르망의 얼굴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 폐하께선 포기를 모르시네요. 꼭 출구도 없는 미로 속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애쓰시는 거 같아요.”


 “역경과 어둠을 두려워 말라.” 나는 연극조로 말했다. “포기하지 않는 게 내 몇 안 되는 장점 중에 하나야. 그때 이후로 네게 그렇게 맹세했으니까.”


 “웃겨,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 기뻐하기라도 할 줄 아셨어요? 양다리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사람은 폐하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도, 하아…….”


 아르망은 입을 삐죽이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전 절대로 저희가 같이 있는 미래 따윈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미래 따윈 예측조차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폐하의 욕망 앞에선 최첨단 과학 기술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건가 봐요.”


 “하, 내가 그깟 기술 따위에 질 리 없지!”


 “한 번 더 꼬집어 드려요?”


 “아, 아뇨. 죄송합니다…….”


 “이래서 제가 마음을 못 놔요. 하여간에 기회만 있다 싶으시면 금세 우쭐해지신다니까.”


 아르망이 손을 다시 들어 올리자 나는 고개를 콱 움츠렸다. 분위기가 살짝 가벼워져서 잊고 있었는데 나 지금 혼나는 중이었다. 그것도 엄청 혼나는 중이었다.


 “정리할게요. 페하께서 먼저 고백하신 건 용 님이시죠?”


 “으, 응. 근데 먼저 사랑한 건…….”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폐하. 잊고 계시나 본데 지금 이 자리에 저만 있는 거 아니라 용 님도 계셔요.”


 그랬지, 참. 그제야 난 내 옆에 있는 용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내 한쪽 손을 잡고 있었지만, 왠지 뭐랄까……. 위험했다. 응, 지금 돌아보면 안 돼. 지금 돌아보면 분명 살해당할 거야, 진짜로…….


 “오래 살고 싶으면 쓸데없는 말은 덧붙이지 마세요. 아시겠죠, 폐하?”


 “넵.”


 “좋아요.”


 아르망의 미소가 어찌나 으스스하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방금 내가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뺀 거였구나. 등 뒤에서 저절로 식은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먼저 위로해주신 쪽도 용 님이 우선이었고요.”


 “그으……. 네, 맞습니다.”


 반사적으로 또 변명거리가 튀어나오려 목젖을 간질였지만 사력을 다해 참았다. 사납게 눈을 치뜬 아르망의 모습은, 그런 말 따윈 다시 목구멍으로 쏙 집어넣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먼저 사랑해주신 쪽은 제 쪽이라 하셨으니까, 그러면……. 하나만 더 맞추면 균형이 맞겠네요. 후훗, 그럼 폐하. 잠시만 고개 좀 숙여주시겠어요?”


 “응?”


 고개 숙여달라고 해놓고선,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내 머리는 타의에 의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다시금 내 머리에 손을 뻗은 아르망이, 이번에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내 머리를 끌어내렸기 때문이었다.


 “아, 아르, 읍…….”


 “응…….”


 그리고 입술에 닿는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감촉.


 부드럽다는 느낌이 달다고 하면 너무 이상한 표현일까. 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아르망의 입술은, 정말 꿀처럼 농밀하고 달게만 느껴졌으니까.


 따뜻하고도 짜릿한, 등골이 찌르르 울릴 정도로 기분 좋은 감촉이 내 입술을 간질였다. 내 얼굴을 감싼 아르망의 부드러운 손이, 숨결이, 그리고 입술이 느껴졌다. 


 “으응, 하아…….”


 입술이 몇 번이나 맞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하고,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코끝을 간질이는 아르망의 따뜻한 숨결. 그리고 달콤한 신음.


 세 번, 네 번……. 그렇게 몇 번이나 새가 모이를 쪼듯 내 입술을 빼앗은 아르망은, 마지막으로 깊고 진한 입맞춤으로 마무리를 지으며 이내 내게서 떨어졌다.


 “하아……. 잘 먹었습니다.”


 황홀한 듯 내 입맞춤을 음미하던 아르망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살짝 입술을 핥는 아르망의 모습은……. 솔직히, 생각 이상으로 깜짝 놀랄 만큼 야했다.


 “아, 아르망?”


 “폐하의 고백은 용 님께서 먼저 가져가셨지만, ‘우리’의 첫키스는 제가 먼저 가져갈게요. 이걸로 2대 2. 후훗, 나쁘지 않은 출발선이에요.”


 “엉? 무슨 소리야?”


 “후훗, 폐하께 말씀드린 거 아니랍니다.”


 아르망이 웃는 그 순간,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내 고개가 홱 기울어지더니 이번엔 용이 내 머리를 꼭 껴안고 있었다. 용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분노나 슬픔 따위가 아닌, 부끄러움과 묘한 질투심으로 달아오른 표정이었다.


 “요, 용?”


 “저도 이 이상은 못 참습니다.”


 “뭐, 뭐를?”


 “서방님께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읍…….”


 그렇게 말하며 용은 내 입술을 막았다. 두 팔로 내 목을 껴안고, 깜짝 놀랄 만큼 열렬하게 내 입술을 탐했다. 아니 너희 둘 다 나한테 말하는 거 아니라면서 왜 날 사이에 끼우고……. 불행히도 그런 잡생각을 계속 하기엔 용의 입술은 지나칠 정도로 달콤했다.


 “응, 음…….”


 너무 달콤해서, 떨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며칠 만일까, 아니 몇 주 만이려나. 이렇게 진한 입맞춤을 나눠 본 건. 마치 몇 년 만에 그리고 그리워하던 입맞춤을 한 듯, 용은 내 입술을 열고 혀를 찾아 몇 번이나 혀를 얽었다. 


 “하아…….”


 달콤한 교성. 서로의 입속을 오가는 서로의 혀. 상냥하게 혀의 뒤쪽을 핥고, 본능에 따라 서로의 침을 삼켰다.


 목덜미부터 뱃속까지 불길이 일어나는 것처럼 뜨거웠다. 등골에 뼈 대신 달군 쇠막대기를 집어넣은 듯 뜨거우면서도 기분 좋은 짜릿함이 전신을 내달렸고, 그 모든 게 자지러지는 쾌감이 되어 뇌를 마비시킬 듯 찌르르 울렸다. 나도, 용도 늪에 빠진 것처럼 그 열락 속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우리가 떨어진 건 마지막으로 진하고도 진한 입맞춤을 끝내고서, 그리고 한 번 더 살짝 입맞춤을 남긴 뒤였다.


 “하아아…….”


 용은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로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피부가 데일 것처럼 뜨거운 숨결이었다. 잠시 나를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용은, 아르망에게 시선을 돌려 도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법이시군요.”


 “이제 비긴 거죠?”


 아르망 역시 그런 용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둘이 서로 분위기 좋은 건 정말 나도 대환영이긴 한데……. 얘들아, 나 지금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꼴이라 어깨랑 목에서 좀 이상한 소리가 나려고 하거든……. 그러나 그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올 일은 불행히도 없었다.


 “그렇군요. 비겼습니다.”


 “아, 아니, 뭐가 비겼는데…….”


 “폐하께서 원하신 대로, 저희가 동등해졌다는 의미에요.”


 “동등?”


 “고백과 사과는 용 님께서 먼저 받으셨고, 첫사랑과 첫키스는 제가 먼저 가져갔으니까 동등해진 거죠.”


 “……?”


 어째 말이 여럿 생략된 거 같은데.


 “이해 못 하셔도 돼요. 폐하는 바보니까요.”


 “…….”


 일단 둘이 납득하는 분위기니까 좋게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내가 이해하는 게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도 했고 말이지.


 하긴 내가 이해하는 게 중요한가, 얘네가 화해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뒷맛이 어째 무시당하는 느낌이라 씁쓸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왜냐고? 이미 둘은 나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로에게 도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내가 그 사이에 껴있는데, 아니 껴있긴 한데……. 왠지 모를 소외감이 느껴졌다. 이런 게 군중 속의 고독이란 건가.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생각 하시면 혼나요, 폐하.”


 “…….”


 그놈의 예진지 독심술인지도 정상으로 돌아온 걸까. 아르망은 내 볼을 쿡 찌르며 핀잔을 줬다. 그리고 용은 아예 날 보고 있지도 않았다.


 “양보는 이번 한 번뿐입니다, 아르망 양. 다음은 없으니까요.”


 “어머, 양보라니요. 아직도 그렇게 여유가 넘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초야(初夜)를 이제야 갓 치룬 분께 비한다면야 아무렴 이 정도는 여유라 할 수 있겠지요.”


 “후후, 그러다 금방 따라잡힌답니다?”


 “그거 참 기대되는군요.”


 용은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말이 웃는 거지 실상 무슨 전투라도 하는 양 투지를 팍팍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르망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 특유의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띠고선 용의 투지를 산들바람이라도 되는 양 가볍게 쳐내고 있었다.


 “…….”


 나만 가운데서 죽을 맛이었다.


 이 상황에서 말 꺼내기란 그야말로 칼싸움 도중에 한가운데에 난입하는 느낌이긴 한데, 그래도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둘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이제 우리들 화해한 거지?”


 “화해요?”


 그러나 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살 보다가 겨우 꺼낸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아르망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용은 안쓰럽다는 듯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애초에 싸우질 않았습니다, 서방님.”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이 싸운 게 아니라고?”


 한 10분 전까지 우리들 전부 죽네 사네 죽이네 죽겠네 난리 치고 있던 거 같은데. 둘의 표정이 내 생각보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이쪽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하군요. 저희는 그저, 어느 분께서 잘못하신 바람에 마음이 상했을 뿐입니다. 아주, 아주 많이요.”


 용이 화제를 가볍게 톡 쳐올리면,


 “그리고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의 원흉이 다 그분이긴 하죠. 욕심쟁이에, 양다리에, 여자 맘이라곤 눈곱만치도 몰라 주시는 주제에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정말 진심이신 어느 분이요. 혹시 누군지 들어보셨어요, 용 님?”


 아르망이 받아서 내리꽂는 듯한 이 완벽한 팀워크.


 “글쎄요. 훗,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여자 둘 정도는 한 번에 울리시는 재주가 있으신 건 확실합니다.”


 “…….”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필 내리꽂는 바로 그곳에 내가 있는지라 속이 쓰리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말이다. 왜 눈물 대신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까. 그런 나를 보며, 용은 여전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르망의 손을 잡았다. 아르망 역시 용의 손을 잡고 내 손을 잡았다. 내 양손의 자유는 사랑스러운 둘에게 뺏긴 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나와 아르망을 바라보던 용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르망.”


 “…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서방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 확실히 받았습니다. 제가 못되게 굴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용 님께 심한 소리를 해서…….”


 고개를 살짝 숙이는 용과 황급히 도리질을 치는 아르망. 아마 손사래를 치고 싶었겠지만 두 손이 모두 자유롭지 못한 탓에 고개를 움직이는 것이리라.


 “앞으로 서로 양보를 해야 할 일도, 기쁨을 나눌 일도, 슬픔을 나눌 일도 있을 겁니다. 허나 한 분의 지아비를 모시는 입장으로서, 서로를 의지하고 또 서방님을 보필했으면 합니다.”


 “…네, 용 님.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망. 앞으로 서방님을 함께 잘 모십시다.”


 마침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는 느낌이 들었다. 이 미로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우리 셋이 한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사이에 있던 얇고도 멀었던 막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우리 셋이 같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주 잡은 손이 유난히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저, 용 님.”


 그런 두 사람의 손길을 조금 음미하고 있자니, 아르망이 용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새삼스럽지만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서, 저, 잠깐 귀 좀…….”


 아르망은 고개를 숙이는 용의 귓가에 무어라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네, 네?!”


 “……?”


 아니 뭘 속삭였길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순식간에 얼굴이 발개진 용은 나와 아르망을 번갈아 바라봤고, 아르망은 그런 용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과연 아르망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표정의 파괴력 앞에선 용도 속수무책인 모양이었다.


 “…안될, 까요?”


 “아, 아니, 그…….”


 용이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굉장히 드물었다. 과연 아르망이 뭐라고 말했길래 그런 걸까. 용은 한참을 말을 더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용의 얼굴은 정말 이루 말할 수도 없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추, 추후에 좋은 날을 골라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때 좀 더 얘기를 나눠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저, 저야 물론 대환영입니다만, 아, 아르망 양이야말로 정말 괜찮으신지…….”


 “괜찮냐고요? 지금 괜찮냐고 물어보셨어요? 당연히 괜찮죠! 정말 기뻐요, 용 님. 저, 가장 맛있는 홍차 준비해놓을게요. 맛있는 과자도 잔뜩요! 많이, 많이 구워놓을게요!”


 “자, 잘 부탁드리오, 아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르망은 뛸 듯이 기뻐했고 용은 그런 아르망을 보며 기쁘단 건지 부끄럽다는 건지 모를 미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지금 여기서 깨달았다. 나만 이 대화에서 완전히 따돌림당하고 있다는 거.


 “아니 나도 좀 알자. 대체 둘이 뭘 말한 거야?”


 “서, 서서서, 서방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


 아니 왜 엄청 관계 많다고 하지 그러니, 응. 나도 거짓말 못 하는 편이긴 한데 이건 좀 심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정도의 일은 아니랍니다.”


 봐봐, 아르망이 훨씬 더 표정 관리며 말투며 능숙하잖아. 분명 용 쪽이 더 성숙해 보이는데 아르망이 언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어딜 봐도 나랑 관련된 거잖아.”


 “저희끼리의 얘기인 걸요, 폐하.” 아르망은 내게 살짝 혀를 내밀며 말했다. “너무 이것저것 다 알려는 남자는 인기 없답니다?”


 “하, 벌써부터 나만 쏙 빼놓고 둘이 비밀 만들기야?”


 “그야 여자들 사이엔 때때로 금남의 구역도 있는 법이니까요. 여자라면 당연히, 비밀 한둘쯤은 가지고 있답니다.”


 “험, 험험.”


 “…….”


 우아하게 아주 한 마디를 안 지는 아르망과 연신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하는 용. 거기에 아르망은 ‘자꾸 칭얼거리면 재미없다’는 듯한 미소를 연신 방긋거리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미소가 무서운 소녀였다. 후우, 아마 세상에서 웃는 얼굴로 화내기 대회 나가면 상을 휩쓸어 올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르망은 연신 그 미소를 방긋거리며 나를 서서히 압박해왔다.


 “기대하세요, 폐하. 이제 저희 둘이서 폐하의 일정과 생활을 공유할 거니까요. 사소한 버릇부터, 그동안 눈여겨봤던 안 좋은 버릇에 나쁜 습관까지 저어언부 다 공유할 거예요.”


 “그걸 기대하라고? 내 귀엔 경고나 협박으로 들리는데?”


 “정말 기대하셔도 돼요. 왜냐하면 무엇을 상상하셔도 그 이상을 경험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거든요.”


 “…….”


 연신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그리 말하는 아르망의 모습은 정말 무서웠다. 진지하게 별의 아이보다도 더 무서웠다, 진짜로.


 “제가 알고 있는 폐하의 약점 아시면 깜짝 놀라실 걸요?”


 “예, 예를 들어 뭐?”


 “어머나, 알려드리면 약점이 아니겠죠?”


 “…….”


 한층 우아하게 웃는 아르망은 이제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아니 자신감을 되찾은 것 이상으로 몇 배로 증폭한 듯해서,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여황제(Empress) 그 자체였다.


 여기서 용이 내 편을 들어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유감스럽게도 그럴 일 따윈 없다는 듯 용은 연신 감탄의 눈빛으로 아르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바로 그것이로군요.”


 “역시 용 님께선 안목이 높으셔서 좋다니까요.”


 “훗, 저 역시 서방님에 대해 말하고픈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이거 벌써부터 아르망 양의 홍차가 마시고 싶어 좀이 쑤시는군요.”


 “그렇게 말해주시면 저야 기쁘죠.”


 “난 안 기쁜데?”


 “폐하께 말씀드린 거 아니거든요?”


 그 말과 함께 나를 향해 이번엔 베에, 하고 혀를 쏙 내미는 아르망이었다. 잠깐. 가만 생각해보니 용은 지휘관이니까 장군이고 아르망은 책사 포지션이잖아.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장 위험한 조합을 내 손으로 만든 꼴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둘은 그야말로 죽이 척척 맞았다.


 “후훗.”


 “풉, 아하하하!”


 서로를 보며 화사하게 웃는 둘의 모습은 정말로 어울렸다. 나이도, 출신도, 모습도, 심지어 태어난 목적까지 모두 달랐지만 둘의 미소는 정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지금까지 그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전부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둘은 서로를 보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을까. 나도 실없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리다가…그때 용의 손가락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갔다. 아, 이런. 다시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저, 용. 미안해. 반지 결국 못 찾았어.”


 “아…….”


 내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용의 눈치를 보자 아르망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약간 사라졌다. 하긴 그 반지 던지고 간 게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니까. 하지만 용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서방님께 다시 받으면 그만이니까요.”


 “그, 정말 괜찮아?”


 눈치를 보며 말했지만, 용은 정말로 괜찮은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고작 패물 하나가, 서방님의 마음을 대신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방님의 마음은 바로 여기, 제 곁에 있으니까요. 반지는 그 약속의 증표. 다시 내려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입니다.”


 “응, 반지 맞춰줄게. 여기서 나가자마자 바로 반지부터 맞추라고 할게.”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만……. 후훗, 정말 어쩔 수 없는 분.”


 어찌 이리 아이 같으실까요, 그렇게 속삭이며 용은 내 머리를 가만가만 만져줬다. 어째 애 취급 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런데 허공을 잠시 바라보던 아르망이 이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나가는 거 말인데요, 폐하. 죄송한데 저, 길이 어딘지 도저히 못 찾겠어요.”


 “응? 아까는 심란해서 예지 못 하던 거 아니었어? 나는 생판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무슨 제 예지 능력을 고장 났다가 고쳤다 하는 나침반처럼 얘기하지 말아 주실래요? 그때도 저 정말 전력으로 연산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르망이 한숨을 푹 쉬며 말하자 용이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이상한 일이로군요. 아무리 미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들 아르망 양의 예지 범주를 벗어날 정도의 완성도를 내진 못했을 텐데.”


 “적어도 이런 축제 이벤트로 즐길 만한 코스치고는 지나치게 공들인……. 아니 이 단시간에 이런 걸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고요.”


 투덜거리며 미로의 위를 바라보는 아르망이었지만, 그래봤자 우리 눈에 보이는 건 거뭇한 천장과 이 장소를 비추는 전등불, 그리고 사방을 압박하듯 막고 있는 철판을 덧대 만든 듯한 미로의 벽뿐이었다.


 “그런 고성능의 장치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아르망, 진짜 다시 한번 제대로 예지해보면 안 돼?”


 벽을 톡톡 치면서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보자는 식으로 말했지만, 내가 가볍게 생각한 것에 비해 아르망은 계속 신경 쓰이고 있었던지 화를 버럭 냈다.


 “아이참, 아까부터 계속해서 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억울하면 머릿속 까서 보여주던가!”


 “어머머, 지금 저한테 성질부리신 거예요? 감히? 폐하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르망의 표정이 어찌나 실감 넘치던지. 그야말로 알밤을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온 세상의 얄미움이란 얄미움은 싹싹 긁어다 채운 듯한 표정이었다.


 더럽다. 이게 좀 전에 날 모시겠다니 어쩌구 한 여자애란 말인가? 그야말로 배신감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너 자꾸 나 폐하라고 부르면서 어째 막 무시한다?”


 “그야 폐하는 바보에 멍청이에, 양다리에 욕심쟁이니까요!”


 “야, 야! 끝난 일 치사하게 다시 또 왜 꺼내?”


 “평생토록 꺼낼 건데요! 평생토록 꺼내고 또 꺼내서 대대손손 영원히 전해지게 만들 건데요, 왜요!”


 그야말로 머릿속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한다면 하는 아르망인지라 절대 헛말로 안 들렸다. 아니 아르망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심지어 용이 달래는 쪽도 내가 아니라 아르망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아르망. 찡그리면 고운 얼굴만 미워집니다.”


 “하지만 용 님, 폐하가 절 고장 난 나침반 취급하는 걸요!”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될 뿐입니다.”


 용이 으스스하게 말하며 허리춤에 달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뭐, 뭘 어쩌게?”


 “기껏해야 낡은 철판. 베어버리고 길을 내면 그만입니다.”


 칼로 벽을 뚫는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할 법한 생각인가 싶으면서도, 그 말을 하는 게 용이란 걸 떠올려보면 별로 불가능하단 느낌도 안 들었다. 철충도 무 자르듯 베어 넘기는 용에게 이런 벽 따위가 문제가 될 리가 없긴 했다.


 “용, 오늘 뭔가 되게 막 나간다.”


 “마음의 짐을 내려놔서 그런지 오늘만큼은 막 나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서방님. 후후, 조금만 뒤로 물러서 계시지요.”


 어느새 뽑아 든 두 자루의 칼이 용의 손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벽으로 다가가니 벽도 놀라서 움찔…….


 “엉?”


 “어머나?”


 방금 내가 본 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철판을 덧대 만든 벽이 용의 칼을 피하듯 슬쩍 움츠러들었다. 그 순간 다른 의미로 내 뇌리를 스치는 불안감.


 “흐음.”


 [자자자, 잠깐! 타임! 타임에요, 타임! 미스 드하고(dragon, 프랑스식 발음)! 무기 내리세요!]


 용이 그 이변을 모르는 척 무심히 칼을 높이 치켜들자, 역시나라고 할까 어디선가 예의 그 확성기로 외치는 듯한 오드리의 목소리가 쨍하니 들려왔다. 아, 역시. 왜 불길한 느낌은 이리도 잘 맞아떨어지는 걸까.


 “오, 오드리 님? 아깐 분명 녹음된 목소리라고…….”


 [아니 아르망 양! 미스 드하고가 저런 교양 없는 짓을 하려는데 말렸어야죠! 아휴, 정말 깜짝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화악!


 오드리의 그 외침과 함께 갑자기 주변은 일변하기 시작했다.


 “…엥?”


 하나 겨우 달려 있던 전등불은 어디론가 휙 사라지고, 창고 안은 그야말로 조명이란 조명은 다 켜놓은 것처럼 환해졌다.


 “어머나…….”


 차라라락


 카드 접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두침침했던 벽들은 무슨 종이접기라도 되는 양 착착 접히더니 사라졌고, 그러면서 드러나는 주변 풍경은…….


 “우와아아아아! 각하! 드디어 한 건 해내셨지…읍, 으읍! 읍읍!”


 “레프리콘! 야! 너 내가 얘 주둥아리 단속하라고 했어, 안 했어?!”


 “이, 이이이일병 레프리콘! 시정하겠습니다!”


 “너 이따 끝나고 니 위로 내 아래로 싹 다 집합시켜!”


 “호오. 지금 설마 내가 보고 있는 게 내무 부조리의 현장인가, 이프리트 병장?”


 “히익?! 이, 임펫 원사님?!”


 날뛰려는 브라우니와 울먹이는 레프리콘, 그리고 발악하려는 이프리트를 쥐락펴락하는 임펫.


 “오호호홋! 봤죠, 엘리스 양? 우리 꼬마 추기경께서 폐하의 성은을 입으셨답니다. 이제 총사대의 위엄이 도전하실 생각은 꿈도 꾸지 마셔야 할 거예요!”


 “어머나, 총사대라고 해봤자 혼자밖에 없으면서 잘난 척은. 누가 보면 샬럿 당신이 성은을 입기라도 한 줄 알겠어요?”


 “뭐, 뭐라고요?!”


 그리고 서로 문자 그대로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엘리스와 샬럿.


 “꺄하하핫! 아이, 들켜버렸네! 그래도 어때, 이 닥터 님의 완벽한 계획이! 아르망 언니도 꼼짝 못 했다고!”


 거기에 오드리며 그렘린이며 아자즈며, 아무튼 기술 쪽으로 관련 있을 법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흑막의 총수처럼 웃는 닥터까지. 뭔 놈의 기계 장치가 그리 잔뜩인지, 정말 온갖 계기판과 설비에 둘러싸인 닥터의 모습은 진짜 악당 같았다.


 그 외에도 정말 많은, 많은 수의 우리 대원들.


 “와아아아아아! 사령관님! 사령관니이이임!”


 “아,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어요!”


 “흐흑, 주인니이임! 아아, 나의 주인님이! 주인님이이!”


 “리리스 언니, 진정하시고 여기 손수건…….”


 그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넓은 창고 안이 비좁을 정도로…아니 우리 대원들이 여기에 다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구나. 설마 하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저 너머 입구 쪽에서도 함성이며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르망은 망치로 뒤통수를 서너 대는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아마, 내 표정도 별반 다르진 않겠지. 용도 이 정도 규모는 예상치 못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내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서, 서방님……. 이, 이이, 이건 대체…….”


 “나도 몰라……. 나한테 물어 봤자야.”


 “폐하……. 저희 완전히 속은 거 같아요, 그것도 완벽하게…….”


 그래, 아르망의 말이 맞았다. 우린 그야말로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미로 따윈 없었다.


 우리 말고 다른 팀 역시 없었다.


 “하하, 하…….”


 넓디넓은 창고 안.


 그 한가운데서 용과 아르망은 반쯤 본능적으로 내 팔을 꼭 껴안고 있었다. 그런 우리 주변에는 오르카의 대원들이 가득 모여 환호성과 고함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 어쩜 좋아요. 폐하…….”


 그래, 이걸 어떡하면 좋니.


 문제의 창고의 천장에는, 대문짝보다 몇 배는 큰 전광판 여러 개에 한눈에 봐도 당황하는 세 명의 모습이 빈틈없이 나타나 있었다.


 세상에나, 뭘 더 숨기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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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가 아마 마지막!

진짜 정성 많이 들인 만큼 재밌었으면 좋겠습니다 ㅜ


으아!

와!


드디어! 드디어 다음 화에! 다음화에 ㅜㅜㅜ 흐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