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에 앞서 - Library of Ruina 및 라스트오리진의 공식 설정과는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아파트 단지 전체가 시체로 가득 찼다.


시커먼 문신을 잔뜩 한 몸을 드러낸 옷차림을 하고, 긴 칼을 차거나 뽑아든 이들이다. 


'도시'의 뒷골목을 주름잡는 다섯 범죄 조직인 '엄지', 그 산하에 있는 거대 범죄 조직, '흑운회'의 무리들이다.


뒷골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둥지'의 주민들이나 도시 바깥의 사람들이라면 엄지가 뭐가 그리 대단하고 그 산하에 있는 조직은 뭐가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의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뒷골목에 사는 이들 중에서 흑운회라는 범죄 조직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최소한 수백 명의 칼잡이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정도의 강자이거나, 그 흑운회를 휘하에 둔 엄지에 소속된 이 정도다.


흑운회에 소속된 이들 하나하나가 신체 강화 시술과 몸을 강화시켜 주는 문신 시술을 받은 이들이며, 이들이 사용하는 칼 역시 일반적인 금속 냉병기가 아니다. 베인 이의 상처를 시꺼멓게 물들이면서 상처를 썩어 들어가게 만들고, 어지간한 보호 장구나 특별한 강화 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무기는 간단히 잘라버릴 수 있는 흉기다.


그 무엇보다도 흑운회를 뒷골목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들의 잔인성과 엄청난 이들의 숫자다. 항상 흑운회는 부조장이나 그 휘하 간부들을 중심으로 수십, 수백 명이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닌다. 아무리 흑운회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거나 한 가닥 하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수십, 수백 명을 한꺼번에 상대해서 모두 죽일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소식이 알려지면 몰려올 또다른 수백, 수천 명의 흑운회 조직원들을 상대로 무사할 자신이 있는 게 아닌 이상 함부로 흑운회와 충돌을 빚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던 수백 명의 흑운회 조직원들을 모조리 시체로 만들어버린 이에게는 그다지 크게 신경쓸 바 아닌 이야기였다.


아파트 25층에서 피떡이 된 흑운회 부조장을 내던진 그녀가 따라 뛰어내렸다. 


제법 급이 되는 신체 강화 시술에다 제법 비싼 문신 시술을 받고, 여기에 질이 괜찮은 천으로 만든 옷까지 걸친 흑운회 부조장이었지만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이 정도 높이에서 추락한 것은 충격이 컸다. 그러나 그 충격은 바로 그녀의 몸 위로 착지한 이가 날린 일격에 비하면 정말로 별 것 아니었다. 


 25층에서 내던져져서 땅바닥에 처박혔을 때에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그녀를 내던진 이가 날린 일격은 그녀의 몸을 산산조각을 내버렸으니까.


"빌어먹을...... 우리 흑운회를 이 따위로 대하고도......"


"너희 Zot또카포가 내가 누군지 이야기 안 해줬어? 아니면 요즘 흑운회는 눈깔병x들만 모아놓은 거야? 너희 흑운회 따위가 날 뭐 어쩔 건데?"


엄지의 고위 간부인 언더보스의 또다른 명칭인 소토카포(Sottocapo)를 멸칭으로 바꿔서 부르는 그 소녀의 말에 아직 목숨이 붙어있던 흑운회 조직원들이 할 말을 잃은 듯이 어버버거렸다. 


엄지의 중간보스들인 카포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거나 이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말을 하려면 최소한 1급 해결사, 혹은 '날개'의 이사, 도시 바깥의 사람들이라면 4대 기업의 간부급은 되어야 했다. 그보다도 상위의 간부인 소토카포, 즉 언더보스들을 저 따위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흑운회 조직원들의 상식 바깥의 존재였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의 동료들을 학살한 존재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였고, 그나마 인간도 아닌 '인형'이었다.


순수한 자의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인형'들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주인의 명령이나 주인의 편의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 도시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인형은 근처에 주인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주 적극적으로 수백 명의 흑운회 조직원들에게 달려들었고 그 수백 명의 흑운회 조직원들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갈아버리거나 뭉개버렸다.


"하....... 하, 설마하니 그 소문의 '인형들의 특색'을 만날 줄이야......"


 하반신이 통째로 뭉개진 흑운회 조직원 중 하나가 흔들리는 눈을 부릅뜨면서 말하자 살아있는 흑운회 조직원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게 뭔지 모른다는 무지를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이들과 저 자그마한 꼬마 인형이 설마 그 인형들의 특색 중 하나였냐며 경악하는 이들.


 후자의 반응을 보인 이들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아무리 네가 인형들의 특색이라도......"


"흑운회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 같냐고?"


거대한 기계 장갑을 낀 손으로 담배를 꺼내든 '잿빛절규'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너희 따위는- 나아가 그들이 속한 단체이자 그들의 자부심의 대상인 흑운회 따위는 나한테 아무 위협도 되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누구도 그런 그녀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다른 호칭도 아니고, 해결사들 중에서도 정점에 선 이들인 특색과 비교하는 칭호로 버젓이 불리는 상대다.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인 부조장과 그 측근들도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은 마당에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자신들이 덤빈다 한들 뭐가 될 리가 없다. 


담배 연기를 뱉어낸 잿빛절규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뭐가 됐든 너희가 알 바는 아니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잿빛절규의 모습이 흑운회 조직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아직까지 살아있던 흑운회 조직원들의 몸이 피떡이 되거나 갈려나간 시체가 되어 이리저리 흩어졌다. 


방금 잿빛절규가 뛰어내린 아파트 25층에서는 겁에 질린 주민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창문 근처로 와서 아래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지켜보았고, 다른 층에서도 흑운회들에게 막대한 금액 또는 신체 일부와 전재산을 뜯길 뻔했던 이들 몇몇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조마조마해하며 구경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물론, 죽어가는 흑운회 조직원들의 눈에도 잿빛절규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그저 비명 소리 같기도 하고 기계음 같기도 한 소리가 아파트 단지에 울려퍼지고, 하얀 섬광 같은 것이 일어나면서 흑운회 조직원들이 떼거지로 죽어나가는 것으로만 보였다.







'도시의 별' '인형들의 특색' 中 1人


"잿빛절규"

정식 명칭 더치걸-31288, 주인 및 소속 불명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4차 기업 전쟁이라 불리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형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이 흐지부지 끝난 이후,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활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던 '도시'에 바이오로이드들이 하나둘씩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도시'의 사람들이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지구인들조차도 바이오로이드들을 물건 취급하는 마당에 인간이 아닌 존재를 배척하던 '도시'의 사람들이 바이오로이드들을 제대로 된 사람 대우해줄 리가 없었지요. 


인간의 목숨조차도 파리 목숨,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곳이 바로 '도시'이니 말입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도시'의 어떤 일자리에도 공식적으로 고용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말이지요. 


-아니,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이오로이드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이오로이드들의 능력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나름대로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비공식적으로 일거리를 받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바이오로이드들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그녀들의 주인을 고용하기도 했고, 바이오로이드를 소유할 만한 재력이 되는 이들이 좀 더 편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 혹은 좀 더 높은 능률과 높은 보수를 바라고 바이오로이드와 함께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식으로 해결사가 될 수 없기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못하지만,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 특히 무력이 뛰어나 해결사들의 정점이라는 '특색' 해결사들과 비견할 만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도시에서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인형들의 특색'이라는 호칭이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