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헤이 교단의 엔젤.

엔젤은 정신감응 능력으로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상대가 기쁨의 감정이면 밝은 색으로, 슬픔의 감정이면 어두운 색으로, 분노의 감정이면 강렬한 색으로.

자신의 마음이 상대의 감정에 물들어간다.

지휘관들은 앞서 두 번째 인간과 이야기하기 전 엔젤에게 이야기동안 정신감응 능력을 사용해줄 것을 요구했다.

조금의 거짓이나 나쁜 감정이라도 있으면 바로 알려달라며.

허락없이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은 사령관도 엔젤도 내키지 않았지만, 두 번째 인간이 악한 마음을 감추고 있을 경우 야기할 파장을 생각하면 허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날 회의실의 구석에서 엔젤이 경험한 것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인간이라고 생각한 헬멧 아래에서 AGS가 나온 것도 놀라웠지만, 정말 정신감응이 되었다는 것에서 더욱 놀랐다.

그런데 인간이 아니여서일까? 정신감응이 달랐다.

마음의 색이 물들어오는 게 아니라 이미지가 전해져온다.

눈폭풍이 몰아치는 설원에 외로이 서 있는 시설 하나.

평소와는 다른 정신감응에 혼란스러워하는 엔젤의 귀에 들려 온 단어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빛의 힘, 공허 빛.


"빛... 저 자가 정말로...?"


*


"인간, 그 무식한 헬멧 좀 벗으면 안 돼?"


상공에서 정찰하며 우리 화력팀을 유도해주던 그리폰이 내게 핀잔을 준다.

첫만남부터 복귀까지 내내 헬멧을 쓰고 있는 게 답답해보인 모양이다.


"우리가 철충이 아닌 건 알고 있을텐데."


비록 내가 4개의 팔을 보기 전까지 엘릭스니인걸 모른 전적이 있지만 철충과 이들이 다른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벗을 수 없다.

앞선 일련의 소동으로 사령관이 당분간 내 정체를 숨길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고스트도 더 설명하기 지친다며 제발 아무데서나 헬멧을 벗지 말아달라며 째려보는 통에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내내 이러고 살았던 나도 이게 익숙하기도 하고.

사령관이 명령한다면 되겠지만 그는 명령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수호자가 부끄럼이 많아서 그래요, 하하. (그렇다고 해요.)"


귓가에서 속삭이는 고스트의 압박에 오늘도 고개만 끄덕였다.


"흐응...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말이야."


그 답은 내가 못 줄텐데.

아쉽게 돌아서는 그리폰을 보며 오늘을 되돌아본다.

저항군 소속 화력팀으로는 처음 맡은 임무였다.

오르카호가 잠항해있는 해안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철충을 요격하는 간단한 임무.

레프리콘과 브라우니에겐 새로 받은 장비로 겪는 첫 실전이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이 쪽의 탄을 사용해봤지만 역시 호환되지 않는다. 이전처럼 고스트가 주변 재료로 변환해주는 탄을 내가 보급해줘야지.

철충을 만난 둘은 화력팀 방식으로 훈련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나쁘지않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코끼리 외골격 장화로 브라우니가 날쌔게 움직이며 철충을 몰아가면 레프리콘이 바보탐지기로 브라우니의 정보를 받고 중화기로 쓸어버린다. 레프리콘은 특히 바보탐지기라는 장비 이름과 후계자를 마음에 들어한 것 같다.

평소 내 무기를 유심히 보길래 비슷한 후계자를 주었더니 회전총열을 맹렬하게 돌려서 탄을 흩뿌려댔다. 전탄을 소진하자 헬멧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돌아보곤 개운한 표정으로 웃어보였었다.


그렇게 장구류를 정리한 후에 고스트는 자신이 보고할테니 쉬고 있으라며 둘을 숙소로 보냈고, 나는 이젠 습관처럼 연구실로 가 닥터를 만난다.

엑소 기술이 무슨 병을 치료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던데.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수복실에서 본 침대가 왜 여깄지?

닥터에게 물어보니 엑소에 흥미를 느껴 개발한 장치가 있고, 이것으로 내 기억장치를 들여다보고싶단다.


"기계 오빠도 성욕이 있어?"

"어... 있지?"


불안한 마음을 품고 기계를 만지는 닥터를 쳐다보고 있자 당황스런 질문을 던져온다.


"엑소는 전쟁 도구로 쓰였댔지?

우리야 인간 유전자를 토대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니까 그렇다쳐도, 오빠는 완전 기계인데 식욕에 실제로 밥을 먹고, 수면욕에 실제로 잠을 자잖아? 성욕까지 있다니. 전쟁을 위해서라면 그런 설계는 비효율적일텐데."


닥터는 오르카호의 AGS들을 예시로 들었다.

사령관이 이들도 인격체로 대해주기 때문에 쉬는 시간을 보장받지만 본질적으론 정비시간을 제외하곤 쉬는 시간이 필요가 없단다. 


"초기 엑소들은 그랬어. 기계신체에 불필요한 욕구들이 느껴지지 않도록 만들어졌지. 당연히 그걸 처리할 부품도 없었고.

뇌는 사용하지 않는 신경을 지운다던데, 알고 있어?"

"알지. 망각이라는 것도 뇌에서 잘 쓰지 않는 신경을 지우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ㅇ..."


닥터는 기계를 연결한 콘솔을 두드리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나를 쳐다본 채 굳어버렸고, 그런 닥터에게 내가 찾았던 자료를 읽어주었다.

엑소 정신 거부반응.

정신이 엑소 신체를 신체로 인지하지 못 하여 통제를 벗어난 기계 근육들이 오작동으로 불가사리처럼 마구 뒤틀리며 결국 사망하는 증상. 그렇게 죽었던 이들은 백업되어있는 정신으로 다시 만들어져서 실험을 위해 몇번이고 죽었단다.

인간과 동일하게 만들어야 그나마 거부반응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계 신체에서 오는 괴리로 인한 정신병은 재부팅이 아니곤 해결하지 못 했다. 그리고 그 재부팅은 할 때마다 자아를 마모시킨다.


"...유감이야."

"괜찮아. 난 그 때 기억이 안 나."


내게 기계를 내밀며 말한다.


"이제 그 떠올릴 수 없다는 기억을 한 번 들여다보자구.

자, 기계 오빠. 이걸 착용하고 한 숨 푹 자면 돼."


왜 하필 지금 슬픔운반자가 생각나는걸까.

자고 일어났더니 꼭두각시가 되어있는 건 아니겠지?

다음번엔 닥터가 웃으며 날 찾으면 도망가야겠다 생각하며 헬멧을 벗고 기계를 착용했다.


*


수호자의 안광이 서서히 사라지고 닥터의 모니터들 중 하나에 수면에 빠진 뇌의 파형이 그려진다.

닥터는 열심히 콘솔을 두드리며 주기억장치에 접근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이해조차 할 수 없게 암호화가 되어 해독이 불가능했고 뒷부분은 죄다 파편화되어 의미가 사라진 코드덩어리만 존재했다.

그 파편 사이에서 닥터는 그나마 유의미해보이는 데이터를 하나 찾아내었다. 음성기록같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오르카의 컴퓨터로 읽을 수 있게 변환작업에 성공, 바로 재생을 누른다.


'슬슬 또 재부팅 할 때가 된 거 같아. 조짐이 보여. 다들 나보고 지금 하라더군. 어서 해치워버리라고.

하지만 난... 잊고 싶지 않아. 더는 싫어.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려고 하지만... 내 딸을 안아봤을 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

딸...? 내게 딸이...? 혹시 꿈에서 본 그 아인가?

그래, 분명 이름이... 기억해... 잊으면 안 돼...

... ... ...나... 뭐하고 있었지? ...아... 슬슬 또 재부팅할 때가 된 거 같아.'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고있다.

그런데 반복될 때마다 말의 길이가 점점 줄어든다.

처음엔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두 번째론 딸의 존재를.

세 번째 반복이 시작되자 더 듣기 힘들었는지 닥터가 패널의 출력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이건 무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