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된 사령관은, 함내를 이곳저곳 쏘다니다가 우연히 창고 앞까지 왔다.


그러고보면 창고를 들어가 본 적이 있던가. 오르카호의 함장이라는 위치 상, 대원들 선실에는 가 봤어도 직접 창고에 갈 일은 여간해선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나 창고에는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잡동사니 뿐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도 있을 줄 알고 기대한 게 잘못이지. 머리를 긁으며 나가려던 중, 순간 이상한 느낌에 다시 돌아보았다.


분명 인기척이 들린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의 깊게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사령관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창고를 나가려다가, 홱 뒤편을 돌아보았다.


힉-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창고 한 구석이 일그러지며 움찔하는 것이었다.


사령관도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누구얏!"


그러자 일그러진 부분이 점차 바뀌어가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아닌 AL 팬텀이었다.


놀라던 사령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철충이 잠입이라도 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팬텀?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아니…… 사령관이야말로 여기서 뭘 하러 오신 거죠."


"뭘 하기는…… 그냥 와 봤던 건데. 내가 여기 함장인 거 까먹었니."


팬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이 창고는 제 아지트여서요."


"아지트? 넌 숙소가 따로 있잖아."


오르카호 대원들은 각자 소속에 따라 거주 구역이 있고, 거주 구역의 숙소에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팬텀은 분명 버뮤다 팀 구역에서 지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어두컴컴한 창고 안이 제일 편해서요." 팬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심정을 알 듯도 모를 듯도 했다.


그럼 일 잘 봐라. 하고 나가려던 사령관은, 문득 팬텀과 이렇다 할 이야기를 길게 나눈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팬텀. 나랑 얘기나 좀 할래?"


딱딱한 표정으로 있던 팬텀이 화들짝 놀랐다.


"저, 저랑 말인가요? 사령관이 왜."


"아니, 그냥. 이제까지 너랑 이야기를 길게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


팬텀은 눈을 굴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있어서 불편하니?"


"아, 아닙니다. 그냥 생각이 많아서……."


사령관이 혹시라도 나갈까봐 팬텀은 손사래를 쳤다.


사령관은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 옆에 앉았다. 팬텀도 주저하다가 굴러다니는 의자를 하나 세워서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팬텀이 화난 사람처럼 표정을 굳히고 앉아 있는지라, 창고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결국 참다 못한 사령관이 먼저 말을 꺼냈다.


"팬텀은 요즘 잘 지내?"


팬텀은 자세를 바로잡고 얼른 대답했다.


"물론 잘 지내죠. 사령관 덕분에."


"불편한 점은 없고?"


"없어요. 괜찮아요."


사령관은 속으로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부터 대원들에게 안부를 물으면 항상 이런 식으로 '다 괜찮다'고 둘러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그는 몸을 기울이며 은근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아?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어? 걱정 마. 남한테 얘기 안 하니까. 마리 소장이 소원수리 하지 말란 말 신경쓰지 말고 얘기해 봐."


이렇게 꼬시자, 팬텀은 머뭇거리면서도 금새 털어놓았다.


"……그게. 실은, 친구가 없어서 외롭긴 해요. 하지만 그것 말고는 불편한 건 별로 없어요. 정말로."


"흐음. 친구라."


사령관은 속으로 그럼 그렇지 싶었다. 팬텀이 친구를 사귀고 싶어함은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비록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드물었지만, 누가 보아도 팬텀이 친구를 바라는 건 한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애가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건 아이러니일까, 아닐까.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턱을 쥐자 팬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시, 신경쓰지 마세요. 어차피 제 일이고."


사령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친구 사귀는 문제는 개인의 일이었다. 사령관이 누구에게 명령을 내려서 사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렇다고 팬텀이 매번 고민하며 속앓이를 하는데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쓰니. 그렇게 매번 고민하는데."


"하지만 사령관한테 폐를 끼칠까봐."


"괜찮아. 신경쓰지 마. 폐를 안 끼치려면 처음부터 모르게 하던지."


그렇게 말한 사령관은 팔짱을 꼈다.


"일단, 특별히 뭔가를 시도하려고 하기보단 좀 자연스럽게 인사부터 건네고 그러는 건 어떨까? 오늘같이 막 놀래키는 식으로 나오면 다들 부담스러워 할 테니까."


"사령관을 놀래키려던 건 아닌데……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해도 거기서 더 어떻게 할 줄 몰라서……."


"거기서부터 별 거 아닌 듯이 안부를 묻거나 날씨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 되겠지."


"안부, 날씨……."


팬텀이 중얼거리는 동안, 사령관은 때마침 출출해져서, 바닐라에게 전화해 창고로 간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바닐라는 이번엔 창고 플레이라도 하느냐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아무 말 없이 창고까지 차와 단팥빵을 내 왔다.


"위장이 비셨을까봐 빨리 가져왔습니다, 주인님."


"그래, 빠릿해서 좋구나. 바닐라."


그렇게 답례한 사령관은 팬텀에게 눈짓했다. 이럴 때 인사하고 안부라도 나누는 게 어떨까.


팬텀도 용케 그 뜻을 알아차리곤, 가슴에 잠시 손을 대고 심호흡을 하다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저, 저기, 바닐라 양."


"예?" 바닐라가 귀찮다는 듯이 되물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하."


"여긴 잠수함 오르카호입니다. 그리고 오늘 해상 일기는 폭풍우고요. 저기압이라 허리도 아파요."


"……."


팬텀의 말을 일축해버린 바닐라는, 더 할말 없냐는 듯이 흘겨보다가 곧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예시가 나빴다. 사령관은 침울해진 팬텀을 다독이려 애썼다.


"신경쓰지 마. 바닐라는 원래 말본새가 저러니까. 그나마 나나 몇몇한테만 좀 공손해졌지, 다른 애들한테도 저렇게 말해."


알겠어요. 팬텀은 고개를 수그리고 작게 대답했다.


같이 단팥빵을 먹는 동안 사령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일단 공통의 관심사로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서로 좋아하는 걸 찾아서 이야기를 해 보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식으로."


"관심사……."


"그래. 뭐 특별히 좋아하는 거라도 있어? 혹시 내가 대원들 중에 소개시켜 줄 수도 있으니까."


팬텀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불현듯이 손뼉을 쳤다.


"아. 이런 걸 좋아해요. 친구 사귀는 법 찾기. 친구 사귀는 법 실천하기. 물론…… 친구를 사귈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 말에 사령관은 난감해졌다. 많은 바이오로이드 대원들의 갈등 조정이나 소망사항을 들어 준 적이 있는 그로서도 팬텀을 어떻게 도울지 잘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팬텀은 사령관이 묵묵히 있자 불안한 듯이 말했다.


"뭔가 이상한가요? 제 취미가 그건데."


"……응. 조금."


팬텀은 낙담하여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한참 말없이 간식을 먹고 있는데, 조용해서 문득 돌아보니, 팬텀이 왠지 모르게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단팥빵과 핫초코는 벌써 다 먹어 치운 모양이었다.


"팬텀."


"네." 팬텀이 눈을 돌렸다.


"혹시 기분 나빠? 표정이 왜 그래. 아까부터 화난 사람처럼."


사령관은 안 그래도 대화가 끊길 때마다 팬텀이 벽을 노려보는 모습이 은근히 신경쓰였다.


"화, 화난 게 아니라……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는 겁니다."


"근엄?"


"예. 이렇게 하면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요."


사령관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반대라고 생각해."


"어째서입니까?"


"그렇게 화난 사람마냥 있으면 다들 접근하기 꺼려하거든. 방금 전에 나만 봐도 너보고 화났냐고 물어봤잖아."


팬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하지만 멸망 전 배트x이나 만화 같은 걸 보면 근엄한 표정으로……."


"현실과 창작물은 다른 거라고 생각해. 물론 그런 표정을 좋아하는 애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개는 일단 다가가기 힘들어지거든. 쟤 뭐 기분 나쁜 일 있나, 하고 말야. 자칫하면 불쾌해할 수도 있고."


"그럴수가."


팬텀은 입을 벌렸다.


"내 생각인데, 혹시 팬텀 네가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다녀서 그간 친구 만들기가 쉽지 않았던 거 아닐까? 나도 네가 애들한테 다가가려고 노력 많이 한 거 알아."


"……."


망연자실하다가 머리를 싸맨 팬텀을 보고, 사령관은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말해 줬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팬텀의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쉐이드와 제법 친하지 않나 싶었지만, 오르카호에서 하루이틀 지낼 것도 아니니 이왕이면 바이오로이드 친구도 중요할 터였다.


그런데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벌컥 창고 문이 열렸다.


놀라서 바라보자 뜻밖에도 쉐이드가 서 있었다.


"쉐이드?!"


비밀작전 로봇 쉐이드는 팬텀을 향해 다가왔다.


- 여기 있었군. 팬텀 대원.


"날 찾았어?"


쉐이드의 푸른 시각 센서가 깜박였다.


- 그러함. 네오딤 대원으로부터의 호출임.


"네오딤이? 왜?"


- 팀내 협동작전을 위한 회의……라고 하지만 그냥 같이 차나 마시자는 것이다. 서로 잘 지내보자는 뜻으로 보인다.


팬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나 지금 사령관하고 단팥빵을 먹은 뒤라…… 배가 부른데."


사령관이 손으로 눈가를 싸맸다. 그리고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나, 쉐이드가 먼저 말했다.


- 그것은 잘못됨. 열량이 필요치 않더라도, 중요한 건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를 잡는 것임.


"……."


팬텀이 자꾸만 주저하자, 쉐이드의 시각 센서가 빠르게 점멸했다. 사령관은 쉐이드에게서 왠지 분노가 느껴지는 듯했다.


- 타인이 먼저 손을 내민 기회임. 로봇인 내가 말벗이 되어 주는 것도 언제까지 계속되진 않음. 빨리 따라올 것.


잠시 침묵하던 팬텀은 이윽고 사령관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저, 사령관? 이만 가봐도 될까요."


"당연하지. 어여 가 봐…… 친구를 찾는다면 나같은 이성보단 같은 또래끼리 어울리는 게 낫다고."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팬텀도 용기를 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사령관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잠깐. 다녀온다고?"


"예. 뭐가 잘못됐는지."


"아니…… 다녀오지 말고 너희 팀 구역이랑 숙소에 있으면 되잖아. 너, 혹시 또 창고에 올 생각이야?"


"그치만, 저 혼자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


친구 사귀고 싶다며. 사령관은 한숨을 쉬고는 쉐이드를 돌아보았다.


"……쉐이드, 포춘에게 말해서 창고 출입 시스템 만들게 하고, 특히 팬텀은 못 오게 해놔."


- 알겠다.


팬텀이 다급히 말했다.


"자, 잠깐만요! 그건 너무한데."


사령관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버뮤다 팀 구역에 있다보면 친구들이랑 마주칠 기회가 늘겠지. 내가 보기엔, 넌 표정도 그렇고 자꾸 창고에 숨어드니 친구와 사귀기 힘든 것 같아…… 네오딤이 잘 해줄 거야. 한번 가 봐."


이어서 쉐이드가 팬텀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너무해! 쉐이드, 창고를 닫지 말아 줘."


팬텀은 근엄한 이미지도 내던진 듯, 전에 없이 칭얼거렸다.


- 불가능. 사령관 명령임.


"언제는 벗이 되줄 수 있다면서."


-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진정한 벗은 친구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는 법이다. 하하하.


쉐이드는 어린아이를 이끌고 가다시피 팬텀을 데려갔다.


사령관도 뒤따라 기지개를 펴면서 흐뭇하게 창고를 나섰다. 휴일을 오랜만에 알차게 보낸 느낌이었다.


이제는 창고가 누군가의 아지트가 될 일은 없겠지. 그는 창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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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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