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방문한 서고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뿌연 먼지가 쌓인 책 하나. 수많은 책들이 있는 장소임에도 매력적인 단어가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섯부르지만... 그, 그래도... 나중이라면..."


솔직히 상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그의 아내가 되어, 예쁜 아이를 낳고 같은 침대에서 같이 잠든다. 그런 매력적인 미래라면 언제나 일기에만 남기는 남에게 보이지 못할 비밀이니까.


"...이건 다음에 보자."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전선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이어지고, 전황은 시시각각 변하며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것은 그저 상상으로만 남기라는 압박을 해오고 있었으니, 결국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다른 평범한 문학 서적을 꺼내 읽을 준비를 갖추었다.


"샬럿이 독서라니... 정말 놀라운 걸?"


자리에 앉아 책을 읽으려는 도중 갑작스레 친근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며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이름을 다르게 부른 것은 평소 장난기가 많은 그가 친밀감을 표시하기 위해 장난을 치는 것이고, 무엇보다 오늘은 그와 만나기로 했던 날이니 더욱 그가 헷갈릴 이유가 없었다.


"또 일부로 그렇게 부른 거지?"

"어? 너무 쉽게 들켰는데..."


친밀한 미소를 섞어 그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보다 날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어."

"이거 내 탓인가?"


서로 사소한 잡담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 위에 앉으며 조금의 하소연을 섞어 중얼거리자, 그는 능청을 부리며 자연스럽게 품에 안아준다. 비록 쿠션이 있는 의자보다 딱딱하고 움직이기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등에 전해지는 그의 따뜻한 온기가 있으니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나만의 독서 장소.


그의 품에 안겨 이렇게 책을 읽는 시간이란 더없이 행복한 최고의 데이트니까.


"그게 사령관의 탓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옷만 바꾸면 사령관도 헷갈리지 않을까, 조금은 고민된다니까."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품에 몸을 눕히며 말하자, 듬직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헷갈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헷갈리냐고? 그, 그렇지. 맞는 말이야."


태연하게 얼굴이 붉어질 만한 낯 뜨거운 말을 하는 그와 다르게, 서서히 얼굴로 핏기가 쏠려 붉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느껴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창피해서 숨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뒤엉켜 결국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을 돌리는 선택지를 골랐다.


"대, 대원들이랑 함께 있는 시간도 좋지만, 사령관이랑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

"나도 그래."


그러나 아무리 말을 돌리려 해봐도 결국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은 말이 나와버리는 입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진심을 말하는 것이기에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대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나 읽을까?"

"오! 이거 알고 있어. 분명,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중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그거지?"


그가 책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나와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좋아해주고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이라는 것을, 방금 그의 대답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르페가 책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나도 책이 좋아졌어."

"정말? 이러다 사령관에게서 못 헤어나오겠는데..."


순수한 기쁨이란 감정을 숨기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던가. 결국 솔직한 본심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더는 상관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하고 이성적인 생각을 방해하며, 그에게 더욱 빠져들게 만들었으니까.


"만약... 우리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면 어떤 장르일까? 아마도... 저거?"


그가 도착하기 전 잠시 망설였던 '좋은 아내가 되는 법' 이라는 책을 가리키며 그에게 질문하자, 예상 외의 대답이 귓가에 들려왔다.


"음... 저건 아닐 것 같아."

"그래? 그럼... 음... 스릴러, 호러, 아니면... 로맨스?"


로맨스라 대답해주길 기대하며 슬며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대답 대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노트를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빈 노트?"

"일기장이야."

"일기? 왜?"


일기라는 그의 대답에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살며시 볼에 입을 맞추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기 시작했다. 마치 사이즈를 처음부터 알아둔 것처럼 그 반지는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쏙 들어가 아름다운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진작 줬어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해."

"반지... 고마워, 사령관이 직접 끼워주니... 뭔가 콩닥콩닥 하네?"

"그리고 일기를 준 이유는 간단해. 앞으로 그 일기장에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었어."


평소 장난기 많고, 가벼운 모습 만을 보여준 그가 이런 뜻밖의 행동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 웃음은 가볍게 피식 웃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행복해서 나오는 웃음 그 자체였고, 내 미소에 그 역시 기쁜 것인지 함께 미소 지었다.


"그러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써나가야 하니까."


뒤늦은 그의 프로포즈가 이런 방식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낡아 빠졌고, 멋지지 못한 프로포즈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프로포즈니까. 그와 함께 써나갈 앞으로의 이야기들이 기대되었다.


"이걸로.. 사령관에게 내가 더 소중해지려나?"

"처음부터 넌 내게 가장 소중했어."


가장 듣고 싶었던 말, 항상 바래왔던 말. 그것을 그의 입으로 더욱 듣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사랑해~' 라고 해줄래? 그럼 내가 '나도 사랑해~' 라고 대답할게."

"사랑해."

"나도 사랑해."


항상 서고에 쌓여있는 먼지도, 책 곰팡이가 퍼트리는 케케묵은 냄새도.

너와 함께 라면 내게 소중한 추억이 되어, 이 일기에 남겨지겠지.



글 모음

귀여운 문학소녀 하르페에게 소중한 한 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