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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장군'이라는 말만큼 에바를 더 잘 표현하는 단어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잊을만하면 느닷없이 나타나 온갖 미심쩍은 정보를 두서없이 늘어놓고는, 볼일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통신을 끊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독불장군이라고 할 만 하다. 어쩌면 양아치 같다는 표현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에바의 말로는 '최소한의 정보 교류'라고는 하지만, 세상의 어떤 정보 교류가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한 채 끝난단 말인가?


이러한 불만은 사실 초기 저항군 시절부터 적지 않은 자매들이 토로하던 것이었지만, 최근 와서는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공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군말없이 통신을 이어올 수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에바가 자신의 정보를 주는 대가로 우리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오기 시작해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저항군의 물자 일부를 제공하거나 데이터베이스를 훑어보는 선에서 끝나는 간단한 부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철충 주둔지 한가운데 있는 서버 회수나 극비 시설 탐색 등, 위험천만한 요구까지 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호의가 계속되니 그게 권리인 줄 아는 격이다.


아무튼, 에바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졌고, 저항군의 부담도 날이 갈수록 늘었다. 급기야 사상자까지 발생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지자, 저항군 지도부 내에서도 에바와의 통신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등, 여론은 계속해서 에바와의 관계를 정리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겠죠...당장 제가 에바와의 통신을 적극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난데.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까지 그녀한테 휘둘리게 된 걸까요?''


텅 빈 텐트 속, 책생 위에 덩그러니 놓인 반쯤 고장난 통신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시던 마리 대장님 역시 가볍게 기지개를 켜시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정보 수집을 소홀히 한 댓가...라기에는 어폐가 있군.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급해서 정보를 수집할 여유가 미처 없었을 뿐이니. 아무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우리 쪽이니, 저쪽에서 우리를 쥐락펴락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만...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구는 건 너무하긴 하군.''


''제 말이요.''


한밤중에 느닷없이 통신을 건 것쯤은 이제 놀랍지도 않고, '오전에 다시 연락할테니 마리 4호와 단둘이서 기다리세요. 나머지 인원은 전부 내보내시고.'라는 요구도 이전에 들었던 온갖 기상천외한 요구들에 비하면 양반이다. 하지만 오전에 연락한다고 해놓고 11시가 다 될 때까지 묵묵부답인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걸까?


''이쪽은 지금이라도 철충이 쳐들어올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당인데, 깐깐하신 우리 에바 아가씨께서는 또 뭐가 불만이길래 코빼기도 안보이는걸까요?''


''낸들 알겠나? 어쩌면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겼나 보지. 예를 들면...''


''가스불을 안 잠궜다던지?''


''화장이 덜 됐다던지.''


''화장실이 갑자기 급해진 걸까요?''


''그냥 연락할 기분이 아닌 걸 수도 있고.''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으시네요.]


어.


큰일났다.


''어어어, 그, 오랜만이네요, 에바?''


''그, 그래! 오래간만이군.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새삼 반가울 다름이야.''


[...]


''어...에바? 혹시 어디서부터 들으셨는지...?''


[글쎄요? 어쩌다가 당신들이 제게 휘둘리기 시작한 건지 한탄하는 부분부터?]


어이쿠, 처음부터 다 들었다는 소리다.


[...할 말이 많지만,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가겠어요. 엄밀히 따지면 약속시간에 늦은 제 잘못이니.]


''네?''


한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걸 이렇게 쉽게 넘어간다고? 한 번 꼬투리 잡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 에바가?


[왜요? 아니면 평소처럼 끝까지 추궁해드릴까요?]


''아니에요. 어서 시작하죠.''


저쪽에서 넘어가준다는데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조용히 넘어가자.


[좋아요. 그럼 일단 지난번에 했던 거래부터 짚고 넘어가죠. 라비아타?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죠?]


얼씨구, 이젠 정보 교류도 아니고 대놓고 거래라고 하는군. 


''약속 지점 입구에 숨겨놨으니 가져가세요. 삼안사업의 연구소 메인 컴퓨터와 2101년 3분기 연구 보고서 맞죠?''


[맞아요. 덕분에 수고를 덜었네요. 수완이 대단하신데요?]


내가 삼안사업의 시스템을 잘 아니까 그런 부탁을 했으면서 놀란 척은.


''잠깐, 잠깐. '지난번'이라니, 난 금시초문이다만? 나 몰래 그런 이야기가 오갔던 건가, 라비아타 통령?''


''저항군이 뿔뿔이 흩어지고, 저 혼자서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을 때 에바가 부탁해온 일이에요.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 저항군 기지가 습격받고 나흘이 채 지나지 않았던 때였을 것이다. 적당히 박살난 폐허 속에서 쪽잠을 청하던 중, 에바가 내 통신기로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주변에 삼안사업의 비밀 연구소가 있으니, 뭘 좀 가져와달라'라고.


[사실 직접 만나서 자료를 건네받고 싶었는데, 만나기로 한 시설에서 그쪽이 한바탕 벌여주신 덕분에 계획이 틀어졌죠. 뭐, 제가 원했던 것만 얻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지만.]


''우리가 뭘 했다는...아, 혹시 언더왓쳐가 있던 시설이 만나기로 했던 장소인건가? 라비아타 통령이 왜 그런 곳을 다 가나 싶긴 했다만, 설마 그런 이유였을 줄이야.''


마리 대장님 말마따나, 에바가 그곳을 약속 장소로 잡지 않았으면 내가 굳이 그런 곳을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다 잘 풀렸으니 불만은 없지만.


''아쉽게 됐죠. 잘만 하면 에바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에요. 아무튼, 전 그쪽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이제 그쪽이 정보를 줄 차례 같은데요, 에바?''


[그러네요. 그럼 우선 지난번에 드리기로 했던 것부터 드리죠. 두 분 다, 아미나 존스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아미나 존스? 뜬금없는 질문이군. 어디 보자...멸망전쟁 때 살아남은 인류를 모아 락 하버에서 항쟁했고, 코코를 비롯한 오비탈 와쳐를 통해 화성 이주를 계획한 사람이지. 그 외에는...딱히 아는 바가 없군.''


''애덤 존스의 부인이기도 하죠. 삼안사업의 창립자인.''


[부인...그렇군요.]


기분 탓일까? 내 대답을 들은 에바의 목소리에 적지 않은 불쾌함이 섞여있는 듯 했다.


[뭐, 딱 적절한 수준으로 알고 계시는군요. 제 정보가 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미나가 락 하버에서 항쟁을 이어나가다가 휩노스병으로 사망한 건 알고 있죠? 그녀가 죽기 얼마 전, 저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자기가 죽을 걸 직감한 거죠. 그때 저를 찾아와서는 터무니없는 걸 맡겨놓았는데, 자기 말로는 미래에 다시 인류를 되살리기 위한 '유산'이라고 하더군요.]


''그 내용물은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미나 존스가 남긴 물건이다.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란 말이다.


[그 내용은...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네?''


''그래, 그럴 줄 알았네. 자네에게서 받는 정보가 다 그렇지, 뭐.''


[어머, 그렇게 말하시면 저도 속상하답니다? 끝까지 들어보세요. 저도 이 내용이 뭔지 알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볼 수가 없었어요. 아미나가 인간의 생체 인증 없이는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게 해놓았더라고요. 제가 약간의 편법을 써서 살짝 확인해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아미나가 제게 준 건 진짜 유산의 위치를 알려주는 일종의 글 내지는 좌표 같아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우리더러 그 내용을 확인해달라는 거군요?''


[맞아요. 그쪽에는 인간이 있으니까, 생체 인증은 별 문제 아니잖아요? 게다가 아미나는 이게 인류 재건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으니, 당신들에게도 손해될 건 없죠. 안 그래요?]


틀린 말은 아니다. 어째 에바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라 영 찜찜하긴 하지만.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라니까요. 그래도 꽤 쓸만한 정보였어요. 이곳에서의 볼일이 끝나면 다음 목표는 그 유산이겠네요.''


''그렇지. 다만, 아군의 규모가 걱정이군. 아미나 존스의 유산을 찾으려면 적지 않은 인력이 들 것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 무리하게 탐색인원을 늘리는 건 오르카호의 안전을 담보로 내놓는 꼴이니 말이야.''


[후후, 그럴 줄 알고 제가 다른 정보를 준비했죠. 이게 오늘 드리기로 한 두 번째 정보에요.]


''그렇군. 그럼, 이번에는 또 뭐가 필요하지? 지금까지 자네의 패턴을 생각해보면, 뭔가를 요구할 것 같은데?''


[없어요.]


''...뭐?''


''뭐라고요?''


[없어요. 이건 그냥 대가 없이 드리는 정보에요.]


대가 없는 정보라는 에바의 말에, 나와 마리 대장님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라비아타 통령? 지금이라도 이 통신을 끊는 걸 추천하지. 이 에바는 진짜가 아니야.''


''동감이에요. 설마 에바가 무상으로 정보를 주다니. 당신, 진짜 에바 아니죠?''


[...도대체 두 분은 절 뭐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기껏 사람이 선심써서 도우려고 했더만!]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고 이런저런 요구를 해온 게 어디 한두번인가? 당장 몇 달 전만 해도 선심이니 뭐니 했다가 결국에는 우리가 직접 블랙리버 군사기지의 서버를 뜯어와야 했지 않았나.''


[그건...그렇지만.]


에바가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는 게 통신기 너머로 느껴졌다.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자기 업보인 셈이니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않아 있었다.


[...알았어요. 이번엔 별다른 요구 없이 그냥 정보만 드리겠다고 약속하죠. 그래서, 들을 거예요, 말 거예요?]


''들려주게나.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


[알겠어요. 자, 그럼 어디까지 말했더라...아, 맞다. 인원 부족 문제였죠. 두 분, 혹시 절대방위지역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요?]


절대방위지역? 분명...


''...AGS들이 철충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지역 아닌가요?''


''그렇지. 내가 알기로는 세계 곳곳에 위치해있는 걸로 아는데 말이야. 혹시 그들과 접촉하라는 이야기인가? 그건 좀 무리인데?''


[맞아요. 안될 거라도 있나요?]


''그야 있지. AGS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와 연락을 취하지 않네. 절대방위지역에서는 우리에게 통신을 보낸 적이 없고, 우리 쪽에서는 그쪽으로 통신을 연결할 수가 없지. 전화기로 치면 연락처는 고사하고 통신기록이 없는 셈이니까. 그나마 에이다가 예외이긴 하지만, 내가 전에 듣기로는 그녀와 절대방위지역의 AGS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네. 애초에 에이다와 통신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죠. 하지만 만약 이쪽에서 절대방위지역의 AGS들에게 통신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에바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갑자기 숫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얼추 10자리는 되는 것 같은데, 이게 뭐지?


''뭔가요, 갑자기?''


''...군 장교의 군번이군. 그것도 꽤 높은 계급의.''


[역시 마리 4호기군요. 맞아요. 이건 당신들이 현재 위치한 곳인 한국의 군인, 그중에서도 영관급 간부의 군번이에요. 이걸 이용하면 멸망 전에 그들이 이용하던 군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있겠죠.]


''그렇군. 하지만 이게 방금 말했던 절대방위지역이랑 무슨 상관이지?''


[제가 절대방위지역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고 했죠? 그중에는 극동에 위치한 극동사령부도 있어요. 아무래도 사령부인 만큼 통신량이 상당해서 AGS에 내장된 회로로는 처리량이 모자란데, 거기서는 효율을 위해 기존에 있었던 군 전산망과 통신망을 보수해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 여기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으셨겠죠?]


''AGS들이 쓰는 통신망이 구시대의 것을 보수해 쓰는 것이니, 이 군번을 통해 그곳에 접속하면 그 통신망을 쓸 수 있다는 것이군.''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와 연락이 됐다고 해서 그쪽이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지는 미지수잖아요.''


''그건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그나저나,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군번만으로는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없을텐데?''


[맞아요. 비밀번호가 필요하죠. 하지만 그건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어요. 군번은 그래도 군 자료를 뒤져보면 구할 수 있지만, 비밀번호는 도저히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럼 결국 쓸모없는 정보 아닌가요?''


''아니, 아마 별 문제 없을걸세. 비밀번호로는 짐작가는 게 있으니.''


''네?''


[정말인가요?]


아니, 당신이 놀라면 안되지. 정보 제공자잖아.


''내 추측이지만...아마 1q2w3e4r!일걸세. !대신 @가 들어가던가. 내가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군 보안은 의외로 허술하거든.''


[애덤한테서 듣긴 했지만, 진담이었군요, 그 이야기...전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동감이다. 저런 비밀번호로 용캐도 잘 굴러갔구나, 군대. 어러모로 대단하다.


[뭐, 아무튼, 제가 드릴 건 다 드렸어요. 그 정보로 뭘 어떻게 할지는 당신들에게 달렸죠. 사령관이 깨어나면 서로 잘 이야기해보세요. 그럼, 전 이만-]


''잠깐만요, 에바.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여느때처럼 통신을 끊고 돌아가려는 에바를 황급히 불러세웠다. 아무래도 늦진 않았는지, 에바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뭐죠? 시간 없으니 짧게 말하세요.]


''걱정 마세요, 짧게 끝나니까. 에바, 당신이 우리에게 말했었죠? 최후의 인간이 나타났으니 반드시 구하라고. 그 최후의 인간이라는 분이 관자놀이에 철충 감염이 있는 10대 언저리의 소년이 맞나요?''


[네.]


''그 인간이 정말로 최후의 인간이 맞나요? 아니면 우리가 그분을 최대한 빨리 구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나요? 그분이정말 최후의 인간이라면, 왜 당신은 철충이 그분의 바로 옆에 있는 위험천만한 상태로 방치해둔 거죠?''


[...]


방금 전까지 에바의 목소리가 들리던 통신기에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게 나를 더 조바심나게 만들었다. 혹시라도 에바가 내 질문을 간파한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사실 프란츠 주인님과 그레고르 씨는 철충들이 들어오기 힘든 건물 잔해 속에 계셨으니, 엄밀히 따지면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철충이 근처에 있기는 했지만, 바로 옆에 있지는 않았으니까. 즉,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그레고르 씨의 존재를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그는 철충인가, 인간인가?'


에바가 그레고르 씨의 존재를 모른다면, 그녀의 대답은 '프란츠 주인님은 철충의 출입이 불가능한 곳에 계셨으니 문제 없다.'일 것이다. 그 폐허 속에서 깨어난 사람은 프란츠 주인님이 유일하다고 알고 있을테니.


에바가 그레고르 씨의 존재를 알고, 그 분의 정체도 안다면, 그녀의 대답은 두 가지다. '당신들을 재촉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라는 답변, 그리고 침묵. 


그레고르 씨가 인간이라면, 그녀 입장에서는 딱히 망설일 필요 없이 곧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딱히 켕기는 것도 없고, 그저 우리를 재촉하기 위해 최후의 인간이라고 거짓말을 쳤다 하면 그만이니까.


그레고르 씨가 철충이라면, 그녀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그 사실을 알고도 프란츠 주인님 곁에 둔 것이니까.


[...]


계속해서 이어진 침묵이 슬슬 거슬렸다. 과연 그녀는 내 진의를 알고 말을 신중히 고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속셈이 들통났다는 걸 깨닫고 당황해하는 중일까?


몇 시간처럼 느껴진 수십초 간의 침묵. 그 끝에 에바는 입을 열었다.


[...'그것'과 같이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어지간한 문제는 그게 다 해결해줄테니.]


...


...


...그것?


''그것이라니, 그게 무슨-''


[...시간이 다 됐네요.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잠깐! 에바!''


''...끊었군.''


아무 대답 없는 통신기를 바라보며, 에바의 마지막 한 마디를 곱씹었다.


'''그것'이라니...그건 또 무슨...''


''나도 모르겠군. 다만, 에바가 우리의 질문을 잘못 해석한 것 같지는 않았네. 즉, 그 '그것'이라는 발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마, 제가 우려했던 게 사실이었던 걸까요?''


''뭘 우려했는데?''


''그야, 그레고르 씨의 정체가-으아아, 깜짝이야!!!''


자연스럽게 답하려는 찰나, 위화감을 느끼고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머리에 이상한 헬멧을 쓴 그레고르 씨가 내 뒤에 서 계셨다.


''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누님 때문에 더 놀랐잖아! 무슨 도깨비라도 본 것 마냥 그래?''


''가, 각하. 여긴 언제...?''


마리 대장님도 어지간히 놀라셨는지, 새파랗게 질린 채 말을 더듬거리며 질문하셨다.


''나? 온 건 한 시간 정도 됐으려나? 너랑 누님이랑 바빠 보여서 요 근처만 어슬렁거리긴 했지만.''


한 시간이라고? 설마 우리 대화를 다 들으신 건가?


''아무튼, 볼일은 다 끝난거지?''


''일단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아, 별 건 아니고, 라비아타 좀 빌려가려고.''


''...네?''


                                                                                               


내가 라비아타를 데리고 나온 곳은 지휘부 근처의 숲이었다. 뭐, 인류가 망한 이후로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심부를 제외한 모든 곳에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니 온 세상이 다 숲이긴 하다만.


아무튼, 나와 라비아타는 1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을 숲 속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뭔가 가족끼리 가볍게 산책을 나온 것 같은 느낌에 괜시리 기분이 오묘했다.


''...''


물론, 저쪽은 의견이 좀 다른 모양이지만. 저 표정은 가족 산책이라기보다는 마치 고려장하러 가는 분위기 아닌가? 분위기도 풀고, 슬슬 할 말도 할 겸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했어?''


''...''


''...별로 말하고 싶은 건 아닌가 보네. 그래, 그럼.''


말할 마음이 없는데 굳이 입을 열게 할 필요도 없다.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어차피 말할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라비아타?''


''네.''


''아직도 내가 의심스러워?''


''...''


''굳이 입에 발린 말 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 아직도 내가 못미더워?''


''...네.''


각오를 하기는 했지만, 역시 직접 듣는 건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 하마터면 섭섭해 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단 말이지...잘 됐네. 이걸 괜히 만든 건 아닌 셈이야. 자, 받아.''


그렇게 말하며 내가 라비아타에게 건네준 것은, 작은 립스틱만한 크기의 스위치였다.


''이건 무슨...?''


''내 슈트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스위치야. 3초 동안 누르면 바로 발동하지. 효과는 10분 정도?''


''...이걸 저한테 주신다고요? 왜?''


''그야...이러는 게 서로 편할 거 같아서.''


''?''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라비아타에게 설명을 하려 했지만,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분명 공방에서 포츈에게 이걸 받을 때까지만 해도 쿨하고 시크한 대사가 있었는데, 내 기억력이 원망스러울 다름이다.


''그게, 설명을 하자니 좀 복잡한데...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가 항상 날 무슨 시한폭탄 보듯 보면서 킬각 재는 걸 보면 신경이 닳아 없어질 것 같아. 그러다 보니 나도 너한테 민감하게 반응하는 면도 있고, 스트레스도 쌓여. 여기까지는 이해됐지?''


''네...''


''오케이. 그래서, 너나 나나 둘 다 서로 견제하는 건 불가피하다면, 하다못해 그 견제가 어느 선은 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막말로, 너랑 나랑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고 지금처럼 서로 등쳐먹으면 다른 애들이 불편하잖아? 그래서 내가 떠올린게 이거야. 이 스위치.''


라비아타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이 지경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제 의심 때문에 괜한 사람들만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네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처음부터 이런 타협안을 찾았어야 했는데, 난 결백하다고 우직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바람에 일을 크게 만들었지. 정작 나도 내가 100% 인간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말이야.''


나도 내가 인간이라고는 믿고 있었지만, 그 증거라고는 고작 리제의 기본적인 뇌 분석 결과가 전부다. 오히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가 더 많은 지금, 무턱대고 내 주장만 밀어붙이는 것은 좋은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일은 모르니까.


''아무튼, 이제 그 스위치도 있겠다, 앞으로는 서로 적당히 견제하면서 지내자고. 그게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면 충분해.''


''...네.''


라비아타는 그렇게 말하며 손 위에 놓인 작은 스위치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니, 지금부터 서로 이해해가면 언젠가는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나저나, 너무 그렇게 건드리면 좀 불안한데. 설마 벌써부터 누르려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보니, 이 장치는 이름이 뭔가요? 그냥 스위치?''


''콘돔(CONDOM).''


''그렇군요. 콘...잠깐, 뭐라고요?!''


''콘돔. 이 장치 이름이야. 뇌파 조종 장비 및 뇌파 제어장치 (Controller Of Neural Device Or Movement). 내가 붙였지.''


''아무리 봐도 억지로 끼워 맞춘 이름이잖아요, 그거!!!''


''왜? 난 좋기만 한데.''


''그야 그렇겠죠, 본인이 만든 이름이니까!''


''참고로 포츈은 그냥 '긴급정지 스위치'라고 부르더라.''


''그게 훨씬 좋잖아요!''


''에이, 감성이 없잖아.''


''그런 감성 필요 없어요! 하여튼, 한순간이라도 그레고르 씨를 좋게 봤던 내가 바보지!''


''어어, 잠깐만? 누님? 그 버튼에서 손가락은 떼고 말하자? 응? 누님?!''


                                                                                               


''아이고 삭신이야...''


''인과응보에요.''


''그렇다고 바로 스위치를 누르는 건 너무하지 않아?!''


''칼로 내려찍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그리고 이 스위치 이름, 당장 바꾸세요.''


''네, 네. 하여간 내숭 떨기는. 어차피 프란츠 신체 재건 끝나면 하루가 멀다하고 쓸 거면서.''


''그거랑 그거랑 같은-응? 이게 무슨 소리죠?''


''무슨 소리?''


''뭔가 멜로디가 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난 아무것도 안들리는데...잠깐만. 청각 센서 좀 키울테니까 조용히 있어봐.''


''...''


''어...음...으흠? 얼씨구? 아 놔, 미치겠네, 진짜.''


''뭔지 아시겠어요?''


''어. 불행하게도 말이지. 지진 경보야.''


''지진 경보라니...땅은 멀쩡한데요?''


''그치. 애초에 저 지진 경보도 그냥 멜로디가 찰져서 쓰는 거지, 지진이 일어났을 땐 안 써. 하기사, 애초에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긴 하냐만.''


''그럼 저 경보는 무슨 의민데요?''


''철충들이 쳐들어왔다. 그것도 자연재해 급으로 큰 놈이. 뭐 대충 그런 뜻.''


''자연재해 급으로 큰 놈이라니...아, 설마?''


''그래. 그 설마인 거 같아. 아무래도 우리 1)삼각두 형님이 엉덩이가 근질거려서 마실 나오신 모양이네.''


                                                                                               


패러디 목록


1) 게임 '사일런트 힐 2'에서 등장하는 괴물.



와! 1만자 돌파!


사실 이번주 월요일에 올릴 예정이었는데 아카 오류 떠서 다 날아갔었다.


덕분에 2주만에 다시 올리는 비운의 화.


근데 다음화 내로 프란츠 신체재건 어떻게 끝내지.


골칫거리가 너무 많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