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남친. 나 저거.”


천아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의 치즈케익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언제부터 내가 남친이었지...?”


사령관은 의아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포크를 집은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잘린 치즈케이크가 몽글거렸다. 천아는 그것을 보며 입을 벌리며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1일 하지 뭐. 싫어? 난 좋은데. 어쨌든 빨리 치즈케익 내놔. 어어? 나 턱 빠진다? 이게 아래로 갈지 위로 갈지 몰라. 처신 잘하라고.”


“예. 예. 그리합죠.”


케이크가 포크에 찍혀 잠깐 부들거렸다. 천천히 옮겨지는 조각이 천아의 입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흠... 오늘은 치즈 맛이 좀 강하네?”


“얻어먹는데 그런 말하면...”


“네. 맞습니다. 저는 남친에게 얻어먹는 중이었지요! 그러면... 입 벌려! 케이크 들어간다!”


“잠깐!”


포크로 자르지도 않고 찔러 넣어진 케이크의 나머지가 사령관의 입으로 돌진했다. 거의 욱여넣다시피 집어 넣어진 케이크를 간신히 우물거리는 사령관과 그것을 보며 웃는 천아.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둘이었지만, 한 명은 그렇지 못했다.


세이렌은 그들의 뒤에서 에이프런을 구기듯 쥐어짜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령관이 누군가랑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머릿속에선 이해하고 있었지만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두근거리는 가슴. 그리고 당장에라도 저 여자는 치워버리고 자신이 옆에 앉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순하고 착한 세이렌은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잡념을 해소하려 애썼다. 누군가에게 그런 폭력적이고 불순한 생각을 하다니. 그녀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아는 그런 세이렌을 보며 씨익 웃다가 사령관을 보며 말했다.


“남친아. 남친아. 나 카페모카 마시고 싶어. 진짜 세상에서 제일 뜨거운걸로. 아니다. 차가운걸로. 얼어 뒤져도 아이스로 마셔야지. 그리고 치크 케이크 하나 더. 이번에는 좀 덜 달달한걸로. 카운터에 있는 게 맛있어보이더라. 그거 가져와.”


여전히 입에 있는 치즈 케이크를 우물거리던 사령관은 의아한 표정으로 천아를 쳐다보았다. 반 쯤 남아 있는 아메리카노를 힐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천아는 그런 그를 보면서 한 숨을 쉬면서 말했다.


“먹고싶다고. 응? 빨리 다녀와.”


사령관은 거의 떠 밀리다시피 의자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천아는 그런 그를 향해 엉덩이를 몇 번 팡팡 쳐주더니 손을 흔들어보였다. 눈웃음치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세이렌의 쪽이었다.


세이렌은 천아의 눈을 쳐다보고는 흠칫 놀라며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뱀의 눈같이 뽀죡한 눈빛이 사방에서 찌르는 듯한 기분이 온 몸을 스쳤다. 잠시동안 눈이 마주쳤다. 이 묘한 긴장감에서, 천아는 세이렌에게 이곳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았다.  소녀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발이 천천히 움직여졌다. 이제 서로의 거리가 테이블 하나 만을 남겨두었을 때, 천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꼬마아가씨. 왜 그렇게 봐. 아주 잡아먹겠어? 혹시... 질투나?”


세이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에이프런의 레이스를 꽉 쥐었다.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천아는 그런 세이렌을 보며 기가 찬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이래서 애들은 안된다니까. 꼭 떠 먹여줘야된다고.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입도 없나? 그치?”


천아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세이렌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대뜸 어깨를 잡아 당겼다. 당황스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세이렌은 눈을 감으며 그대로 주저 앉았다. 하지만 무언가 푹신한 느낌이 들어 살짝 눈을 떠서 보았다. 이제는 천아의 자리에 세이렌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진짜 딱 한 번 기회 준다. 이 언니가 한거 그대로 해. 오케이? 남친이 고자가 아니면 넘어갈껄?”


세이렌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넋을 놓았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천아는 미묘한, 뱀과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반대편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세이렌은 멍하니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겨진 에이프런과 부스스한 머리카락. 황급히 그것들을 다듬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천아는?”


사령관의 목소리였다. 세이렌은 헛기침과 딸꾹질을 한 번 하더니 하나 둘 씩 놓여지는 아이스 카페 모카와 치즈 케이크를 보다가 결심이 선 듯 비장하게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천아가 사라지고 세이렌이 놓여진 상황이 의아하기도 했고 오늘따라 이상한 소녀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왜?”


물론 소녀에게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말 보다는 행동이었다. 세이렌은 이미 붉어진 얼굴을 위로 올리고는 평소에 내지 못할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나... 남친... 나 이거...”


크리티컬 히트였다.


ㅡㅡㅡ


나른한 오후였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구름은 천천히 하늘에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사령관실의 소파는 푹신했다. 노곤노곤한 햇살과 식곤증에 눈이 서서히 감겼다. 세상의 모든 여유를 쌓아 놓는다면 오늘이 아닐까. 나는 다리 하나를 소파의 팔걸이에 올려놓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각하.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되지 말임다.”


브라우니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류 뭉치를 내 탁자에 올려 놓고서는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안경을 쓰고서는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지성이 느껴지는 외모와 손짓. 종종 고민하는 듯 머리를 긁적임에도 금방 해결되었다는 듯 다시 손이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분명 보통의 사람들은 브라우니에게 지성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무례함을 떠나서 사실이었으니까)라고 말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브라우니는 달랐다. 지성이 생긴 브라우니. 민트초코와 같은 발언이었지만,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기억을 잃었다. 정확히는 뇌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한 모듈의 급진적 어쩌구 저쩌구. 닥터가 말한 이론이라 기억하고 싶지 않아 대충 그러려니 했다. 어쨌든 그녀는 충분한 지성과 지능을 가졌고 그 결과 참으로 유능한 부관으로써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그동안 격무에 시달리던 나도 이런 한가로움과 느긋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브라우니에게 박수를! 니가 최고야!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부끄럽잖아.


나는 너무 오래 누워있어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폈다. 몸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다리를 움직여 소파를 벗어났다. 이제 일을 해야할 시간이었다. 아무리 브라우니가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존재했다. 자. 의자에 앉아 펜을 들고, 찍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피곤해져서 등받이에서 미끄러지듯 흐물거렸다. 나는 한 마리 코다리다. 죽어가는 코다리. 밥경찰이 될 운명인 코다리. 펄떡펄떡.


“각하. 오늘까지 처리 안하시면 마리 대장님이 혼내러 오신다고 하심다.”


“귀찮은데... 에이. 그냥 오늘은 청년 몸으로 살아야겠다. 그럼 마리도 포기하고 안 오겠지.”


“그러면 라비아타 통령이 달려들검다.”


오. 이런. 그건만은 싫은데. 최근 라비아타랑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다. 특히, 골반이 반 쯤 으스러지는 기분은 이제 사양이다.


“그래. 일 하자. 일.”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아 서류를 하나 씩 흝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브라우니는 지금이 더 좋을까. 아니면 기억을 가졌던 과거가 더 좋을까. 의문은 빠르게 처리할 수록 좋은 것이었으니, 당당하게 브라우니를 보며 말했다.


“브라우니.”


“예. 각하.”


“브라우니는 지금이 좋아? 아니면 예전에 좋아?”


“좋은 것 말씀이심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들은 브라우니는 손을 턱에 괴고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 삼 분쯤 지났을 때 브라우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둘 다 좋슴다.”


“뭐야. 그럼 이야기가 성립이 안되잖아.”


“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슴다. 분명 지금의 저에겐 기억이 없슴다. 하지만 이프리트 하사랑 노움 병장. 실키 상병. 레프리콘 상병. 모두 저한테 잘해 주심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과거의 저는 행복했을검다. 반대로 지금은 각하과 함께 업무를 보는게 좋슴다. 그 이런걸 뭐라고 함까? 복에 겹다? 그런 말이었슴다.”


아직 언어 모듈에 완벽히 집어 넣지 않은 말을 꺼내다니. 단어 사이에 지성이 느껴지는 너는 브라우니가...! 맞다. 기특한 브라우니같으니. 나는 더 이상 묻는 것을 무례로 여겨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나도 너랑 일하는게 좋아.”


“감사함다. 각하. 그... 영광임다! 아. 맞슴다. 오늘 저녁 대검찰청임다. 가지무침, 해빔소, 조기구이(진), 그리고 홍합탕임다. 후식으로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임다.”


“... 브라우니!!! px 가자!!! 냉동 사줄게!!!”


“좋슴다!”


ㅡㅡㅡ

노을이 지고 있는 들판에는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다. 느긋하게 한 발자국씩 내 딛는 사령관과 그의 옆에서 속도를 맞춰 주는 칸. 바람의 소리가 풀을 스치며 사각거렸다. 조금씩 붉어짐과 색을 잃어 검정으로 칠해지는 구름이 게으르게 움직였다. 분명 세계는 이런 식으로 흘러가기를 반복 했을 것이었다.


사령관은 그런 풍경들을 보다가 본능적으로 칸의 손을 잡을 뻔했다. 하지만 닿지 못한 감정이 뻗어 졌다가 움츠러들었다. 그의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금반지가 빛을 반사하면서 반짝거렸다. 머뭇거림과 꿈틀거림이 반복되다가 결국 코트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말았다.


칸은 눈치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왜 이곳에 자신을 대려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섵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모든 시작은 그가 해야했다. 어림짐작 하나만으로 풀어나가기에는 서로에게 엮여 있는 이해관계가 복잡했으니까.


“칸.”


먼저 입을 연 것은 멈춰선 사령관이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큰 아름드리 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사이사이로 새어나오는 노을빛과 거대한 그림자를 만드는 가지와 나뭇잎들. 떨어진 나뭇가지가 그의 머리에 천천히 내려 앉았다. 칸은 그것을 유심히 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그것을 집어 들어 만지작거렸다.


“사령관. 칠칠지 못하군.”


“그러게.”


어색한 침묵이 서로의 입에서 삼켜졌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으며 나뭇잎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칸과 말해야 하는 사령관.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면서 말했다.


“이 곳. 기억나지 않아?”


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 장면은 과거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과거’의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어림짐작일 뿐이었지만, 그동안 사령관인 자신에게 해왔던 일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칸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나무 하나와 좋은 분위기의 풍경. 그 뿐이었다.


“그렇구나.”


씁쓸한 표정이 떨궈졌다. 아랫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감내하는 이의 얼굴을 얼마나 처량한가. 사령관은 간신히 참아낸 말을 다시 집어 삼키며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칸도 그를 뒤따라 갔다. 사박거리는 두 사람분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췄다. 그는 손을 뻗어 나무의 껍질에 새겨진 음각을 만지작거렸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 당신이 새긴 글인가.”


칸은 그렇게 말했다. 사령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부채 의식과 이상한 기분이 동시에 들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과거의 자신. 기억을 잃기 전에 영원을 맹약한 사이. 하지만 그녀는 살아있으면서 죽었다. 칸은 돌아오지 않을 기억과 감정을 놓치 못한 남자의 모습과 지금 자신의 모습. 어쩌면 닮았다는 생각도 들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가. 사령관.”


“아무것도. 그저, 내가 놓지 못한 것 뿐이야.”


“그럼에도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러게.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왼손 약지의 반지가 그림자에 서서히 가려져 빛을 잃었다. 다른 손가락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사령관은 고개를 조금 들어 그 글귀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에게.’ 손 위에 손을 포개어 같이 새긴 말이었다.


채 이어지지 않아도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때에는 그랬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한 쪽이 채워지지 않았다. 존재 함에도 끼워 넣어지지 못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아니라고 말해야겠지. 테세우스의 배 같은... 아니. 그 반대로군. 껍데기만 남은 내가 과연 그대의 ‘칸’인가?”


사령관은 아무 말 없이 칸을 쳐다보았다. 그리움이 가득 담긴, 그럼에도 원망 하나 없는 눈이었다. 그 눈을 본 칸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를 향해 걸어갔다. 한 발자국에 풀잎이 살랑거렸다. 두 걸음에 손을 뻗었다.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에 칸의 손바닥이 사령관의 볼에 닿았다. 사령관은 그 손을 포개며 말했다.


“테세우스의 배같은 어려운 명제도 필요 없어. 언제나, 처음 그대로. 늘 그랬듯이. 넌 언제나 나에게 ‘칸’이야. 내가 가진 마음을 비운 후에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일이야. 그러니까...”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기회를 주겠어? ‘칸’?”


칸은 포개어진 두 손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기억보다는 가슴이 알고 있었다. 시간의 문제였다. 그녀는 결국 그에게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걸. 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거의 나도,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면... 꽤 괜찮군.”


ㅡㅡㅡ


1일차 3개


원래는 대댓으로 달았는데 가독성 때문에 단편집으로 내는게 좋은거 같아서 이렇게 함


신청 받은 소재는 파악하기 쉽게 앞에 잘라서 넣어봄


오늘은 좀 달달한 소재여서 호불호 안 갈릴듯?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