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산지가 많아 농업 생산성이 바닥을 기는 땅이자 21세기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을 꼽으면 항상 순위권 안에 들어가는 곳이다. 책으로는 왜구의 근거지였고 조선, 일본간의 중계무역을 맡았던 전진기지라고 알 수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와보니 왜 삼국시대의 국가들과 고려, 조선이 쓰시마를 점령 안 하고 그대로 놔뒀는지 알 것 같았다. 


 

점령을 하지 못한게 아니라 안 한 수준이잖아. 줄줄이 이어진 산들은 강원도의 고산지대를 연상시켰고, 인프라라곤 박살난 걸 떠나 흔적조차 보이지도 않는데다가 그나마 평지라고 불러줄 수 있는 곳은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촌락지대뿐이었다. 제주도처럼 섬 중앙에 산이 있는 형식이 아니라 그냥 산맥 자체가 뚝 떨어져 나와 섬이 된 모양새 같았다. 


 

“땅이 너무 척박하네요...저런 땅에서는 제대로 길러도 절반 정도는 다 자라기 전에 시들고 말 거에요. 온실을 쓴다 해도 한계가 있겠어요.” 

 


의견을 듣기 위해 일부러 데리고 온 레아마저 한숨을 쉰다. 비와 천둥을 불러오고 농업에 특화되어있는 페어리의 지휘관인 레아가 절반을 죽여 먹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면 평범한 사람이 농사를 시도했다간 바로 폭망해 쪽박 차는 땅이라는 뜻이다. 


 

“에휴...이건 내 실책이네. 정말 미안하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대구와 경주의 흔적들보다 훨씬 낙후된 건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 다녀온 사람들에게 험하고 척박하다 얘기도 듣고 볼 것도 별로 없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막상 이렇게 와 보니 그 정도가 좀 심하다. 이건 명실상부 내 실책이다. 제주도와 한반도에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적당한 규모만 보고 정작 중요한 식량 생산성과 공업부지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산이 많아서야 공장부지가 별로 나오지 않을 것 같거든..누나 생각에 옮겨와 봤자 몇 개 못 옮길 것 같거든?”


“혹시 포츈, 이 시대에는 산을 평지로 만들어주는 기술이나 바이오로이드는 없어?”


“그런 무지막지한 기술이 있으면 철충에게 쉽게 당했을 리 없거든..”


“민님, 소설 너무 많이 보신 거 아닙니까.” 

 


왜. 사람도 만들어내는 세곈데 산맥 평탄화 기술 정도는 있을 법하지.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땅을 깎는 것보다 기계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쪽이 더 대단하다고.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옆에서 한숨을 쉬는 팬서를 한번 째려본 나는 산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 보았다. 아직은 겨울이라 그런지 정말 해가 빨리 진다. 지금 승선을 준비해 귀환하기 위해 출항한다고 한들 밤을 피하진 못할 것이다. 등대도 없어서 불빛 하나 없는 밤바다를 가로지르느니 차라리 여기서 앞으로의 계획을 짤 겸 하룻밤 묵으면서 아침을 기다리는 쪽이 더 좋겠지. 


 

마침 정찰을 보낸 스파르탄 중대도 돌아왔다. 섬에 도착하기 무섭게 섬 곳곳을 정찰한 스파르탄 중대의 정찰 결과를 받아보고서 결정해도 늦진 않겠지. 이번에는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아야지.


 

무리 지어 온 네모 몸통의 로봇들이 나란히 사열한 가운데로 붉은색이 인상적인 스파르탄 캡틴이 앞으로 나와 정찰 결과를 말해주었다.


 

“스파르탄 캡틴. 전 구역 정찰 완료. 적대적인 물체 발견되지 않음.”


“그래? 그러면 버려진 AGS 같은 건 없어? 생존자나?”


“AGS 발견되지 않음. 미등록 바이오로이드 1개체 발견. 내부 데이터와 대조 분석 결과 블랙리버 사 ‘아머드 메이든’출신의 ‘A-14B 스프리건’모델로 보임.”


“스프리건?! 걔 지금 어딨어?!”

 


같은 부대원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앉아있던 팬서가 물을 붓던 컵라면을 내동댕이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있는지 말하라며 스파르탄 캡틴 앞으로 다가간 팬서의 다그침에 답하듯이 네모난 몸체로 철의 벽을 만들어 사열한 스파르탄들 사이에서 다다미로 보이는 돗자리를 옷 대신 몸에 두른 사람 하나가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대장..? 블러디 팬서 대장 맞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렇지 대장 얼굴도 까먹었냐.”


 

먼지가 껴서 푸석푸석한 분홍 머리를 몇 번 만지던 스프리건은 털털한 블러디 팬서의 한마디에 울음을 터트리며 팔을 벌린 팬서의 품에 꽉 안겼다. 


 

“대장, 진짜 대장이구나! 정말 살아있는 거 맞지?”


“그럼 내가 죽었겠냐. 오랜만이다. 스프리건.”


 

김밥처럼 돗자리로 돌돌 몸을 만 그녀를 끌어안은 팬서의 묵묵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실려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털털하게 말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부대원을 만났다는 감격 때문인지 지긋이 감은 팬서의 눈꼬리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너 그런데 장비는 어떻게 된 거야. BFG1000은? 외골격은 어디에 갔어?” 


 

스프리건의 울음이 그치자마자 팬서는 그녀의 장비부터 지적했다. 팬서의 지적을 받은 스프리건은 창피하다는 듯 팬서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지..함선 호위 임무가 끝나고 퇴각 명령 떨어졌을 때, 바다에 빠졌거든..그 때 벗어던졌어.”


“장비야 무거워서 벗어 던졌다곤 하지만, 옷까지 전부 벗어 던지면 어떡하냐. 대체 그 돗자리 하나로 어떻게 지금까지 산 거야? 여기 인간들이 챙겨 주기라도 했어?”


“아니? 내가 왔을 때 아무도 없었는데?”

 


둘의 대화를 듣다 보니 뭔가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팬서가 얘기한 때는 적어도 아직 인류가 살아있을 시절 같은데 대마도에 사람이 비어 있다고? 아무리 여기가 일본에서 낙후한 지역이고 존재감도 없는 곳이긴 하지만 대한민국과 일본을 잇는 거점 중 하나다. 관광객들의 발길로 제법 오갔었고, 관광객이 없더라도 자위대 경비대가 있던 곳인데 이런 곳이 비어있었다고? 뭔가 이상한데?

 


“저기, 스프리건이라고 했지?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아?”


“우와..진짜 살아있는 인간이잖아. 뇌파를 느꼈을 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 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인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나 말고도 한 사람 더 살아있으니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대마도가 비어있었다고?”


“여기가 대마도라고 하는구나. 응, 정말 전부 비어있었어. 얼마나 낡은 섬인지 시설도 그렇고 다른 곳보다 30년은 더 낙후되어있는 곳이라니까.”


 

스프리건의 말과 촌락 등을 봤을 때 일본 정부가 대마도를 아예 버렸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여기가 인구수도 좆만하고 수입이라곤 관광 원툴에 나오는 자원도 아예 없다고는 하지만 섬 전체를 버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주민들이야 본토로 오게 하면 된다지만 적어도 군 기지 정도는 유지했을 텐데.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아 스프리건에게 섬 안내를 받자 사람하나 없는 텅 빈 유령마을이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수많은 도시나 마을은 파괴되긴 했지만 적어도 사람이 살던 흔적이라도 보이긴 했다. 하지만 대마도에 있는 마을은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텅 빈 집들 뿐, 편의점에 남아있는 참치캔이라던가, 버려진 가구같은 사람의 흔적들은 어딜 봐도 없었다. 하다못해 내가 맨 처음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을 만난 울진군 평해도 촌동네긴 하지만 이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스프리건이 자신의 집이라고 소개시켜 준 항구 근처의 빈 집 또한 있는 것이라곤 침대 매트리스 하나와 다리 하나가 작살난 원형 식탁, 그리고 웃는 얼굴이 그려진 축구공 하나가 전부였다. 대체 이런 곳에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이런곳에서 홀로 살아남은 스프리건의 생존능력이 경이롭다. 


 

“너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 나도 고생 좀 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도 마 대장, 내가 살아남는데 얼마나 고생했다고. 손에도 안 맞는 낚시도 하고 이상한 해초까지 먹으면서 버텼어.”


“그런데 이 축구공은 대체 왜 가져다 놓은 거야?”


“으악! 그거 만지지 마!!”


 

그릇 위에 곱게 올려진 축구공을 손으로 가리키자 얼굴을 붉게 붉힌 스프리건은 축구공을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너 설마 저 축구공이랑 혼자 대화하면서 지냈냐?”

 


깨진 창문과 공을 던진 그녀를 바라보는 팬서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네. 어제까지만 해도 소중한 윌슨이었을텐데 그걸 부끄럽다고 아무렇지도 던져버린 스프리건도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다. 


 

그나저나 간만에 만난 생존자인데 혹시 우리에게 합류할 수 있냐고 물어나 볼까? 팬서의 부대원이니 합류하면 팬서도 많이 편해질 테고. 만약 싫다고 해도 오르카호가 있으니 그쪽을 소개시켜 주면 되겠지. 


 

“저기, 스프리건? 우리는 저항군에 소속된 오르카 군수 사령부라고 해. 혹시 네가 괜찮으다면 우리 쪽에 합류해주지 않을래?”


“응? 나 데리고 가려던 거 아니었어? 설마 두고 가려고 했던 거야?”


“아니 그게..네가 싫다고 하면..”


“싫다고 할 리 없잖아. 이 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횐데!”


“민님. 얘가 지금 돗자리로 돌돌 말고 있어서 그렇지, 실은 엄청 유능한 애지 말입니다. 장비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엄청 활약할 수 있는 애니까 데려가시지 말입니다.”

 


아니 난 그냥 본인의 의사만 물어본 건데 왜 날 외로운 애를 섬에 버려두고 가려고 하는 냉혈한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지? 

 


“그냥 단순히 의사만 물어본 거야. 합류해준다면 나야말로 고맙지.”

 


그녀와 악수를 나눈 나는 오랜만에 동료를 만난 팬서를 위해 일부러 자리를 비워주었다. 바깥으로 나가니 지휘를 맡은 홍련과 아스널, 그리고 경호가 필요하다고 억지로 따라온 리리스와 토지 관련 조언을 위해 데려온 레아가 머리를 맞대고 경계근무와 내 경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어차피 하루밖에 묵지 않을 건데 그냥 빈 건물에서 자면 되지 않나? 경호도 어차피 철충도 없는 섬인데 필요 없고.

 


난 그녀들에게 껴드는 대신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에게 가는 쪽을 택했다. 항구 근처 빈 곳에 자리 잡아 담요와 모포로 쓸만한 잠자리를 깐 브라우니는 내가 오자마자 담요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손을 흔들며 날 반겨주었다.

 


“헤헤 민님 오셨슴까? 여기 이불 깔아놨슴다!”


“이거 레프리콘 자리 아냐?”


“어...레프리콘 상병님도 이해해 주실검다! 그리고 예전에 저희 셋이서 같이 붙어 잔 적도 있지 않슴까? 저희 체격 정도라면 세 명이서 붙어자도 괜찮을 검다!”


 

그렇긴 하지..여기보다 좁은 곳에서 셋이서 붙어잔 적도 있고 어깨를 맞대고 앉은 채 잔 적도 있으니까. 브라우니의 권유에 그녀의 옆에 앉자 자리에서 일어난 브라우니는 헤헤 웃으며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앉으니 옛날 생각나지 말임다. 그 때는 엄청 조그만한 곳에 세 명이서 있었는데 지금은 식구가 엄청 많아졌지 말임다.”


“그때는 진짜 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브라우니.”


“그래도 군수공장에 머물 수 있던 건 민님 덕분이지 말임다! 역시 그 때 마을 쪽으로 간 게 제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지 말임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다 브라우니야.”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자리의 주인인 레프리콘이 물통 하나를 들고 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이렇게 세 명이서 붙어 있으니 평해에 있었을 시절이 생각난다. 있는 거라곤 낡은 총 두 자루와 참치 캔이 전부였고 기댈만한 사람은 옆에 있는 둘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동료도 많아지고, 가지고 있는 것도 많아졌다. 전부 이 둘이 아니었더라면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너한테도 고마워 레프리콘.”


“아, 아니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브라우니와 달리 레프리콘은 어색하다는 듯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런 면조차 귀여웠다. 

 


동생같은 두 녀석과 함께 옛날 이야기를 하며 브라우니가 홍련 몰래 가져온 초코파이를 까먹고 있자, 열린 문 너머로 새로 합류한 스프리건이 들어왔다. 누군가가 옷을 챙겨줬는지 두르고 있던 돗자리 대신 멀쩡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안녕! 새로 합류한 스프리건이라고 해. 너네가 대장 밑에 있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구나?”


“스..승리! 일병 브라우니입니다!”


“승리! 상병 레프리콘입니다!”


“에이 경례는 됐어. 나 대장처럼 빡빡하진 않거든.”


 

팬서를 만나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배시시 웃은 스프리건은 날 보고서 배시시 웃더니 갑자기 내 앞에 숟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그럼 민님을 만난 기념으로 첫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블러디 팬서 대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갑작스럽게 들어와 마이크 대신 숟가락을 들이밀고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는 그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실실 웃는 스프리건과 마이크 대신 내민 숟가락을 번갈아 본 나는 한숨을 쉬었다. 팬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야겠다.

 


“얘네 둘이 내 동생 같은 녀석이라면 팬서는 내 친구같은 녀석이지. 그것도 엄청 친한 친구.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고, 가끔가다 가볍게 한잔하며 같이 웃는 그런 녀석.”


“어...그러니까..친구라는 거지?”


“응. 근데 왜?”


“어..아무것도 아냐. 편히 있어! 난 대장한테 가 볼 테니까.”

 


온 것만큼이나 나가는 것도 빠른 애구만. 육중한 팬서와는 달리 발걸음이 엄청 가벼운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스프리건을 바라본 나는 둘과 함께 다시 과자를 먹으며 둘과 쌓은 추억을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팬서는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팬서도 같이 와서 함께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를 여기 데려오지 못한 게 살짝 아쉽다. 다음에는 팬서도 데려와야지. 넷이서 맥주와 과자를 먹으며 다같이 추억을 얘기하면 요즘 어색하게 행동하는 팬서도 좋아할 게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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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리건 등장. 


그리고 옮겨가는 본진은 오키나와, 아니면 북해도 쪽이 될듯. 그리고 여전히 팬서는 불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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