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그쪽 세계로 가겠다, 사령관txt]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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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은 날이 밝자마자 서점에 들러 아르망이 부탁한 것들을 샀다.

서점에서는 정세나 사회 이슈, 역사에 대한 서적들을,

편의점에서는 신문을 사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아, 폐하."


원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르망이 있었다.


"아르망!"


사령관은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간다.

아르망이 예고 없이 집에 와 있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컴퓨터로 게임을 켜놓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폐하, 오셨습니까."

"응. 어땠어?"


컴퓨터로 게임을 켜놓은 건 아르망의 부탁이었다.

양쪽 모두를 '문'으로 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습니다. 정상적으로 로그인된 쪽만 '문' 역할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래? 아쉽네. 사실 짐작하고 있기는 했어. 두 기기에서 동시에 로그인할 수는 없거든."

"하지만 이로써 계정만 멀쩡하면 된다는 가설이, 실제로도 그러함을 확인했습니다."


그건 확실히 큰 수확이었다.

휴대폰을 잃어버려도 얼마든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참, 여기 말했던 것들."


그는 낑낑거리며 들고 온 책과 신문들을 땅에 내려두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직접 저를 위해 행동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니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인 걸. 그런데 이걸로 충분해?"

"한 일주일 정도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조사하려고 합니다."

"아하, 그럼 매일매일 다른 책들을 가져오면 되는 거지?"


그의 질문에 아르망이 살짝 웃는다.


"예. 부탁 드리겠습니다."

"부탁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벌써? 좀 더 있다가 가지 않고?"

"폐하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르망이 그의 앞에 바짝 붙어 선다.

키가 작아 그를 올려다보는 소녀.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한다.


"저의 기운을 돋워 주시는 의미로... 폐하의 포옹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나 지금 땀 냄새 날 텐데."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그것이 폐하의 체취라면 더더욱......"

"...!"


음습한 취향을 드러낸 당사자보다 사령관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어.. 크흠.. 음..."


화면 너머로 저런 대사를 보는 것과

현실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듣는 것과는 천차만별이었다.


'칸 때는 너무 당황해서 오히려 마비됐었는데.'


그때는 편의점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 다급한 마음이 강했다.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맨정신이고, 그래서 더 부각됐다.


"그, 그게.... 음.. 아르망이 좋다면.."

"그러면..."


아르망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안겼다.


"으읏..."


아르망의 팔이 허리에 감겼다.

그는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부끄러웠으나, 꾹 참고 아르망을 안았다.

그때, 두 다리가 붕 떴다.


"어어?! 아, 아르망?!"

"후후후후."


아르망이 즐거운 듯이 웃으며 그를 안은 채 비행기 태운다.


키가 한참 작은 연하의 소녀에게 힘에 져 마음대로 휘둘리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고, 정신을 잃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 잠깐만 아르망.. 이건 너무...!"

"폐하, 얼굴이 꼭 진홍빛의 장미 같습니다."

"으....!!"

"후후후."


아르망은 그를 들어 안은 채 잔잔한 춤을 추듯 몇 바퀴 회전한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지만 회전으로 인한 어지럼보다는,

소녀에게 맥없이 휘둘린다는 부끄럼이 훨씬 거대했다.


"아, 아르망...!"

"예, 폐하?"

"이, 이만 내려줘...!"

"후후후. 저와 춤을 추시는 게 즐겁지 않으십니까?"

"그, 그게......!"

"훗."


아르망은 춤을 멈추고 그를 내려놓았다.

사령관은 부끄럽고 당황한 마음에 털썩 주저앉았다.


"즐거우셨습니까?"

"아.. 으... 모, 모르겠어.... 얼굴이 터질 것 같긴 해...."

"농이 심했다면 죄송합니다, 폐하."


사과하고 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아, 아니야.... 좀 부끄러워서... 기분은.. 기분은 좋았던 거 같아.."


아르망이 미소를 머금고 그를 지긋이 바라본다.

그러다가 바짝 다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칸 대장이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폐하께서는 굉장히 귀여우시다고."

"윽...."

"감히 폐하의 어전에 귀여우시다는 망말을 뱉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폐하."


그녀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을 잇는다.


"정말 귀여우십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우실 줄은 몰랐기에, 그 차이가 더욱 크게 와 닿았습니다.

가능하다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우신 모습을 오랫동안 뵙고 싶군요."


"하하..... 뭐, 아르망 네가 좋다면야...."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행복은 오래 갈 수 있으니.

이미 편의점 기습 대딸도 받았는데 뭐 어떤가.


"후후후."


다시 한 번 입술이 다가와 뺨을 적셨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폐하."

"응......"


아르망이 떠났다.












"불초, 금란. 인사드리옵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오후.

중후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 몸놀림에 맞춰 보라색 휘장과 치장들이 휘날리자,

마치 벚꽃이 휘날리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음.. 아, 아니, 금란!"


사령관은 첫 대면에 실수를 저지르고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훗."


금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금이 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읏....."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주시기를."

"때가 아니라니?"


아직 호감이 부족하다는 얘기인가 싶어 그가 물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호감도가 그대로 적용한 건 이미 앞선 대원들을 통해 확인했고,

그는 모든 대원과 호감도가 100이상이었다.


"칸 대장께서는 가볍게 접촉하셨던 것 같으나, 아직 저희에게는 허가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허가? 나랑 야한 짓 하는데도 허가가 필요했었나...?"

"아,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요,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금란이 갓을 벗었다.


"아직 전송이 완전하지 않기에, 자칫 주인님이 휘말리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쪽의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몰입이 동반되기에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스널 준장께서도 입맞춤 이상의 접촉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직접 안 하고 칸한테 장난 쳐보라고 권했던 거구나...."

"그렇습니다. 칸 대장은 절제심이 대단하시기에."

"맞지."


사령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저희 몸이 붕괴되기 시작하면 즉시 떨어지십시오.


그 말에는 단순한 경고성이 아니라 여러 의미가 들어 있던 것이었다.

확실히, 야한 짓에 몰입하다가 크게 다치는 것보단 미리미리 조심하는 편이 낫을 터.

그는 납득했다.


"그럼 나도 야한 장난 같은 건 자제해야겠네."

"배려를 해주신다면 황송하오나, 필시 싫어할 자매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예. 다만, 허가가 떨어진 후의 후폭풍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음....."


사령관은 아르망이 자신을 안아 올렸던 걸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강간 당할 거다.

저들이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으면, 그는 떨쳐내지 못할 거다.


'더스트 주입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게 설마....?'


살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손쉽게 신체강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떡하니 두고도 말하지 않은 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잠자코 있기는 한데....


'아니야, 설마....'


"음.. 조심할게. 응..."

"그럼 주인님, 외출을 하시겠습니까?"

"응.....?"


사령관은 움찔했다.

저 복장이 현대와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는 옷이었기에.


"외출하고 싶어?"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이 나라가 한국이라 제가 온 것입니다만...... 혹시 소첩으로는 주인님 곁을 모시는 게 역부족인 것인지...."

"아니, 아니 절대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사령관은 다시 생각한다.


'하긴, 요새 시대가 어떤 때인데. 코스프레나 연극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저런 복장을 입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게다가 복장이 어디가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구수한 멋이 있는 복장이었다.


"시선이 좀 집중되겠지만, 뭐 상관 없겠지."

"시선이요...?"

"응. 참, 환도는 두고 가고."

"아....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어디로 갈까? 하고 싶은 거 있어?"

"식자재를 볼까 합니다. 소완 양께서 주인님의 건강을 잘 챙겨드리고 싶다 했습니다."

"오...."


둘은 함께 외출하고 가까운 마트로 가서 장을 본다.


"흠....."


금란은 평생 뜨지 않을 것만 같은 눈을 뜨고 재료를 골랐다.

너무 진지해서 양배추랑 싸우러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간만 많았더라면 꼼꼼히 살펴보며 최상의 재료를 골라드렸을 텐데...."


그녀는 아쉬워했다.


"괜찮아. 금란이 골라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걸."

"그, 그렇습니까? 조, 조금 더 노력해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귀엽네.'


사령관은 흐뭇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10분 정도 시간을 들여 장을 봤다.

금란은 더 오래 있고 싶어 했지만 여건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계산 대로라면 곧 복귀해야 할 때입니다. 그전에 요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응, 기대할게."


금란은 집으로 돌아온 후, 곧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소완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요리였다.


"맛있다, 맛있어!"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


지직.


"....오늘은 시간이 다 된 모양입니다."

"....고생만 시키고 뭐 해준 게 없네.... 미안해."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


금란이 깜짝 놀라서 말한다.


"식사를 대접해드릴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사실, 저희가 게임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상실감이 얼마나 컸.... 앗...!!"


그녀가 숨을 삼키며 입을 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금란...."

"이,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금란."


사령관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등 뒤에서 안아주었다.


"주, 주인님! 이러시면...! 붕괴에 휘말리십니다!"

"고마워. 그리고 이렇게 만나서 정말 기뻐. 정말로. 너희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야. 이렇게 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사령관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을 보며.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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