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로부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아니지만 유명한 거 몇 개는 봐서 대충 어떤 성향인지는 알고 있었음.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번 스토리는 중심이 되는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빨아주는 역할은 기존보다 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 그런데 좋은 의미로 통수를 날려줘서 재밌게 봤음.


솔직하게 말해서 아쉬운 점을 들자면 분량의 문제였는지 시간의 문제였는지 혹은 지금의 구조가 최선이라고 판단한건지는 알 수 없지만, 케시크-칸의 고민이 각각 연계되지 않고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지기에 막판에 케시크랑 칸이랑 학살하는 씬에서 지금까지 쌓아둔 무언가가 해소되면서 뽕이 극대화되는 쾌감이 없었던 부분은 조금 아쉬웠음. 근데 칸이랑 케시크 성격상 둘 사이에서 뭔가 갈등이 쌓이려면 전개가 작위적이거나 분량을 엄청 넣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해는 감. 아쉬운 점은 여기까지고 그 외의 나머지는 다 마음에 들었음. 투전승불로 진화한 프로그래머의 연출이 합쳐져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좋더라.


이벤트 스토리의 큰 줄기는 다들 예상했던 내용대로 무난히 흘러갔음. 현재 오르카 애들은 죽으면 안 되니까 좀 억지라도 살려주고, 칸이 칸으로 변하게 된 이유인 과거의 트라우마도 짧게나마 다뤘음. 이런 부분을 보면서 나는 2가지 생각을 했는데, 하나는 우로부치가 칸-케시크에게만 너무 중점이 돌아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스토리를 분배했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자기 취향도 적당한 선에서 억제했다는 거였음.


1부부터 보면서 지금껏 느낀 건 우로부치가 라오의 스토리와 뒷설정에 엄청 해박하다는 거랑 프로답게 그걸 적재적소에서 설명충 느낌 전혀 안 나게 잘 뿌려줄 줄 안다는 거였음. 그런 과정에서 주인공인 칸과 케시크, 조금 더 나아간 영역의 호드 대원도 잘 케어해줬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짧게짧게 등장한 캐릭터들도 가려운데를 긁어주듯이 나름대로 인상적인 대사나 지금껏 인게임에서 보여주지 않았지만 캐릭터에게 굉장히 어울리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음.


동시에 우로부치가 존나 좋아하는 상세한 총기묘사도 많이 억제한 느낌이고 딥 다크하게 빠질 수 있는 칸의 트라우마를 심화시키는 부분도 상당히 부드러운 수준에서 풀어내는 걸 보면서 이 양반 이번 스토리에서 자기가 준비한 이야기를 메인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라스트오리진의 설정과 캐릭터들을 마음껏 예뻐해주고 싶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음.


솔직히 100% 뇌피셜이기는 한데, 우로부치 이름값도 있고 스마조가 엄청 돈을 쏟아부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이 게임에서 스토리를 맡은 걸 보면, 평소 자기가 좋아하던 이야기를 라오에서 보여주려는 의도보다는 라오 설정을 가지고 마음껏 창작을 즐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봄.


2차 창작을 해본 사람들은 느껴본 적 있을거임. 원본에서는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원본에서 보여준 설정과 캐릭터성을 토대로 볼 때 이건 진짜 그럴싸하다 싶은 장면을 만들어놓고 혼자서 흐뭇해하는거. 그런데 이게 흐뭇해하는 걸로 끝나는게 아니라 정사가 된다? 이건 못참지.


그런 시각으로 스토리를 다시 한 번 보니까 칸의 트라우마, 케시크의 고민, 두 사람이 각자에게 주어진 고난을 헤쳐나가는 방법 등을 쓰기는 썼지만 이 부분에 대한 분량이나 집중도를 의도적으로 낮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거기서 남은 분량은 다른 호드 부대원들의 캐릭터를 챙겨주는데 쓰기도 했고, 정말 짧게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 2부에서는 피닉스, 안드바리, 그렘린 등이 있겠네. 그런 애들을 보여주는데 할애하기도 했음.


결론 없이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번 이벤트는 우로부치가 자기 취향의 스토리를 라오라는 배경 속에서 써냈다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라오의 설정과 캐릭터에 대한 리스펙을 보낸게 아닌가 싶음. '우로부치의' 라스트오리진 이벤트 스토리가 아니라 우로부치의 '라스트오리진' 이벤트 스토리를 써줬다는 말이지. 


프로 작가니까 원청에 맞추는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껏 스마조의 행보를 보면 법적인 문제가 없고, 치명적인 설정충돌이 없는 한 스토리의 방향성은 우로부치에게 전적으로 맡겼을거임. 게다가 트위터에서 굳이 뻥을 친게 아니라면 초고가 한방에 OK 받았다고 했으니 초기부터 이런 흐름을 탔을 거라고 생각함.


여기까지가 뇌피셜 버무린 감상글이었고 만약 내 뇌피셜이 맞다면 3부는 섹스엔딩 예상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라스트오리진의 매력은 '딥 다크한 배경설정' '인류가 멸망한 배경에서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이야기'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과도 같은 피조물' '섹돌'임. 이미 다른 건 다 보여줬으니 이제 섹돌의 극치를 보여줄 때다! 딸페의 자위로는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