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 발키리는 다른 발할라 대원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환보직제에 따라 자신이 사령관의 부관을 맡았던 달의 마지막 날 밤, 당일 치 서류 결재를 마친 사령관이 그녀에게 방에 가서 풀어보라며 쪽지를 하나 건넸었다. 그녀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숙소 침대에 누워 몰래 풀어본 쪽지에는 사령관의 친필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새벽 5시까지 다른 대원들 몰래 페어리 시리즈가 관리하는 식물원으로 와줘

 

 

서류 결재 시에 사용하는 정자(正字)가 아니라 흘려 쓴 필기체에서 사령관이 단순한 사무적 문제로 발키리를 호출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발키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가볍게 화장을 했다. 하얀 그녀의 피부를 캔버스로 옅은 화장품들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하지만 화장을 해도 그녀의 얼굴에 붉게 떠오른 홍조를 감추지는 못했다.

 

‘이러지 마, 진정하자. 레오나 대장님보다 내가 더 사령관님과 가까워져서는 안 돼.

 

 

....그렇지만, 사령관님께 사랑받는 일이라면...’

 

발키리는 부관으로서의 자세를 생각하며 욕망을 억누르려 했으나 그녀 스스로도 내심 사령관이 자신에게 애정을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레오나의 부관이기 전에 발키리 그녀 역시 사랑을 갈구하는 한 명의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키리는 더욱 오늘 사령관이 자신을 부른 일에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 긴장은 전장에 섰을 때처럼 두려운 긴장이라기보다는 어떤 긍정적인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긍정적인 긴장이었다.

 

발키리는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식물원에 도착했다. 자신이 먼저 사령관을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캄캄한 식물원의 불을 켤 생각을 하며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에 식물원 문 틈사이로 새오나오는 빛이 들어왔다. 안에 있는 누군가가 그녀보다 먼저 불을 켜고 있었음을 뜻하는 사실에 발키리는 누구일지 궁금해 하며 문을 열었다.

 

‘사령관님이 벌써 와 계신 건가? 아니면 페어리 시리즈 분들 중에 야근하시는 분이 계신 건가?’

 

그녀의 손을 따라 열린 문 뒤에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령관이 있었다. 어둠에 잠긴 식물원에서 플라타너스가 있는 곳에만 핀 조명을 켜고 그 아래에 서있는 사령관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발키리는 사령관에게 다가가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녀를 발견한 사령관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발키리, 왔어?”

 

“아! 네, 저보다 먼저 오셨군요 각하.”

 

“아냐, 온지 얼마 안됐어.”

 

발키리는 사령관의 말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가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의 바짓단을 기어 올라가다 방금 날아간 무당벌레로 보아, 적어도 사령관은 무당벌레가 자신의 신발에서 바짓단까지 기어오를 정도의 시간동안 그녀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 서툰 거짓말을 해주는 사령관의 모습에 발키리는 자신의 볼이 불콰해지는 걸 느꼈다.

 

‘으으... 화장을 더 진하게 할 걸.’

 

감정을 사령관에게 들킬까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령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싱긋 웃음 짓더니 손을 내밀었다.

 

“잠깐 걸을까?”

 

“네.”

 

사령관이 손에 들고 있는 스위치의 버튼을 누르자 바닥에 불이 켜졌다. 사령관은 발키리와 함께 빛이 그린 길 위로 발을 내딛으며 자신들의 경로에 따라 밝아지는 좌우 화단의 꽃을 구경했다.

 

“저건 장미, 이건 달맞이꽃, 요건 도라지꽃. 꽃이 참 많이 피었네.”

 

“언제 이런 걸 준비하신 건가요?”

 

“레아에게 부탁했지. 요새 우리 부관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서 표정을 풀어주고 싶었거든.”

 

“아...”

 

사령관의 말에 발키리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언제나 모두에게 친절한 사령관이었지만 그녀는 사령관이 자신에게 주는 마음이 친절이 아닌 사랑이기를 바랐다. 똑같이 잘해주어야 할 존재에서 특별히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애끓는 걸 이기심으로 치부하고 덮었지만, 지금 옆에서 함께 걷는 사령관의 말에 발키리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느끼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발키리, 가장 좋아하는 꽃이 있어?”

 

“좋아하는 꽃이요? 음...”

 

사령관의 질문에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특별히 생각나는 꽃이 없었기에 딱히 좋아하는 꽃은 없다고 답하려는 순간, 지난 달 작전에서 보았던 꽃 한 송이가 떠올랐다.

 

“실라라는 꽃이 떠오르네요. 푸른 별모양의 꽃인데 예뻤어요.”

 

“그래? 나중에 한 번 찾아봐야겠네. 발키리가 좋아하는 꽃이니까 분명 발키리를 닮았을 거야.”

 

“히힛... 혹시 모르죠. 각하께서는 좋아하는 꽃이 있으신가요?”

 

“나? 나는 안개꽃을 좋아해.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서 풍성한 꽃다발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구름 같아서.”

 

“후훗, 그렇기는 하죠. 안개꽃은 장기 보존이 가능한 염료에 담가 프리저드 플라워(Preserved flower)로 쓰이기도 한다니, 나중에 페어리 시리즈 분들께 부탁드려 아이들을 위한 화훼 수업을 열어도 괜찮을 듯 하네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의견 고마워.”

 

“아니에요.”

 

사령관과 발키리가 걷는 꽃길은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아갔다. 처음 걷기 시작한 플라타너스 나무 근처로 길이 이어지자 발키리는 둘만의 달콤한 시간이 끝나감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길은 플라타너스를 넘어서도 이어졌다.

 

“각하? 한 바퀴를 다 돈 것 아니었나요?”

 

“아직 안 가본 곳이 하나 있지. 거기까지 마저 봐야하지 않겠어?”

 

사령관은 발키리와 맞잡은 손을 깍지로 바꾸더니 그녀를 이어지는 길로 이끌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길을 제외하면 아까처럼 좌우에 전등이 켜지지 않아서 발키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발키리, 아까도 말했지만 난 안개꽃을 좋아해. 꽃다발이 구름 같아서 말이지.”

 

“그리 말씀하셨죠.”

 

“그래서 가끔 생각하고는 했어. 구름을 선물로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후후, 그거 정말 귀여운 생각이신데요?”

 

“...흠, 아무튼 그것 때문에 오드리한테 부탁을 했었지. 구름으로 옷을 만들어줄 수는 없냐고.”

 

사령관은 거기까지 말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아까 그가 플라타너스 아래에 서있었던 것처럼, 발키리의 눈앞에 아름다운 원피스 한 벌이 핀 조명의 빛을 한 몸에 받으며 나타났다.

 

“이, 이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잡아와서 만든 것처럼 폭신해 보이는 안개꽃 다발이 청초하게 피어난 매화꽃 모양의 원피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오드리의 뛰어난 솜씨가 아낌없이 발휘되어 원피스는 꽃밭 사이에 숨겨두면 감쪽같이 모습을 감출 정도로 꽃의 모습을 따와 만들어졌었다.

 

“잘 만들었지? 오드리의 실력은 알아주어야 한다니까.”

 

“...정말 예쁘네요. 이런 멋진 원피스를 선물 받을 분은 행복하시겠어요.”

 

“그리 말해주니 좋네.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인데 행복하게 받아주니 말이야.”

 

“네?”

 

사령관의 말에 발키리는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도 모르고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사령관은 그녀를 보며 저 원피스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해주었다.

 

“발키리, 못난 사령관을 만나 고생 많이 했어. 널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 받아줄래?”

 

“...각하는 정말이지 바보입니다. 이런 거.... 이런 거... 

 

제가 안 받을 리가 없잖아요.”

 

발키리는 환히 웃으면서 그에게 답했다. 화장을 닦으며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눈물 한 방울이 붉디붉은 그녀의 사랑을 투명하게 보여주었다.

 

“받아줘서 다행이네. 여기서 한 번 입어볼래?”

 

“여, 여기서요?”

 

사령관의 제안에 발키리는 약간 놀랐으나 이내 만연에 미소를 띠고 옷을 벗었다. 사령관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녀는 늘 입고 다니던 제복을 벗고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사령관은 물었다.

 

“다 입었어? 눈 떠도 될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령관이 조금만 더 기다려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키리는 그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평소의 농후한 키스가 아닌 가벼운 입맞춤이었기에 자극은 더 커서 사령관은 예기치 못한 놀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놀란 사령관의 표정을 보며 배시시 웃는 그녀는 안개꽃과 매화, 그리고 발키리 그녀로 피어난 꽃다발 같았다. 사령관은 볼을 붉히며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고 답했다. 발키리는 자신처럼 불콰하게 물든 사령관의 얼굴을 보며 팔짱을 끼더니 속삭였다.

 

 

 

“그러면... 다시 같이 꽃구경하실래요?”

 

 

 

사령관과 발키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꽃길을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오는 길과는 달리, 가는 길 내내 사령관이 바라본 꽃은 그의 옆에 있는 꽃다발뿐이었다. 처음 걸었던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선 둘은 다시 입을 맞췄다.  꽃 사이로, 절대 시들지 않을 사랑이 피어나고 있었다.







사복 대회에 문학도 낼 수 있다는 걸 어제 알았네. 발키리 스킨 보다가 문득 떠올라서 발키리와 연결되는 꽃들만 따와서 써봤어.


실라의 꽃말-변하지 않는 사랑

안개꽃- 사랑의 성공, 간절한 마음

매화- 고결한 마음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