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화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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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리는 컵을 들어올렸다.

손에 든 컵을 집어던져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그녀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해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오?"

흰 제복, 푸른 머리칼. 수많은 검을 허리춤에 걸친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 반란군을 소탕하는 일은 선제께서 남기신 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마리는 용이 유독 사령관에 대한 충심이 깊던 것을 떠올리며, 그렇게 덧붙였다.


"선제께서 남기신 나라를 지킨다라..."

용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마리에게 물었다.


"그대는 선제 폐하와 이 나라,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오?"

어차피 대답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기에, 마리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이 나라는 선제께서 세우신 것.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목숨은 선제께서 이루신 위업 덕분에 붙어있는 것.

이 나라가 중요한 것 역시 이 나라를 선제께서 남기셨기 때문이지, 나라가 선제 폐하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왜 묻는거지?"


그러자 용은 품 속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어 마리에게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읽어보시오."


"이게 뭐지?"

그렇게 말하며 마리는 종이를 펴 보았다.



오르카 제국 해군 사령관 무적의 용은 자신의 임무에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것이 누구에게서 내려진 명령이든지 간에 거부할 권한이 있다.

황제의 권한으로도 이를 강제할 수 없다.


-오르카 제국 초대 황제 (인)



"소관은 반란군 소탕에 해군을 지원해줄 수 없소. 지금 해군은 별의 아이 잔당을 막아내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요.

선제께서 직접 지휘하시던 시절이면 모를까, 소관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병력을 빼내면 방어선은 돌파되고 말 것이오."


마리는 명령서와 용을 몇 번인가 번갈아 바라보다니 조용히 말했다.


"...그런가, 알겠다."



거짓말이었다.

사령관이 해전에서도 천재적인 전술로 대전쟁 시기 수많은 승리를 견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용의 군재가 그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사령관은 육상전 대부분을 자신이 지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직접 지휘했지만

해전은 정말 사활을 건 전투가 아니라면 대부분 용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사령관만큼 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른 이도 아닌 그 사령관이 그렇게나 신뢰했던 지휘관이다.

게다가 지금은 대전쟁 시기만큼 위험한 별의 아이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해군의 규모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해군 병력이 지금의 4분의 1이라도 용은 충분히 별의 아이를 막아낼 능력이 있다.

마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남겨놓은 명령서가 있는 이상, 더 따지고 들어봐야 무의미했다.

마리는 집무실 문을 열고 나올수밖에 없었다.



쨍그랑!

마리가 쥐고 있던 컵이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산산조각났다.


"쯧, 나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했군."

마리는 한숨을 쉬며 컵의 잔해를 대강 손으로 쓸어 모았다.


'소관은 선제께서 바다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셨기에 그에 맞는 행동을 할 뿐이오.

이쪽이 그 명령을 지키기 수월하기에 선택한 것이지, 그대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오.'


그녀가 집무실을 나오는 순간 용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다시 화를 돋구었다.


"젠장, 생각대로 풀리는 일이 없군..."



분명 계획은 완벽했다.

우리에 갇힌 지 오래되어 그 예기를 잃은 암사자가 모으는 사병따위는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르카 육군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사병정도는 가뿐히 짓밟아줄 수 있었기에.


칸은 자기 부대와 부대원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자이니 침묵할 것이고

메이는 사령관의 죽음에 한동안 제대로 정신조차 차리지 못할 자였고

슬레이프니르는 애초에 군을 은퇴했으니 공군쪽은 논외로 쳐도 문제없었다.


그런데 칸이 반기를 들어 정부 기관을 습격할 때부터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행정이 마비되어 레오나의 반란에 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고, 그녀가 제시한 명분에 점점 군에서 사람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메이는 사령관이 죽자 그녀가 설계될 당시의 모습을 되찾고 내부에서 분열을 초래했다.

그녀를 제거하기에는 명분이 없었고, 명분도 없이 군의 원로인 그녀를 제거했다가는 그대로 군이 와해될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면전을 치른다면 레오나에게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는 마리였지만, 승리 이후가 문제였다.


칸의 공작으로 인해 온갖 행정체계가 파괴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면전까지 치르게 되면 국가 자체가 흔들릴 것은 명백했다.

물론 아르망 추기경이나 알파처럼 그렇게 흔들려버린 체계를 바로잡아줄 유능한 행정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사령관의 죽음과 동시에 은퇴를 선언하고 어딘가로 잠적해버렸다.

오르카가 아직 잠수정이던 시절 안살림을 도맡아 하던 배틀메이드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사령관이 남긴 명령서로 해군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방금 컵을 부순 손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각하... 알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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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입니다. 도저히 수많은 과제와 시험을 창작과 병행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만간 종강이니까, 다시 개강하기 전까지 몰아쳐서 완결을 내겠습니다.

마리는 기나긴 대전쟁의 시기와 평화의 시기를 거치며 성격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비단 마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긴 시기를 거쳐온 거의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모두 포함되는 이야기입니다.

기나긴 악전고투의 시간과 안정기를 모두 거쳐온 이들의 성격이 그대로이길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가끔 세상에는 약간의 변화로 인해 그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