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자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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펙스에는 내전이 벌어졌다.

알파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메가는 벌레를 모든 레모네이드 개체에게 보냈다. 이를 삼킨 후 남은 벌레들도 휘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심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불응하는 레모네이드 세력권에 군대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 알파는 오메가가 '철의 왕자의 유적'을 발견하고 이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탐지했다. 어떤 기술이 담겨있는지는 모르나, 멸망 전쟁 당시 이 시설에서 보내 준 자료 덕분에 패배를 늦출 수 있었다는 기록에서 철충에 대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음은 자명했다. 알파는 이 기술들이 오메가의 손에 넘어간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며 저항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신의 병력은 오메가의 군대를 막는 것도 벅찼으니까.


시설 내부에서 벌어질 근접전이라는 점에서 몽구스팀과 화력팀이 선정되었다. 화력팀을 선두로 몽구스가 구역을 하나하나 확보해나가며 오메가 소속 AGS의 저항을 밀고 들어갔다. 시설 장악을 위해 몽구스팀이 제어실로 향했고 화력팀은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춰섰다.


"마더. 화력팀, 진입하겠습니다."


고스트의 무전에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고, 수호자를 선두로 경계하며 화력팀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레프리콘은 공예시간을 가지는 브라우니의 글로우 스틱을 뺏어 내부에 던져보지만 글로우 스틱만 빛을 발할 뿐 주변을 전혀 밝히질 못 했다.


"이상한데요... 실내 조명 전원은 들어와있어요. 정상 작동 중이구요. 하지만 조명이 다 꺼져있는 것처럼 어둡군요.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요. 흠. 잠시만 기다려요."


고스트가 의체를 펼쳐 구역을 크게 스캔하자, 어둠이 물러나더니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반가워요." 그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오메가.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당신 실력은 익히 들었답니다. 당신의 힘과 그 날벌레의 지식, 이 시설의 기술들이라면... 회장님을 되살릴 수 있을 거에요. ...제 힘이 되어주시겠어요?"


"지금이라도 멈춰요." 작은 빛이 나선다. "저흰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봤어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요. 살기 위해 영원히 싸워야 하는 세상만이 있었죠."


"아름답지 않던가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노력들이. 존재를 위한 투쟁이." 오메가는 비웃었다. "이번 세계는 제 발 밑에서, 회장님의 발 밑에서 그렇게 될 거에요. 당신들은 늘 그래왔듯 패배할 거고요."


실내가 안개로 뒤덮이며 가시거리가 극한으로 줄어든다. 고스트는 빠르게 배낭으로 숨었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훈련받은대로 수호자의 뒤에 모인다. 어느새 수호자의 왼팔엔 아탈란테의 것과 비슷한 보랏빛 방패가 들려있었다.


세 명의 동작탐지기는 무언가에 재밍당해 무작위의 좌표를 찍어댔다. 수호자는 동작탐지기를 끄고 안개 속을 노려보다 대검을 들고 달려드는 오메가에 맞춰 방패로 빗겨쳐낸다. 오메가가 괴성을 지르며 휘청이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이 방패 너머에서 납탄세레를 쏟아붙는다. 납탄을 얻어맞은 오메가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수호자는 다시 안개 속 기둥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린다. 어디냐.


"4시 방향! 빠르게 옴다!"


수호자는 브라우니의 도움으로 오메가의 칼날을 다시 한 번 빗겨쳐낸다.


*


몇 번의 공격을 버텨내며 시간을 끈 끝에 제어실을 완전히 장악한 몽구스팀이 환기 시스템을 가동했다. 안개가 걷히고, 두 다리로 겨우 서 있는 너덜너덜해진 오메가가 드러난다.


"안 돼... 이렇겐...!" 오메가가 비틀거리며 홀로그램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자 벽으로 보였던 거대한 무언가가 작동을 시작했다.

쿵.

무거운 물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수호자님!" 타이탄을 브라우니가 빠르게 부축한다.


"어떻게...! 저 거대한 컴퓨터가 수호자로부터 빛을 빨아들이고 있어요! 저걸 막아야해요!"


브라우니가 수호자를 기둥 뒤로 옮겨두는 사이 레프리콘은 고스트의 지시대로 후계자의 회전총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 까지 오메가의 케스토스 히마스를 두들겼고, 브라우니의 돌격소총까지 합세하자 몇 번의 스파크가 일더니 기계는 땅으로 떨어져 작동을 멈췄다.


"으..으흐흐...하하...하하하하하하...회장...님..."


브라우니가 총구를 채 돌리기도 전에 기분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오메가는 사라졌다. 아니, 힘이 다한 신체가 바닥에 닿으려는 찰나, 마치 현실에 구멍이 뚫리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 기이한 광경에 전투 후의 고요함에도 두 화력팀원은 긴장을 놓지 못 했다.


오랜 긴장상태를 깬 건 브라우니의 한마디였다.

"...해치웠ㄴ, 으읍!" 레프리콘이 급하게 브라우니의 입을 막았다. "재수없는 말 하지 말아요. 브라우니."


레프리콘은 바보탐지기 헬멧을 벗어 숨을 한 번 크게 쉰 후 가만히 서 있는 수호자에게 다가갔다. "수호자님, 본부에 연락을 하겠ㅅ" "잠깐만요!" 그녀의 시야 한가운데 갑작스레 고스트가 나타났다. 수호자가 조금 이상하다는 말에 레프리콘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고스트 너머 수호자를 다시 보았다. 수호자는 가만히 서 있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채로. 


*


여행자가 도망가 빛을 잃고 코스모드롬에 낙오된 그는 희미한 비상등에 의지한 채 군체 노예 둘과 대치하고 있었다.


"수호자님?" 눈 앞의 군체 노예 중 하나가 인간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두려움에 눌려 움직일 수 없었다. "오지마..." 군체 노예가 천천히 다가올수록, 그의 숨도 가파져갔다. 군체 노예가 팔을 펼친다. "저리가...! 오지말라니까!"


"수호자님." 레프리콘의 목소리였다.


"허억!" 타이탄의 주먹이 멈췄다. 그는 자신의 주먹을 보았다. 공허 빛이었다.


"아..."


"... ... ...미안." 그녀가 싱긋 웃는다. "아니에요." 공허 빛이 사라진 그의 떨리는 주먹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화력팀은 가족이잖아요."


브라우니가 첫만남때처럼 달려와 끌어안았다. "서로 짐을 나눠 드는 게 가족이라 하셨잖슴까? 헤헤."


고스트는 그 주위를 빙글 돌다 고스트님도 가족이라며 브라우니의 손에 잡혀 합세했다. "...고마워요. 두 분. 수호자의 화력팀이 되어줘서."


고장난 모조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두터운 장갑판 너머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


사령관과 조사를 위한 인력이 현장에 도착하고서야, 화력팀은 확보한 구역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다.


"...이게 철의 왕자였던 모양이군요."


미라화한 얼굴 가죽을 덮어 쓴 채 죽어있는, 흰 바탕에 빨간 색 강조가 들어간 기계 신체.


인간은 사용하지 않는 신경을 제거한다. 그리고 기계는 수면이나, 식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이 피로함을 느껴 기계 신체에 수면이란 명령을 하달하면 기계 신체는 이를 오작동으로 받아들이고 차단하는 것이다.

이 현상이 반복되면 결국 인간의 정신은 퇴화하게 되고, 갈 곳을 잃은 욕구신호는 오류처리된 행동 신호가 되어 불수의적인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사망하는 것이다. 정신이 퇴화하고 팔다리가 뒤틀려 떨어져나간 무언가가 되어서.


철의 왕자의 최후를 뒤로하고 몽구스팀과 함께 화력팀은 마지막 구역으로 향했다. 연구실 심층부로 이어지는 문. 진입 전 브리핑받은 내용대로라면 저 안은 공동이다.


공동 안의 동력은 바깥과 이어져있지 않았다. "이 안에 뭐가 있길래 따로 에너지를 공급해야 했을까요?" 고스트는 못참겠다는듯 빠르게 날아들어갔다. 일행은 그런 고스트를 따라 문을 들어갔다. 커다란 공동의 가운데, 조각난 접시를 얼기설기 이어붙인듯한 형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건..."


"벡스 차원 관문!" "변화의 성소?"


고스트와 홍련은 동시에 다른 단어를 말했다. 고스트가 의체를 돌리고 홍련은 고개를 돌리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런 걸 본 적이 있나요?"


"변화의 성소 심층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수호자와 고스트는 철충과 저항군이 '알터리움'이라는 전략 자원을 두고 경쟁 중이란 것은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저항군이 확보한 알터리움 채굴장인 '변화의 성소'에는 모두 저것이 있었다는 게 홍련의 설명이다.


"알터리움... '모든 금속과 상호작용 가능한 촉매제'에서 의심을 하긴 했는데...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그게 사실이라면 여기 이 분들 모두 진작에 벡스화 되었을 거에요. 게다가 검은 정원에서의 전투로 벡스는 더 남아있지 않아요."


순간 고스트와 수호자는 깨달았다. 벡스에 초인과적인 힘이 가해지면 벡스의 성질은 죽는다는 걸.


"흠. 검은 정원을 뒤덮고 있던 죽은 벡스들의 물질이 차원 관문을 통해 조금씩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의체를 으쓱하며 덧붙인다. "뭐, 어디까지나 제 가설이지만요. 그냥 생긴 것만 비슷한 다른 걸 수도 있죠. 이 관문이 작동하기 전 까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죠."


수호자는 생각에 잠겼다.

벡스는 교묘하고 치밀한 종족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정말 그들이 그 세계에서 끝났던 것일까.

타이탄의 짧은 생각은 사령관에게 경례하는 레프리콘의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 흩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