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죽음으로 얼룩진 27번 아일랜드는 마침내 새로운 모습으로 개척되었다.


울창한 숲에서는 럼버 제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엘븐 시리즈 기종들과 민간 바이오로이드들이 평지를 일구며 농작물을 심고 있었다.


고원 쪽에서는 토미워커들을 앞세운 광산 채굴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62명이 묻힌 해변의 광산만큼은 그 누구도 건들지 못했다.

"저 정도의 인프라라면...철충과 펙스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엄청난 이점을 얻는 건 확정되어 있겠어."


"이제야 얼룩들을 태우고 나니 봐줄만 하군."


"저기에서 나오는 자원들을 다 제가 관리하는 거라고요? 정말로요?"


"그럼, 지휘관 씩이나 되서 너에게 저런 섬 관리 하나 못 맡겨줄까?"


모두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일 때, 오직 더치만이 그저 말 없이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치?"


"응, 사령관."


"기분은 괜찮니?"


"......그다지."


더치는 그저 섬만을 바라보고 , 또 바라보았다.


"적어도 한 명이라도 더 살아 있었다면, 그랬다면...같이 저 섬을 볼 수 있었을텐데...."


"...."


홀로 살아남은 더치의 옆에서 아더는 천 마디의 위로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 지금 이 순간에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있으면 추모식이지?"


"그래, 이제 옷부터 갈아입어야 해."


"오드리, 부탁한 건 다 준비 됐나?"


아더의 말에 오드리는 옅은 미소와 함께 한 상자를 꺼내들었다.


"당연히 모두 준비해 놓았죠. 희생을 택한 62명과 그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피 흘린 군인들을 위한 자리인만큼,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답니다."


더치가 오드리에게서 받은 상자 안에는 그녀의 몸에 딱 맞는 검은 양복이었다. 


그리고 양복 가슴팍에는 데드 오스트의 문양이 새겨진 배지가 달려 있었다.


"......."


"실은 대원들과 이야기를 좀 해 봤어.


정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너 역시 우리와 함께 했으니, 명예 대원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겠냐고 하니까 모두가 동의하더군.


이그니스에게도 옷을 보냈으니, 추모식에서 같이 할 수 있을거야."


"고마워, 사령관."


"적어도...혼자 살아남았다고 평생 죄책감 가지고 살지 않게 됬네."


"....그래."


아더는 고개를 떨군 더치의 옆에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드리가 더치의 손을 잡고 탈의실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더는 여전히, 창 밖만을 바라보았다.



27번 아일랜드에서의 추모식이 시작되자, 섬에 정착한 이들은 굳은 표정을 유지하며 죽은 이들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백파이프 음악과 함께 제복을 갖춰입은 여섯 명의 지휘관들이 선두에 나서자 공포탄을 장전한 군용 바이오로이드들은 굳은 표정과 함께 총을 허공에 겨누었다.


광산의 매몰된 입구 앞에 멈춰선 지휘관들 앞에는 아더와 데드 오스트 대원들, 이그니스, 그리고 더치가 있었다.



핵심 부대들의 지휘관들은 굳은 표정으로 입구 옆에 배치된 전사자들의 번호가 적힌 대리석판을 바라보며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이 경례 자세를 풀자, 아더의 손짓과 함께 백파이프의 연주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곧 아더가 자신의 앞에 모인 병사들과 지휘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섬이 보이나?"


"이 섬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고 있나?"


"인류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이 곳을 지키려 한 62명의 더치걸들은 일개 소모품으로 취급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인격체라 여기며 살았다.


곧 아더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우러나오는 듯한 분노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섬이 철충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조잡한 무장만을 갖추고 망설임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지!


그 순간에서 그들은 소모품이 아니었다! 인격체이자, 오르카 호의 자랑스러운 대원이자! 군인이었다!


누가 그들의 용기를 객기라 조롱할 수 있지? 


누가 그들의 희생을 개죽음이라 조롱할 수 있지?


아무도 그럴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들을 조롱할 수 없으며! 


조롱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섬을 차지한 간계자와 추적자는 자기들이 섬의 주인인 것 마냥 그들의 희생을 개죽음이라 조롱했다!


그들만이 이 섬의 힘이며, 진리라는 식으로 패악질을 부렸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묻겠다! 


이 섬의 힘과 진리를 자칭한 둘이 왜 우리에게 짓밟힌 것인가!"



"군인의 희생을 조롱했기에! 짓밟힌 것입니다!!"


스틸라인 병사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자, 숲의 나뭇잎들이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음에도 조심스레 흔들렸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약탈자이자, 짐승이었기에! 


그들은 명예의 가치를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죽음으로써 명예의 가치를 배우게 되었다!


"이 섬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그들의 죽음은 개죽음인 것인가?


하늘에서 전사한 창공의 기사들과 재앙의 인도자들은 전부 개죽음을 당한 것인가!


전우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이 해변에서 목숨 바쳐 싸우다 죽어간 강철 전선의 병사들과, 발할라의 자매들과, 분노를 품었던 호드의 병사들은 전부 개죽음을 맞이한 것인가!


이 섬의 힘과 진리를 자칭한 간계자와 추적자의 말이 사실이었나!"


아더의 연설에 그 자리에서 모인 수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도 숨 쉴 수 있으며,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삼은 명예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이 잠든 곳이다!


이 섬에 잠든 이들의 명예를 그 누구라도 더럽힌다면! 


우린 그들에게 잊지 못할 가르침을 줄 것이다!


명예를 조롱한 댓가는 오직 죽음 뿐이라는 가르침을 우리의 총칼로써 보여줄 것이다!"


아더의 연설 아래, 섬에 모인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은 탄광 입구 위에 내걸린 트릭스터와 스토커의 목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잊혀진 이들을 위해 라비아타 통령의 추모 연설과 함께 62명의 훈장 수여식을 거행하겠다."


곧 라비아타와 메이드들이 단상 위로 올라왔으며, 한 콘스탄챠는 양복을 단정히 입은 더치를 62명의 무덤 앞으로 안내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상처투성이었습니다. 


인간들의 학대로 인해 그들은 병들고 지쳤으며, 그저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전 그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수 없이 노력했고, 마침내 그들의 희미한 웃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인간을 찾는다면 또 다시 모든 게 반복될 것인데, 정말 그러고 싶냐고, 그들은 물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들에게 고난의 시기 속에서 이 곳으로 오기 전까지, 그 어떤 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곳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몰랐던 저는, 이제서야 그들을 만나러 온 제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무덤 앞에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비아타는 숨을 고르며, 더치걸들의 묘비 앞에 묵념 자세를 취했다.


"전 마침내 진실된 인간님을 찾았고, 이번에는...다른 방향으로써 인류 재건을 계획하겠어요.


그러니, 이제 마음 놓고 쉬세요. 


여러분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명예는 저희가 잊지 않고 기억하겠어요."


라비아타의 연설이 끝나자, 아더와 데드 오스트 대원들은 물론, 지휘관들이 몸소 나서서 62명의 묘비에 명예 훈장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더치 역시 이그니스와 같이 양복을 갖춰 입고, 묘비에 훈장들을 걸어주기 시작했지만, 묘비들마다 묵염하던 더치의 어깨는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전 대원! 이 곳에 잠든 이들을 위해 사격 준비! 조준! 발사!"


레드후드의 호령에 총성이 허공을 가득 메웠으며, 백파이프 음악이 더치의 울음소리를 감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