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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긴 것 같나.”

 

 

 

내가 먼저 놈에게 물었다.

 

 

 

“날 놀리는 건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좋은 성격이 아닌데.”

 

“... 그렇군.”

 

 

 

호수처럼 고인 집행관의 체액의 수면이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액체는 가느다란 실처럼 뽑혔고, 데우스는 그걸 잡아 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땅에서부터 솟아난 검을 놈의 손이 부드럽게 감쌌다.

 

 

 

“이 시스템은 네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다.

제아무리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들 이 정도의 화망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네가 진조라 부르는 피조물과 그 밖의 몇으로 저들을 멸살하기란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 하지만.”

 

“하지만?”

 

 

 

휘릭.

 

 

 

“우리가 너희를 죽이는 건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겠지.

훌륭하다. 네가 나를 이겼다. 이단자여.”

 

 

 

자신이 쥔 검을 바닥에 던지며 데우스가 조용히 조소를 내뱉었다.

 

제법 날카롭게 벼려진 검.

LRL의 눈에서 나오는 빛으로 반짝이는 검은 꽤나 잘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호수처럼 쌓여 있는 체액을 감안해보았을 때 적어도 저런 무구 수천 개는 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싸우기를 포기했다.

 

 

 

“가망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은 지쳤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것들은 전부 그런 것뿐이었어.”

 

“교황을 말하는 건가?”

 

“교황이라...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교황이 원하는 지배의 방식과 내가 추구했던 것은 확연히 달랐으니까.

하지만...”

 

 

 

데우스는 아무 말 없이 쓰러져가는 자신의 서기관들을 바라보다, 한참이 지난 뒤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이상으로, 나의 꿈은 터무니 없었다.

욕망의 충족으로 이루는 지배라니.

한 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비대해질 수 있는 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 그래. 참 멍청한 꿈을 꾸었어.”

 

“... ...”

 

“나는 어린 시절, 부족함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모든 것이 충족되어서가 아닌, 모든 것이 부족해서.

삶의 그 어떤 것도 채워지는 것 없이,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나마 나의 머리카락 색깔이 아버지에겐 위안이 되었지.

황금은 부를 상징하는 색이었으니까.”

 

 

 

놈이 바스라진 흙을 한 줌 쥐었다, 놓았다.

힘없이 흩어지는 것이 밤 바람에 실려 쓰러진 철충의 시체 사이를 가로질렀다.

 

 

 

“나를 볼 때마다 내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한다.’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부성애란 으레 기적 같은 말인 법이니까.”

 

 

 

말을 하는 놈은, 도중도중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과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폐와 파랗게 질린 핏줄이 놈의 팔뚝 너머로 비춰졌다.

손 끝에선 썩은 사과의 악취가 풍겼다.

곧 죽을 녀석이란 뜻이겠지.

다만 그럼에도 조금 상큼한 향기가 났던 것은, 사과가 황금빛을 띄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 하지만 사랑만이 가득한 집안은 사랑을 양분 삼아 하루를 버티는 법이다.

그 사랑이 바닥을 드러낼 때, 비로소 본연의 욕망을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그러니 내가 묻겠다. 이단자여.

그 날은 나의 아버지가 굶은 지 백일이 되던 날이었다.

과연 그 때 나의 아버지께서 가장 바래었던 욕망은 무엇이었을 것 같나?”

 

 

 

놈이 피를 흘리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열 때마다 검은 진액과 뒤섞여 붉은 핏물을 토해낸다.

하지만 그보다 절박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절박함은 섬뜩함이 되었고, 나는 다 죽어가는 추기경에게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놈의 표정으로 드러나는 녀석의 삶은, 칠판을 뜯는 손톱처럼 소름 돋는 기괴였다.

 

 

 

“... 먹고 싶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무엇을 먹지? 또 무엇을 마시지?”

 

 

 

나는 일전, 기록물 보관소에서 읽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전 사령관 밑에서 스틸라인이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했던 때의 기록을.

단 한 달만에 브라우니 수백 명이 아사했던 그 때의 일들은 잔혹하리만큼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뭣하면... 땅을 파먹거나 나무 줄기를 뜯어 먹었겠지.”

가난한 농부에 손에 든 것이라곤 다 낡아 날이 빠진 농기구 하나뿐이니까.”

 

“네 말이 옳다. 하지만.”

 

 

 

놈이 녹아 내리는 자신의 몸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그 정도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자들은 진작에 죽었다.”

 

“... 뭐?”

 

“내 아버지는 자신의 옷을 찢어 제비를 만들었다. 기다란 제비 하나와, 짧은 제비 여러 개를.

그리곤 나와 내 동생들에게 뽑게 했다.

그 때, 아버지는 부엌에서 날카롭게 칼을 갈고 있었다.”

 

“... 설마.”

 

 

 

자기 자식을 잡아먹으려 했던 건가.

 

 

 

“뭐, 우리도 짐작은 했지. 이대로 가다간 전부 다 죽어버릴 것이라고. 누구 하나 입을 줄이긴 했어야 했다.”

 

“제비의 결과, 내가 뽑은 것은 긴 제비였다. 당첨이었지.

동생들은 그걸 보고 안심했고,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칼 가는 소리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더구나.”

 

 

 

그럼 놈은 자기 아빠에게 잡아 먹혔다는 건가?

하지만 놈은 지금 내 눈 앞에...

 

 

 

“멀쩡히 살아있지 않냐고?”

 

 

 

순간, 머리 속을 스치고 한 가지 섬뜩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내 아버지는 기다란 제비를 뽑은 사람을 먹으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긴 제비를 뽑은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를 전부 죽여 먹으려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방으로 돌아온 직후, 게걸스럽게 내 여동생의 목덜미를 물어 뜯었다.

남동생의 가슴에 칼을 꽂고, 도망가려는 아이들의 발목을 손으로 붙잡아 일격에 즉사시켰다.

오직 나만이 그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

 

“그 때, 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울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백일만에 위장이 채워지는 충족감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더군.

그 표정에서 더럽고, 추잡하고, 역겨운 욕망이 보였다.

... 또 아주 선명한.”

 

 

 

아비가 스스로 제 자식을 먹으며 기뻐하는 것.

생존이란 울타리 안에서 뒤틀릴 대로 뒤틀린 그로테스크한 감정이 놈의 처음이었다.

여전히 그 때를 떠올리면 두려운 것인지, 데우스느 떨리는 팔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아버지는 나에게 죽은 여동생의 팔을 잘라 건네며 말씀 하셨다.

‘먹어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래서 난, 먹었다. 이를 악 물고 먹었다.

하얀 뼈가 보일 정도로 게걸스럽게. 남은 살점들은 불에 그슬려 전부 다 먹어 치웠지.”

 

“... ...”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식중독으로 돌아가셨다.

제 자식까지 죽여가면서 살고자 했던 욕망이었는데, 그렇게 간 것이다.”

 

 

 

데우스는 그대로 풀썩, 땅에 주저 앉았다.

파르르, 파르르, 놈의 팔이 간헐적으로 떨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격렬하게.

이미 폭포처럼 녹아 내리는 몸으로 지금까지 입을 연 것이 기적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하지만 사랑도 욕망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식욕과 사랑 중, 식욕을 택했을 뿐이다.”

 

 

 

 

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스러지는 자신의 몸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단자여.”

 

“그래.”

 

“이것이 평범한 인간의 말로다.”

 

“그렇군.”

 

“그리고 너 역시 나처럼 평범하게 태어났고, 아마 나처럼 평범하게 죽을 것이다.”

 

“그러겠지.”

 

“그러니 분에 넘치는 욕망은 네 삶을 좀먹을 것이다.

기적을 바라는 것이 그렇다. 교황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점치는 것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커다란 기적은.”

 

 

 

하늘에서 글라시아스가 구름을 새하얗게 얼리고 있다.

 

그 목에 올라 타 있는 LRL.

데우스그 그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순간마다 기적을 바라야 한다.

세상 누구보다 너를 앞세우는 감정의 노동, 끝도 없이 커져만 가는 기대, 실패로 끝날 경우 감내해야 하는 상처.

사랑이란 무저갱처럼 깊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괴물이다.”

 

“나를 보고 괴물이라 하였느냐, 교황을 보고 괴물이라 하였느냐,

허나 진짜 괴물은 네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다.

그 괴물과의 싸움에서 너는 얼마의 승산을 점치겠나.”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사랑.

에우리피데스에게 제대로 말 한 번 해보지 못한 사랑.

버려지고, 무너진 데우스의 삶은 신이라는 이명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최후였다.

 

어쩌면 저기, 죽어가는 서기관들이 믿었던 신은 사랑이란 괴물에게 짓밟혀버린 존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나 역시도.

 

 

 

“추기경 성하시여!!”

 

 

 

쓰러진 데우스의 주변으로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서기관들이 어렵사리 발을 떼어 다가왔다.

 

 

 

"서, 성하시여! 어찌 육체가..."


“우리의... 우리의 추기경 성하께...!”

 

“감히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으리라!!”

 

 

 

그 중 하나가 힘겹게 손가락을 들어 붉은 안개 같은 것을 있는 힘껏 뭉쳤다.

지잉, 지잉, 울리며 한 개의 점으로 수렴하는 에너지들.

게임 속 네스트가 했던 것과 비슷한 공격을 서기관들이 하기 위해 온 힘을 모았다.

 

 

 

“죽어라!”

 

 

 

슈숙!

 

점으로 모인 에너지들이 폭발하듯이 나에게로 질주했다.

저거에 맞으면 분명 죽긴 죽겠지.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주인님!!”

 

 

 

내 뒤로 누군가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스스슥!

 

내 눈 앞을 가리는 푸른 방패.

온 사방을 두르는 파란빛의 역장이 서기관들의 공격을 보기 좋게 막아냈다.

 

그녀가 거칠게 숨을 쉬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단지 숨이 차다기엔 조금 더 격한, 울먹거림이 섞인 떨림.

푸른 방어막과 대비되는 붉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오랜만이네. 리리스.’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서기관이 쏘았던 에너지처럼 붉은 화염이 리리스의 총에서 난사됐다.

지금 시간을 보아 하니 대충 LRL이 하늘로 신호를 보내자마자 달려온 것이리라.

 

 

 

“죽어! 죽어! 이 빌어먹을 해충들!!!”

 

 

 

그녀의 뒤를 따라, 꽤 난폭한 요정 한 명이 거대한 가위를 들고 나이트 칙들을 베어내며 등장했다.

양산형으로 태어나 날 때부터 급이 다른 리리스를 따라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리제의 등은 한계를 넘은 날개짓을 한 탓에 바람에 베인 상처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해충들!! 주인님께 손 대지 마!”

 

 

 

리리스가 쏠 수 있을 만한 것들의 이마엔 전부 총알을 박아 넣었을 때쯤, 리제가 주변에 있는 나이트 칙들을 전부 일도양단했다.

그러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각자에게로 자신의 무기를 던졌다.

리제는 가위의 사정거리 밖에 있는 적들을 쏘아버리기 위해, 리리스는 아직 죽지 않은 서기관들의 목을 확실히 베어버리기 위해.

리제가 쏘는 총알의 총성이 전장을 덮었고, 리리스가 베어내는 적들의 목이 새빨간 피를 뿜어낸다.

 

 

 

“이봐, 스토커! 이제 다시 넘겨!”

 

“시끄러워!”

 

 

 

티격태격 거리지만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움직임.

나는 그 모습을 데우스와 함께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멋진 절경에 화려한 피날레를 날린 것은,

 

 

 

“추기경 데우스! 집행 4부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왔소!

당장 일어나...”

 

“가긴 어딜 가려고!”

 

 

 

하늘로부터 주먹을 쥐고 메테오처럼 집행관을 향해 돌진한 감마였다.

 

그녀가 몸을 던진 하늘을 보고 있으니 왠 작은 검은색 AGS 한 마리가 보였다.

푸른 입자포를 드문드문 던지고 있는 것을 보니 필히 알바트로스였으리라.

 

 

 

‘저 자신감 비대증 환자가 용케도 감마를 도와줬군...’

 

 

 

확실히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진 감마였음에도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하다.

주변에 푸른색 역장이 육각형으로 쳐져 있는 것을 보면 알바트로스가 도와준 것이었겠지.

 

덕분에 감마는 자신의 안위는 살피지 않는 야만적인 움직임으로 집행관의 얼굴에 주먹을 갈겨 넣을 수 있었다.

얼굴을 주먹보다 앞으로 들이대며, 집행관이 휘두르는 검을 이마로 때려 박살을 낸다.

상식이란 것이 결여된 듯한 움직임에 집행관이 당황할 때쯤,

 

콰앙!!

 

그녀의 주먹이 상대의 몸을 짓누르듯이 때려 날려버렸다.

용들이 온 사방에서 번쩍번쩍거리는 판타지의 전장 속에서도 감마의 광기는 그 누구보다 옹골차게 빛났다.

 

 

 

“크하하하핫! 그래! 이게 싸움이지! 

회장놈들이 하라 던져둔 싸움은 이거에 비하면 완전 애들 장난이었다 이 말이야!”

 

“이, 이 광년이 감히 어느 안전에서!”

 

“광년? 그래! 나 미쳤다! 그러니까 더! 더 날뛰어보라고! 철충 나으리!

조금만 더 하면 진짜 미칠 것 같으니까!”

 

 

 

한창 싸움을 즐기던 감마가 자신의 왼팔로 집행관의 머리를 움켜 잡았다.

으드득, 그녀의 손에서 힘줄이 터져나올 듯이 부풀어 올랐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집행관. 감마는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레모네이드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 지 토해내듯이 뽐내고 있었다.

 

스르릉.

 

그리고 그 화려한 과시는, 거대한 리멘이 열리는 것으로 종장을 맺었다.

그 순간, 감마가 왼팔에 쥐고 있는 집행관을 하늘로 높이 날렸다..

 

 

 

“어때, 익숙한 광경이지?”

 

 

 

감마는 빙그레 웃으며 목청이 터져라 하늘 높이 외쳤다.

 

 

 

“기함, 어나이얼레이터!”

 

“주포 발사!!”

 

 

 

콰과과과광!!

 

어지간한 건물보다 거대한 푸른빛의 레이저 광선이 그대로 집행관의 몸을 덮쳤다.

불타 먼지처럼 사그라드는 집행관을 보며 감마는 광기 서린 웃음을 내뱉으며 다음 상대를 찾아 나섰다.

 

 

 

“... 실로 미친 것이 분명하군. 저 여자는...”

 

“그래. 하지만 여기 있는 전부가 다 미친 것 아니겠어?”

 

 

 

기가 차다는 듯이 숨을 내뱉는 데우스를 향해 걸어나갔다.

 

 

 

“가장 약하면서 누구보다 내 옆에 있었던 LRL,

경호대장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 미친 전장으로 달려 나온 리리스,

A급이면서도 SS급인 리리스와 똑같은 속도로 날아온 리제,

감마는 뭐, 말할 것도 없지. 전부 다 미친 사람들뿐이야.”

 

“그리고 미친 짓은 기적을 부르는 법이지.”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힌 어머니의 레시피가 손에 집혔다.

도끼에 붙인 말씀 카드가 바람이 흩날렸다.

 

 

 

“저기 있는 애들 좀 봐.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든 이를 악 물고 싸우고 있잖아.

그렇다고 저 애들이 마냥 강한가? 아니지. 너에 비하면 한참 약한 애들이야.

한참, 평범한 애들이지.”

 

“... ... 평범이라.”

 

“그런데도 저리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있잖아.”

 

 

 

리리스의 총알이 서기관의 미간을 관통한다.

리제의 가위가 철충의 머리를 꿰뚫는다.

하지만 그럴 수록 그녀들의 입에서는 거친 숨이 터져 나온다.

제아무리 경호대장이라 한들 이 싸움터에서 그녀가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도 많다.

 

한계가 명확한 싸움.

하지만 그녀들의 발걸음은 천천히, 전선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건 아집일까, 아니면 불굴일까?”

 

 

 

일개 바이오로이드가 자신들의 발버둥으로 수만 명의 전선을 뒤로 밀어내고 있다.

그녀들의 이마에선 비 오듯이 땀이 흘렀고, 괴로움을 잊기 위해 악에 바친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데우스에게 물었다.

 

 

 

“...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흉년이 든 농지에서 너의 아버지 같은 인간은 평범한 사람이었을 지도 몰라.

오히려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는 드물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내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들보다 훨씬 드문 사람이었어.

괜히 멀쩡한 직장을 내버려두고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님이었으니까.”

 

 

 

평범했던 데우스의 아버지.

평범하지 않았던 나의 아버지.

허나 그 둘 모두 불행하기 그지 없는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너에게 묻고 싶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모두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범인이 아닌, 다만 영웅인 자들만이...”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영웅이었어.”

 

 

 

그렇다면 질문은 조금 달라지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몇 명에게 영웅이어야 할까?”

 

 

 

하나의 나무는 숲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몇 개의 나무가 모여야 숲이 되는 것일까?

 

 

 

“몇 개의 기적이 모여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나의 나무는 작은 개미에겐 거목이 되지만, 커다란 코끼리에겐 길에 치이는 잡초와도 같다.

한 인간의 인생은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헛발질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겐 위대한 업적이 된다.

 

그 인생이 몇 명에게 위대한 업적처럼 여겨져야,

또 그러기 위해 몇 개의 기적이 합쳐져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네가 물었지? 사랑이란 괴물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느냐고.

글쎄, 확답은 못 내리겠지만 지지 않을 거란 보장은 할 수 있어.”

 

“... 꽤나 자신만만하는군.”

 

“그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그런 걸.”

 

 

 

주말마다 바닐라와 같이 침대에서 뒹굴고,

심심하면 마트에서 미호랑 같이 쇼핑하고,

아르망과 같이 체스를 두거나,

워울프와 함께 시답잖은 흑백 영화를 본다던가,

 

돌이켜보면 사랑했기에 즐거웠던 삶이었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사랑을 느끼지 못한 아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하지만 난 매 순간 순간 마다 눈 앞에 있는 아이에게 집중했다.

 

 

 

“몇 개의 기적을 모아야 할까,

몇 명에게 영웅이 되어야 할까,

그렇게 얼마가 지나야 평범한 인간은 영웅이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100개의 기적이 모여도 안 될 거야.

1000명에게 영웅이 되어도 부족할 거야.

그런 일이 백날 일어난다고 해도 평범한 인간은 영원히 평범한 인간이고, 세상에 짓눌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금껏 내 삶은 그렇지 않다며 말하고 있다.

 

 

 

“1번의 기적이면 충분해.

단 한 명에게 영웅이면 족해.

그 한 번의 기적이 눈 앞의 한 명에게 날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그럼 난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아버지의 기도는 나의 기적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영웅이셨다.

 

난 한 개의 기적과 한 명의 영웅을 보며 일어섰다.

 

그렇게 일어났으나, 나는 거대한 벽 앞에 다시 한 번 기적을 바라야 했다.

 

그 때 LRL이 어둔 밤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그것이 한 번의 기적이었다.

 

LRL이 나에게 떠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한 명의 아이가 나에게 영웅이었다.

 

난 한 개의 기적과 한 명의 영웅을 보며, 다시 일어섰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진 않겠지.

다음에도 일어날 리 없는 기적이 필요해질 때가 올 것이고, 그 때가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믿는 것 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럼 다시 일어서면 된다.”

 

 

 

하늘을 보았다.

글라시아스가 얼린 구름들이 눈이 되어 고요해진 전장 위로 소복이 쌓여갔다.

 

 

 

“사랑은 매 순간 기적이 필요하다 했었지?

그럼 매 순간 기적이 있길 믿고, 소망하고, 사랑할 거야.”

 

 

 

도끼 자루에 붙은 말씀 카드가 스륵, 바람에 흩날렸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 고린도전서 13:13

 

 

 

“딱 한 번, 한 번만 기적이 일어나면 그 다음 기적은 또 다시 일어날 테니까.

난 끝까지 아이들을 사랑할 거야.”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13

 

 

 

잠잠해진 주변.

싸움이 멈추고, 내가 만들었던 세계는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장대한 위엄을 자랑했던 용들의 무리는 점차 하늘로 빛 줄기가 되어 사라졌고, 끝을 모르던 철충의 무리도 잔해로 변해 지평선을 채웠다.

LRL들이 만들어준 빛도 기력을 다해 하나 둘, 꺼져갔다.

 

다만 그 끝에서 천천히,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아버지와 LRL을 잇는, 다음의 기적이 꿈틀거리며 맥동한다.

 

글라시아스와 페레그리누스,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셋의 몸도 다른 용들과 다를 바 없이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태양이 떠올라 그 속도를 늦춰주었다만, 일시적인 효과였다.

 

 

 

“용살자여, 이번 싸움이 제법 격하여 짐의 옷이 더럽혀졌구나.

덕분에 무릎 베개를 해줄 수가 없게 되었으니 네 괴상한 정신 머리를 고치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어이, 사령관. 내 몸 좀 보라고. 벌써 만신창이야.

천하의 하피의 왕께서 이런 꼴이 됐는데, 뒤풀이가 없어서야 되겠어?”

 

“후우, 그대여. 확실히 이번 싸움은 그대와 했던 그 어떤 전투보다도 격렬했다.

조금 피곤하군...”

 

 

 

쿵.

 

글라시아스가 그 거대한 몸체를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른 누구보다 집행관들을 상대로 선전해주었던 글라시아스.

집행관의 신기에 가까운 칼솜씨에 그녀의 온 몸에는 수천 개의 자상이 나있었다.

 

그에 따라 함께 주저 앉은 페레그리누스.

날개 한 쪽이 전부 뜯긴 하피의 왕은 검은 기름을 피처럼 뚝뚝 흘리며 나에게 괜한 웃음을 선보였다.

한참을 숨을 몰아 쉬던 페레그리누스가 이젠 끝이란 걸 직감한 듯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친구.”

 

“왜.”

 

“... 수고했다. 그냥 다.”

 

 

 

그러면서 내 뺨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슬며시 닦아 올렸다.

묻어 나오는 핏자국.

데우스가 내 손목을 잘랐을 때 묻었던 내 피였다.


멋쩍게 웃는 녀석을 보며 나도 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 뭐 이 정도 가지고.

엿 같은 세상에 우리라도 정의롭게 살아야지.”

 

“크크, 그래. 정의롭게 살자고. 알았지?”

 

“... 그래야지.”

 

 

 

동쪽 하늘에서 새빨간 태양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징그럽게도 정의에 굶주린 세계니까.”

 

 

 

스릉.

 

페레그리누스의 몸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광자로 돌아가는 몸.

원래부터 있을 리 없었던 녀석은 낙원의 끝을 직감하자 스스로 하나 남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솟아 올랐다.

 

그것이, 하피의 왕의 끝이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LRL에게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다가갔다.

그녀 역시 하얀 빛의 가루로 변해가는 자신의 왼팔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진조의 위엄도, 결국 끝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었구나.

... 어린 소녀야.”

 

“... ...”

 

“짐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하느냐?”

 

 

 

LRL이 진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LRL와 함께 읽으며 그 끝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도끼를 든 용살자와 사이클롭스 프린세스.

그 둘은 가장 거대했던 악룡을 무찌르고 또 다른 여행을 떠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뻔하디 뻔한 클리셰로 마무리된 엔딩.

 

 

 

“짐은 그렇게 떠날 것이다.

그러니 네가 용살자에게 새로운 진조의 여왕이 되어주거라.”

 

 

 

다만 지금이 그런 뻔한 삶이 되기 위해선 무수한 기적이 필요했다.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짐을 이은, 2대 진조의 프린세스여.

할 수 있겠느냐?”

 

“... 네!”

 

 

 

LRL이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짐은 어느 누구보다 권속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

 

 

 

어떻게든 눈물을 흘리려고 하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다그치며, LRL은 어깨를 당당히 펴고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에게 자신의 왼쪽 눈을 자랑했다.

 

어둔 하늘을 빛으로 꿰뚫은 유일무이한 무구.

그 사실만큼은 진조의 여왕이 세운 그 어떤 위업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전설이었다.

 

 

 

“고맙구나.”

 

 

 

그에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자신의 치마를 우아하게 잡아 들며 LRL에게 인사를 건넸다.

넝마가 된 드레스였음에도 그녀의 고귀한 손짓이 LRL을 한 폭의 만화 속으로 인도했다.

 

글라시아스의 앞발에 손을 얹은 진조.

그녀는 이내 무수한 빛의 알갱이로 흩어지며 글라시아스와 함께 떠오르는 일출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LRL은 진조가 남기고 간 작은 장미 꽃잎 하나를 손에 들고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예쁘지?”

 

“... ...”

 

“이런데 내가 어떻게 이 애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리리스와 리제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 전장 속에서 또 하나의 기적을 일궈낸 장본인들.

허나 망연히 나를 지켜보는 둘의 눈엔 그런 자각은 전혀 들어있지 않은 듯했다.

 

 

 

“... 주인님.”

 

“주인님!”

 

 

 

각자 다른 톤으로,

각자 같은 단어를 내뱉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리리스의 발걸음은, 리제의 날개짓은, 무겁기 그지 없었고,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손에 물집이 잡힐 만큼 강하게 총을 쥐었던 리리스와, 너무도 거친 날개짓을 하느라 등이 온통 찢겨진 리제는,

한 동안 받지 못한 사랑을 갈구하듯이 내 품에 안겨 눈물을 글썽거렸다.

 

 

 

“주인님...!! 주인님... ... 내 주인님...

이번에는 지켰어요... 이번에는 지켰다고요...!!”

 

“아아... 주인님... 주인님...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팔에 힘이 다 빠진 탓이었을까,

온 몸으로 부딪혀오는 둘의 협공에 나는 맥없이 그 자리에 풀썩 누워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옆에는 온 몸이 흘러 내리는 데우스가 있었다.

마치 눈사람이 햇살에 녹아 내리는 것처럼, 데우스의 몸은 이제 바닥에 고인 체액들과 함께 뒤섞였다.

언뜻 보기에도 흉하기 짝이 없는 최후.

하지만 놈의 얼굴에는 뭔지 모를 아련함이 서려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예쁜 사랑이라 해줄 수 있지 않겠어?”

 

“... 그래. 네가 이겼다. 사령관...”

 

“인정은 빨라서 좋구만.”

 

“... ... 고맙다.”

 

“뭐가?”

 

 

 

데우스가 곤죽이 된 자신의 손을 벌벌 떨면서 땅에서 하얀 거적때기를 주워 들었다.

한 때 집행관이 머리에 쓰고 있었던 찢어진 천.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에 황금빛 망토처럼 빛났다.

 

 

 

“너라면... 내 스승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구나.

사랑하고... 서로 채워주고... 평화롭게... ...”

 

“네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임마.”

 

“그것 참... 다행이군.”

 

 

 

어느덧 몸 전체가 녹아 내린 데우스.

데우스는 말없이 서쪽 하늘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물러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그 끝에는 메리를 안고 서있는 마키나가 있었다.

 

낙원이 무너졌다. 자신의 한 평생의 꿈이 촛불처럼 야위었다.

하지만 마키나는 빙그레 웃을 뿐, 일말의 후회도 내비치지 않았다.

한 때 이 낙원의 주인이었던 자의 새하얀 욕망을, 데우스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 사령관.”

 

 

 

그러다 문득,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지금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뭐냐.”

 

“음식?

흠... 글쎄. 저기 해를 보고 있으니까 왠지 아이스크림이 땡기는데.”

 

“아이스크림이라...

...

... 아이스크림...”

 

 

 

사령관이나 되는 놈이 먹고 싶은 게 아이스크림이라 그런가,

갑자기 데우스가 피식, 하고 조용히 웃었다.

 

 

 

“네 놈...  평생 소원이 누릉지구나.”

 

 

 

그렇게 데우스의 마지막 황금은,

천천히, 땅 속으로 가라앉았다.

 

픽, 하고 뱉어 내듯이 말한 마지막 한 마디.

단신으로 온 오르카를 무너뜨린 괴물의 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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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스는 눈을 감았다.

팔과 다리, 오장육부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생체 에너지를 전부 몰아다 쓴 이의 말로는 이리도 참혹한 것이었다.

 

다만 저 끝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데우스.”

 

 

 

옥구슬을 굴리는 듯이 맑고 청아한 목소리.

죽음 속에서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

 

 

 

‘... 에우리피데스...’

 

 

 

데우스가 힘겹게 뜬 눈으로 바라본 앞에는 그녀가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철충은 죽고 나면 필히 외신의 심연으로 떨어질 것이었을 텐데,

먼저 간 에우리피데스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있으니 자신도 분명 심연으로 떨어진 것이리라.

 

결국 에우리피데스도 심연 속으로 떨어진 것이었구나.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주었을 때 쓰라린 마음에 선뜻 일어설 수 없었다.

 

 

 

“... 데우스.”

 

“그만해라. 난 패배했다.

네 추기경으로서 고개를 들 낯이...”

 

“이제 됐어.”

 

 

 

아직 누워있는 자신을, 에우리피데스가 조심이 껴안았다.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

 

“... ...”

 

“알고 있어. 넌 연기를 엄청 못하거든.

그런 주제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무슨. 넌 평범한 잡상인 배역이 가장 잘 어울려.”

 

“... 나는...”

 

 

 

데우스는 녹아 내린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추기경으로서의 위엄도, 자신을 따르던 무수한 서기관도 사라진 지금.

그를 안아주는 자는 자신이 한 평생 사랑했던 그녀 한 명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랑한다 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 사... 사랑...”

 

“... 으휴.”

 

 

 

에우리피데스가 데우스를 와락 껴안았다.

 

 

 

“그래. 우리는 사랑 같은 거 하기엔 너무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

나도 가족에게 버려졌고, 너도 사랑 같은 건 받아본 적 없잖아.”

 

“... ...”

 

“그러니까 그냥 고맙다고 해줘.

무대 위에서 하는 대사는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자신을 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신도, 아무런 힘도 줄 수 없는 자신도 그렇게 일어났다.

 

 

 

“... 고맙다.”

 

 

 

데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걸음을 에우리피데스가 인도했다.

 

 

 

“자. 그럼 이제 남은 이야기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하자고.

무대에 남아서 하기엔 해야 하는 말이 너무 많잖아?”

 

“그래... 그렇지...”

 

“아, 맞다.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알잖아? 무대가 끝날 땐 각본가가 아닌 배우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거.”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황금색 망토를 꺼내 건넸다.

약간 거칠거칠한 재질. 무대의 커튼으로 자주 쓰이는 재질의 물건이었다.

그를 보자 데우스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 그래. 그래야지.

무대를 끝내려면...”

 

 

 

그렇게 각본가의 인도를 따라,

신은 기계 장치를 타고 무대 위로 강림하는 대신,

무대 밖으로 천천히 걸어 가기를 택했다.

 

그가 화려한 자신의 망토를 길게 휘날리며 걸어 나갔다.

그의 망토가 거대한 커튼처럼 흩날렸다.

 

 

 

커튼콜(Curtain Call).

 

 

 

에우리피데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데우스는 우습다는 듯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신이라고 불리는 배우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오르카 호라는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 클리셰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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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에피소드도 이제 끝이 났네요

자잘한 떡밥 몇 개가 남긴 했는데 회수야 하면 그만이죠.

이제 좀 쉬는 시간 좀 가져봅시다.

다음 에피소드는 '우당탕탕 오르카 상견례 대소동'입니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