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전편 모음 https://arca.live/b/lastorigin/52141864 







점심이 살짝 지난 시간.


똑똑


나는 사령관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사령관의 대답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 라붕씨 무슨 일이야?"


"시간도 남아돌고... 심심해서 와 봤지"


저번에 훈련에 몰두하다 결국 출입을 제한당한 이후 정말로 시간이 남아돌게 된 나는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는 게 일과가 된 지 좀 되었다.


"아하... 그래서 왔구나?"


"그래"


잠시 이야기가 끊기고 서류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펜 소리가 방을 울렸다.


"괜찮나?"


"응? 나? 당연히 괜찮지 걱정하지 마"


"그렇다는 녀석이 하는 말치고는 힘이 없군"


"하하..."


"어땠어 거기는?"


"신기했지... 멸망하기 전의 도시와 거리... 수많은 사람들"


"그럴 거 같더라"


"단순히 가상현실이라고 치부할 수 있긴 했지만... 같은 친구도 만나봤고... 좀 아쉽지"


"왜, 아저씨는 취급 안 하나 봐?"


"그렇다기에는... 셜록이나 토모랑은 다르게 나한테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으니까"


"지금은?"


"말로 굳이 설명 해야 돼?"


그의 말에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지"


그 또한 나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펜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나의 이야기가 방 안을 채운다.


지금껏 미루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한껏 풀어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들도 풀어냈다.


시시한 웃음소리와 함께 노을이 떨어지고 있었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나서야 우리의 이야기는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아직 서류 더미를 붙잡고 있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사령관실을 나왔다.




-연구실-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연구실의 문을 다시 두들겼다.


"...."


별다른 답이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이미 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닥터가 있었다.


"설마 어제 나랑 이야기 한 이후로 아직까지 안잔거야?"


어제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같이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들은 뭐고?"


"어... 아저씨네"


다크서클이 이미 볼 언저리까지 내려온 닥터가 들어온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다 뭔 일이야?"


"아니... 헤헤, 중간에 방법을 찾았거든. 그래서 언니들이랑 같이 바로 작업했지"


"아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왜 이 꼴이야...?"


"아, 그건 휴식 없이 17시간 동안 프로그래밍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엎어져서 손가락만 까닥이며 시체처럼 프로그래밍 중인 스카디가 이야기했다.


"배양 캡슐에... 그렘린?!"


"흐어엉..."


"야, 여기가 무슨 공동묘지냐"


"비슷한 거 같거든"


저기 어딘가 파묻힌 포츈이 힘없는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아니, 바이오로이드잖아. 얼마나 크런치 모드로 굴렸으면 다들 이 모양이야?"


"헤헤헤, 이 정도면 하루 만에 석사 논문 정도는 쓸 수 있겠어...히히"


"미치겠네"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짙은 색깔을 띄고 있는 배양액의 수조 너머로 무언가가 보이는 게 이제서야 눈에 뜨인다.


"뭐야, 성공했어??"


"지금은 파편화된 기억들을 재구성하는 중이랍니다. 곧 있으면 끝날 거에요"


"진짜... 니들 고생 엄청 했다고 사령관한테 이야기라도 해야겠다..."


"어차피 나랑은 안 해줄 거 아니야..."


"아니.. 너는..."


"히히히히힛, 성장약까지 만들었는데 나를 그런 취급이나 하고 말이지..."


"닥터가 또 폭주하는 거거든!"


"야, 뭐 하는 거야!"


한 명의 광인과 두 명의 엔지니어 그리고 로봇 하나가 난리를 피우는 동안


시체는 익숙하다는 듯 프로그램을 만졌다.




-그리고 얼마 후-


난리 통 속에 캡슐 속에서 걸어 나와 대충 몸을 가릴만한 것만 걸친 리앤은


엎어진 채 그대로 잠들어버린 스카디와


봉인해 둔  검열됨  를 꺼내려 하는 닥터를 막느라 서로 엉켜있는 우리 넷을 당황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나 분명 착하게 산다고 산 것 같은데... 설마 지옥에 떨어진 거야...?"


라며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리앤"


"아저씨... 역시 같이 죽은 거구나..."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우리 좀 도와줘요!"


그렘린의 단말마에 수건만 걸친 알몸의 여성이 뛰어들고 나서야 광기에 물든 닥터가 잠잠해졌다.



-난장판이 정리된 후-


옷가지를 이제서야 제대로 차려입은 리앤과 내가 닥터와 함께 책상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기억은 잘 나?"


"아저씨랑 마지막까지 싸우던 것까지 다 기억해"


"히히히히... 완벽하게 성공했어..."


"쟤는 원래 저런 거야 아저씨?"


"아니, 그냥 잠깐 정신줄을 놓은 걸 꺼야... 아마"


"에휴..."


"아무튼.... 언니... 오르카호에 온 걸 환영해"


"오르카호?"


"인류가 멸망하고 난 뒤 최후의 인간인 우리 오빠가 지휘하는 초대형 군용 잠수함이야"


"내 기억 읽어봤으니 알지 않아?"


"다 읽어본 건 아니니까. 거의 옛날 기록만 봤어"


"아... 그럼 다 설명해 줘야겠네"




몇 가지 간략한 설명을 하는 동안 닥터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간단한 설명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으니 애써 무시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뭐 대충 이 정도면 될까?"


"설명 고마워 아저씨"


"뭘, 굳이 그런 것 까지"


"생각했던 것 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었네"


"나도 처음에는 그 생각 했다."


"근데 왓슨은?"


"사령관실에 있을 거야, 빨리 가봐 너 없다고 표정이 말이 아니다 야"


"헤헷, 알았어"


"그래 이야기 잘 나누고"


"가볼게 아저씨"


문이 닫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리앤을 배웅했다.


"자, 그럼 이 난장판을 어떻게 정리하냐인데..."


이제는 이 잠든 두 사람을 제대로 눕혀 놓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