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전편 모음 https://arca.live/b/lastorigin/52141864 







리앤이 사령관실로 가고 연구실을 대강 정리한 뒤 자리를 비운다.


늦은 시간.


적막한 복도를 조심히 걸어간다.


다시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붕 떠버린 나만을 제외하고


창밖으로는 어두운 심연뿐이다.


낮의 오르카 호와는 다르게 밤의 오르카 호는 지상의 밤보다 훨씬 더 어둡다.


이전에 닥터가 했던 이야기들을 되새긴다


인간보다, 기계에 가까울 것이라는 이야기


분명 무슨 느낌이 들었어야 할 상황에서도 무덤덤해진 내 모습에 스스로도 의아함이 느껴진다.


만약, 한 번 더 이전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똑같이 슬퍼할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던 도중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저기..."


"헤엣!... 저 술 안마셨어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놀란 마녀 의상을 입은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손사래를 쳤다.


"아... 그런 게 아니라"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를 보고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누구세요?"


"저번에 괌 인근 섬에서 합류한 녀석들 책임자였던 라붕이입니다."


"아... 그때 더치걸들이랑 같이 승선하신 분이신가요?"


"네"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헤헤, 제 소개를 잊었네요"


그녀는 자세를 고쳐잡고는 한 손을 가슴께에 얹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키르케, 이전 테마파크의 관리인이랍니다"


"테마파크라면..."


"아..세요?"


"알기는 알죠, 영 좋은 기억 따위는 없다만."


"그러시구나"


"테마파크 관리인이라면... 이전부터?"


"네... 맞아요"


"흐음..."


"그러고 보니 저번에 승선했던 아이들의 책임자라고 하셨었죠?"


"예 그렇죠, 제가 죽은 뒤로는 니아가 했을 테지만, 일단은요"


"그러면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그러죠"


잠시 걸어 방에 도착했다.


밖에서 키르케에게 기다려달라 하고 방에 들어가 자고 있는 니아가 깨지 않도록 술 몇 병과 잔을 챙겨 나왔다.


조용히 문이 닫히고 얼떨떨한 표정을 한 그녀에게 잔을 건넨다.


"그러면 저기 휴게실로 갈까요?"


"방에서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요?"


"안사람이 있어서요"


"아..."


사물함과 침대들을 빼내고 의자와 탁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들어있는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앉으시죠"


키르케가 앉고 내가 그녀가 들고 온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그녀가 술을 홀짝이고는 입맛을 다신다.


"어때?"


"괜찮은데요?"


"우리 애들이 만든 거니까"


"애들이라면... 더치걸이요?"


"만나봤어?"


"네, 몇 번... 그러면 그쪽이..."


"사장님?"


"예, 그 사장님이구나!"


"일단은 맞는 말이지"


내 대답을 듣고 다시 한 모금 홀짝이는 키르케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테마파크로 팔려 가기 직전에 거두어 주셨다고"


"아, 그랬지... 지금 그거 때문에 골치가 좀 아파"


"네? 갑자기요?"


키르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더치걸들 이야기가 아니고 그때 계약할 때 오메가랑 만났는데 이번에 그 녀석이 내 존재를 눈치챘거든"


"아..."


안도하는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내가 더치걸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이야기로 들은 듯 해 보였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더치걸들이랑 만나게 되신 거예요?"


"이야기 하자면 좀 긴데..."




키르케가 술을 홀짝이며 내 이야기를 듣는다.


연합전쟁 이후 은퇴하여 개인 자산과 배당금 그리고 퇴직금과 각종 수당들을 이용해 괌 근처 섬에 터를 잡고


닥터와 아자즈를 빌리러 간 김에 그녀들을 만나 내가 거둬들였다는 이야기


벙커의 건설 장비의 설치 그 후 같이 보았던 영화들 먹었던 음식들


아자즈와 닥터의 이야기들


테러로 보급선이 끊기는 걸 걱정해 시작한 농사


2차 연합전쟁


그리고 멸망전쟁까지


그 이야기들을 찬찬히 듣던 키르케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말년에는 녀석들이랑 부딪힐 일이 별로 없었지, 나이도 들었고 그곳에서 자급자족을 할 수 있을 만한 기반을 만들어야 했거든."


이미 눈이 벌게진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괜찮아? 졸립진 않고?"


"아... 괜찮아요, 제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니까요"


분명 피곤할 게 분명할 터였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뭐... 결국에는 식수를 정화할 수 있게 락스도 만들고 계획도 다 짰지... 그러고 나서야 연구실을 나올 수 있었어 그리고 연구실을 나오고 난 뒤 녀석들이 처음 내게 건네준 술이 바로 그거야"


"이... 위스키가요?"


"잉여 작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열대지방이잖아, 원래라면 만들 수 없긴 한데 전에 건축하고 보관 중이던 유럽산 참나무 자재들을 칩으로 만들고 그거를 숯에 두세 번 거른 소주... 하기야 그쯤 거르면 보드카네, 여튼 그 술에 칩을 집어넣어서 만들어낸 술이지"


"아..."


"그럴 듯 하지?"


내 이야기에 키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만들 수 있는 녀석이 둘밖에 안 남았어"


"아... 그러고 보니..."


"그래, 병 때문에..."


"미안해요"


피곤에 쩔어 있던 표정은 어디 가고 굳게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은 키르케가 내게 이야기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요"


"어...? 감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야"


"아뇨, 당신이 한 일이 위선이든, 유흥이든 간에...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해 봐도"


"제 손에 이끌려서... 얼..마나 많은 애들이 죽었는지... 아세요?"


"어..."


"사실... 저도 몰라요... 너무 많이 죽었거든요"


굳은 표정의 얼굴이 떨려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목소리는 아련하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느라 우는듯한 소리로밖에는 안 들렸다.


"저와... 제 자매...들... 모두... 끅... 흑..."


마침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 키르케는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갔다.


"너, 무 많...이 죽었어요... 매일... 시체를... 흐윽... 언제...는 죽지 못해서... 제가... 회..수할 때 까지... 살아있던 더치걸이... 있었어요... 관리자가... 그걸 보...고는 살아있을...때... 소각로에.... 끅.. 넣어... 흐아아아앙"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 울었다


"미안하다..."


우는 키르케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손을 잠시 잡아주고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조용히 곁을 지켰다.




우는 게 끝나고 울먹이며 이야기 하는 키르케의 고백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이번 만큼은 차라리 이 몸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미 심신이 지쳐 비틀거리는 키르케를 배웅하려 했지만 그녀는 결국 한사코 괜찮다 이야기 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잠수함의 창 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다시 아침이 밝았는지 물 속으로 비치는 햇빛이 보였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