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거모음


금요일.


오늘은 미호가 모의고사를 치는 날이다.


3월의 기본 모의고사는 중학교 수준이고,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수준의 모의고사를 진행했을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게 이 4월달 모의고사...이 성적에 따라서 내 과외선생 운명이 걸렸다.


뭐, 근데 미호는 공부 잘하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이게 내신이 걸린 중간고사도 아니고 부담없이 치면 되는데 뭘.


"잘 갔다와, 시험 잘 보고."


"네~흐헤헤."


웃는거보니까 좋아보이네. 어제는 그냥 단순한 변덕이었나? 어휴, 여자 마음 알기 어렵다 어려워.


그렇게 미호를 데려다 준 뒤, 오늘 할 일을 하려고 했는데…


"할일이 없네."


원래 오후까지는 할 일이 없었고, 오히려 지금까지 이래저래 일이 있었던게 특이한거였다.


"월요일은...뭐, 별거 안했고. 화요일은 문제집 사고 꽃 사고...수요일은...시라유리한테 붙잡히고, 하르페랑 밥먹고, 그 다음에 사장님이랑..크흠. 목요일은...목요일도 사장님이랑 시간을 보냈었네."


나, 의외로 여자랑 얽히는 일이 많은것같은데? 아니, 나랑 어울릴 사람이 원래 없었는데 그나마 새로 생긴게 여자들뿐인건가?


연애노선...아니, 여자복이 터진것같은데 근데 정작 생각해보면 사귈만한 사람은 몇몇 안된다.


미호랑 고등학생들은 제외하고...사장님도, 관계는 갖고 있지만 내가 어울리기엔 너무 부자인데. 사모님도...유부녀잖아.


그렇게 따져보면 사장님이랑 사모님 빼고 나랑 말이라도 섞어본 사람의 범주에 드는건...


"사장님이랑 자매라고 하지만 나름 평범해보이던 꽃집 사람들이랑..."


"대학 동기인 하르페랑 나앤..."


"그때 그 디저트카페의 아우로라랑, 오드리씨....는 좀 아닌가? 오드리씨도 조금 어울리기 힘든 분위기가 있는데."



"유미씨랑, 수녀님, 바텐더누나..."



"그리고, 리앤."


단순히 말만 섞어본 이들만 고르면 이정도지만, 여기서 현실적으로 사귈수 있다고 하면 리앤이나 하르페정도겠지. 나한테 호의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후우....나 뭐 이딴 고민이나 하고 있지? 나 어지간히 할일이 없구나."


뭐 예전같았으면 게임이라도 했겠지만, 일을 시작하자 그럴 마음이 옅어졌다. 그것도 공부 관련된 일이니, 더더욱.


"아니, 요즘 남자들을 못만나서 그런가?"


내가 남자인데 남자를 못만나서 고민이라는 이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친구들은 지금 다 군대에 박혀있다.


그러니까...만날 남자가 없긴 하지. 셜록도 일본에 있고, 입원한 상태라고 하고.


그러면 과외 일도 없는 주말엔 진짜 뭐하지? 밤에는 바로 출근한다고 쳐도...낮시간에 할게 없는데. 어디 가서 놀기에는 아직 벌어둔 돈이 적고.


음...음? 주말? 마침 내일 주말인데, 리앤이랑 만나자고 할까? 리앤도 주말에 만나자고 얘기했었고.


생각난김에, 나는 바로 리앤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세요! 에헴, 이 초천재 미소녀 탐정의 조수 왓슨군인가?"


"네, 네. 탐정님. 내일 이 조수랑 같이 놀러가실 생각 있으십니까?"


내가 아는 리앤이면 바로 좋다고 하겠지. 노는데에는 사족을 못쓰니까.


"뭐?! 정말?! 어어, 그러니까...어! 잠깐! 조금만 기다려줄래?"


어? 이건 예상못한 반응인데.


"어...리앤? 혹시 못가는거야?"


"아냐, 듣고있어! 아니아니, 갈거야! 가고싶어! 가게 해줘! 알겠지? 내일! 약속이다? 아침 일찍...아니, 아니야! 오후에! 오후! 오후에 만나자 우리! 알겠지? 약속 다 하고 오후에 만나는거다?! 토모! 나 백점..."


뚝.


리앤은 다급하게 무언가를 소리치고는 그대로 통화를 끊었다.


"아니, 시간이랑 장소도 얘기 안했잖아...."


뭐, 그래도 약속 자체는 잡았으니 내일은 리앤이랑 놀러간다고 생각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고...밤에는 근무 나가면 되겠다.


그리고 일요일에는...아, 일요일.


"성당에 가면 되겠네. 수녀님이 밥사준다고 했던가..."


사실 식사에는 크게 흥미가 없지만, 수녀님이 부르니까 거절하기 힘든것도 있다. 근데 거기도 어딘지 모르는데....아, 바텐더 누나가 알겠구나. 오늘 밤에 가서 물어봐야지.


"좋아, 주말에 할건 다 정했네. 오늘 미호 모의고사에서 틀린거 봐준 다음에 중간고사 대비하고 수업 끝내고 가서 물어보면 되겠어."


그렇게 오늘 일은 수월하게 풀릴거라고 생각했지만, 미호를 태우러 갔을때 그 생각은 전면 부정당했다.



".....몇점이라고?"


"...323점이요."


어째서?! 물론 323점이 나오는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각 과목마다 80점은 맞아야한다는거니까.


그런데, 내가 아는 한 미호의 실력은 한 과목에서 80점을 맞는게 아니라 총합 380이 나와야 할 실력인데...!


"...어쩌다가?"


"문제풀다가...시간을 너무 써서...뒤는 찍어야했어요."


문제풀다가 시간을 너무 썼다고? 찍었어? 그럼 점수를 더 낮춰야하는데? 대충 300쯤 나온다고 하면...더 나빠졌어.


"그래, 그래...시간 배분문제라...가끔 있지.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거야. 집에가서 연습하자."


나는 일단 미호를 격려하며, 오늘 생긴 문제를 고치려 했다.


중간고사는 다음주였고, 과외는 평일에만 진행하니 오늘이랑 다음주 월요일에 모든걸 해야했다. 서둘러서 고쳐야…


"...쌤, 전 공부랑 안맞는걸까요?"


"뭐? 아니, 아니야. 너 공부 잘해. 똑똑해."


"그런데 망했잖아요..."


"아니야, 시험을 많이 안쳐봐서 그래. 경험이 쌓이면 다른 잡생각같은건 잘 안들거야. 너는 아직 1학년이잖아?"


나는 운전을 하며 미호를 필사적으로 달래고 있었고, 이때 미호가 날 보는 눈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여우나 늑대의 모습을 순간 본것 같았지만 앞을 보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다.


"....쌤 때문이야. 쌤 때문에 괜히 마음이 뒤숭숭해서....아니,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뭐? 뭐라고? 잠깐, 나때문이라고?


"잠깐?! 미호야?"


집에 도착할때까지 계속해서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미호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과외때도, 내 설명에 미호는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화는 하지 않았다.


"...미호야, 힘내라는말밖에 못해주겠네. 그...필요한거 있으면 언제든지 쌤한테 연락하고."


미호한테 연락처를 건네주고,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겨우 옮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갔지?"


미호는 과외가 끝난 뒤, 창 밖으로 익숙한 차가 사라지는것을 확인했다.


철남의 차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미호는 곧바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진 뒤 폰을 껴안았다.


"에헤, 에헤헤...쌤이 나만 보고 있어...폰 번호도 줬고...이제 나한테 관심을 더 주겠지...?"


세상 행복한 미소를 띈 채, 미호는 폰을 껴안고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


'쟤 저거 왜저래....'



-그날 밤 9시-


"후우...바텐더 누나, 술 좀 더 주세요."


저녁을 먹자마자 곧바로 바에 온 나는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분명히 술을 적게 먹기로 했는데, 사장님이랑 술을 마신 후로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것같다. 그런데...오늘은 진짜 술을 마시고싶다.


"저기, 알바군. 이제 슬슬 일할 시간인데? 나도 술먹고 일하는게 하루이틀이 아니긴 하지만 너는 좀 많이 마신거 아닐까? 사장님이 오시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오늘 사장님 안와요. 내일도."


내 대답에, 바텐더 누나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어? 왜?"


"이틀동안 어디 가신대요. 그말만 하고 사라지셨어요."


"이틀동안...안와? 사장님이?"


"네. 그러니까 술 좀..."


나는 술을 계속 달라고 했지만, 바텐더누나는 곧바로 바에서 몸을 날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무슨 액션영화처럼 매끄럽게 넘어가...는가 싶었더니, 막판에 발이 걸려 휘청였다.


"엄마야!"


넘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멋은 없었다. 하지만 바텐더누나는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다는듯, 곧바로 자세를 바로하고 문쪽으로 달려갔다.


"잠깐, 잠깐 기다려봐!"


"술은 주고 가세요!"


"기다려어어!"


.......내가 알아서 꺼내 먹을까?


진열해둔 술 중에 그나마 괜찮은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바텐더 누나가 돌아왔다.


"알바군! 나 왔어!"


"지, 진짜 사장님 안오시는거 맞죠...?"


바텐더 누나는 유미씨랑, 유미씨가 들고있는 술안주와 술이 가득 든 편의점 봉투를 함께 데려왔다.


"자, 사장님도 없으니까 문 걸어잠그고 마시자!"


"펴, 편의점 비워도 되려나? 그보다, 당신은 왜 술을..."


"왜요? 마시면 안돼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뭐 어때! 마시자고!"


유미씨가 잠시 불안을 내비쳤지만, 바텐더 누나의 추진력은 굉장했다.


부스럭부스럭-치익, 딱!


과자봉지와 안주 제품들에 손을 갖다대자마자 포장을 뜯는것과, 맥주캔을 테이블에 올리는것과 동시에 뚜껑을 따는 신기를 보여준 바텐더 누나.


"자, 자. 알바군! 오늘 속상한일 있었지? 그럼 마셔! 유미도, 요즘 스트레스 많지? 마셔! 아핫핫핫하! 다같이 적셔보자고! 건배!"


바텐더 누나는 잔 대신 병을 손에 들고, 유미씨는 뚜껑을 딴 맥주캔을 들고, 나는 얼음이 담긴 온더락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그래, 그냥 마시죠!"



그로부터 2시간 뒤.


"흐유으우우우우~흐에에엥...나는 왕자님 없나...?"


"아이씨, 누나. 나 망하게 생겼어...중간고사까지 망치면 나 일 짤리는거 아니야...?"


"흐헤헤, 우리 동생~철남아~괜찮아. 이 누나가 도와줄게. 너 과외 짤려도 바에서 먹고 살면 되잖아아~?"


완전히 뻗은 유미를 두고, 키르케 누나랑 나는 속에 담긴 감정을 털어놓으며 대작을 하고 있었다.


이게 술이 들어가니까 사람이 좀 더 본성을 따르게 되네...동갑이지만 유미씨라고 부르던 유미랑은 말을 놨고, 바텐더 누나라고 부르던 키르케 누나랑은 말을 좀 더 텄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서로가 기분좋게 술을 들이키던 때, 철남이 갑자기 고개를 떨구며 마음속에 담고있던 것을 털어놓으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하아, 이대로 쭉 바에서 일하면 누구랑 연애하고 결혼해요...? 과외도 실패해서 바에 취직한 남자랑 연애할 여자는 아무도 없을텐데?"


과외에서의 실수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철남은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가아~? 아하하, 철남아. 그보다 너 엄청 더워보인다~옷좀 벗어~"


"술들어가면 덥고 땀나고 그런거지 뭐...누나, 에어컨 켜져있는건 맞아?"


지금 철남은 외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의가 땀에 조금씩 젖어있었고, 얼굴에 땀이 흐르는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땀이 나오는것을 보고, 키르케는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켜져있지 당연히! 근데도 너 땀난다? 어후, 이것봐. 땀냄새가 아주 대단하네~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여기서 싱글몰트 냄새가 나?"


"술냄새가 왜 나? 누나도 나처럼 멍청하구나? 헤헤헤헤."


"히히히, 너도 나도 둘다 멍청하니까 참 잘 어울린다. 그치?"


그렇게 둘 다 실없이 웃고 있을 때, 키르케는 자리를 조금 옮겨 철남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저기, 너 여자 없으면....누나가 연애하고 결혼해줄까? 나중에 애인 못만들면 연락해!"


"누나가? 재미있네. 나~중에 없으면 연락할게."


"그래? 그렇단말이지? 너 그 말....진짜지?"


"그래, 진짜로. 나중에 애인 없으면 누나랑 결혼할게."


철남의 대답을 들은 키르케는 얼굴을 붉힌 뒤, 철남의 팔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그럼...그때를 대비한 연습, 하지 않을래?"


키르케의 은근한 권유에, 철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내 그 안에 든것을 꺼냈다.


지갑에서 나온것은 서로 연결된 콘돔 3개.


그것을 목격하자, 키르케는 살짝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철남도 할생각이 가득하다는것이 기뻤다.


"어머, 이런 준비까지...철남아? 너 의외로 되게 음흉하구나? 후후후...."


"그럼, 없이 하시게요? 누나가 원하는건데?"


지금까지 고민을 털어놓으며 약하게만 보였던 철남이 갑자기 당당하게 나오자, 키르케는 살짝 움츠러들었으나 그것을 티내기 싫어 허세를 부렸다.


"뭐야~? 우리 철남이, 이런 부분에서 되게 남자답네? 멋져. 그보다, 그걸 가져온걸 보면 여기에 그러려고 온거야? 야하네~"


어차피 양측의 의사는 확인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기마 하면 될것을 굳이 말 끝을 조금씩 늘이며,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는것이 그녀가 허세부리는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으음."


하지만 철남은 키르케가 얼떨결에 늘어놓은 그 소리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지금 술에 취했다지만 그 콘돔이 사장님이 준 물건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분위기도 바꾸고 지금의 상황도 조금 바꿀 겸, 철남은 키르케에게 장소를 옮길것을 제안했다.


"여기는 유미가 있으니까...다른데로 갈까요."


애초에, 유미를 옆에 둔 상태로 서로 마음놓고 옷을 벗을수도 없었다.


그런 철남의 제안에, 키르케는 바깥에 있을지 모르는 모텔이나 철남...또는 자신의 집을 후보에 올리다가 문득 가까운곳에 아주 적합한 장소가 있는것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전에~내가 말했던가? 여기 창고에...매.트.리.스. 하나 있다고♡"


키르케는 작게 미소지은 뒤, 철남의 손을 잡고 바의 창고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둘 다 천천히 창고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 모습은 태연해보였지만, 둘의 마음속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어, 어어어 어쩌지...! 가게에서 이러는거 어떻게 하면 좋지...! 일단, 일단은 저지르고 생각해볼까...? 현자타임이 오면 좀더 좋은 생각이 날지도...?'


'아, 이거 어떡하지...사장님이 이거 혹시라도 알면 진짜 가게가 아니라 건물 전체가 뒤집어질텐데...뒷처리 확실하게 해야겠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복잡한 둘이었지만, 둘 다 정작 여기서 물러나거나 그만두려는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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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키르케


원래 오늘 하나 써놔서 안쓸라 했는데 패치 기다리는게 너무 심심해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