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합류한 바르그의 물품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을 집어 바라보는 도중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이 돌아갔다. 작은 신장이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녀의 눈매는 힘이 들어가 있어 단번에 그녀가 짐짓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미안! 그게 몰래 살펴보려는 것은 아니..."

"딱히 화난 것은 아니니 괘념치 않아도 좋다."


대답을 끊으며 대답하는 바르그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방에 들어오며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내 손에 들려있는 녹음기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내 손에서 녹음기를 건네 받고 안절부절 하는 내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푸훗!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군."

"하핫..."


누군가 개인의 물품을 마음대로 뒤져보면 당연히 화가 날 법도 했다. 아니, 그 이전에 마음대로 개인실에 들어온 시점에서 아웃이겠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르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기억은 생각보다 빠르게 풍화되니까.. 그래서 옛 기억을 떠올릴 때 애용한다."

"옛 기억? 음.. 옛 주인의 목소리 같은 거?"

"주인이라.. 아, 여제 님 말이군."


옛 주인이라는 말에 피식 웃는 바르그. 그녀의 짧은 미소에는 환희의 기쁨보다는 외로움과 고독함이 묻어 나왔다. 단호한 어투는 아마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연막이리라.


"여제... 그녀는 이제 죽고 없어졌으니, 기억하려면 이 녹음기 뿐이긴 하지."

"그래서 녹음기를?"

"아니, 솔직히 난 여제 님에게 충성하긴 했으나, 그녀는 내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나도 딱히 애정이라는 감정은 없었고."


일순 지나간 쓸쓸함이 묻어 나오는 눈빛을 보면 꼭 그녀의 말처럼 주인을 향한 애정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입을 다물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무언가를 터 놓고 싶어하는 것 같은 그녀의 행동과 어투에 자연스레 입이 다물어진 것이다.


"훗, 뭘 그렇게 기대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는 녀석들에게 유용한 것일 뿐이었는데."


그러면서 녹음기를 만지작 거리는 바르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약속을 내뱉고 있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난 절대 너보다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다시는 바르그가 혼자 버려지지 않도록!"

"응?"

"앗..."


스스로도 낯 뜨거울 정도로 오글거리는 말을 내뱉었다는 자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마음 속에서 오그라든 손발을 펴기 위해 발악하는 내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바르그는 이내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내가 너보다 수명이 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약속을 어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지."

"그 부분은 닥터가 아마도..."

"아, 그 꼬마 아가씨 말인가? 확실히 유능한 과학자이긴 하더군."


다행히 더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질 생각은 없는 것인지, 바르그는 다른 질문을 내게 건넸다. 아마 그녀가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무겁고 진지한 질문. 그것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사냥개다. 여제님의 명에 따라 목표를 파괴했고, 적을 멸절했지. 덤으로 배신자의 처형도 맡아서 했다."


바르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돌리는 듯, 다시 한번 그녀의 작은 손에 들린 녹음기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세월을 함께한 것인지 잔뜩 낡고 여러 번 고친 흔적이 남은 저 녹음기는 아마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간직한 보물이 아닐까.


"넌 어째서 사냥개 따위에게 그렇게 마음을 여는 것이지? 오면서 보니 낯익은 얼굴들도 보이던데..."


낯익은 얼굴이란 아마 장화와 천아를 말하는 것이겠지. 한때 같은 조직이었으니 그녀가 말하는 낯익은 얼굴이란 그녀들 말고 떠오르지 않았다.


"그 녀석들을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 넌 사냥개에게 마음을 주는 괴짜라고."

"난 너희들을 도구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바르그를 보며 신념을 담아 계속 대답했다. 과거의 인간들이 살던 세상과는 다를 것이라고. 그 누구도 앞으로의 세상에서 너희들을 도구로 여기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과 신념을 담아 대답했다.


"이것도 약속할게, 난 너희들을 도구로 여기지 않아. 모두 소중한 사람들 뿐이니까."

"하핫.. 하하하핫!"


내 대답을 계속 듣고 있던 바르그가 한참을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그렇게 웃기를 몇 분, 간신히 진정된 바르그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너무 웃어서 미안하군. 그런데 그 약속, 정말 지켜나갈 생각인가?"

"응!"

"좋아.. 그럼 믿어보지.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다 녹음했으니 나중에 발뺌할 생각은 접는 게 좋다."


어느 틈에 녹음기를 켠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분 좋게 웃는 바르그의 모습에 마찬가지로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속을 어길 바에야 스스로 혀라도 깨물고 죽는 편이 좋다고 여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런 미소들을 지켜주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앞으로 곁에서 잘 부탁해."

"읏..! 함부로 남의 몸에 손대지 말라고 못 배웠나?"

"아.. 그게 귀여워서 그만.."

"뭐? 귀여워서? 그게 이유가 될 것이라 생각했나?"


기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바르그를 안아주었지만 바르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건 아웃인 모양이었다. 결국 어색한 마음에 살며시 그녀를 풀어주려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바르그가 나를 살며시 끌어 당겨 품에 안겨들었다.


"....조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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