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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하튼. 금고에서의 일은 거기까지가 끝.

이젠 더 보고할 것도 없을 만큼 자세하게 설명했으니까 이젠 오빠 알아서 해.”

 

“고마워.”

 

 

 

오세아니아 동쪽의 항구 도시 근처.

정박시켜놓은 오르카 호에서 나는 닥터의 열띤 보고를 듣고 있었다.

임무를 끝낸지 4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양식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보고 있자니 이 애들의 괴물 같은 실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르카 원년 멤버라는 이름이 괜한 게 아니라니까? 짬이 있지.

 

 

 

“후우, 이제 좀 쉬겠네. 요즘엔 영 일이 손에 안 잡힌단 말이야.”

 

“그 동안 일 열심히 했으니까 쉴 때도 됐지.”

 

“그지. 이제 쉴 때도 됐는데...”

 

 

 

내 테이블 위에 얼굴을 대고 길게 늘어진 닥터.

양 볼이 쫀득한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하게 녹아버렸다.

 

무심코 손가락으로 그걸 콕콕 찔러봤지만 닥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이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카르디아랑 여왕. 저 인간들만 보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네가 왜? 어차피 철충이랑 싸운다 해도 네가 앞장 설 일은 없잖아.”

 

“오빠가 앞장 서는 게 문제지!

안 그러겠어? 추기경인지 뭔지는 오빠한테만 관심이 있고, 내가 만든 기술들은 그것들한텐 생채기 하나 못 내고...”

 

 

 

닥터가 고개를 푹 숙이곤 푸념을 늘어놓듯이 작게 웅얼거렸다.

 

 

 

“그런데 이제는 뭐? 세 번째?

하아... 이번에도 난 병풍 신세겠지?”

 

“... 하하하.”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있으면 뭐라도 해줄게.

짱짱 큰 타이런트 등에 타고 불 뿜어보고 싶어? 아니면 알바트로스를 탑승형 로봇으로 만들어줄까?

뭐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 좀 해봐. 응? 응?”

 

 

 

닥터는 초연한 듯한 썩소를 지으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자기 다리에 먼지가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결국 내가 직접 닥터를 들어 내 무릎 위에 앉혀야만 했다. 

 

 

 

“... 미안해.”

 

“이제 와서 뭘.”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데...

이번 임무도 결국 이렇게 끝났잖아.”

 

“... ...”

 

 

 

사령관실의 거대한 유리창문으로 거세게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닥터의 입술은 꼭 그 모래 바람처럼 거칠었다.

 

 

 

“에바 프로토타입은 마지막까지도 못 찾았지. 이 근방은 죄다 뒤져봤는데도.

오빠가 엄청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인데 우리는 또 실망만 하게 만들었네.”

 

“괜찮아.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분명 금고 내부에 있었으리라 생각했던 에바 프로토타입.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금고 안에도, 밖에도, 어디에서도 에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찾을 수 있었던 건 구조 신호를 보냈던 신호기와 몇몇 전파 송수신기 정도.

그마저도 설계도에 의하면 원래부터 금고 내부에 존재했던 것으로, 에바가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구조 신호 속에 뭔가 숨겨 놓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에게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을 테고...’

 

 

 

금고가 거대하긴 했으나 투입된 탐색 팀만 두 자리 수. 

아무리 에바라 한들 숨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설령 팬텀이 은신을 하고 있었다 해도 5분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듯이 떨고 있는 닥터.

그런 닥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더 불안해졌다.

여왕이 분명 말했다.

거기 있는 철충들은 만들어 진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존재는 세 번째 추기경뿐이라고.

 

 

 

‘그렇다면...’

 

 

 

생각해볼 만한 시나리오가 하나 생긴다.

 

‘추기경이 철충을 데리고 와 AGS들을 뚫고 금고 내에 숨어 있었던 에바 프로토타입을 납치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놈들이 에바를 노리고 있다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이제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하는데...

 

 

 

“어이, 사령관!”

 

 

 

트리아이나가 사령관실 문을 쿵쿵 두들기며 내 이름을 불렀다.

저 문이 개폐식이 아니라 옆으로 미는 거라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발로 차서 열고 들어왔을 거다.

 

 

 

“여기 잠수함 맞아? 나 혼자 이렇게 좋은 데서 살았던 건...”

 

“... ...”

 

“아니... 지?”

 

 

 

제발. 누가 트리아이나 아니랄까 봐.

다 좋으니까 분위기만 읽어주면 금상첨화겠다.

 

 

 

“원하면 침낭 가지고 여기 와서 자. 네 숙소 배정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으니까.”

 

“어... 그래? 혹시 바쁜 거야?”

 

“바쁘냐고...?”

 

 

 

트리아이나는 내 방 한쪽에 가득 쌓인 책들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상 위에 서류철이라도 산더미처럼 쌓아두는 거였는데.

그걸 봤다면 굳이 내가 대답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그래... 바빴지. 지금은 잠시 한숨 돌리는 중이야.”

 

“그, 그래? 그럼 내가 쉬는 걸 방해했던 건가...?”

 

“아니. 괜찮아.

온 김에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가.”

 

“하하... 그럼 사양은 안 할 게.

호의가 있으면 거절하지 마라. 모험의 열 여섯 번째 원칙이 그거거든.”

 

 

 

녹슨 로봇처럼 끼릭끼릭 팔을 움직이며 트리아이나는 정수기 앞까지 걸어갔다.

보글보글, 정수기 안의 물이 공기 방울을 만들며 컵을 채웠고, 트리아이나는 경직된 자세로 물을 마시며 주변을 살폈다.

 

하긴, 그렇게 하지 않기엔 분위기가 좀 험악하긴 했으니까.

 

 

 

“... 푸하! 무, 물맛 좋네? 역시 사령관실이라 정수기도 좋은 걸 쓰나 봐?”

 

“... ...”

 

“하, 하하하... 안 그래...? 거기 어린 조수양도...”

 

“그래. 오빠가 마시는 물이라도 좋게 해주려면 정수기도 좋은 걸 써야지.”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닥터가 살벌한 눈빛으로 트리아이나를 째려 보았다.

과장된 움직임으로 물을 마시던 트리아이나는 그제야 깨달았던 모양이다.

자기가 뭔 짓을 해도 지금 분위기는 풀릴 게 아니라는 걸.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

이곳에 온 걸 없던 일로 하고 그대로 뒷걸음질 치거나, 아니면.

 

 

 

“... 그래! 덕분에 맛있는 물 맛있게 먹었어. 어린 조수양.”

 

 

 

정면돌파하거나.

 

상황의 맥락을 모르는 트리아이나가 전자가 아닌 후자를 택한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트리아이나는 그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 흥.”

 

 

 

닥터가 고개를 휘릭 돌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조금은 진정된 듯한 호흡.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저기, 사령관. 걱정이 한 가득 인 것 같은데 내가 뭐라도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금고 문을 여는 걸로 끝이었고.”

 

“에이,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야.

찾다 보면 뭔가 할 수 있는 게 나올 지도 모르잖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뒷짐을 진 채 내게 다가온 트리아이나가 내 옆자리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잖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 진짜 안 된단 말이야.

설령 안 될 거라 해도 마음만은 할 수 있다고 믿어야지!”

 

 

 

늘, 늘 그렇듯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그녀.

하지만 나는 저 미소가 참 실없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트리아이나가 하는 고민이라고 해 봤자 모험의 성패 여부겠지.

물론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하는 고민에 비하면 훨씬 가슴 뛰는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해야 한다.

인류의 존속. 그리고 바이오로이드의 존속.

내가 지금 걷는 길이 잘못된다면 눈 앞에 있는 트리아이나는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오늘이 아니라도 일주일 뒤에 죽을 수 있고, 기적적으로 산다 한들 한 달 뒤에 죽을 것이다.

 

교황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이미 내가 아는 게임과는 너무도 멀어졌다.

그 말은, 게임 속에서 살아 남았던 아이라 해도 여기선 죽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 그럼 지금 나는 뭘 해야 할까.’

 

 

 

환생의 의미도, 알고 있는 지식의 이점도 다 퇴색되어버린 지금.

과연 내가 세 번째 추기경과의 싸움을 이길 가능성은 몇이나 될까?

 

 

 

“사령관!”

 

 

 

그 때, 트리아이나가 내 얼굴의 양 뺨을 때렸다.

 

 

 

“으, 응?”

 

“또 뭔 생각 하느라 멍 때리고 있는 거야!

모험하는 중에 그러고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 트리아이나. 우리는 지금 모험 중이 아닌...”

 

“정말?”

 

 

 

트리아이나가 내 말을 끊었다.

 

 

 

“정말 아니야?”

 

“...”

 

“사령관이 뭘 하고 있는 지는 나도 자세히 몰라.

하지만 그 표정. 뭔가 잔뜩 걱정하고 있는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

지금. 해결해야 하지만 알 수 없는 그런 일이 있는 거지?”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모르겠지만, 아마 긍정이 섞인 침묵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던 리오보로스 이벤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1부의 끝자락 즈음이었나, 세이렌과 함께 보물을 찾는 도중 트리아이나가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날 봐봐.”

 

 

 

그 때 트리아이나는 대수롭지 않게 보물 지도를 보며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길을 떠나 길을 잃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지금의 나는 안다.

 

그리고 아마, 그 때 그녀가 속으로 지었을 표정도 지금과 비슷했을 것이다.

실룩거리는 눈썹. 불안함에 차있는 입.

제대로 뜨지 못하는 눈과 피가 거꾸로 돌아 손 끝이 조금 차갑다. 

 

 

 

“모험이 무서운 거. 그건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러니까 다시 일어서는 방법도 내가 가장 잘 알아.”

 

“어떻게...”

 

 

 

트리아이나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하얀색의 몸체, 작은 단자가 튀어 나와 있는 모양새.

USB 같은 단말기였다.

 

 

 

“사령관이 보낸 대원들은 금고 내부로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눈치채진 못했겠지만 금고로 들어가는 관문마다 일종의 데이터 저장소가 있었어.

어떤 여자가 그 데이터 보관소에 무언가를 잔뜩 기록하는 모습을 내가 탐험하는 도중에 우연히 봤거든.”

 

“... 여자라고?”

 

 

 

설마... 에바 프로토타입을 말하는 건가?

 

 

 

“그 금고의 문은 한 번 열리면 다시 닫힐 때까지 시간이 걸려.

첫 번째 관문은 13시간 42분. 두 번째는 11시간 44분.

오차가 조금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내가 뒤를 밟기엔 어렵지 않은 정도였지.

내가 금고 안에 있었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

 

“그럼 지금 에바 프로토타입이 어디 있는지...”

 

 

 

트리아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이 USB에 담긴 기록들. 그것부터 보면서 따라가보자고.”

 

 

 

그녀가 들고 있는 데이터에 닥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

실마리 하나 찾을 수 없던 일에 드디어 한 가닥을 찾은 것이었다.

 

 

 

“내가 말했지? 찾다 보면 뭔가 할 수 있는 게 나온다고.”

 

“... 그래. 이번엔 네 말이 맞았네.”

 

“앞으로도 쭉 맞을 거야. 모험의 짬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트리아이나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이 방 안의 분위기 역시 화색이 돌았다.

뒷걸음질치지 않고 물을 마시며 정면돌파한 트리아이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세 번째 추기경. 아직 그게 누구인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괜찮다.

적어도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명확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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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화 올렸을 때 조회수 1에 누가 비추 하나 박고 가더라...

추천은 그대로 0이었던 걸 봐서 그냥 싫어서 일부로 하고 간 거 같은데, 싫으면 말이라도 하고 가면 안 될까?

어차피 이 소설 퇴물 다 된거 나도 알아... 이런 거에 기분 나빠하기엔 감정 소모가 너무 아깝잖아.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