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크로 쓴 사령관_모음



“어딜 그리 바삐 가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하게도 오르카 밖으론 누구도 내보내지 말라는 지휘관님 명령입니다. 이해 좀 해주십쇼, 수녀님.”


“조금 늦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신지?”


“하하, 머리 쓰는 건 영 제 스타일이 아니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


-쿵!


팬서를 감싼 거대한 무장이 육중한 구동음과 함께 성벽과도 같은 장갑을 눈앞으로 내세운다. 머리 위로 뻗은 한 쌍의 기관총과 세워진 화포 한정이 그녀만의 성벽에 마침표를 찍는데.


“제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려 합니다.”


“…바람직하군요. 모두가 당신 같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하하! 수녀님도 모르는 게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잘 모르겠슴다. 그래도 하나는 확신합니다.”


팬서의 말을 경청하던 베로니카가 싱긋 웃으며 손에 쥔 성물을 쓰다듬는다.


“나머진 동료를 믿고! 전 제 할 일만 신경 쓰면 된다는 걸 말임다.”


“명쾌하군요.”


베로니카의 손짓에 성물의 모습이 변모해간다. 뭉툭한 모서리가 기지개를 피더니 가느다란 봉의 모습이 되며, 반대편의 접힌 첨단에선 예기를 띈 칼날이 고고하게 피어난다.


한순간에 달라진 성물에 눈을 크게 뜬 팬서.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 더 자세를 낮추곤 무게중심을 뒤편으로 흘려보낸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슴다. 물론, 봐 드리지도 않을 검다.”


“새삼스럽지만 마치 성벽 같은 모양새네요.”


“이래 봬도 연합전쟁에선 포트리스까지 제친 몸임다. 그러니까 괜히 힘 빼지 마시고-”


이상하다. 이제껏 자신의 무장을 마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빈틈을 찾으려 애쓰거나 충돌을 피하려 했건만, 눈앞의 수녀는 전의를 불태우다 못해 오히려 이쪽을 분석키 시작한다.


“조금, 몸이 굳었을 지도요.”


“수녀님이 조금 무서워졌슴다.”


등 뒤로 이어진 신경을 집중해 기관총의 총구를 베로니카에게 향한다. 가늘게 미소지은 베로니카가 발을 차며 달려들자 그녀를 곧장 추격해 흩뿌려지는 탄환 무리.


분명 유리하다 생각한 팬서였지만 조금 생각을 달리한 그녀다.


***


“아르망?! ㄴ, 네가 왜 여기에-?”


“어머, 정말 오셨네요. 사실은 반신반의였답니다.”


철충과 맞서는 무리를 이끌고 측면을 향한 인간과 일행들. 작게나마 C구역이라 적힌 팻말에 무언가 단서를 찾으려던 사령관은 그곳에서 만난 뜻밖의 인물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엥?! 뭐야, 추기경 님이잖아? 오랜만이야~”


“당신이 왜 여기에…”


아르망을 발견한 워울프와 바닐라가 저마다의 감정을 내비친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적의를 보이는 바닐라와 반갑게 인사하지만 경계심만은 늦추지 않는 워울프.


“어떻게 온 지가 중요할까요. 중요한 건 왜 이곳에 왔냐는 사실이죠.”


“그렇담 얼른 말해주시죠? 저흰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여러 일 때문에 상당히 지쳤답니다.”


“바닐라 양은 인간님과 꽤 친해진 것 같군요. 그런데도 듣지 못했나요?”


서서히 썩어가는 바닐라의 표정에 얼른 앞으로 나선다. 그나저나 아르망이 진짜 왜 여기 있는 거지? 지원기 혼자서 철탑에 오는 건 좀…


거기까지 생각한 내 시야가 아르망이 들고 있는 한 돌멩이에 다다른다. 아니, 정확히는 광석이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금처럼 빛나진 않지만 단단해 보이는 표면이 마치-


“자, 잠깐! 아르망 너 손에 그거- 알터리움… 이야?”


씨익.


단순한 표정이지만 소름 끼치도록 한기가 도는 미소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너 그걸 어디서…?!”


“하하하! 여기까지 와서 모른 척이라니 너무 뻔뻔하신 거 아닌가요? 키킥, 상관없어요. 그래도 덕분에 손에 넣기까지 했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드려야겠죠.”


다르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와 함께 사령관을 보필하던 게임 속 그녀라기엔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 펴지는 입꼬리는 비슷하나 명백한 비소를 띤 눈꼬리가 사령관의 마음을 들쑤셔오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네들은?! 딱 봐도 나쁜 녀석이잖아-! 저런 사이비 자식은 내 캐논으로 한 방에-!”


“이번엔 나도 저 시끄러운 녀석 말에 동감. 내 말년 센서가 맹렬히 울고 있거든, 인간님?”


너희 잠시만 진정 좀-!


이런 내 기대완 달리 먼저 움직인 건 상황을 살피던 워울프와 발키리도, 곧장 뛰쳐나갈 듯 보이는 칼리스타와 이프리트도, 곁에서 날 호위하던 바닐라도 아니었으니.


“인간님께선 참으로 신비스런 분이에요. 분명 오르카의 운영에서 손을 놓으셨다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모습을 드러내선 저나 다른 총명한 이들조차 모르던 일들을 척척 해결하려 드시잖아요?”


-뜨끔.


모두의 시선이 모인다.


“게다가 방금 말한 이 알터리움. 듣기론 이 광석이 생기기 위해선 오래도록 숙성된 바이오더스트와 연결체 철충의 에센스가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대체 이런 정보를 어디서 구한 걸까요?”


손안의 돌을 이리저리 돌리며 눈앞에 가져다 대는 아르망. 시선을 빼앗긴 그녀를 향해 칼리스타가 서둘러 포신을 들어 올리자 별안간, 일행의 발밑으로 시꺼먼 그림자가 드리운다.


“당신이 인도한 어린양이에요. 끝까지 사랑으로 보살펴 주세요?”


“잠깐만, 아르망! 너 어디서 그런 소릴-?!”


-콰앙!!


순간, 천장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물체. 새까만 형체가 낙석이라 생각했지만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더치…”


『키륵…! 날,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끔찍이도 새하얀 피부와 이질적인 생명체의 몸. 어울리지 않는 두 생명체가 하나로 진화한 듯한 그 모습은, 꿈에서도 바라지 않는 모습의 더치걸이었다.


『네가… 너희- 이이, 인간이-!!!』


절규를 외친 그녀의 분노가 쏟아진다.


***


철탑 내부로 진입한 발할라 일행은 이제껏 보지 못한 철충에 온 신경을 집중한 한편, 점점 전략적 행동까지 취하는 그들로 인해 진군 속도조차 느려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레오나.


“기습하는 것도 모자라 매복에 자폭에… 거기다 재밍까지?”


레오나의 무장이 날개를 펼쳐 사방으로 빛무리를 퍼트린다. 얼핏 농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연신 움직이는 눈동자가 그녀의 초조한 마음을 대변하는데.


“앗! 레오나 대장님, 레오나 대장님-! 발키리 언니가 남긴 단서를 알비스가 찾은 것 같아요!”


“장하네, 알비스. 그래서… 손에 든 토끼 모양 키링이 그 단서라고? 대장으로서 단서의 중요도만 판별해야 할까, 아니면 부하의 안쓰러운 소녀 취향에 유감을 표해야 할까?”


알비스에게 건네받은 키링을 이리저리 굴리던 레오나는 곧 토끼의 코가 위치한 곳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미소를 띤다.


【행여 발견할 경우를 대비해 남깁니다. 가설이긴 하나 이곳 ‘철의 탑’은 철충들의 최대 본거지로 인간의 말에 따르면 멸망 전의 시설들이 아직도  …뭐야, 발키리! 누구하고 전화해? 너 아까 나한테는 통신 안 된다며-!  …이건 그냥 녹음- 하아~ 나머진 돌아가서 마저 보고 드리겠습니다.】


목소리가 끊기자 레오나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진다.


“호드는 끝까지 방해네. 그건 그렇고 철의 탑? 누가 지은 진 몰라도 센스가 너무 구린 거 아냐?”


“저, 저희로서도 조금 전부터 계속 케이크~ 케이크, 이런 식으로만 부르고 있잖아요? 하하, 이리된 거 그냥 부르기 편하게 철탑이라 하는 게 어때요?”


님프의 중재안에 고개를 끄덕이는 레오나지만 바로 옆의 베라만큼은 케이크란 이름을 은근 고수하던 레오나의 눈치를 살핀다. 삐지시는 거 아니겠지?


-쿵! 쿠웅!!


그런 베라의 상념도 외부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충격에 끝을 맺고 만다. 우습게도 일행들 모두가 지금의 사태에 질린 듯 허공을 바라보는데.


“메이드 씨에게 이런 구닥다리 신혼집을 소개해준 게 누구야, 대체? 첫날밤도 전에 대청소에 몸이 망가지겠어.”


“아하하, 그래도 앨리스 씨가 총사대장과 교단 브라우니들을 상대해 주는 덕에 저희가 이렇게 편하게 진입했잖아요?”


“그거 그냥 무시 아니니? 저런 녀석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같은?”


에이~ 무슨 소리세요, 레오나 대장님~


뾰로통한 레오나를 달래가며 발키리의 흔적을 찾아 앞으로 나서는 발할라 대원들이었지만 다가올 적의 정체가 모호한 지금 쉽사리 발을 옮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


“더, 더치! 아니, 아니지… 더치걸! 잠시만, 내 말 좀 들어줘!”


망할, 총소리랑 온갖 때려 부수는 소리에 목소리가 안 닿아.


“이만 포기해요! 저건 글렀어요, 젠장.”


“무슨 소리야?! 더치는 우리-”


“그렇게 아끼시는 분이 왜-!!”


욱하는 마음과 함께 역정을 내려는 바닐라가 입술을 짓이긴다. 제법 괜찮아졌다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가슴 속 죄책감만 무거워지는 기분.


“그 얘긴 나중에-! 야, 아르망! 대답해!! 방금 그 말 누구한테 들은 거야-?!”


“…”


말없이 이쪽을 바라본 아르망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반대편 방향으로 사라진다. 이걸 어쩐다. 알터리움의 기원까진 게임에서도 제공치 않은 정본데. 그렇다면 필시 매크로로 인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이봐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내 멱살을 누군가 잡아챈다. 이젠 악력만으로도 누군지 대충 감이 와.


“한 번이에요. 마지막!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에요-!”


“마, 마지막이라니. 뭘…?”


아, 바닐라 화났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갈 거에요. 철의 탑이든, 알터리움이든, 다른 뭐든! 그러니까 쫓아가요. 얼른-!! 저딴 사이비 정도야 당신도 제압할 수 있잖아요?!”


그 말과 함께 냅다 날 던져버린다. 우리 메이드는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아르망이 사라진 방향으로 내던져진 난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아 뛸 준비를 한다. 아니, 잠시만.


“뭘 꾸물거리는 거예요-!? 얼른-”


“이번 일이 끝나면 모두 얘기할게!!”


바닐라는 물론, 한창 전투를 펼치던 모든 대원의 시선이 한순간 내게 모인다.


“믿어줘서 고마워!”


“…”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이 정도면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또 헛소리하지 말라고 면박 주려나.


***


“크흠, 흠! 못난 아이도 사랑으로 돌보면…”


“헛소리 말고 앞이나 봐요, 워울프.”


-쿵!


더치걸이 휘두른 커다란 팔이 땅을 뒤엎자 쑥대밭으로 변하는 전장. 부족한 화력을 더하던 칼리스타와 이프리트의 지원 역시 큰 효과는 보이지 않자 전투는 고착에 빠진다.


『흐히이… 크륵-!』


희여멀건 무언가를 입가로 질질 흘리는 더치걸. 수축되다 팽창한 붉은 눈동자 또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기세로 박동하고 있다.


『네들… 네들이-!!』


“하아… 한심한 인간 때문에 망할 꼬맹이 비위나 맞추고 있어야 하다니.”


“그… 메이드 씨? 우리 스틸라인에선 저런 관심병사 같은 녀석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되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지침이-”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텐데 무슨 대순가요. 아니면 당장 저기 벌렁벌렁 대는 눈알에 총알 한 발 멋지게 박아주시죠?”


“어… 음, 아무리 그래도 트라우마 때문에 저렇게 변한 애한테…”


맞아! 너무한 거 아니야, 메이드?!


어느새 이프리트의 말을 감싸고 도는 칼리스타에게 한심한 눈빛을 보낸 바닐라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째 모를까요. 테마파크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돈데. 하지만 제가 맘에 안 드는 점은 그게 아니에요.”


수류탄의 안전핀을 이빨로 뽑아낸 그녀가 냅다 손을 휘두르자 짧은 정적과 함께 더치에게 매달린 무수한 다리 뭉치가 떨어져 나간다.


“트라우마? 하! 누가 들으면 본인만 그런 최악을 겪은 줄 알겠어요. 당장 오르카에만 찾아봐도 남들에게 말 못 할 과거를 보낸 분들은 많습니다. 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숨을 고른 그녀의 시야로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더치걸이 비추어진다.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한 행동에 바닐라의 눈꼬리가 차갑게 가라앉는데.


“저렇게 모든 걸 내려놓지는 않아요.”


한숨 돌린 워울프가 일행의 곁으로 다가온다. 모습을 보아하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바닐라에게 무언가 전할 말이 있어 보인다.


“메이드 씨, 이번 일 말이야.”


평소라면 바로 본론을 말할 그녀가 운을 띄운다. 긴장된 분위기에 대응 못 한 바닐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씨익 웃어 보이는 워울프.


“여기 있는 모두는 공평하게 전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 얘긴가요.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아, 아. 괜찮아, 괜찮아~”


시답잖은 말과 함께 이미 막혀버린 벽 쪽을 가리키는 워울프.


-펑!!


“대충 정리된 모양이네. 더치 꼬맹이는… 진정제라도 한 방 먹인 거야? 보고와는 다르게 꽤 얌전한걸?”


일련의 발할라 대원들이 우수수 튀어나와 방금까지 전투를 벌인 더치의 주변을 에워싼다. 워울프의 말을 이제야 이해한 바닐라는 헛웃음을 참지 못하곤 무장마저 내려놓은 상황.


“오랜만이야, 발키리. 고생 많았어.”


“레오나 대장님!”


“미안, 미안~ 어쩌다 보니 마무리만 쏙 빼먹는 경찰 역할을 하고 말았네. 아, 곳곳에 떨어진 기록은 잘 들었어. 수고했어. 키링은… 미안, 나중에 돌려줄게. 새 걸로.”


알비스와 님프의 호위를 받으며 이젠 쓰러진 더치걸에게 향하는 레오나. 본디 토미 워커와 결합해 이 꼴이 된 더치걸이라, 하반신 밑으론 커다란 철충의 몸체가 아직도 맥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드니? …안 들리나.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다. 닥터도 떠났으니 정비관님 한 명에겐 기대하기가 조금 힘든데.”


생각에 빠진 레오나의 앞, 쓰러진 철충의 몸체가 별안간 수축하더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황급히 뒷걸음친 일행들의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는데.


불쑥 솟아난 여러 개의 붉은 가시. 생명체의 손톱과도 닮은 이질적인 칼날들이 잉태한 어미의 뱃가죽을 뚫으려는 듯한 기괴한 행태에, 일행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저게 무, 뭐죠…?”


님프의 당혹감 어린 말에 정신을 차린 레오나가 모두에게 공격을 명령한다.


“모두 발사-! 인질은 포기한다!”


무수한 화기가 빗발치는 가운데 칼날을 덮은 철충의 표피가 길게 찢어진다.



휴가 넘모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