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검은 문 뒤의 방은 아무 것도 없는 하얀색이었다. 무의식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공간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그의 모든 기억을 전부 본 건가 의아해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난 단순히 기억을 보는 게 아니라 그의 해결되지 않은 목적들을 바로잡고 있는 중이었다고. 겨우 2개로 그의 모든 목적이 만든 문제가 풀렸을 리가 없어.”

 

주변을 둘러보면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칸은 여태까지 해온 대로 관찰을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하얀 공간과 대조되는 검은 색의 줄이 저 멀리에 떨어진 광경을 보고 발걸음을 그쪽으로 향했다. 굵고 단단한 검은 밧줄로 만든 고기를 주워든 칸은 매듭의 구조를 보고 이번 목적이 심각함을 자각했다.

 

“에반스 매듭법이군. 당기면 당길수록 조이는 구조라서 자살용으로도 쓰인다는 매듭법인데, 이게 무의식에 있다는 사실은... 생명과 관련된 목적이라는 건가?”

 

 

생명에 대한 목적. 희연의 죽음. 어릴 때부터 괴로워하던 유상의 모습.

 

 

세 개의 키워드가 얽히고설키더니 하나의 답을 가리켰다. 답을 직시한 칸은 오싹한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면서 황급히 밧줄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하얀 공간에서 다른 단서를 찾으려고 달리던 칸은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생각을 전력을 다해 부정했다.

 

“아니야! 그런 목적이 있으면... 여태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

 

소중한 이의 죽음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돌아오는데,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사랑으로 채워준 이의 죽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보다 더 클 터였다. 동시에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은 학대의 기억이 만든 상처가 작용하면 리마토르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살용 밧줄이 발견된 사실이 개연성을 더해주었다.

 

“이 목적은 반드시 수정할 거야. 절대로, 절대로 당신의 안에 죽음을 갈망하는 목적이 있게 내버려두지 않겠어!”

 

칸은 이를 악물고 단서를 찾으려 광활한 공간을 뛰어다녔다. 한참을 움직여도 밧줄 외에 유의미한 단서를 찾지 못한 칸은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닿은 뺨에서 차가운 감각이 느껴지자 칸은 감정으로 달구어졌던 머리가 차츰 식는 걸 느꼈다.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몸을 일으켜 그 자리에 앉은 칸은 다시 하늘을 보며 드러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얼마나 움직였는지도 체감이 되지 않는 하얗기만 한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이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손에 쥔 밧줄을 만지던 그녀는 부질없다는 생각에 밧줄을 집어던졌다. 그녀의 손을 떠난 밧줄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챙그랑하고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칸은 몸을 벌떡 일으켜 밧줄을 주웠다.

 

“자세히 보니까 이 밧줄, 단순한 줄이 아니야. 매듭 부분에 해당하는 밧줄 안에 뭐가 들어있었어.”

 

얇은 줄을 여러 겹으로 꼬고 꼬아 만들어진 굵은 밧줄의 틈을 손으로 살살 벌려 손가락을 집어넣은 그녀는 무언가가 손끝에 닿자 환호를 질렀다.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아주 작은 단서에도 목이 말랐던 그녀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발견이었다.

 

“큰 금속인데, 많이 단단하고, 묵직하기도 하고... 이건 뭐지?”

 

밧줄 안의 물건을 더듬어보던 칸은 매듭을 풀었다. 밧줄을 꼬인 반대방향으로 돌려 안에 든 물건의 정체가 커다란 열쇠임을 확인한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열쇠? 무언가를 열라는 의미인가?”

 

열쇠의 의미를 고민하던 칸 앞에 풀린 채 떨어진 밧줄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열쇠 구멍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밧줄이 모든 단서였음을 깨달은 칸은 밧줄이 만든 열쇠구멍 안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있던 하얀 공간이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나더니 아래에서부터 검은 공간으로 바뀌어갔다. 눈앞에서 공간이 뒤바뀌는 광경에 칸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무너진 흰 공간의 잔해는 모여서 뭉치더니 검은 공간 정 가운데에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칼을 빼어들어 자신을 찌르는 동작을 반복하는 사람의 형상에 칸은 자신이 수정할 목적이 저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칼로 자신을 수없이 찌르는 모습이라니, 그럼 당신은 결국...”

 

죽음을 갈망하는 목적이 맞았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목도한 칸은 스스로를 찌르는 형상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잡은 팔이 부러지면서 유상의 목감각이 그녀의 안에 흘러 들어왔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아. 사랑받고 싶어.

 

 

아무도 믿어서는 안 돼. 사람들이 어떤 성격인지 분석하고 예측해서 나한테 좋은 결과만 갖고 오는 말을 해주자.

 

 

사람들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은 힘들어. 피곤해. 아이들이 좋아. 내가 계산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나를 미워하지 않아.

 

 

희연이가 날 사랑해줘. 내가 고마운 사람이래. 분석하고 계산하지 않아도 나를 미워하지 않아. 이런 사람이 좋아.

 

 

이제는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어. 기계장치에 불과한 바이오로이드를 연구하는 나 자신이 싫어. 바이오로이드를 철저하게 굴리자.

 

 

사람들이 날 보고 자리를 피해. 미움 받지 않으려고 다시 노력만 해야 해. 그래도 사람들은 날 악독하다고 거리를 둬.

 

 

 

 



 

이제는 지쳤어. 그만 할래. 

 



 

 

 

나만 없어지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

 

그의 감각을 받아들인 칸은 부정의 외침을 질렀다. 왼팔은 부러졌지만 아직 온전한 오른팔이 자신의 몸을 찌르는 행동을 반복하자 칸은 형상의 오른팔도 부여잡았다.

 

“뭐? 나만 없어지면 돼?

 

절대 그렇지 않아. 당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게 절대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사랑받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내가 전부 채워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런 목적은 필요 없어!”

 

칸은 형상의 오른팔을 힘을 주어 부러뜨렸다. 양팔이 떨어져나간 형상을 상대로 칸은 거침없이 주먹을 날렸다. 얼굴, 몸통, 다리 등 형상은 전부 박살이 나서 가루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한 줌의 가루를 집어 들었다.

 

“리마토르, 당신이 그랬어. 목적을 수정할 용기만 있으면 인간은 바뀐다고. 

 

생각해보니까 그 용기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더라. 내가 옆에서 당신에게 99%를 불어넣어 줄 테니까, 당신은 딱 1%만 더하면 돼. 그 1%만 당신에게 부탁할게.”

 

칸은 가루를 허공에 흩뿌렸다. 뿌옇게 검은 공간에 퍼져나간 가루들을 보면서 그녀는 조용히 읊조렸다.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관계에 기대어서 살아가잖아.”

 

모든 가루가 완전히 검은 공간으로 사라지자 칸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설령 그에게 닿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검은 공간에서 평생을 지내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칸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배어나와 참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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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음 편이면 과거 에피소드가 끝난다. 기억을 되찾은 리마토르와 그의 상처를 알게 된 칸, 철학자로 거듭나게 된 아스널은 이제 어떻게 될까?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준 모두에게 정말 고맙다. 행복한 일만 가득한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