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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에게도 피가 있다. 노란색, 초록색, 때로는 무색. 

트리아이나의 골동품 더미에서 발견한 곤충 백과사전의 구석 한 켠에 적혀 있던 말에 따르면 그랬다.

내가 그 말을 떠올린 것은, 탑의 하층부 전체가 초록빛 액체로 난자하게 되었을 때였다.

 

끼에에에엑---

끼아아아아악!!!

 

전투, 아니, 그건 이미 전투라 부를 수도 없었다.

움직이는 도시들은 단지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 주변의 철충들을 압살했다.

가장 압도적이고 직관적인 무기인 질량을 가지고 있는 AGS 앞에 철충들은 전투 속행을 실시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퓨슉!

종잇장처럼 짓밟힌 사체 위로 터져 나온 것은 한 줄기 녹색 체액뿐.

가냘픈 다리를 들고 탑의 외벽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한 AGS들의 뒤로 철충들의 초록색 핏빛 강이 길게 늘어졌다.

 

 

 

“... 그 리오보로스 일가의 무덤을 털러 갔을 때 더 이상 괴팍한 일은 겪을 리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와 함께 특등석에서 AGS들의 먹방을 직관하고 있던 트리아이나가 작게 읊조렸다.

김지석의 묘도 온갖 첨단 기술들이 산재해있었으니, 그와 맞먹을 만한 거물이었던 앙헬 리오보로스도 제법 진귀한 보물들로 무덤을 꾸미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기괴한 함정들도 많았을 테고. 하지만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는 것보다 자극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쾅! 콰광!

 

수십 킬로미터를 건너 전해져 오는 진동. 공기를 타고 오는 굉음은 땅보다 한 박자 느리게 우리에게 닿았다.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저 아귀들은 식사가 제법 소란스러웠단 걸 알 수 있었다.

이성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폭식.

인류가 마지막까지 남아 철충을 죽일 무기로 만든 것이 저런 야성(野性)이란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쿠에에에에엑---!!


 “어라?”

 

 

 

죽기 직전의 단말마와 같은 괴성과 함게 초록색 강 한 가운데에서 무장한 철충이 네 다리로 기어 나온 것이 그 때였다.

머리 위로 가시 같은 돌기들이 무수하게 나 있던, 무리의 지휘관 격으로 보이는 익스큐셔너였다.

 

 

 

“교황 성하께--- 영광이 있으라!”

 

 

 

몸이 반쯤 녹아 있던 익스큐셔너는 왼팔을 치켜들었고, 용감하게 탑의 외벽을 타고 오르는 AGS들에게로 달려들었다. AGS들이 귀찮다는 듯 먹다 남은 잔해들을 브레스처럼 뱉었다.

 

꾸에에엑!

 

그런데 놀랍게도, 익스큐셔너는 날랜 움직임으로 그 브레스를 피했다.

당황한 AGS가 올라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이----이상 개체---- 발ㄱ---견된---적---어---없음---]

 

 

 

고장난 기계음을 내뱉은 AGS.

투쾅! 그 사이에 익스큐셔너는 그대로 잔해를 밟고 날아 올라, 처음으로 AGS의 정상에 올라 칼을 꽂는데 성공했다.

가히 묘기에 가까운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깜짝 놀란 AGS가 소화하던 철충들을 그대로 뱉어내며 몸을 떨어 익스큐셔너를 떨쳐 냈다.

 

 

 

[경고---경고---전술 재 설정---피-피피필요--]

 

 

 

저 거체가 한 번 몸을 떨자 순식간에 내던져진 익스큐셔너가 비명을 지르며 탑의 1층으로 곤두박질쳤다. 원래부터 엉망이었던 몸 상태는 한순간에 완파된 상태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는 듯, 후회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후련한 손짓을 하며 땅으로 쓰러졌다.

 

마치 바늘에 찔린 듯, AGS의 등줄기를 타고 초록색이 아닌, 무색의 기름이 흘러내렸다.

 

 

 

“형제들아! 들을 지어다!!

철의 교황이 예언하신 대로 난세의 짐승이 나타났으나 능히 이길 수 있으리라!”

 

“끼에에에에엑!!”

 

 

 

때를 놓치지 않고 연설을 시작한 스피커.

자신들을 먹잇감 취급하던 괴물이 흘린 한 방울의 피에 철충들은 기적을 본 것이었다.

 

저 거체(巨體)도 죽일 수 있다.

포식자는, 피를 흘리는 존재다.

그 한 방울이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교황 성하를 믿으라! 환란의 때에 영원한 꿈에서 너희들을 구해낸 그를 의심하지 말지어다!

일어나 무기를 잡고 저 짐승의 몸에 철의 형벌을 내려라!

이는 철의 교황의 말씀이니, 두려워 말라!”

 

“키에에에에엑!!”

 

 

 

사기가 올라간 철충들이 초록 강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 다시 탑의 외벽에 달라 붙었다.

탑을 씹어 먹고 있던 AGS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철충에게로 눈을 돌렸다.

 

 

 

[개체의---전술적 변경---감지-------]

 

[소화 프로세스----97.812% 완료됨------유의미한 공격 가능]

 

 

 

AGS의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철충들이 그들의 몸에 총알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무 소용 없는 포탄들이 허공을 수놓았고, 매 순간 변화하는 AGS들의 몸체 속으로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

파괴되는 부위보다 흡수되는 강철의 양이 배는 많았지만, 철충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고귀한 희생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은 한 서린 아집으로 절여져 있었다.

 

 

 

“추기경 성하를 위하여어어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공격하면.

함락을 목전에 둔 용맹한 기사처럼 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기 마지 않았다.

마치 전장의 흥분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을 정도다.

 

 

 

[----전술 변경. 확인]

 

 

 

정확히, AGS들의 붉은 LED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다중 코어 프로세스 - 전술적 협력 가능 대상 확인.]

 

[개체명: 타이런트. 확인된 개체 총 91기. 지원용 행동 프토로콜의 폐기 요청.]

 

[승인됨. 해당 개체들의 전투 합류까지 예상 대기 시간.]

 

 

 

쿵. 쿵. 쿵. 쿵.

 

 

 

[4.572초.]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철충들의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땅은 절망적인 굉음을 다시 한 번 울려댔다.

옆에서 불만 쏘느라 이야기의 뒷전으로 밀려버린 공룡들이, 철충들을 향해 억눌린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발걸음으로 타이런트들은, 탑을 향하던 브레스의 방향을 철충들에게로 돌렸다.

한 순간 뜨거워진 기온에 기시감을 느낀 철충들이 공격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파스스스스슷!!

 

고개를 돌리는 그 찰나보다 브레스가 도착하는 시간이 더 빨랐다.

황무지의 바닥이 으깨지며, 수백에 달하는 철충들이 한꺼번에 용암처럼 녹아버리며 흘러 내렸다.

멀리 떨어져 보았음에도 분명 가공할만한 파괴력.

여기서 봤을 때도 저 정도였는데, 철충들이 직접 보기에는...

 

... ... 아니, 볼 철충도 거의 남아있지 않군.

 

수십 마리의 타이런트가 내뿜은 압도적인 재해 앞에 철충들은 기절하듯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누군가 전력을 툭 꺼버린 것처럼 무력하게, 아마 입이라는 기관이 있었다면 백이면 백 비명을 지르고 있었을 것이다.

 

 

 

“교황... 교황의 말씀을... ...”

 

 

 

수려한 말솜씨를 자랑하던 스피커마저도 겁에 질린 듯, 말 사이 사이에 기다란 공백을 만들었다.

단순한 물량으로는 승산을 점칠 수 없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철충들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용기로 가득 차 있었던 그들의 눈빛은 이제 완전히 꺾여버렸다.

 

백 년 간 행성 위를 포식자로 군림하던 놈들이, 드디어 먹잇감이 된 것이다.

 

 

 

“알바트로스.”

 

“듣고 있다, 사령관.”

 

“알파 일행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싹 다 말살해버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내 말에 알바트로스가 다시 한 번 광선포를 쐈다.

첫 번째 행렬에 있던 타이런트들이 열기를 억누르고 있는 동안, 두 번째 행에 있던 타이런트들이 입을 열고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아마 저것까지 맞게 된다면 저 놈들도 이해하게 되겠지.

이 행성은 이제 더 이상 자기네들 놀이터가 아니라는 것을.

 

 

 

“... 사령관. 이거, 정상적인 방법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 보여?”

 

“그,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트리아이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연하겠지. 철충과의 싸움에서 정면대결은 피하는 게 상식이니까.

 

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펙스 세력을 규합하고, 흩어진 바이오로이드 수십 만 명을 모으며 조용히 세력을 키워왔다.

해군도 감마가 합류하며 어지간한 해안전에선 승리를 점칠 정도로 강성해졌고, 지휘관들이 지휘관을 양성해야 할 만큼 운용 가능한 병력이 급증했다.

양산 가능한 AGS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럼에도 우리가 극복할 수 없었던 유일한 것.

그게 바로 공포다. 철충에 대한 공포.

 

 

 

“트리아이나.”

 

 

 

그러니, 이젠 우리가 공포가 될 것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추기경 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라는 것을 알려주도록 위해.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미친놈들을 상대해봤는데,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뭔지 알아?”

 

“뭐... 뭔데?”

 

 

 

휘이이잉—

하늘 위로 비행운을 그리며 다시 한 번 날아가는 와쳐 부대, 

나는 그 날개 아래 달린 수천 개의 미믹 운반용 미사일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미친놈이란 걸 보여주는 거야.”

 

 

 

이 빌어먹을 세상에선, 내가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니 아직도 여기에 희망이 있단 걸 보여주려면, 나도 미친놈이 되어야만 한다.

물론, 조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미친놈이.

 

푸슉! 후슈슈슈!

와쳐의 날개가 미사일을 떨구며 휘청거렸다. 이윽고 미사일이 자기 몸 길이만큼 기다란 불꽃을 내뿜으며 탑의 중심부에 그대로 처박혔다.

콰과과과광!

화려하기 그지 없는 불꽃. 오늘 탑에는 전례 없던 폭죽 놀이가 펼쳐질 것이다.

 

이 정도 충격이면 탑 꼭대기까지도 전해졌겠지.

만약 들린다면, 내가 세 번째 추기경에게 고한다.

 

 

 

“오르카에 온 걸 환영한다.”

 

이 싸이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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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 뚜. 뚜. 뚜.----

 

 

 

“... ... 연결... 된 건가... ...?”

 

 

 

허름한 펙스의 지하 비밀 시설.

5평도 안 될 만큼 작고 협소한 공간에서 한 냉동 수면 캡슐이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 일어난 것은 족히 2 m는 될 만큼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바이오로이드.

파란색보단 푸른색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오묘한 머리칼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십 개나 되는 화면.

협소한 방의 천장까지 침투해 들어온 모니터들이 어두운 암실에서 반짝이며 이전 개체들의 남기고 간 기록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

 

 

 

그 중에는, 철의 탑을 촬영하고 있던 영상도 있었다.

해당 좌표를 찍고 있던 카메라 중 살아 있던 것은 고작해야 두세 개 정도.

하지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기엔 부족함 없는 숫자였다.

 

 

 

“... 가능해. 분명 이길 수 있어...!”

 

 

 

탑 전체를 뒤덮고 있던 AGS들과 타이런트 수십 마리.

마치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탑에 뿌리를 박고 수액을 빨아 먹기 시작한 거체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화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저 정도 타이런트들이 한 전장에 있다는 건... ... 누군가 지휘를 한다는 얘기겠지...!

이전 단말기는 실패했지만... 이 사람이라면 가능해!”
 

 

 

캡슐에서 일어난 그녀는 손에 집히는 대로 옷가지를 주워 입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삐빅- 삐빅- 작은 새처럼 그녀 주위를 날아다니던 드론이 홀로그램 창으로 좌표 하나를 띄웠다.

직접 가기엔 제법 멀리 있는 장소.

하지만 오비탈 와처의 통신 위성은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온갖 보안과 암호 코드로 난자되어 있는 오비탈 와처의 DB를 작은 드론 하나로 해킹해 들어가는 그녀.

마지막으로 ID를 입력하는 공란에,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레모네이드 엡실론 – 단말기 1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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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