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거모음


미호와 리앤의 손에 이끌려 관람차를 타러오게 되었고, 관람차는 넉넉하게 4명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애초에 미호와 리앤이 같이 타자고 끌고온만큼, 한칸에 두명밖에 못타게되면 어쩌나 했는데...


네명이면 리리스도 같이 타서 경호고 뭐고 얘기할것도 없고, 다른 둘도 큰 불만은 없겠지.


"네명이면 딱맞네. 적당히 기다리다 불꽃 쏘는거 보면 되겠다."


"쌤, 빨리 타요."


그렇게 나는 아무생각없이 관람차에 가장 먼저 올라탔고, 내 뒤로 미호가 올라탔다.


그리고....


끼익. 텅.


공포영화처럼, 갑자기 문이 닫혔다.


"...?"


"어? 왜 문이 닫힌..."


미호도 문이 닫히는건 예상못했는지 문이 닫힌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창문을 통해 바깥...다시말해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왓슨! 둘이서 잘 놀다와~!"


리앤이 밑에서 우리둘이 탄 관람차를 보며 손을 흔들고있었고, 그 옆에서 리리스가 팔짱을 끼고 보고있었다.


즉, 리리스의 암묵적 동의 하에 진행된 리앤의 소행이라는건데...


"어, 쌤? 그러니까...저희 둘만 남게된거...맞죠?"


"그런것같네."


미호와 나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서로 눈치를 봤고, 이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관람차가 올라가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무언가 말을 꺼낸다면, 너무 어색해질것만 같았으니까.


"....크흠."


"네?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뭐라고 말하신줄로만..."


"아무것도 아니야."


"아, 네에..."


이거봐. 곧 죽을것같이 어색하잖아.


그 시각, 아래에서는...



"으~음, 역시 같이갈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이번엔 내가 끼어든 입장이니까. 이런 부분은 양보해야겠지..."


리앤은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 구경 부분을 함께 차지하는 대신, 미호에게 양보해주었다.


미호가 철남을 좋아한다는것은 눈을 가리고 귀를 가리고 뒤돌아서 봐도 알 수 있을정도로 명확했다.


애초에 그녀가 철남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일때 유일하게 언짢아보이는 느낌을 풀풀 풍겼으니까.


하지만 사랑의 라이벌이라고 해서 무조건 경쟁하고 따돌리고 패배시켜야할 대상은 아니었다.


리앤이 보기에 미호는 지금 가진게 너무나도 열악했고, 또 필사적으로 보였으니까.


"나는 좋은 추억을 어릴적에 많이 쌓았고, 데이트도 한번 했으니...출발은 동일하지 못해도 조건은 동일해야겠지? 음, 어떻게 보면 소꿉친구 포지션이라 너무 여유부린게 아닐까싶기도 하고...아니지, 학생이잖아. 왓슨도 그 부분은 많이 신경쓰겠지."


그녀에게는 소꿉친구라는 이점도 있었고, 또 비슷한 나이라는 이점까지 있었기에 리앤은 미호에게 추억과 데이트라는 동일한 조건하의 경쟁을 위해 이번 관람차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의문을 품는게 하나 있었다.


"그보다 그쪽은 안따라가도 됐어? 경호한다며?"


"경호말인가요? 걱정은 없습니다. 장거리 저격이 불가능한것도 아니지만...적어도, 이 테마파크 내에서는 그런일이 없을테니까요. 후후. 그 능력을 아니까 오히려 신뢰가 되네요. 경호에 마음을 놓은게 얼마만인지."


"...무슨 뜻이야?"


"글쎄요?"


리리스의 말에 리앤은 의문을 표했지만, 리리스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테마파크 뒤쪽의 산이나 높은 구조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지노 인근의 한 통신탑 위에서 테마파크의 조명을 반사해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쪽을 향해 소리없이 입을 움직였다.


"........"


400미터 떨어진 통신탑 상부.


"허. 튼. 짓. 하. 면. 다. 죽. 인. 다....여길 발견한건 놀랍지만, 별로 무섭지는 않군요."


스코프를 통해 테마파크를 주시하던 갈색머리의 여성이 리리스의 입술모양을 읽고 그녀의 메시지를 무전으로 전달했다.


원거리에 있는 본인을 발견하고 메시지를 보낸것은 예상외였지만, 저격을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죽인다고 협박해봐야 별 의미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무전을 통해 들려온 답은 충격적이었다.


-무서워해야할거야, 발키리. '저건' 그게 가능한 괴물이니까. 주시만 해. 칸의 말에 따르면 경호목적으로 온거니까 건드리지 않으면 저쪽도 얌전히 있어줄거야. 그보다 그렘린, 아직도 옆에 있는 남자의 신원은 파악못했어?


레오나의 지시에, 그렘린은 무언가에 열중하고있는듯 다급하게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대장님. 결제정보도 다 알아보고 있는데 몰래 캐는거라 시간이 걸려요! 티켓구입쪽은 본사 데이터라 더 힘들다고요...


-그렘린, 적어도 식사는 여기서 했을거 아니야? 거길 파봐. CCTV 동선이랑 시간대에 맞춘 결제기록이면 하나쯤 있겠지.


-으음...그 부분은 해볼만하겠네요.


그러나 둘은 몰랐다. 철남이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했고, 입구 인근의 CCTV는 테이블쪽을 비추지 않는다는것을...




관람차 안.


미호와 철남은 서로 말없이 창 밖만을 보거나 관람차 내부의 환기용 소형 창문을 본다거나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리고 관람차가 3분의 1바퀴를 회전했을 때 즈음, 바닥에서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발 끝을 쳐다보던 미호는 망설임에 빠져있었다.


'어떡하지? 일단 둘이서 타긴 했는데, 아무 말도 못하겠어...쌤도 별 말 없으시고...불꽃은 언제 터지는거야? 이렇게 말 없이 가만히 있기 너무 어색해...'


서둘러 불꽃이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미호.


'하, 불꽃 언제 터지냐...저게 터져야 뭐라도 말해보는데...와! 저거 예쁘다! 라거나 저기봐! 라던가...감탄사라도 해야하는데. 부탁한다! 하이에나! 빨리 자랑하던 불꽃을 터트려줘!'


그리고 철남 또한 미호와 비슷한 이유로 불꽃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불꽃놀이가 시작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관람차가 꼭대기에 다가가기 시작하자 미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후회했다.


'이게뭐야, 놀러오자고 떼썼는데 철용이가 끼어들고. 놀러왔더니 쌤 옆에는 다른 여자들도 붙어있고. 경호하는 언니야 사무적으로 나오니까 괜찮다쳐도 리앤씨...아니, 리앤언니는 쌤하고 엄청 친한 모습 보이고있고....'


시험으로 겨우 따낸 데이트였지만 철용을 비롯한 자매들이 끼어들어 데이트가 아니게 되었고, 기껏 인원수를 잘라냈더니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인 리앤이 함께해 데이트의 느낌을 느낄 수 없었다.


'쌤이 실패한 내 김밥을 맛있게 먹어준건 좋지만, 괜히 사람이 좋아서 다른 도시락도 다 먹고 과식하는바람에 같이 놀지도 못했고, 저녁때까지 어영부영 시간만 보냈고...이게 뭐야? 지금까지 한게 없잖아. 지금, 둘이 된 지금 뭐라도 해야하는데...'


그나마 데이트라고 느낄 수 있었던건 점심때 뿐이었고, 그 이후로는 별다른 진전없이 시간만 보냈다.


그리고 지금, 기회라고 할만한것이 찾아왔지만...부끄러움에 말을 못하는 자신이 싫었던 미호.


'그래, 뭐라도 하는거야.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하더라...이런때에 적합한 말이 있을것같은데....'


"으음...."


미호는 침묵의 순간을 파괴하고 놀이공원에 온 목적, 본격적 데이트를 위해 가장 적합한 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지? 일단 좋아한다는 고백은 나중으로 하고...'


그리고 그 때,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자, 시작은 큰거 한방으로!"


피유우우우-


첫 발사는 모두의 이목을 모으기 위한 신호탄인만큼, 가능한 주의를 끌어야했다.


길고 긴 시간동안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필요했고, 또 단 한번의 큰 폭발로 이목을 끌어야했다.


'아아, 뭐라고 말하지?! 고백은 나중인건 알겠는데, 중간이랑 시작을 모르겠어!'


퍼어엉!


"쌤, 좋아해요."


폭죽의 폭발과 함께, 미호가 마음속에서 나중에 꺼내야겠다고 생각한 말이 폭발해버렸다.


"에?! 어어?"


미호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뜨고 주위를 돌아보았고, 다행히 아무런 반응없이 가만히 있는 철남을 보고 안심했다.


'아아, 폭죽소리때문에 못들었구나. 다행이야.'


그렇게 미호가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철남이 미호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 알아."


"....네?"



"연속폭발 간다!"


초록색과 붉은색, 주황색 등 각종 색색깔의 폭죽이 차례대로 발사되었고, 이내 공중에서 폭발했다.


퍼버버버버버벙!


"나도 알아, 네가 나 좋아하는거."


"티...났어요?"


폭죽의 폭음과 불빛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지만, 관람차 안쪽에 있는 둘의 세상까지 침범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티가 나는데 어떻게 몰라?"


철남의 대답에, 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 그럼..."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대답에 미호는 움직임을 멈추고말았다.


"그런데, 나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해줄수가 없어."

'아, 그렇구나. 내 마음을 알아도 응답해줄 수 없었던 이유가...있었구나. 역시, 나같이 어린애보다는 추억도 있고 친하고, 또 나이도 비슷한 리앤언니가...'

"...그렇겠죠? 역시 이미 여자친구가...."


차마 리앤이라고 말을 꺼낼 수 없어 여자친구라고 대체해서 말한 미호는 사랑을 실패한 마음보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가슴아팠다.


'나, 되게 꼴불견이네. 혼자 멋대로 사랑을 시작하고 이뤄질리도 없는데 다른사람이 날 제친것처럼 미워하기나 하고. 현실을 보고서도 인정 못하고 말이나 돌리고...'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아쉬움에 눈에서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고 목이 메이고 있었다.


'울면 안돼. 최소한 못난 모습은 안보여야지.'


미호는 자신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하늘높이 들어올리려 했다.


때마침 하늘에서 폭죽이 신나게 터지고 있었으니, 고개를 들어올려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거고.


'그래, 불꽃놀이나 보자. 쌤이 뭐라해도, 불꽃놀이만 보는거야. 오늘 본 불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눈을 못떼는거야.'


그렇게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한 미호.


"아니, 여친이 있고 자시고가 아니라. 없어. 뭐랄까, 연애라는게 너무...낯설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무섭다고 해야하나."


미호의 결심은 철남의 말에 곧바로 박살났다.


"...네?"


깜짝 놀라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호의 눈빛에, 철남은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첫 단추를 어디서부터 잘못 꿴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딘가가 좀 뒤틀린 사람이거든. 내가 이런말 하는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그게, 사랑이라는게 조금 힘들어."


"...그럼, 저는 제 마음을 포기해야하나요?"


사랑을 스스로 내려놔야하냐는 미호의 물음에, 철남은 섣불리 대답해줄 수 없었다.


'연애는 무서워하면서, 정작 그 앞단계에 있는건 안무서워하고 오히려 좋아하는...괴상한 인간이지. 성욕에 패배한걸수도 있지만, 가볍게 연애할 수 있는것도 이악물고 무시하고있지.'


티타니아와의 관계에서 티타니아가 헤어짐과 그 이후의 고독을 두려워할때 그저 이해하고 그녀의 뜻에 따르는 대신 그녀를 안아줄수도 있었다.


키르케와의 관계에서도 서로 합의하에 없었던것으로 하는게 아니라 아침에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대로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이 있었다.


카엔과 제로도, 단순 주종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연인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서로의 과거와 세계가 달랐지만, 현재의 그들은 같은 위치에 있었으니까.


시라유리는...다소 뒤틀리긴 했지만, 자신에게 오는 사랑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품는 대신, 책임을 지기 싫다는듯 시라유리에게 선택하게했다.


마음이 없는건 아니지만, 하나를 고르기 위한 확신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지도 모르지. 애정과 욕구는 있지만, 상대가 사랑으로 다가와도 순수하게 사랑때문에 관계에 응해주는게 아닌 그런 뒤틀린 인간.'

자신을 돌아본 철남은, 미호에게 포기하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결국,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결정을 맡기기로했다.

"포기하는걸 말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추천하지도 않아. 힘들수도 있어."

철남은 무거운 마음으로 한 말이었고, 이내 미호는 고개를 숙여 눈가를 닦기 시작했다.


"으, 으우으...."


"미호야, 괜찮아. 눈물흘려도..."


미호가 눈물을 닦는것을 본 철남의 위로가 이어지려던 그 때, 미호는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눈물을 흘리던것이 거짓말이었던것처럼, 그녀는 지금 활짝 웃고있었다.

미호의 미소와 하늘에서 터져나가는 폭죽의 밝은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눈물. 둘을 비교했을때 미소쪽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응?"

사랑의 실패로 인해 좌절할줄로만 알았고,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미호가 갑자기 웃는다.


철남은 그런 미호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미호는 철남의 대답에 희망을 얻었다.

"선생님의 옛날친구 리앤언니, 그리고 가까이서 경호하는 그 은발 여자, 그 외에 학생회장이나 기타등등. 선생님이 여러 여자들한테 관심받고 애정을 받는건 알고 있었어요."

리앤이 미호의 마음을 꿰뚫어본것처럼, 미호도 철남 주위에 있는 여자들을 어느정도 꿰뚫어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에 비해서 다소 뒤쳐진 자신의 처지에 낙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치만 키도 작고, 가슴도 작고...또 뛰어난점도 없어서 학생이라는점에 매달리려 했는데...쌤이 모두를 똑같이 대우하는걸 알았으니 저도 희망이 보이네요."


그러나 오늘, 철남이 연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해듣자 미호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누구는 앞서있고 누구는 뒤쳐지고 그런게 아니었어요. 모두가 동일하게 시작점. 다같이 0에서 출발하는거잖아요."


"....저기, 미호야. 잠깐."


철남이 미호의 말을 가로막으려하자, 미호는 더더욱 강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저, 안질거예요. 학생회장이 상대든, 리앤언니가 상대든, 누가 됐든! 물론 쌤의 처음은 아니겠지만, 쌤의 끝사랑은 이 미호가 가져갈거에요! 기대하세요!!"

미호는 철남의 가슴팍에 검지를 펴고서 당당하게 선전포고까지 했다.


"쌤의 마음을 제가 빵! 하고 저격할거에요!"


"...미호야. 잠깐만.."

"포기하지 않을거라니까요? 무슨 말을 해도 전 쌤을 반드시 유혹해서 남친으로 만들겠어요!"

"...그러니까, 그게..."


철남이 계속해서 말을 멈추려하자 북받쳐있던 상태의 미호는 이내 소리까지 지르기 시작했다.

"왜요! 뭐가 무서워서 그러시는건데요?"

미호의 외침에, 철남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바깥을 가리켰다.

"그, 우리 이제 꼭대기에서 내려가고 있거든? 그런말을 벌써 해버리면 남은시간동안 우리 부끄러워서 어떻게 하라고?"


지금 둘은 관람차의 정상에 있었고, 즉 지상까지 내려가려면 지금까지 보냈던 시간만큼 다시 여기에서 보내야한다는 뜻이었다.


미호도 그 사실을 깨닫자 방금 전 자신이 한 언행과 지금의 상황에 도저히 할 말을 못찾았다.

"아, 앗...어...그..."

"이래서 말리려고 했는데..."

결국, 미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붉어지기 시작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으우으으으....시작부터 망했어...."

"그래도, 마음을 저격하겠다는 말은 조금 귀여웠어."


"말하지마세요...."


"아아~불꽃놀이가 예쁘네~"


계속 바닥만 쳐다보는 미호와, 바깥으로 고개를 돌린 채 절대로 안쪽을 쳐다보지 않는 철남.


둘은 그렇게 말 없이 관람차가 내려갈때까지 시간을 보냈지만, 올라갈때처럼 어색하고 불편하지는 않았다.


말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속내를 털어놓은 둘에게는 더이상의 말이 필요없다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관람차에서의 시간도 끝나고, 철남은 곧바로 집으로 귀가하기 시작했다.


"으음...쌔애앰..."


조수석에 잠든 미호를 태우고, 뒷자리에 리앤과 리리스를 태운 채 홍련의 집까지 향한 철남.


그는 잠든 미호를 방까지 옮겨다 준 뒤, 그대로 집에 가려 했다.


하지만 그 때, 홍련이 그를 멈춰세웠다.


"철남군? 잠깐...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시죠?"


"이쪽으로."


홍련은 집에있는 베란다로 그를 불러냈고, 베란다와 거실과의 문을 닫자 외부의 소음이 거의 사라졌다.


"아까 관람차에서 돌아온 미호를 보니, 마음은...이미 전달받았겠죠."


"네."


'뭐라고 하려고 그러시나...'


미호는 미성년자이니 건들지 말아달라고 하는 이야기를 꺼내려나 싶었던 철남.


하지만 홍련에게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약속은 약속이라는 말...기억하시죠? 미호와의 약속을 지킨다고 했던."


"네."


"그럼, 저하고도 약속하나 해주세요."


"미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건전한 연애를 해달라는건가요?"


철남은 다소 직설적으로 질문했지만, 홍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가 그런말 할 자격은 없죠. 저도 10대때에 애들을 가졌으니까요."


"10대...?!"


"네.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종종 만나는 식당 직원이었던 남편과 속도위반을 하게됐거든요. 그렇게 이른나이에 결혼을 하고, 남편이 요식업으로 성공해서 기업으로 불릴만큼 사업을 키우다가...과로로 사망했어요. 그 이후 남편의 기업은 블랙리버에 인수됐고....그 지분을 상속받고 본래도 실무진에 중역이었던 제가 그 뒤를 이어서 임원으로 앉았지만."


홍련은 철남에게 본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철남은 홍련이 아이들을 데리고 젊은나이에 임원에 앉게된 배경을 이해하면서도 문득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게 혹시 어떤 기업인지..."


"몽구스에요. 남편이 학생들을 배부르게 먹이기 위해서 가성비가 좋은 음식을 주로 취급했고...그게 대박이 났죠."


철남은 그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아, 몽구스...학교다닐때 신세 좀 졌던 프랜차이즈 밥버거 집이었는데 그게 사모님네 기업이었구나...'


대화가 옆으로 새자, 홍련은 다시 주제를 바로잡았다.


"아무튼, 약속 하나만 지켜줘요."


"어떤 약속인가요?"


"미호와 관계를...맺게 된다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미호는 철남군에게서 오빠나 아빠같은 듬직한 남자를 보고있는걸수도 있고 의지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걸수도 있겠지만...철남군이 미호에게 그만큼의 감정을 가지는건 아닌것같으니까요."


대기업의 임원은 그저 우연으로 된게 아닌지, 홍련은 지금 철남과 미호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


철남은 홍련의 말에 곧바로 대답해주지 못했고, 홍련도 바로 대답이 나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말을 덧붙였다.


"무조건 책임지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첫사랑이 무조건 이뤄진다는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다만....미호가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고 했을 때, 미호의 마음의 상처가 어느정도일지 짐작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렇게 된다면....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먼저 다가가지는 못하겠지만...제가 미호의 마음까지 막을 자격은 없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약속을 하는거예요. 내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 도 없고 또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달라는것도 아니지만...적어도, 그 아이가 어디까지 철남군을 사랑했는지 정도만 이야기해주세요. 저는, 연애경험이 많지않아서....이렇게 부끄럽고 도리에 어긋난 부탁이라도 해야하니까요."


"사모님..."


"뭐라도 알아야, 뭐라도 할 수 있어야 딸들이 엄마를 믿어주잖아요. 다른건 몰라도,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만큼은....아, 그만 잊어주세요. 저희가 한 대화는 약속까지만...한걸로."


홍련은 중간에 자신이 너무 많은 대화를 했다고 깨닫고 대화를 중단했고,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복잡하네."


철남은 마음속이 복잡해지는것을 느끼며 홍련의 집에서 나왔고, 그 복잡한 마음은 리앤과 토모를 데려다줄때까지도 가라앉지않았다.


"그럼 왓슨, 잘가~"


"아저씨, 잘가~"


모두를 떠나보낸 뒤, 철남은 리리스와 함께 집으로 향했고 이내 집에 도착하자 리리스까지 떠나갔다.


"그럼, 주인님. 오늘은 이만 물러가고, 업체를 정리한 뒤 내일 뵙겠습니다."


집 안에 들어왔지만, 언제나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그에게 인사를 하는 쿠노이치 자매는 없었다.


그렇게, 철남은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철남은 간만에 맞이하는 이런 고독이, 열중할것이 없어 생각에 빠지게되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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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후우....."


한숨만을 내쉰지 몇분이나 되었을까.


마음이 계속 복잡하고 머리는 다른 생각을 귀찮아하고있다.


미호는 오늘 나에게 고백해왔지만, 나는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호는 내 마음을 가지겠다며 선언했고,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저 작은 아이도 저만큼의 용기를 내는데, 나는 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좋다고 답할 용기를 못냈지?


그리고 사모님도 미호의 사랑을 가로막거나 제한하지 않았다.


적극적 응원은 아니지만, 그 사랑을 응원하며 언젠가 내가 미호를 차더라도 원망하는 대신 미호를 달래주기 위해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허락받았지만, 동시에 허락을 받지 못한 기분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의 사랑은 허락받지 못해서 주지 못하는것같다.


아껴주고싶지만, 확신이 없어 아껴줄 수 없다.


어려울수도 있지만, 서로가 처음인만큼 시행착오가 당연한것인데도 나는 완벽한 확신이 없어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게 고민하던 도중, 휴대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모르는 번호다. 잘못걸었거나...스팸인가.


하지만, 이런 전화라도 고맙다. 뭐라도 신경쓰이게 해줬으니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팀장님? 부장님? 아니, 누구든간에 부디 시덥잖은 주제로 긴 긴 이야기를 풀어줘.


-여보세요? 저 보련이에요!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 오드리님이 연락주셨어요! 정장이랑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 필요하시다던데?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번호는 모를텐데.


"...보련?"


-네, 얼마전에 손님이 정장을 새로 맞췄는데 헤어는 거기에 안맞는다는 설명을 들었거든요! 머리, 하실거죠?


영업 전화인가...이 시간에 할 필요는 없을텐데. 아니. 이 시간에라도 영업을 해줘서 고맙다.


"그걸 왜 지금 시간에..."


-오드리님이 손님은 그냥 있으면 샵에 안올것같으니 직접 재촉해보라고 하셨어요! 게다가, 오후 10시라도 머리는 자를 수 있잖아요?


...오드리씨의 배려와, 보련의 즉흥적인 행동이 힘을 합친 결과인것 같았다.


그래, 시원하게 마사지랑 이발도 받으면서 생각을 정리해볼까. 마사지를 받는 시간동안은 고민이 사라질지도 모르지.


그렇게 나는 곧바로 정장을 챙겨 보련의 샵으로 향했고, 주위가 다 어두운 와중에 혼자만 불이 켜진 바버샵이 나를 반겨주었다.


"손님, 어서오세요~ 그보다 정장은 안챙겨오셨나요? 안어울리면 조금 힘든데~?"


보련은 지난번처럼 밝고 활기차게 나를 맞이해주었지만, 나는 비에 축 젖은 개처럼 의욕없고 기운없이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가져왔어요."


"손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


"여러가지로 일이 좀 있었죠."


"...그럴때일수록 변화를 줘야겠죠. 손님을 꾸며서 웃게 만들고 나도 웃는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거예요. 안쪽에 마사지베드가 있는 방 옆에 탈의실이 있어요. 한번 갈아입고 와보시겠어요?"


나는 보련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고, 이내 정장을 입고 그녀의 앞에 섰다.


"완벽하네요, 역시 오드리씨에요. 그럼, 이 다음은 제 영역이겠죠."


지난번처럼 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 보련.


"자, 이제 완벽해졌어요!"


그리 오래 지나지않아 보련은 내 목에 두른 천을 치우고 내 전신 모습을 보여주었고, 포마드로 넘겼던 지난번과 달리 별도의 손질 없이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멋지네요."


"네, 손님은 지금 헤어도 옷도 전부 완벽하지만...마음이 그렇지 못하네요."


내가 품은 고민이 그렇게 티가 나나...


"음, 역시...특별한 코스가 필요하겠어요."


곧바로 문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걸어잠구고, 이내 입구쪽의 커튼까지 친 보련.


"손님? 다시 앉아주세요. 제가 옷 안쪽의...마음까지 깔끔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리해드릴테니까. 시술을 받고 나면, 생각이 바뀌실거예요. 그리고, 음료라도 드릴까요?"


그녀는 손에 술 한병을 든 채,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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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향기 페로몬 뿌리는 철남씨-보련 편에서 계속.

40화(보련편 감상 추천)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다음편이 떡씬이라 조금 분위기가 깨지는것 같지만, 의외로 고민해결에 제일 적합한 방법과 적절한 위치에 있는게 보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