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감도 0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 잠복 중인 철충을 찾아내 경계하기 위해 정찰대가 오르카 호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철충들에게 습격받는 참호를 발견한 것이다. 참호는 안에 누군가가 있는지 설치된 중화기에서 격렬하게 불을 뿜었지만 짐승떼처럼 몰려드는 철충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긴급보고를 받은 나는 즉시 정예 기동부대를 출격시켜 철충들을 물리치고 참호 안의 생존자를 구출해오게 했다. 그리고 기동부대가 데리고 온 그 생존자는 놀랍게도 스틸라인의 말단 보병 바이오로이드, 브라우니였다.


오르카 호에 돌아온 초췌한 몰골의 브라우니는 곧바로 먹을 것을 찾더니 우리가 식사를 가져다주자 그야말로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웠다. 한참동안 음식을 입에 쑤셔넣은 브라우니는 배가 볼록 나올만큼 배를 채우고 나서야 나에게 살았다며 감사를 표했다. 같이 있던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마리는 없었다)이 브라우니의 행동에 노발대발하는 것을 내가 진정시키고 브라우니에게 자세한 사정을 묻자, 브라우니는 그제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만나기 한참 전, 브라우니와 함께 레프리콘이랑 이프리트, 노움으로 구성된 스틸라인 소대는 철충의 습격을 받아 근처의 버려져 있던 참호로 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농성하며 기다리면 지원군이 와 줄거라고 자신과 소대원들은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원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대원들은 하나 둘씩 쓰러져갔고, 나중에는 자신 혼자만 남았다.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싸우다가 죽을 생각이었다고. 


기구한 사정을 들은 나는 브라우니에게 스틸라인에 복귀해야되는 건 아닌지 물었는데, 자신은 이미 전사처리되서 군적이 말소되었을 거라고 브라우니는 씁쓸하게 말했다. 딱하기도 하고 브라우니가 있다면 다른 스틸라인 부대원들을 찾는 일도 수월해질 것 같아 나는 브라우니에게 오르카 호에 머무를 것을 권했다. 이에 브라우니는 매우 기뻐하면서 나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기운차게 장담했다. 그렇게 브라우니는 오르카 호의 일원이 되었다.



호감도 25


얼마 전 오르카 호에 합류한 브라우니는 소름끼칠정도로 빠르게 오르카 호 내의 바이오로이드들과 친해졌다. 브라우니가 친화력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게 이 정도일 줄이야... 어찌나 친화력이 좋은지 원래라면 사이가 좋지 않을 둠브링어 출신의 바이오로이드들과도 잘 지낸다(※둠브링어와 스틸라인은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음).


잘 적응하는걸 넘어서 아예 동화되어버린 브라우니에게 난 어떻게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과 그렇게 빨리 친해졌는지 물었다. 그러자 브라우니는 '진솔한 마음이 비결이지 말임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며 자기 가슴을 탁 쳤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곳에 살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절도있게 경례했다. 이 때 만큼은 각 잡힌 군인처럼 보였다.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돌아가려는데, 브라우니가 대뜸 궁금한 게 있다고 나를 멈춰세웠다. 내가 그게 무엇이냐고 하자 브라우니는 오르카 호 내의 바이오로이드들이 하나같이 나를 거의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던데, 그건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어떤 대답을 해 줄까 하다가 아까 브라우니가 말한 걸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솔직한 마음이 비결이지.'


브라우니는 허를 찔린 것처럼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재밌다는듯이 웃으며 과연 보통이 아니라고 나에게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진솔한 마음이라는 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멀지 않은 날에 알게 되지 않을까, 라고 말을 남긴 뒤 자리를 떠났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브라우니가 넋잃은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조금 무안해진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호감도 50


오늘은 작전지역을 시찰하는 날이었다. 작전지역 파견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있어 꽤 위험한 일이라서 전투에 특화된 군 부대 바이오로이드들만 파견했는데, 어쩌다보니 스틸라인이 근무 중인 지역을 가장 먼저 방문하게 되었다. 작전지역에 도착하니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브라우니가 나를 맞이했다. 다른 부대원들은 안 보이길래 행방을 물으니 마리를 따라 시찰을 나갔다고 한다. 딱히 위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잠시 브라우니랑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브라우니는 이 곳의 스틸라인 부대는 오르카 호에 합류하기 전 복무했던 스틸라인과 매우 다르다고 했다. 엄격한 위계질서도 없고, 처절한 소모전도 없다. 군 계급이 나뉘어있긴 하지만 상관들이랑 부하들이랑 모두 폭넓게 잘 어울리고 있는 것이 매우 신기하다고 했다. 특히 마리는 원래 자신이 상관으로 있었던 마리와는 완전 딴판이라고 했다. 그 마리는 부하들을 아끼긴 했으나 엄격하고 무뚝뚝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 마리는 그야말로 왕언니같은 분위기라고 했다. 


얼마동안 브라우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브라우니가 대뜸 나에게 사령관님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이런 질문은 거의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꽤 당황했다. 지금까지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과는 그러고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 줘야할지 고민하던 차에 저번에 읽은 책에서 읽은 한 글귀가 생각났다. 오늘을 소중히 하면 소망하던 내일이 찾아온다는 말. 꽤 인상깊게 들었던 말이나 나는 그것을 브라우니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나는 오늘을 소중히 하며 꿈꾸는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브라우니는 내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게 뭐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기껏 공들여서 말했는데 뭔가 무안해진 것 같아 뻘쭘해졌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작전지역을 떠나려는데, 브라우니가 나를 불러세우며 물었다. 정말로 오늘을 소중히 하면 꿈꾸던 내일이 찾아오는것이냐고. 아까 내가 말할 땐 웃기만 하더니 꽤 인상적으로 들었나보다. 나는 브라우니에게 그건 오늘부터 그 말을 실천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고 말해주고 오르카 호로 돌아가는 소형 비행정에 올라탔다. 뒤를 돌아보니 브라우니가 묘한 표정으로 내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쾌활한 이미지가 강한 브라우니에게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과연 브라우니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생각에 잠긴 채 나는 오르카 호로 돌아왔다.  



호감도 75


스틸라인 부대가 맡고 있던 작전지역의 작전이 종료되어 그곳에 있던 스틸라인 분대가 오르카 호로 귀환했다. 조촐한 환영식을 열고 잠깐이나마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이프리트가 나에게 다가왔다. 늘 스텔스 모드(?)라 잘 못 봤던 이프리트가 다가오다니 별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으니 이프리트가 최근 브라우니가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생각없이 쾌활하기만 한 브라우니였는데 요즘은 무언가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고. 이프리트는 나에게 브라우니의 상태를 좀 자세히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나는 브라우니를 찾아갔다.


브라우니를 찾아 오르카 호를 한참이나 돌아다닌 끝에 나는 오르카 호의 갑판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브라우니를 찾을 수 있었다. 브라우니는 하얀 달이 떠 있는 청명한 오후의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브라우니에게 다가가 뭐하냐고 물으니 브라우니가 깜짝 놀랐다. 내가 오는 것도 몰랐나보다. 브라우니는 머쓱해하며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색에라도 잠겨있는건가? 갸우뚱해하는 나에게 브라우니는 짧게 웃고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저번에 내가 한 말에 대해 그때부터 쭉 생각해 봤다고. 그러고는 평소의 브라우니답지않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브라우니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을 비롯한 브라우니 모델들은 거대한 군부대의 말단 보병으로 만들어졌고, 전장의 소모품처럼 쓰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면 그저 이번에는 넘어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살고자 하는 본능만은 충실했기에 전장에서는 살아남으려고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고 나면, 자신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은 목적이 결여된 채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참호에서 나에게 구해지고 나서 자신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브라우니가 새롭게 합류한 오르카 호의 스틸라인 부대의 대원들은 군의 위계질서를 지키면서도 전에 있던 스틸라인 부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정다감하고 따뜻하게 브라우니를 대해 주었다. 이런 경험은 처절한 전투만을 수없이 반복해오며 살아왔던 브라우니에게있어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혼란스러움이 더해가던 중, 내가 한 말이 마치 파도치는 바다를 잠재우는 바람처럼 자신에게 다가왔다고 한다. 브라우니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았냐고 묻자 브라우니는 웃으며 아직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오르카 호의 생활은 자신에게 있어 너무나 새롭고 이질적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만나보면서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령관이 얼마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아끼고 있는지 말이다. 바이오로이드들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항상 희망과 활기를 잃지 않았던 것이 바로 사령관 때문이라고 브라우니는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사령관을 더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는 무척이나 진중한 브라우니의 태도에 놀랐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브라우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조만간 내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을 들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호감도 100


정찰 중이던 스카이 나이츠 분대에게서 고립된 채 공격받고 있는 아머드 메이든 부대를 발견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서둘러 기동부대를 구성해 급파하려는데 스틸라인 주둔지 쪽에서 연락이 왔다. 자신들을 구출작전에 투입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리가 연락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연락을 걸어온 건 브라우니였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브라우니의 말에도 일리가 있고, 한시를 다투는 상황이라 작전을 허락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부상을 입은 아머드 메이든 부대가 옴으로써 나는 구출작전이 성공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전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작전 지역에 방문하자 스틸라인 부대가 나를 달갑게 맞이해 주었다. 마리는 이번 작전의 성공에는 브라우니의 역할이 컸다고 했는데, 자신보다 결단을 빠르게 내려 적들을 뚫고 아머드 메이든 부대를 구출해냈다고 칭찬을 연신 아끼지 않았다. 마리가 부하들에게 잘 해주기는 해도 칭찬을 헤프게 하는 성격은 절대 아닌데,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길래 마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건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브라우니가 나타났다.


브라우니는 여기저기 작은 생채기를 입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부상은 입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리는 나와 브라우니가 대화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브라우니와 둘만 남게 되자 브라우니는 자신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확실히 전보다 훨씬 완숙해진 느낌이 강해졌다. 일개 말단 보병에게서 보일 법한 완숙함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시간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브라우니는 축하하는 자리를 가진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고, 나쁜 제안은 아니라서 나는 작전 지역에서 애니웨어 쪽 바이오로이드들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조촐하게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파티가 끝나고 오르카 호로 돌아가려는데, 브라우니가 인적없이 다가와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브라우니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브라우니가 평소의 군복이나 제식복이 아니라 사복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옷을 구했는지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나는 브라우니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나와 브라우니는 만월의 달빛이 내리는 해안가로 걸음을 옮겼다.


걷던 중 브라우니는 왜 자신이 구출작전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 일을 떠올리며 약간의 의아함을 느낀 내가 브라우니의 말대로 이유를 묻자, 브라우니는 그제서야 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에 브라우니랑 했던 대화를 떠올린 나는 잠자코 브라우니가 하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고, 브라우니는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브라우니는 전에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몰랐던 결정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만이 내일의 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브라우니가 찾아헤멨던 자신의 가치란 바로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과감하게 뛰어들 줄 아는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또 관심없던 내일이 기다려졌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해변 끝에 다다르고, 브라우니는 사실 새롭게 발견한 내일의 꿈이 하나 더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묻자 브라우니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그건 바로 나와 함께 내가 앞으로 만들어나갈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놀란 내게 브라우니는 내가 이 세상을 바꿀 사람이라는 것을 그동안 오르카 호에서 지내며 오르카 호의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활기차고 밝은 모습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화평과 행복을 가져오는 전령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브라우니가 어느새 나에게 안겨온 것을 알아챘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브라우니는 내 품에 머리를 잠시동안 묻고 있다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것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서. 그 말에 나는 과분한 칭찬이라며 웃었고, 이후 찾아든 정적 속에서 브라우니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드디어 끝냈다!

분량조절기 고장난 내가 개얄밉다

다음편은 레후임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