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교수님, 강의 들어가실 시간이에요.”

 

“알겠어요.”

 

 

다음 날, 하르페이아는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리마토르에게 일정을 전달했다. 어제 자고 일어난 뒤에도 실연당한 듯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하르페이아는 평소처럼 기운이 넘치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마토르는 하르페이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료를 챙겨 강의실로 향했다. 하르페이아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고민하면서 리마토르가 나간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복도를 걷던 리마토르는 둠 브링어의 숙소로 향했다. 출력한 강의 자료를 확인한 그는 전날 저녁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떠올렸다.

 

‘나이트 앤젤 씨가 찾아온 건 의외였어. 기초 논리학에 대해 짧은 설명을 들은 기억이 아직도 생각난다면서 둠 브링어 전원을 위한 강의를 바란다고 요청할 줄이야. 그런 요청을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장을 더 적극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말은 뭔지 모르겠어.’

 

둠 브링어의 대장인 메이를 떠올린 그는 자신에게 비아냥거린 합류 초기 그녀의 모습까지 연상했다. 그가 오르카호에 합류하고 1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메이는 다른 대장들과 달리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충돌한 적이 있는 마리나, 왜인지는 모르지만 사령관에게 버터밀크 컵을 집어던지고 자신을 노려보면서 사령관을 인계한 레오나나 최소한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메이는 시종일관 날카로운 모습을 견지했다.

 

“메이 씨가 소극적으로 보이지는 않은데, 대체 내가 해줄만한 말로 이게 충분하려나...”

 

자신이 준비한 강의에 의구심을 계속 갖던 리마토르는 어느새 둠 브링어의 숙소 앞에 도착하자 강의를 미뤄야 하나 고민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가 문 앞에서 망설이는 동안 방 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그를 맞이했다.

 

“교수님, 오셨-?!”

 

“어억-!!!!”

 

문을 열던 이는 실수로 리마토르의 발을 세게 찧고 말았다. 하필 잠수함인지라 문도 육중한 철문인데, 새끼발가락을 가격당한 리마토르는 이성보다 먼저 튀어나가는 비명소리를 참지 못했다. 문을 열던 여성은 그의 비명에 놀라 그를 부르려고 나가다가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꺄악!”

 

“커억!”

 

넘어지면서 리마토르의 턱에 정통으로 박치기를 시전한 빨간 머리 여인 덕분에 리마토르는 눈앞에 별이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문학적 수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의 위로 넘어지는 여인에게 깔려 쿠션 역할까지 했기에 충격은 2배가 되었다.

 

“무슨 일이야?!”

 

그 사이 리마토르의 비명을 듣고 급히 달려온 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핑핑 도는 눈을 한 여인이 리마토르 위에 몸을 포개고 있자 그녀는 정지한 사고가 다시 되돌아오면서 감정까지 한 번에 차올랐다. 칸은 리마토르 위에 쓰러진 여성을 일으켜 세우면서 차갑게 째려봤다.

 

“스트라토 엔젤, 남의 남자에게 누구 마음대로 손을 대라고 했지?”

 

“에.... 나이트 앤젤 씨...?”

 

칸이 스트라토 엔젤을 신문하는 사이 반쯤 정신을 차린 리마토르는 본의 아니게 자신을 공격한 사람의 외모를 보고 누구인지 지목했다. 얼굴을 보고 나이트 앤젤을 떠올린 그는 자신의 상체를 짓누르는 부드러운 지방질을 확인하고 곧 그 판단을 철회했다.

 

“아니구나, 나이트 앤젤 씨는 이런 크기일 수가...”

 

“뭐라고요?! 저를 저 가슴 괴물이랑 헷갈리시다니 참을 수 없군요!”

 

리마토르의 말을 듣고 울컥한 나이트 앤젤이 문으로 달려가 쓰러진 그의 멱살을 잡자 칸은 스트라토 엔젤의 어깨를 손에 쥔 채 나이트 앤젤을 쏘아봤다. 하지만 나이트 앤젤도 밀리지 않고 눈에 힘을 주어 칸을 바라보았다.

 

“인증된 납작 대령 ㅋㅋㅋㅋㅋㅋㅋㅋ”

 

“저... 그만.... 하시고... 일단.... 들어오시죠....”

 

‘다들 무섭다. 선배가 보고 싶다...’

 

“네 분 다 이 팝콘 드시고 그만 싸우세요!”

 

순식간에 4파전이 된 상황을 관망하며 메이는 실컷 웃었다. 그나마 다이카와 지니야가 네 명을 뜯어말린 끝에야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강의는 뒷전이 된 채 한바탕 소동만 오간 자리는 5분 후 본래의 목적을 되찾았다.

 

“아이고 턱이야... 반갑습니다. 오르카 인문사회대학 학장 리마토르 교수입니다.”

 

그가 강단에 서자 박수가 그를 맞았다. 누가 들어도 적당히 의례적이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 박수였으나 이마에 반창고를 붙인 스트라토 앤젤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박수에 더 힘을 실었다. 청강을 명목으로 메이의 옆에 앉은 칸도 박수에 힘을 아낌없이 넣었다. 칸의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은 리마토르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강의는 나이트 앤젤 씨께서 메이 씨가 더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달라고 부탁하셔서 성립되었습니다. 제가 의뢰 내용에 맞추어 어떤 강의를 해야 할지 고민한 결과, 에드문트 후설이라는 철학자가 창시한 현상학이 적합한 것 같아서 후설과 현상학을 주제로 설정했습니다. 조금 복잡한 내용이니 제가 나누어드린 자료를 보시면서 따라와 주세요.”

 

지니야가 종이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면서 끄트머리를 맛보자 리마토르는 유인물이 지니야의 뱃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강의를 서둘렀다.

 

에드문트 후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보아야 합니다. 근대가 끝나가기 직전인 1900년대 초반에는 모든 현상이 인과법칙으로 이루어진다는 근대 과학의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인과 법칙은 일종의 연역법으로, 정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도출된다는 공식입니다. 이 덕분에 당시에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죠. 하지만 이는 인간의 정신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정신세계의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은 조건이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벌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모두가 똑같은 상황을 보고 같은 판단을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죠.

 

이 점은 근대 과학의 큰 한계가 되었습니다. 근대 과학의 인과법칙은 도덕규범이나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능동적인 현상을 모두 조건에 따른 결과로 몰고 갔습니다. 도덕규범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니 생존에 적합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물학적 현상은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DNA의 본능이라는 식으로 환원했죠. 이런 주장은 진화심리학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모순에 충돌했습니다. 본능을 극복하는 이성을 중시했는데, 그 이성마저도 본능에 기반한 결과라는 순환오류에 걸려든 것이죠.

 

후설은 이런 근대과학의 자연주의가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져나가는 걸 보면서 자신의 시대가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설은 시대의 위기는 학문의 위기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는데, 모든 학문의 근원은 철학이기 때문에 이는 곧 철학의 위기이기도 했죠. 후설은 인과법칙을 내세운 자연주의가 고유한 개체에게 내재된 능동성을 부정하고 모든 개체를 조건에만 의존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면서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상학을 제창했죠.”

 

“질문 있어요. 후설의 시대에는 자연주의만이 유일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나요?”

 

지니야의 질문을 들은 리마토르는 훌륭한 생각을 했다면서 유인물 한 장을 더 주었다. 그는 어느새 반 정도가 지니야의 뱃속으로 사라진 유인물에서 눈을 떼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후설이 살았던 시기에는 과거로부터 오늘을 배운다는 역사주의도 득세했어요. 미술, 문학, 음악 등 모든 영역에서 시대적 맥락이 존재한다는 역사주의는 자연주의와 달리 각 영역마다 전부 다른 특수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후설은 역사주의도 비판했어요. 역사주의가 제시한 맥락성은 황금률처럼 모든 이가 보편적으로 지켜야하는 도덕원칙마저 극단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보게 만들기 때문이었죠.”

 

“질문 있습니다. 그럼 현상학은 원칙이 존재한다고 보았나요?”

 

“좋은 질문이에요, 나이트 앤젤 씨. 후설은 현상학을 만들면서 보편적인 철학은 있으나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했어요. 이제부터 자세히 살펴봅시다.

 

현상학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세계의 중심은 나 자신’입니다. 물론 이 말만으로 현상학의 모든 내용을 대변할 수는 없죠. 후설은 있는 사실 자체를 기술(記述)하는 걸 목표로 하면서도 현상의 지각은 초시간적인 직관인 판단을 하는 나 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어요.”

 

“교수님,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스트라토 엔젤이 우물쭈물거리면서 손을 들자 나이트 앤젤이 ‘두뇌에 갈 영양분을 전부 가슴에 쏟았으니 그러죠’하고 핀잔을 주었다. 리마토르는 더 쉽게 설명하겠다면서 스트라토 엔젤의 의견을 수용했다.

 

“후설이 말한 판단의식적으로 존재를 지각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대상이 존재하더라도 지각해야만 그 대상이 참인지 알 수 있다는 뜻이죠. 제가 나누어드린 종이로 예시를 들어볼까요? 여러분께서 종이를 받았으면 그냥 ‘종이가 있다’라는 사실에서 그칩니다. 하지만 종이의 내용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거나, 종이가 어떤 상태이며 그 상태에 대해 자신이 판단을 내리면 종이라는 대상에 대해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종이가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죠.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면 안 됩니다. 의식적인 지각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대상 없이도 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제 방에 칠판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여러분이 칠판에 대한 감상을 말씀하시면 여기 없는 칠판을 ‘지각’하는 걸까요? 아니죠. 그건 여러분의 주관적 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제 방에 칠판이 있나 없나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시더라도 제 방에 칠판이 있는지 입증할 수 있나요? 아니죠. 제 방에 도달해서 칠판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보고 인식하는 과정, 다시 말해 지각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설은 대상에 대한 감상뿐만 아니라 실재를 보았을 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본 거죠.

 

정리하자면 현상학은 그 자리에 존재하는 대상과 대상에 대한 자신의 지각을 통해 현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입니다. 자연주의가 주장한 것처럼 의식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며, 역사주의가 주장한 모든 대상이 맥락을 따라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내용을 반박하는 내용이죠. 후설의 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을 보고 지각해서 판단을 내릴 때 우리 의식은 객관적 진실을 찾고자 능동적으로 움직이니까요.”

 

리마토르는 설명을 마치고 둠 브링어의 표정을 쓱 보았다. 다들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던 중, 다이카가 손을 들었다.

 

“교수님... 질문이... 있어요....”

 

“네, 뭔가요?”

 

“후설은... 인식이 발동.... 하는 건.... 언제나... 대상을 볼.... 때 만인가요...?”

 

다이카의 느릿느릿한 질문을 들은 리마토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나누어준 유인물 두 번째 장에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침반의 모습에 주목하라고 답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요. 후설은 인식이 가는 방향은 하나라고 보지 않았어요. 인식은 안에 있다가 대상이 주어지면 튀어나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후설은 인식이 항상 외부세계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라고 보았어요. 앞에서 말했듯이 현상학이 추구하는 목표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이 특정 상황에서만 밖으로 뻗어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느 때나 외부 세계를 탐색하는 능동적인 존재여야 했죠.

 

세상에는 반드시 물질의 성격을 가진 대상만이 존재하지 않아요. 이는 후설이 세상 모든 걸 물질로 환원하여 해석할 수 있다는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꺼내든 자신의 논리입니다. 다시 말해 대상을 감각적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위한 의식이 작동함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과 헷갈리면 안 되는 게 위에서 제가 칠판을 예시로 설명한 건 '실재하는 물질 대상에 대한 지각'이 확인 없이 참이 될 수 없다는 뜻이지, 비물질적인 생각과 같은 대상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참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후설은 비물질적인 것들을 들여다보는 지각에 대해서도 설명했어요. 

 

그게 바로 초월론적 주관이에요. 초월론적 주관은 능동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작용의 주체로, 자신이 일상 속에서 많은 대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의식작용을 수없이 진행하고 있음을 자각하면 도달하는 것이죠.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을 통해 일상을 반성하고 삶이 자아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려고 했어요.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서 파고들면 인간의 참된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 자아를 보지 않더라도 의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탐구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다이카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마토르가 다른 질문이 없냐고 물으려고 하자 여러 번 손을 들었다 내렸다하던 은발 여성이 머뭇거리면서 손을 들었다. 질문을 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묻던 그녀는 리마토르가 물어봐도 괜찮다고 하자 쭈뼛거리면서 마이크를 잡았다.

 

“초월론적 주관을 통해 어떻게 본질에 도달하는가?”

 

그녀의 질문에 리마토르는 열성적인 반응을 보내줘서 고맙다고 운을 뗐다. 자신의 인사에 안절부절 못하면서 바닥으로 눈을 굴리던 그녀를 본 리마토르는 전에 뮤지컬 공연을 했을 때 자신이 지목했던 인물임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녀가 다른 이들보다 눈에 띄는 상황을 불안하게 느꼈음을 추가로 기억한 그는 바로 말문을 돌렸다.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이 다른 의식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초월론적 주관은 시간 의식에 근거한다고 보았죠. 후설이 시간을 바라본 관점이 시간 의식으로, 후설은 지금 이 순간이 모여서 시간을 이룬다고 주장했어요. 현재에 받아들여진 근원인상이 새롭게 수용된 근원인상에 밀려 약화되는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오래된 근원인상은 무의식적으로 영향력을 표출하는 파지(把持)에 이른다고 말했죠. 축적된 근원인상과 파지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미래가 어떻게 다가올 거라고 예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원인상의 수용도, 파지의 영향도, 예지도 전부 무의식적으로 벌어져요. 우리는 이걸 어떻게 명확히 알 수 있을까요? 그렇죠, 초월론적 주관을 통해서입니다. 능동적인 인식을 수행하는 초월론적 주관으로 시간 의식을 바라보지만,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동시에 축적된 근원인상의 영향을 받아 초월론적 주관의 인식 방법을 수정할 수도 있죠. 후설은 여기에서 또 다시 본질직관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켜켜이 쌓인 근원인상과 파지, 예지를 초월론적 주관으로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가치를 읽을 수 있어요. 그 가치를 읽는 힘이 본질직관이며, 가치에는 시해동포윤리처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변치 않는 윤리관이 있습니다. 정리하면 후설은 초월적 주관으로 시간 의식을 바라보며 꺼낸 본질직관으로 이어가야만 할 가치들을 봄으로써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음... 알겠다.”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둠 브링어의 명렬표를 눈으로 흘낏 훔쳐보고 그녀의 이름이 레이스임을 확인한 그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더 질문할 이가 없는지 확인했다.

 

“자, 질문할 분 더 없으신가요? 없으시다면 강의를 종료하겠습니다만, 완전히 수업을 마치기 전에 맨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잠깐 꺼내도록 하죠. 오늘 강의는 나이트 앤젤 씨께서 메이 대장님이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의뢰하여 구성된 것입니다. 제가 그 요청에 부응하여 후설의 현상학을 들고 온 만큼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후설은 현상학을 통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삶을 점검하는 걸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메이 대장님께서도 현상학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재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시고 의식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본질을 생각해보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실 겁니다.”

 

리마토르의 말에 메이는 삼각눈을 뜨고 그를 째려보더니 나이트 앤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나이트 앤젤은 이런 이야기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면서 반박했다.

 

“아다를 뗀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지만 한 번 출발한 열차는 목적지까지 가야죠.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점검해보세요.”

 

“납작이 네가 나한테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니잖아! 너야말로 네 부족한 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어때?”

 

“...현상학은 받아들이는데서 멈추지 말고 참인지 아닌지 판단한 뒤에 본질을 찾으라는 학문이에요. 여기서 그 이야기를 꺼내면-”

 

“더 판단할 거 있어? 작은 수준을 넘어 없다시피 한데 이미 참이지.”

 

“그래요! 대장은 크고 무거운 걸 달고 있어서 좋겠네요!”

 

메이와 나이트 앤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더니 이내 한바탕 말싸움이 벌어지자 다이카는 ‘또 저러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마토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말려야하나 고민하던 사이, 칸은 그의 손에 깍지를 끼며 더 신경 쓰지 말라며 같이 둠 브링어의 숙소를 나왔다. 그의 연구실로 가는 내내 손깍지를 풀지 않던 칸은 그에게 물었다.

 

“후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보편적으로 지켜야할 가치가 있다고 그랬지. 그 가치에 사랑도 포함되나?”

 

“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후설은 시해동포주의적인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쳤으니까요. 에로스에 해당하는 사랑은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순수성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 사랑은 언제나 가장 좋은 거네. 그리스도교에서도 믿음, 사랑, 소망 중에 가장 중요한 걸 사랑으로 꼽잖아. 신에 대한 사랑인 아가페라서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사랑의 무게는 무거운 거 같아.”

 

“사랑이 가진 순수한 헌신은 고등적인 지각 작용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고 봐야겠죠. 타인에게 자기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걸 내어주려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나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발그스레하게 홍조가 올라온 그녀는 어느새 도착한 연구실에 들어가더니 문을 잠갔다. 그를 침대로 밀어 넣은 칸은 잔잔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리마토르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 그 좋은 걸 내가 지금 하고 있어. 당신도 그렇지?”

 

“...당연하죠.”

 

그의 대답이 돌아오자 칸은 그를 눕혔다. 당황한 리마토르가 잠시 움찔거렸지만 칸은 그의 입에 그녀의 검지를 갖다 대어 말을 막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가도 괜찮지?”

 

칸의 부드럽고 고운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리마토르의 바지에 닿았다. 그의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그의 양물을 손에 쥐었다. 그녀의 손길에 단단해진 그의 물건을 매만지던 칸은 일부러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 희연과는 동침했던데, 이제 와서 거절하지는 않겠지?”

 

“잠깐만요, 칸. 지금은 아직...”

 

“쉿. 대답을 들으려는 질문이 아니잖아.”

 

칸은 천천히 그의 물건을 만지다가 점점 속도를 올렸다. 팬티와 바지라는 두 겹의 천이 그녀의 손을 덮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손에 미끄러운 촉감이 추가되는 건 알 수 있었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는 리마토르를 본 그녀는 슬쩍 그를 떠보았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손을 떼?”

 

칸이 손에서 힘을 약간 풀었음에도 그의 물건은 가라앉지 않았다. 절정에 다다르기 직전에 쾌락을 뺏긴 그는 억누르던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그녀에게 부탁했다.

 

“지, 진행해주세요...”

 

“그렇게 나와야지♥

 

리마토르의 말에 칸은 우월감과 애욕이 섞인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강렬한 충격에 그의 물건이 떨리자 칸은 다시 손을 위 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흐긋... 칸, 칸...!”

 

“그래, 난 여기 있어.”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절정에 다다르려는 그가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자 칸은 그의 부름에 답해주었다. 그의 물건 끝에 하얀 물기가 맺히려는 순간, 잠긴 문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저, 리마토르 교수님 안에 계시나요?”

 

“쯧, 이런 젠장.”

 

한창 재미를 보려는 순간에 눈치 없는 불청객이 나타나자 칸은 재빨리 그의 바지 안에서 손을 뺐다. 쾌락의 정점에 깃발을 꽂으려던 리마토르도 갑작스레 사라진 황홀경의 자극에 찝찝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물티슈를 꺼내 손에 묻은 쿠퍼액을 닦던 칸은 문을 열고 좋은 순간에 훼방을 놓은 방문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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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지만 진도는 여기서 컷. 앞으로 3편 뒤에 본편을 진행할 생각인데, 최대한 필력을 끌어올려서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


이번 편은 실존주의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스승인 에드문트 후설을 다뤘어. 후설이 제창한 현상학이 이후 하이데거가 제창한 현존재와 존재론 사상으로 이어지게 되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설은 하이데거가 현상학에서 영감을 받아 존재론에 대한 논문을 썼다면서 제출했을 때 하이데거가 자신의 현상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고 해. 현상학이 꽤 난해한 내용이라 해설서와 여러 논문들 찾아읽으면서 이번 편을 썼는데, 잘 이해가 됐을라나 모르겠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적극적인 지적 부탁할게.



많이 부족한 글인데 읽어준 모두에게 정말 고맙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