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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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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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 내지 마세요.”

 

이비가 나지막이 속삭인다. 

 

이제까지 마주친 철충들은 운 좋게 피해왔지만, 저 녀석만큼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이비와 리리스는 각자 총을 쥐고 벽 모퉁이 너머의 철충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언제나 쌍권총을 들고 다니던 리리스는 이제 하나뿐인 권총을 쥐고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긴장한 얼굴을 한 것은 이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굳은 표정 위로 흉터를 덮은 드레싱이 보인다. 어째 저러니까 예전보다 더 진지해 보인다. 조금은 더 험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딴생각을 해가며 가슴을 옥죄어오는 긴장감을 외면하고 있던 순간, 아까 들려왔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천천히. 신중하고도 단호한 걸음 소리다. 무슨 탱크 포탑 같은 걸 머리 위에 얹고 있는 저 철충이 지금 우릴 찾고 있었다. 거 몸집 한번 지랄맞게 크네 또.

 

에바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 아줌마가 알려줬던 루트를 따라 오던 길이었는데......그 고생을 하다 밖으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 꼴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싸워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놈이랑 마주쳤으니. 

 

그냥 우리가 운이 지지리도 없는 건지, 에바 그 아줌마가 길을 잘못 알려준 건지, 그것고 아니면 일부러 엿 먹어보라고 이러는 건지....원인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좆됐다는 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하 즐거운 내 팔자야......

 

그 와중에 이비는 유탄발사기를 들어 올리려던 아라를 제지했다. 고작 그런 거로는 흠집도 못 낼 거라면서. 하긴, 무기 같은 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저 정도로는 안 되겠다 싶다. 

 

그런데, 그 작은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건지, 저 거대한 철충이 코어 부분을 우리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과시하듯 옆에 있던 트럭을 발로 짓뭉개기 시작했는데....

 

어어.....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놈이 몸을 기울여 우리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키이이이....]]

 

“으읏...!”

 

리리스와 놈의 붉은 색 렌즈가 시선을 맞교환한다. 

 

“히끅!”

 

“Oh, shit.”

(이런 썅.)

 

유미와 이비의 반응이 모든 걸 말해준다.

 

아, 끝났네.

 

그 녀석이 (대롱대롱 매달린 게 흡사 거시기를 연상케 하는) 흉측한 기관포를 우리 방향으로 들이민 찰나였다. 

 

“Run like hell!”

(죽어라 뛰어요!)

 

이비가 나를 뒤로 떠밀면서 리리스와 함께 모퉁이 밖으로 몸을 던진다. 고작 소총같은 걸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본인이 더 잘 알 텐데도. 칼을 쥔 소완은 물론이고, 그걸 본 아라와 유미도 나를 뒤로 떠밀며 앞다퉈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를 살리겠다고 모두가 저 괴물 앞에 주저 없이 몸을 내던진 상태. 이런 상황에서 그저 도망가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총소리가 귓전을 때리면서 내 정신을 흔들어 놨거든. 이비가 녀석의 동체 곳곳에 이리저리 돌출된 카메라 같은 것들을 향해 소총을 난사하자, 리리스는 침착하게 녀석의 코어를 겨냥하고 사격을 가했다. 큼지막한 크기에 걸맞는 우렁찬 총성과 함께, 놈의 코어 부분에서 파편들이 퍽퍽 튀어 나간다.

 

막상 저 녀석 반응을 보아하니, 아프다기보다는 짜증이 난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외계 기생충에게도 짜증이란 느낌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들 같은 하찮은 위협에 굳이 총알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건지, 녀석은 기관포를 쏘는 대신 커다란 다리를 휘둘러댈 뿐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이비를 빗겨나간 놈의 발차기는 그대로 리리스에게로 향했다. 최고급 스펙이라는 명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던 듯, 리리스는 눈 깜짝할 새에 공격을 피해버렸다.

 

하지만 외양과는 별개로 꽤나 재빨랐던 철충은, 그대로 뒷발질을 날려 리리스를 (아까 자기가 밟았던) 트럭을 향해 걷어 차버렸고, 나머지 일행들 주변을 사정없이 밟아대고 있었다. 이비와 아라가 소총을 난사하고, 유미가 크랭크를 돌려가며 –거기에 소완은 주방칼을 던져대기까지 했다-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못해 일행들은 바닥에 몸을 굴려 가며 놈의 발에 압사당하는 걸 간신히 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최후의 발악 같은 느낌인지, 이비와 리리스가 각자의 무기를 철충의 센서에다 일제히 갈겨버렸고, 코앞에서 총알 세례를 받은 녀석의 고개가 홱 꺾이는 것이 나름대로 충격은 받은 모양이다.

 

문제라면, 그 덕분에 이제 저놈과 내가 다이렉트로 아이컨택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려나.

 

[꾸우으으륽]

 

아 새끼 거 되게 못생겼네.

 

통성명 뒤에 이어지는 의례적인 악수. 아마도 저놈은 그걸 발도장으로 대신하려는 모양이다. 무슨 거대 닭둘기마냥 쿵쾅쿵쾅 걸어와선 나를 짓밟으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리리스, 이비, 아라, 그리고 유미까지 다급히 녀석을 막아서려 했지만, 이미 그러기엔 조금 늦은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달리기 연습을 조금 더 해둘 걸 그랬지.

 

놈의 파손된 렌즈에 생긴 크랙이 꽤나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밟혀 죽겠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거기, 멈추세요!”

 

갑자기 어딘가에서 뭔가가 날아와 철충의 코어 부분을 가격했고, 이미 심하게 손상된 그 녀석의 렌즈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끼이에에에엑!]

 

내 귀가 다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비명을 질러대는 철충. 고통에 겨운 모양인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대고 있었다. 

 

그 순간,

 

“파이어 인 더 올!”

 

작달막한 무언가가 날아와 놈의 코어 부분을 다시 한번 가격했고, 작은 폭발과 함께 놈의 코어에서 불이 피어오른다. 한층 더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던 커다란 철충이 이제는 기관포를 허공에 쏘아대며 버둥댄다. 총성은 얼마 안 가 끊겨버렸지만. 탄약이 얼마 없었는가 보지. 녀석은 아까와 똑같은 폭발을 한 번 더 뒤집어쓰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바닥에 주저앉은 녀석의 동체에서 빠져나오던 보라색 기생충을 쏘아 없앤 이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선....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데.....이건 또 무슨 일이라니.

 

“아하하! 호린환!”

 

“......홀인원이겠죠.”

 

...내 뒤에서 들려오는 두 여자의 목소리. 아마도 이비가 겨냥하고 있는 건 저 친구들이겠지. 그들이 내고 있을 것이 분명한 두 사람분의 구둣발 소리가 내 바로 뒤에서 멈춘다.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혀보자,

 


 

 

 

 

 

“아하핫, 아저씨 얼굴 웃기다! 꼭 겁먹은 강아지 같아!”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죠? 함부로 나다나지 말라고 누누히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내 눈앞에 보인 건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었다. 차가운 인상의 활을 든 학생 하나, 그리고 탄약과 폭탄 따위가 가득한 가방을 멘 웃는 상의 학생 하나.

 

당장 리리스와 이비가 자신들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두 학생은 그녀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자세히 보니 소완도 칼을 던질 채비를 하고 있다. 저런 살벌한 광경도 전혀 신경이 안 쓰이는 건가?

 

“당신들 누구야.”

 

이비가 소총을 똑바로 조준하며 물어왔다. 그제서야 이비와 리리스에게로 고개를 돌린 두 학생은, 어딘가 의아해하는 얼굴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본다. 

 

“.....그쪽은, 혹시 외부에서 오신 건가요?”

 

활을 쥔 검은 생머리의 학생이 물어왔다. 그러자 갈색 머리의 웃는 상도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는 나와 일행들을 분주하게 번갈아 본다.

 

“오옷? 그럼 아저씨는.....철쭉밭을 뚫고 여기까지 온 거야? 우와, 대단해!”

 

“철충이예요, 토모.”

 

“에헤헤, 쏴리! 마이 미소테이크!”

 

“......”

 

“......”

 

“.....?”

 

유미와 아라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내 표정도 지금 딱 저렇겠지. 뭔지는 몰라도 이거 상당히 피곤한 녀석들하고 마주친 것 같은데.

 

“.....자세한 말씀은 우선 자리를 옮긴 뒤에 나누시죠.”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어색한 침묵을 깨었다. 

 

“아까의 소란 때문에 인근의 철충들이 모두 이리로 몰려들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걸 바라시는 건 아니겠죠?”

 

“맞아맞아! 근처의 안전지대까지 데려다줄게! 거긴 이불도 있고 여기보단 훨씬 나아!”

 

못 믿겠다는 듯 한동안 무기를 계속 겨누고 있던 이비는, 곧 한숨을 쉬며 총구를 내려놓았다. 리리스 또한 주변에 접근 중인 철충 무리가 느껴진다며 권총을 내렸다. 아마 두 여학생이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좋아요. 우선은 저희를 따라오세요. 설명은 도착하고 나서 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두 여학생이 앞장섰고, 우리 또한 그 뒤를 따라 신속히 자리를 피했다. 리리스와 이비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고. 

 

뭣 때문에 그러느냐 물어봤더니, 이비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저들을 몇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블랙 리버의 정보기관 바이오로이드들이예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는 리리스.

 

“네. 정보 공작과 요인 암살에 특화된 개체들입니다. 이번 전쟁 동안 삼안 시설에 침투해 많은 피해를 준 전적도 있고요. 함부로 믿을 수 없는 개체들이에요.”

 

......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그렇게 뵈진 않지만, 그게 또 노림수겠지. 리리스나 이비나 함부로 허튼 말을 할 만한 사람들도 아니고. 

 

우리가 하던 얘기를 주워듣고 긴장을 삼키는 유미와 아라. 녀석들을 보니 덩달아 나까지 똥줄이 탄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자고 속으로 다짐해본다. 그래봐야 당장은 쟤들을 믿는 것 외엔 길이 없지만. 

 

제발 별일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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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학생이 말한 곳까지 가는 길은 위험 그 자체였다. 공중이며 지상이며 전부 철충들로 득시글댔으니까. 이 작은 도시 전체가 철충들의 소굴인 것처럼. 심지어 아까 마주쳤던 녀석처럼 거대한 철충들까지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학생은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지, 야음을 틈타 이리저리 샛길을 찾아가며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달한 안전지대라는 건 정말이지.....

 

“어서와! 어때, 나쁘지 않지?”

 

문자 그대로 거지꼴이었다.

 

구역은 사태 초기에 설치된 듯한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 약간의 경찰 및 군용 AGS, 거기에 이런저런 바이로이드들로 구성된 경비대가 나름대로 방어를 맡고 있었으나.....이 안전지대라는 건 그야말로 난민촌 수준이었다.

 

다 헤진 텐트라도 있는 건 양반이요, 대부분은 꾀죄죄한 몰골로 노숙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박스라도 덮고 있으면 차라리 다행이고. 대부분은 맨몸으로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도 주거수준에 걸맞게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선 침울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노릇이겠지. 

 

시라유리(활을 쥔 학생의 이름이란다)가 설명하길, 이곳은 부유층의 대피소로 들어가지 못한 소외 계층 위주로 이루어진 생존자 그룹이란다. 그럼 그 부유층은 어떻게 되었냐 물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사태 초반에 대부분 죽어 버렸댄다. 경비 AGS로 시설 안팎을 도배해놨던 게 오히려 악수로 작용했다나.

 

아무튼, 그렇게 각 지자체가 순식간에 붕괴하고 정부까지 마비되면서, 지휘계통을 상실한 경찰과 이런저런 세력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모여 이곳에서 생존자들을 보호하고 있단다. 시라유리와 토모(웃는 상의 여학생)가 수행하던 원래 임무는 사실상 쫑났고, 때문에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의 첫 번째 행동강령인 ‘인간 보호’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나. 그건 그렇고 삼안 쪽 경찰과 손잡은 블랙리버 첩보원들이라니, 어째 그림이 좀 웃기다.

 

“.....이 정도 숫자의 민간인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장소 아닌가요? 이대로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을 겁니다.”

 

시설을 둘러보던 이비가 지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두 블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철충들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저놈들과 가까웠으니까. 과장을 좀 섞자면 이미 철충 떼에 포위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당장에 방벽 안쪽에도 공격받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버려진 건물들에도 총알 자국은 기본에 심하면 귀퉁이가 사라진 상태이기도 했고, 그 와중에 사람들은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위에 앉아 통조림을 까먹고 있었다.

 

“우리도 인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도시 바깥으로 퇴로를 뚫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작전 실행을 승인해주실 인간 명령권자가 부재한 상황이라서요.”

 

씁슬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시라유리.

 

“아무나 데려다 임시 명령권자로 삼자니, 사회적 위치가 낮은 분들뿐이라서 그것도 곤란하네요. 아무런 권한도, 지식도 없는.....심지어 몇몇은 신원등록조차 되어있지 않더군요. 우리끼리는 이렇게 큰 사안을 마음대로 진행할 권한도 없고....”

 

주변에 넘쳐나는게 인간인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명령이 없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 아이러니에 헛웃음이 나오려던 순간, 이비가 나를 붙잡고 귓속말을 속삭인다.

 

“주인님, VIP 입장권은 잘 숨겨두세요. 만약 명령권자로 추대되실 경우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게 될 수 있습니다.”

 

할 말만 마치고서는 의심받기 전에 내게서 거리를 벌리는 이비. 그래, 삼안 이사회 VVIP 정도라면 그런 요구를 받고도 남을 만한 신분이다. 이비의 말뜻은 여기 있는 사람들과 바이오로이드들을 전부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의미겠지.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일리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품 안의 VVIP 신분증을 가방 한 구석에 찔러 넣었다. 저 정도면 일부러 헤집지 않는 이상 보일 일은 없겠지. 

 

.......

.......

.......

 

그렇게 시라유리와 토모의 안내를 받으며 빈말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소위 ‘안전지대’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음? 처음보는 얼굴이네? 이 사람들은 어디서 찾았어?”

 

길다란 소총을 메고 지나가던 분홍 머리 소녀가 시라유리에게 물어온다. 누가 봐도 바이오로이드인 게 분명한 생김새다. 시라유리가 우리를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 그녀(이름이 미호라는 모양이다)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흐으흠. 여기까지 안 들키고 왔다는 것도 대단하네. 일단 우리 엄- 아니, 작전관님부터 뵈러가자. 형식적이긴 해도 신원등록도 해야 하고, 할 게 좀 있거든. 마침 나도 보고 드릴 게 있으니까 데려다줄게.”

 

우리는 연신 이리 와, 하며 손짓하는 미호를 따라 ‘지휘소’라는 곳으로 향했다. 주변에선 여러 경찰 바이오로이드들이 분주히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지휘소에 차려진 것들은 급하게 들고나온 장비라는 게 분명히 드러날 정도로 어지러웠고,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자, 여긴 우리 작전관님, 인사해. 그리고 작전관님, 여긴 새로 구조한 민간인들이에요. 아, 그리고 요건 정찰 보고서.”

 

미호가 가리킨 작전관이라는 사람은......무언가 정장같은 걸 입었으되, 정장 본연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특히 저 다리가.....

 

“.....흠흠,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수고했어요, 미호.”

 

표정을 보아하니 내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다. 너무 빤히 들여다봤나.

 

“반갑습니다. 저는 이곳의 임시 책임자이자 몽구스팀의 대테러 작전관, 홍련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사무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작전관이라기 보다는 무슨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 나오는 비서 같은 모양새같이. 

 

“....신원등록 절차를 거치시게 될 텐데, 용이한 인원 관리를 위한 조치이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혹시 신분증을 소지하고 계신가요?”

 

잠시 멍때리고 있는 동안 본론으로 들어간 홍련. 일단은 일행 중 유일한 인간인 내 신분증만 있으면 된단다.

 

......이제서야 내 지갑이 가방 깊숙히 쑤셔박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민증이고 뭐고 거기 다 있는데. 나는 주민등록증을 찾기 위해 분주히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이건 뭐야? 민증 아니야?”

 

잠시 후, 누군가가 내 가방에서 뭔가를 쑥 빼간다. 홍련 옆에 앉아있던 갈색 머리에 무슨 퍼레이드 제복 같은 걸 입은 바이오로이드였다.

 

“드, 드라코! 개인 소지품에 함부로 손대면 어떡해요!”

 

“아, 죄송해요 엄마. 지금 돌려놓.....응?”

 

드라코랬나, 아무튼 녀석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뭘 찾았길래 저러지, 싶어서 그녀의 손으로 시선을 옮기자...... 

 

“이거 어떻게 읽더라.....빕? 아니, 삡인가?”

 

“......”

 

“......”

 

삼안 VVIP 입장권/신분증이 녀석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마 정신없이 가방을 까뒤집다 나온 모양이지.

 

책망하듯 나를 바라보는 이비의 시선의 아주 따갑다. 하지만 그보다 따가웠던 것은, 나를 노려보는 시라유리와 홍련, 그리고 미호의 시선이었다.

 

“찾은 것 같네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요.”

 

어딘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 시라유리.

 

“이....이거 가짜 아니지? 진짜지? 응? 진짜 맞지?”

 

핑핑 도는 듯한 눈으로 어버버거리는 미호.

 

“.....A님.”

 

그리고 VVIP 신분증을 쳐다보던 홍련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던 순간.....

 

“얘들아! 찾았다 찾았어! 삡이래 삡! 진짜 삡!!! 명령권자 찾았대애애!!!!!”

 

드라코의 돌발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신분증을 낚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녀석.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목소리도 참 우렁차다.

 

“자-잠깐!”

 

이비가 다급히 드라코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명령권자?”

 

“명령권자라고요?”

 

“진짜로?”

 

“진짜야! 여기야 여기!!!”

 

각자 한마디씩 내뱉으며 부랴부랴 이쪽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 경찰 출신, 소방서 출신, 민간 출신에....아무튼 별의별 종류가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높은 분이래? 진짜로?”

 

“다 죽거나 떠난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네?”

 

“우리 좀 도와주세요! 부탁이에요!”

 

“인간님! 제발!”

 

“이제 대피할 수 있는거죠? 여기서 더 안 버텨도 되는 거죠?”

 

웅성웅성 하던 소리는 어느새 커다란 외침으로까지 커져 있었고, 신기하다는 듯 뱉어대던 한마디들은 이제 도움을 구걸하는 간청으로 변해있었다.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한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던 이비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

 

나는 이 사람들을 도와줄 능력도, 자격도......그리고 그럴 이유도 없었으니까.

 

설령 저 간청을 들어주더라도, 나는 이 사람들을......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실컷 이용하다가, 버려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내게 주어진 조언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조언은 옳을 것이고.

 

왜냐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어떤 사투를 벌이며 이들을 돕던 간에,

 

결국 여기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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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보이나요? 얼마 전 함락된 정부와 삼안 보안군의 최대 거점 중 하나였죠.”

 

지도상에 [C]로 표시된 지점이 점멸한다. 그 주변 영역은 희미한 붉은색 실선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곳이 무너지면서 한국 정부와 본토에 남은 삼안 본사는 저항할 여력을 사실상 잃어버린 상태예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철충들은 조금 더 큰 목표에 집중하기로 한 모양이에요. 막대한 물량의 AGS를 동원하고 있는 블랙리버 치하 한반도 북부 조차지와 중국 방향으로 상당수의 철충 병력이 이동 중이거든요.” 

 

이번에는 [B]라고 표시된 지점이 깜빡인다. 그곳도 빨간 실선으로 뒤덮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유효한 전력이 남아 있는 곳은 현재 이곳이 유일해요. 하지만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랍니다. 핵심 인사들과 주요 전력은 진작 삼안이 소유한 각지의 해상 거점으로 옮겨 갔으니까요. 다만,”

 

지도상에 유일하게 남은 ‘블루’ 지점, [A]가 하이라이트 되었다. 

 

“당신들이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 도움은 되겠죠.”

 

우리의 현 위치, D에서부터 A까지의 직선 경로가 지도상에 나타났다.

 

“인근에 잔류한 철충들의 관심은 저곳에 쏠려 있어요. 그 수가 많은 편은 아니니, 저 거점도 당분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 틈을 이용해서, 당신은 이 항구에 도달하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으세요.”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 에바가 말하는 항구인 [A]를 바라본다. 저런데 항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신규 건함을 위해 삼안 측에서 극비리에 건설 중이었던 조선소예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사업이 중단되어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죠. 상당량의 AGS 경비 부대가 배치되어 모든 출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거고요. 자, 그럼 이제부터 본론이에요.”

 

강조하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는 에바. 그에 맞추어 지도가 A 지점을 향해 확대되었다. 

 

“조만간 삼안-블랙리버-펙스 연합함대가 VIP 생존자 구출을 위해 이 항구로 접근할 거예요. 아쉽지만 그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지금 확답하기 힘들겠네요.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항구에 도달해서 구조를 기다리세요.”

 

삼안-블랙리버, 거기에 펙스까지 낀 연합함대라. 한 달 전에 들었으면 미친 소리 취급했을 얘기인데.

 

“참, 한 가지 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인 에바.

 

“구조 대상은 당신을 비롯한 삼안 또는 블랙리버 고위직으로 한정되어 있어요.”

 

이어진 말은 내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다.

 

“항구까지 가는 길에 누구의 도움을 받든 그건 당신 자유지만, 영웅 놀이를 할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건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니까.”

 

저렇게 평온한 목소리로,

 

“누구와 마주치든, 그들이 당신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건, 언제든 그들을 내칠 준비는 되어 있도록 하세요. 무슨 선택을 하든.....”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당신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으세요.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

 

“그럼 행운을 빌게요, A.”

 

형언할 수 없이 이질적으로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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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님,”

 

“A님,”

 

소란의 와중에 동시에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 시라유리와 홍련.

 

“갑작스러우시겠지만, A님의 협조를 정식으로 요청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내 대답은.....

 

“내 대답은.....”

 

“주인님....”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비.

 

“......알았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

 

좆까.

 

일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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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간만이네요.

그 동안 여러 일이 있어서 너무 오래 끌었습니다.

삽화도 새로 그리고 있고요

으어어 힘드네유

여하간, 스토리가 다시 진행되고 있읍니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