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더 시간을 끌면 우리만 불리해지겠어. 바로 움직이자.”

 

칸은 굳어있던 입을 떼고 움직일 방법을 내놓았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과감한 결단을 내려 위기를 타개하는 호드의 대장다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할 건가의 방법론적인 문제가 남아있었기에 리마토르는 그녀에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상황에서 하르페이아에게 접근해봤자 악수(惡手)만 될 뿐이에요.”

 

“지금 확실하게 드러난 꼬리는 있잖아. 그거부터 잡자고.”

 

칸은 탈론 페더가 들고 있는 화면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빠르게 올라가는 댓글 창 뒤에 적힌 기자의 이름을 향하고 있었다. 칸의 뜻을 이해한 탈론 페더는 패드를 몇 번 터치하더니 오르카호 전도에 붉은 점 하나를 띄웠다.

 

“목표물은 지금 개인실에 있어요. 하이에나와 워울프를 보내 근처 복도를 은밀하게 통제할게요.”

 

“좋아. 현 시간부로 호드는 작전 체제에 돌입한다.

 

가자, 리마토르.”

 

“알겠어요.”

 

칸은 리마토르의 손을 잡고 풀리지 않게 힘을 주었다. 섬섬옥수에 서린 강인한 정신은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다른 이가 잡고 흔들더라도 일말의 틈을 내주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사퇴해라!”

 

그런 뜻은 문을 열자마자 흔들렸다. 호드의 숙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바이오로이드 시위대는 리마토르의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구호를 외쳤다. 맨 앞줄에 앉아있던 그리폰이 던진 계란이 리마토르의 머리에 정통으로 부딪쳐 깨지자 칸은 분노에 휩싸여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지? 당장 해산하지 못해!”

 

장성급 개체인 칸의 언성이 높아지자 시위대는 눈에 띄게 주춤거렸다. 그 사이 탈론 페더가 전해준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달걀을 닦던 리마토르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조직적인 행동이었으면 칸의 호통 정도로 이렇게 움츠러들 리가 없어. 높은 확률로 기사에 호도되어 개별적으로 뭉쳐서 진행된 시위겠지. 이런 경우에는 조금만 더 흔들면 해체될 거야.’

 

그는 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더 흔들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 광경을 본 펜리르가 리마토르가 수작을 부린다면서 손에 들고 있던 홍시를 던졌으나, 칸이 재빨리 공중에 뜬 홍시를 붙잡고 되던져 오히려 펜리르가 홍시 범벅이 되었다.

 

“지금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호드에 대한 중대한 도발로 간주하겠다! 다들 해산해!”

 

“범죄자를 비호하지 마라!”

 

얼굴에 곤죽이 된 홍시를 뒤집어쓴 펜리르가 목청을 높여 칸에게 항의했지만 문 뒤에서 워울프와 하이에나가 따라 나와 칸의 뒤를 받치자 시위대는 풀이 꺾였다. 하나 둘 도망치다가 끝내 와해된 시위대는 흩어지는 와중에도 리마토르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구 인류!”

 

브라우니 하나가 던진 유리병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자 워울프가 권총을 쏴서 격추하려 했으나 이는 심각한 오판이었다. 총알에 맞아 산산조각난 유리조각이 칸과 리마토르를 덮치는 모양새가 되자 워울프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대장! 교수! 괜찮아?”

 

“네, 그럭저럭요.”

 

“나도 문제없다.”

 

다행히 둘 다 상처가 없었기에 워울프는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하이에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병을 던진 브라우니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쏘아보았다.

 

“젠장, 군번줄을 봤어야 했는데...”

 

“나중에 마리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도록 하지. 리마토르, 아까 맞은 데는 괜찮아?”

 

“네, 다치지는 않았어요.”

 

칸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달걀을 맞은 리마토르의 상태를 묻자 그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호의적이었던 여론이 스프리건의 찌라시로 뒤집어졌다는 사실이 명백했기에 리마토르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읽은 칸은 그를 숙소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일단 씻어. 그 다음에 방법을 생각해보자.”

 

 

리마토르가 머리에 묻은 날달걀을 씻어내는 동안 호드는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리마토르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치부될 수 있었으나,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닌 호드 숙소 앞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탈론 페더가 부대 전체 차원에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서 성립한 회의였다. 칸은 자신의 부관에게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본론으로 넘어갔다.

 

“단발적이고 파편적이지만 시위가 발생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문제가 심각하다. 이에 우리 호드가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는지 의견을 듣고 싶군.”

 

“폭탄으로 싹 밀어버려야지.”

 

“힘에는 힘으로 대응해야지 않겠어?”

 

하이에나와 워울프는 무력을 사용한 대응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무력을 사용하면 문제가 해결될 리가 만무했기에 칸은 즉각 그 의견을 기각했다.

 

“저희 측에서 정정 방송을 내는 건 어떨까요?”

 

“저도 그게 좋을 거 같아요.”

 

“현실적으로는 이게 맞아.”

 

탈론 페더와 케시크, 퀵 카멜은 평화적인 방법을 거론했다. 칸도 속으로는 가급적 문제가 무력 충돌 없이 봉합되기를 원했기에 그 방안을 거론했으나, 자신의 눈앞에서 리마토르가 달걀을 맞는 광경을 목도한 분노가 그 방법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반론을 제시했다. 그녀는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방법에 손을 들어주었다.

 

“여론전에는 여론전으로 대응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은 방법이군. 스카라비아, 네 생각은 어떻지?”

 

“음... 뭘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유포자를 부숴버려.”

 

스카라비아는 칸의 질문에 커피잔을 비우면서 답했다. 케시크가 잘못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으나, 칸의 감성은 그 방법에 마음이 쏠렸다.

 

“...어차피 스프리건을 털러 갈 생각이었으니 겸사겸사 손봐줘도 괜찮겠지.”

 

“대장님! 그건 잘못하다가는 더 심각한-”

 

“저도 그 방법에 찬성합니다.”

 

리마토르는 케시크가 걱정을 가득 담아 꺼낸 반대를 자르고 들어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던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말을 계속했다.

 

“어떤 식으로든 폭력 사태까지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최초 유포자인 스프리건에게 책임이 있어요. 제가 처음 강의한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다시 알려줄 때가 된 듯합니다.”

 

그의 말에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의 동의까지 얻었으니 거칠 게 없어진 스카라비아의 의견을 확정시킨 그녀는 그에게 확실히 못 박았다.

 

“걱정 마. 뼈에 아주 새겨줄게.”

 

“그 전에 두 가지 조건을 달죠. 첫째, 우선 대화로 접근할 것. 둘째, 저도 동행할 것.”

 

“아뇨, 교수님은 여기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리마토르의 말을 들은 탈론 페더는 바로 그를 만류했다. 시위대가 한 번 해산했다지만 스프리건의 방까지 가는 길에 또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몰랐기에 그녀는 리마토르의 안전을 생각하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리마토르는 그녀의 말은 이해한다는 말과 함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 일만큼은 제가 직접 처리할 필요가 있어서요.”

 

그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은 탈론 페더는 한 발 물러섰다. 케시크도 처음 보는 리마토르의 분노에 약간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만큼 그가 이번 일에 단호히 대응할 의사를 갖고 있다고 판단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동의했으니 시작하도록 하지. 작전 시작이다, 호드.”




 

 

 

“좋아, 이번 기사 조회수가 아주 폭발적이야!”

 

스프리건은 방송이 끝나고 폭증한 접속자를 보고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딱 보자마자 대박의 냄새가 나서 기대를 갖고 기사를 썼는데, 그 기사 하나만으로도 뜨거운 반응을 불러온데 이어 인터뷰까지 하니 오르카호 내부 게시판은 리마토르의 불륜을 주제로 아주 활활 타고 있었다. 조회수만큼이나 쑥쑥 올라가는 구독자수를 보며 스프리건은 이번 달 참치 수익이 아주 쏠쏠하리라는 기대를 했다.

 

“이번에 참치 들어오면 갖고 싶었던 배지 세트 사고, 사령관님이랑 같이 비밀의 방에서...”

 

“걱정 마. 비밀의 방 대신 진실의 방으로 보내줄 테니까.”

 

스프리건은 행복한 상상을 끊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봤다. 인기척도 없이 방에 들어온 워울프는 스프리건이 방송에 사용한 대본 종이 무더기를 흘낏 쳐다보더니 입에 문 담배를 대본에 문질러서 껐다. 담배연기가 올라오면서 넘어간 불씨들이 새로운 먹잇감을 물어뜯자 스프리건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언론을 건드리는 건 아니겠지?”

 

워울프는 지금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냐고 지적한 스프리건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대신 늘 쓰던 권총을 뽑아들어 그녀의 발 근처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워울프의 총구가 불꽃을 뿜자 스프리건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틈을 타서 스프리건의 머리채를 잡은 워울프는 아직 뜨거운 총구를 스프리건의 턱에 갖다 대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이해가 안 됐나 보네. 너 납치된 거야.”

 

“납치는 뭔 놈의 납치에요. 부탁드린 것보다 과합니다, 워울프 씨.”

 

워울프의 말에 스프리건이 정신을 잃기 일보직전에 몰려 파들파들 떨자 리마토르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제지했다. 그와 함께 칸이 방에 들어오자 워울프는 총구를 내렸다.

 

“그냥 영화 따라한 거라고. 이 총알도 전부 공포탄이야.”

 

“그래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쏘면 위험하지. 나가 있어.”

 

별 거 아니라도 툴툴대는 워울프에게 칸은 복도를 지키라는 지시르 내렸다. 워을프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문을 열고 나가자 밖에 서있던 하이에나가 낄낄 웃으면서 그녀를 맞았다. 소란스러워지는 복도를 뒤로하고 리마토르와 칸은 스프리건을 바라보았다. 총구가 겨누어진 공포에서 벗어난 스프리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둘의 눈에서 살기가 비치자 목까지 올라온 한숨을 도로 삼켰다.

 

“스프리건. 길게 말하지 않겠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에 진실만 대답할 수 있겠나?”

 

“네, 그럴게요...”

 

“대화가 잘 통하는군. 그래, 기사 출처가 누구지?”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스프리건이 대답하지 않자 칸은 오른쪽 눈을 살짝 치뜨고 스프리건을 노려봤다. 눈빛만으로 기세가 눌린 스프리건은 움찔거렸으나 그래도 아직 완전히 기가 꺾인 건 아니라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이유가 뭐지?”

 

“언론인은 제보자의 비밀을 지켜야 해요.”

 

칸의 질문에 재차 스프리건이 당돌하게 답하자 칸은 고개를 돌려 리마토르를 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잠그고 스프리건에게 걸어왔다.

 

“칸, 아직은 하지 마요. 대화로 풀어보죠.”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존중하지.”

 

리마토르는 스프리건의 맞은편에 앉더니 입가에 미소를 살짝 걸었다. 스프리건은 그나마 온건하게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의 기색을 살폈으나, 리마토르의 표정은 칸만큼이나 살벌한 눈빛으로 그녀를 어떻게 담글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스프리건은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스프리건 씨. 제가 웬만해서 화를 잘 안 내려고 해요. 화를 함부로 표출하는 건 굉장히 거친 방법이거든요. 기분이 언짢다고 핵무기를 막 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문명인답게 배운 사람답게 상대방도 덜 불편하도록 가급적이면 대화로 평화롭게 끝내려고 하는데, 그것도 다 선이라는 게 있죠. 상대방이 실수로 그랬다면 모를까, 고의적으로 저를 곤경에 빠뜨렸는데 그걸 대화로 푸는 게 맞을까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랬는데?”

 

스프리건은 이제 입을 덜덜 떨었다. 이가 딱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이 리마토르의 눈에 담기자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목소리를 한층 깔았다.

 

“상대방의 편의를 봐주는 것도 선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넘었으면 단호한 대응을 하는 게 옳죠. 계속 대화로 풀어주는 호의를 베풀면 자기가 맞는 줄 알고 설치는 무식하고 저열한 종자들은 꼭 있기 마련이거든요.

 

스프리건 씨. 기사 출처 누구에요?”

 

리마토르의 목소리에는 서릿발 같은 매서움이 서 있었다. 칸은 그에게서 그가 블랙리버 군사기지에서 근무할 때 보인 비인간적인 모습이 얼핏 스쳐지나가는 걸 보았으나, 가짜뉴스에 여지껏 쌓아올린 평판이 와르르 무너졌으니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넘겼다.

 

“그, 그건.... 몰라요....”


 

“흐음... 스프리건. 

 


내가 아직도 대화로 풀 마음이 있는 거 같아?


 

칸. 처리해요.”


 

“그러지.”

 

스프리건의 입에서 다시 모른다는 말이 나오자 리마토르는 희미하게나마 입에 걸어둔 미소를 거두었다. 합류한 이래 쭉 써오던 경어까지 뒤집고 반말로 그녀에게 최후통첩을 날린 그는 칸에게 마음대로 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그가 감정이 극단에 치닫는 게 아닌 이상 반말을 꺼내는 일이 없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칸은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스프리건을 확실히 고문할 방법을 떠올렸다.

 

“조금 간지러울 거야.”

 

칸은 스프리건의 등을 발로 밟으며 양팔을 뒤로 꺾어 올렸다. 팔이 비틀리는 고통에 스프리건이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리마토르는 아까 워울프가 담배를 문질러서 태운 종이뭉치를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녀가 끅끅대는 신음만 겨우 흘리자 리마토르는 칸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끄허어.... 허어...”

 

“다시 묻는다. 기사 출처가 누구야?”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가쁜 숨을 고르는 스프리건에게 리마토르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생각할 시간 없이 빠른 박자로 공격해야 진실을 말하는 말실수를 범한다는 신문의 기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프리건이 공포에 몰린 지금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

 

“그... 그건... 몰라요...”

 

“몰라? 칸, 한 번 더하죠.”

 

“그러지.”

 

스프리건이 이번에도 입을 다물자 리마토르는 다시 칸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칸이 스프리건의 셀카봉에 타월을 감아 흔적이 안 남는 폭행을 기획하자 스프리건은 다급히 대답했다.

 

“진짜 몰라요! 전 게시판에 올라온 글보고 쓴 거에요!”

 

“아, 그러세요? 그런데 아까는 뭐, 제보자의 비밀을 지키는 게 언론인이라고?

 

가짜뉴스나 쓰는 기레기 새끼가 감히 내 남편을 건드려?”

 

칸은 손에 든 몽둥이로 스프리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갈비뼈 깊숙이 전해지는 고통이 입으로 올라오자 스프리건은 숨을 울컥이며 토해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스프리건을 발로 툭툭 건드리던 칸은 다시 몽둥이를 들었다.

 

“그 정도로 뼈에 금도 안 가는 거 알아. 5초 준다, 일어서.”

 

“ㄴ, 네!”

 

다시 찾아올 고통이 두려워 스프리건이 바로 일어나자 칸은 몽둥이를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스프리건을 가루로 만들어 사막에 뿌려버리려는 의지가 눈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칸. 근데 아까 남편이란 말은...”

 

“시, 신경 쓰지 마! 지금은 스프리건부터 고문해야지!”

 

리마토르가 그녀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며 방금 그녀의 말을 지적하자 칸은 처음부터 살기가 어디 있었냐는 듯 귀를 새빨갛게 달구고 말을 돌렸다. 냉혹한 군인에서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으로 변한 칸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차가운 표정을 깨고 칸에게만 살짝 따뜻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스프리건, 게시판에 쓰인 글을 보고 기사를 썼다고? 설명해봐.”

 

“그,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오르카호 내부 게시판을 둘러보다가 교수님이랑 하르페이아가 불륜하는 증거를 포착했다는 글을 봤어요... 특종 느낌이 와서 댓글을 다니까 기사를 써달라면서 영상을 보내길래.... 그래서 쓴 거에요...”

 

스프리건은 사건의 전말을 실토했다. 오르카호를 발칵 뒤집은 기사의 단초가 겨우 검증되지 않은 커뮤니티 글 하나였다는 사실에 리마토르는 나비효과를 몰고 온 스프리건을 여기서 담가버려야 하나 고민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자신의 안에서 족쇄를 풀고 나온 분노가 더 날뛰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더 맹렬히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 글 주소 내놔.”

 

“어, 없어요... 영상 받고 새로 고침하니까 삭제되었다고 떠서...”

 

“그럼 작성자 닉네임은.”

 

“익명으로 쓰인 거라서 저도 몰라요...”

 

“스프리건,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넌 검증되지 않은 찌라시를 특종이랍시고 썼다는 거지?

 

칸, 오늘 포로 심문 훈련도 해볼래요?”

 

“경험하기 어려운 훈련인데 기회가 잘 왔군.”

 

칸은 스프리건의 책상 서랍에서 연필을 꺼내 스프리건의 머리맡에 세웠다.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칸은 듣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공포를 꾹꾹 눌러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마술 하나 보여줄게. 연필이 사라지는 마술.”

 

그러면서 그녀는 스프리건의 머리를 연필을 향해 빠르게 내려찍었다. 아슬아슬하게 연필에 닿기 전에 멈추었으나 스프리건은 극심한 공포에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후였다. 칸은 기절한 스프리건을 뒤로 던져놓고 그에게 말했다.

 

“리마토르, 기절해버렸는데 깨울까?”

 

“아뇨. 더 털어봤자 나올 것도 없을 거 같아요. 일단 방으로 돌아가죠.”

 

리마토르는 그녀의 말에 답하면서 스프리건이 써둔 서류를 살피다가 자신과 하르페이아의 후속 기사에 관한 내용이면 모두 품에 챙겼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신고하지 못하도록 자신들이 왔다간다는 모든 증거를 인멸하던 그는 메모장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일을 발설하면 이제 입으로 타자를 치게 될 거에요.’


 

“볼일은 끝났어요.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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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 소설의 핵심어 중 하나인 자유를 대표하는 말이라서 이번 편에 약간 과격한 묘사를 넣어서 표현해봤어. 스프리건 좋아하는 라붕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소설에서 초반부터 기레기 캐릭터로 빌드업을 쌓은 바이오로이드가 스프리건 밖에 없어서 그만...


이번 편에서 리마토르의 감정이 격해지는 묘사가 나왔는데, 이걸로 6편에 나온 리마토르의 반말 장면을 약간 회수했네. 아직 회수하지 못한 부분은 후반부에서 등장할 예정이야.


감정이 이성보다 강한 걸까? 아니면 이성이 감성보다 강한 걸까?



부족한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