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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수하게 많은 기적을 보았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이기기도 했고, 죽어야 할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리 멋진 하늘은 아니다. 그렇지?”

 

 

 

기적이 있었다.

 

나는 무수하게 많은 기적을 보았고,

 

이제서야 보지 못한 기적 또한 무수하게 많았음을 깨달았다.

 

 

 

“아... 아아... ...”

 

“왜 그런 표정이야. 이미 죽은 사람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없을 텐데.”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나있는,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 소녀의 형상을 보기 위해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절벽 위에서.

그 아이의 주황색 머리카락이 생기 넘치에 흩날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 내가... 내가 너 때문에... ...”

 

“응. 나 때문에 그랬지..”

 

“너 때문에 얼마나... ...”

 

 

 

1회차의 첫날, 내가 그 때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전혀 모르는 곳에 떨어졌다는 공포, 얼굴을 아는 사람들 속에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

내가 울었던 첫날은 그런 두려움으로 흘린 눈물이 가득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나는 두려움이 아닌 슬픔으로 울게 되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던 더치걸의 가죽을 보며 울었다.

 

거칠게 뜯겨진 실처럼 주변에 흩어져있던 주황색 머리카락을 보며 울었다.

 

 

 

“내가... 내가 너희들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

 

 

 

다신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울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죽인 인간을 영원히 원망하며 죽어갈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래서 우리 정체를 그 때 안 알려준 거야.”

 

 

 

이 아이는 너무도 포근하게 나를 껴안았다.

 

 

 

“그 때는 일이 전부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처음 봤을 때 기억나? 그 때 사령관 얼굴 진짜 볼만했는데.”

 

“하... 하하하하... ... 그랬지.”

 

“자기가 어디로 온 건지도 모르고 허둥대는 게 엄청 불쌍해 보였어.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모르고 물에 빠져버렸겠지.”

 

 

 

그 때 일을 회상하려는 듯, 더치걸은 눈을 감고 절벽 주변을 조용히 배회했다.

 

저벅-

 

풀잎이 가볍게 즈려 밟히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뒤섞이며 비산한다.

두꺼운 안전모를 깊게 눌러쓴 소녀는 나에게 등을 돌려 콧 노래를 바람 속으로 흘려 보냈다.

 

평화롭다.

평화로울 수 있었다.

 

 

 

‘... 이게 현실이었다면...’

 

 

 

저 얼굴을 현실에서도 볼 수 있었다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생각이다. 더 이상 아무 힘도 없는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다만 슬퍼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파르르 떨려오는 손 끝에 뾰족한 풀잎이 스쳤고, 만신창이가 된 몸에선 힘이 빠졌다.

 

들썩이던 내 어깨를 보던 더치걸이 오묘한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굴에서 팔로, 팔에서 다시 손으로.

검붉은 하늘에서 심온하게 비춰오는 어두운 햇살이 내 살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짙은 핏덩어리 같은 색깔.

 

이 세계를 지탱하던 태양의 색은, 그렇게 더럽고 아픈 색이었다.

 

 

 

“아팠을 거야.”

 

“... ...”

 

“지금도 아플 거고.”

 

 

 

한 별의 상처가, 노을처럼 지고 있다.

 

그건 노을처럼 대부분 붉은색이었다.

 

 

 

“후회하진 않아?”

 

“... 이젠 생각할 필요 없는 선택지잖아.”

 

“하지만 우리가 원망스러웠던 순간은 분명 있었겠지.”

 

“... ...”

 

 

 

더치걸은 조용히 내 얼굴 사위로 손을 뻗어 그림자를 만들었다.

 

가녀린 손바닥으로 만든 차양막은, 검은색이 조금 섞인 노을빛을 막아주었다.

 

 

 

“왜 하필 너희였을까,

왜 내가 온 세상이, 다른 평범한 이세계가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던 이 게임 속이었을까.

힘들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 그리고 아마 엄청 미웠을 거야.”

 

 

 

내 마음 속, 무너진 활자들 사이를 거닐 듯이,

 

더치걸은 느리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구원자가 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어느 정도 선하게, 또 어느 정도 악하게, 그렇게 적당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 ...”

 

“하지만 사령관은 그러지 않았어. 우리를 사랑했으니까.

그러니 그만큼 우리가 미웠을 거야.”

 

 

 

더치걸이 상처가 난 입꼬리를 빙그레 올리며 이야기했다.

 

나는 아무 말도 대답할 수 없었다.

 

2번의 삶.

2번의 회귀.

그 어느 때에도 입 밖으로 내밀지 않았던 상처.

 

‘왜 하필 너희였을까?’

왜 하필이면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너희였을까.

‘왜 하필 나였을까?’만큼이나 셀 수 없이 읊조리고 씹어 삼켰던 의문.

 

1회차에서 라비아타에게 목이 겨눠질 때도,

사향이 나를 셀 수 없이 죽이려 들었을 때도,

빛이 없는 세계에서 데우스 앞에 서야만 했을 때도,

나는 내 다리를 일으켜 세우는 그 감정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차마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었던 감정.

 

‘사랑’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 받은 적 없던 아이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가 위대한 성인(聖人)이 된다면,

그저 내가 당연하게 희생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된다면,

그런 의무적인 사랑을 품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된다면,

 

그 때 다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말하는 대신, 사랑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지?”

 

 

 

그런데,

 

나는 아직도,

 

 

 

“... 힘들었어.”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인가 보다.

 

 

 

“... ...죽고 싶지 않았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어.”

 

 

 

기다란 물줄기가 땅으로 흘러 내렸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선택지가 그 둘 밖에 없었어...”

 

“그래. 그랬구나.”

 

“... 무서웠어.”

 

 

 

그건 그저 무심하게 툭 하고 떨어진 눈물이 아니었다.

 

코 끝이 찡해지고,

눈 앞이 흐려지고,

꼴 사납게 흐르는 눈물을 막으려 미간을 찌푸리지만,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그런 아이 같은 서글픔이었다.

 

 

 

“무서웠어! 

포기라는 선택지가 없었던... 그 10년을 다시 살아야만 했던 게 너무 무서웠다고!”

 

“맞아. 사령관이 맞아.”

 

“사향이 그 커다란 망치로 나를 짓눌러버렸을 때. 내가 그걸 피했다면 시라유리가 대신 죽었겠지!

데우스는? 메리에게 시간을 끌어달라고 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는 줄 알아?

트리아이나를 우주로 올려 보냈을 땐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거 아닐까, 매 순간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손톱만큼만.

 

딱 손톱만큼만 사랑하자.

 

나는 그 말을 따라 살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이 뜨거운 사랑도, 의무감에 저려져 버린 사랑도 아닌.

진짜 참을 수 있는 만큼의 사랑.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상처가 난, 거칠게 뜯겨진, 초점을 잃은,

 

무수한 수식언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 얼굴들을 볼 때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내 의지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교황과 싸워야 했을 때!

그 때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이라는 게... 내가 죽는 거였어!

그게 얼마나 무서웠던 건지... 내 목숨을 끊는 게 ‘최선’이라 여겨지는 게 얼마나 비참한 건지...”

 

 

 

아팠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사랑이란 것에 빼앗긴 것처럼, 나는 바보처럼 죽고, 죽고, 또 죽었다.

 

너무도 기쁘게.

 

 

 

“... 그걸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던 건지...”

 

 

 

그러니까 그걸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손톱이 빠지는 듯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 ...”

 

“수고 많았어.”

 

 

 

하늘의 빛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던 더치걸.

그녀가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 안으며 온 몸으로 아픈 햇살을 대신 받아주었다.

 

사락-

 

햇살이 바람에 흔들린다.

 

사락-

 

검게 뒤틀린 세계의 빛.

 

바람에 흔들리던 검은 숲.

 

묘지가 길게 늘어져 있던 어둠 속에서 무수히 많은 신형들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에 뒤흔들리는 시야에 그 아이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을 초대한 아이들이 모두 보고 싶어 했어.”

 

 

 

그 형상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는 왠지 모르게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아픈 영혼들.

 

상처 받고, 배신 당해 아픔이 무엇인지 각인해버린 아이들.

 

나는 별의 아이가 말한 이 세계의 정체를 떠올렸다.

 

그들이 수거한 영혼이 거하는 장소

 

영혼들이 쉴 수 있는 최후의 휴식처..

 

죽음 속에서 너무도 깊게 상처 받은 영혼들이 오는 정거장.

 

 

 

“영웅을 위한 자리가 없는 곳으로 온, 멋진 영웅 씨.”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의 세계.

 

나는 마침내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사락-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느 브라우니였다.

 

눈가에 난 상처와 길게 내려온 장발이 인상적인.

 

 

 

“우와, 이 분이 진짜 마지막 인간이심까?

처음 뵙겠슴다. 우리 대장님이 너무 달라 붙거나 하진 않지 말임다?”

 

“장발 브라우니... ...?”

 

 

 

브라우니로 태어나 최초로 마리의 부관의 자리까지 간 아이.

 

좆간 사령관의 브라우니 학살을 저지하기 위해 긴 머리를 자르고 스스로 분쇄기에 뛰어든 바보 같은 브라우니.

 

마리의 책상 위에 남아 있던 낡은 담뱃값의 원래 주인.

 

 

 

“크으... 아까 그 새끼 대가리에 주먹질 할 땐 제 속이 다 시원했지 말임다?

아래 턱뼈부터 훅훅! 그 다음에 윗대가리에 푸직!

손에 박힌 어금니를 너클처럼 쓰시는 거 보고 제가 다 쫄았지 말임다! 크크.”

 

 

 

길게 내려온 갈색의 장발을 흩날리던 그녀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날카로운 철충의 발톱에 긁힌 것처럼 오른쪽 눈가를 크게 찢고 가는 흉터 하나.

다른 브라우니에 비해 조금 거친 안면과 여유가 느껴지는 몸짓에서 그녀가 살았던 삶의 격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이런 아이까지 나를... ...

 

 

 

“확실히 인간은 인간이랑 싸워야 한다고, 제가 뭔 지랄을 해도 못 이기던 놈을 너무 쉽게 이겨버리시니까 좀 허탈하지 말임다.

정말이지. 이런 분이 올 줄 알았으면 좀만 더 악착 같이 살 걸 그랬네.

아, 마리 대장님은 잘 지내시지 말임다?”

 

“... 마리... ... 마리는... ...”

 

“에이, 뭐, 그 FM 대장님이 못 살게 굴었으면 못 살게 굴었지, 못 지낼 일은 없겠지 말임다?

저도 담배 필 때마다 대장님 잔소리가 무서워서 늘 사주 경계하며 펴야 했는데, 공감하지 말임다.

그래서 그런데 마리 대장님 대할 때 팀 몇 개 좀 드리자면... ...”

 

 

 

고작 내 얼굴을 봤을 뿐인데 바보처럼 헤실거리던 브라우니.

 

그 애는 나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뜨려 놓으며, 마리와 함께 있을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이야기했다.

 

 

 

“우선 아침 기상 시간은 늘 6시 30분으로 고정되어 있으니까 딴짓 하려면 무조건 그 전에는 일어나서... ...”

 

 

 

하지만 멍 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내 시선을 느낀 브라우니는, 내 이마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면서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 각하.”

 

“우리 대장님,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녀석은, 새벽 안개처럼 흐릿하게 사라져버렸다.

 

저벅-

 

다음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안녕하세요.”

 

 

 

담백한 인삿말로 시작을 끊은 정체불명의 목소리.

꽤나 미성이었던 음성은 옥타브가 그리 높지 않았고, 자세히 들으면 어린 미소년의 목소리처럼도 들렸다.

 

저벅-

 

목소리의 주인이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점차 선명해지는 형태.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아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나와 비슷한 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분홍색 머리카락.

고작 일곱 살 남짓 정도 될 것 같은 어린...

 

... 불현듯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여기서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여쭤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거든요. 물론 가장 여쭤보고 싶었던 건 이건데...”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저 분홍색 머리를 볼 때마다 내 가설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다.

 

 

 

“우리 엄마는 잘 지내나요?”

 

“... 엄마...?”

 

“세라피아스 앨리스. 

아저씨의 메이드요.”

 

 

 

순간 입이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입에 어금니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혀를 깨물며 최대함 숨 죽이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에게 ‘어금니가 씹히는 소리’가 어떤 의미일 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깊은 심해처럼 파란 눈동자.

제 어머니처럼 밝고 화창한 분홍색 머리카락.

 

곱게 잘린 단발의 소년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 어... 엄마는... ...”

 

“엄마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아이는 ‘잘 지낸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까.

 

자신을 씹어 먹은 어머니를 증오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로 인해 무수한 세월을 깊은 고통 속에서 지낸 어머니를 동정하고 있을까,

 

와락-

 

하지만 그런 의문이 바보 같다고 느껴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잘 지낸다고 말해줘요.

우리 엄마가 힘들어한 건 여기서 질리도록 봤으니까.”

 

“... 잘 지내.”

 

 

 

아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조금은 힘들어 하셨겠죠?”

 

“... 많이.

많이 힘들어했어.”

 

“그래도 아저씨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 하죠?

왠지 우리 엄마라면 그럴 것 같거든요.”

 

“... 그래. 이젠 많이 괜찮아졌다.”

 

“그러면 됐어요.”

 

 

 

내 어깨 너머로 뻗어 안은 소년의 팔이 조금씩 빛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위로 흩어지는 모래알갱이처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사라지는 아이를 붙잡을 힘은 나에게 없었다.

 

다만 위안이 됐던 것은,

소년은 웃고 있었다.

 

 

 

“우리 엄마 많이 사랑해줘요.”

 

 

 

사락-

 

그 얘기를 끝으로 소년의 영혼은 하늘로 사라졌다.

 

 

 

“흐음, 왓슨에겐 그런 일도 있었군요?”

 

 

 

그 다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그림자는, 꽤 기다란 흑발을 하고 있는 청초한 아가씨였다.

 

분홍색에 가까운 자색의 눈동자를 하고 있는 등 뒤에는 기다란 장궁을 매고 있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수첩에 무언가를 연신 적고 있었다.

 

 

 

“이것도 꽤 흥미로운 정보군요.”

 

“... 시라유리?”

 

“어머, 왜 그런 얼굴이죠 왓슨? 

제가 별로 반갑지 않는 건가요? 그럼 조금 슬플 것 같은데.”

 

 

 

나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눈을 꿈뻑거렸다.

더치걸이나 다른 바이오로이드도 있는 마당에 시라유리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르카의 시라유리는 나를 보고 ‘사령관님’이라고 부른다.

나를 ‘왓슨’이라 부를 만한 시라유리는... ...

 

 

 

“우리의 이별이 꽤 멋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재회의 순간에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왓슨”

 

 

 

사락-

 

내 생각이 끝맺음 짓기 전, 그녀가 나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가슴이 미어지는 햄버거 냄새.

 

은은한 벚꽃 향기.

 

귓가를 간지럼 피는 익숙한 숨결.

 

사향에게 수도 없이 죽어갈 때 나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누군가의 흐린 기억.

 

 

 

“... 보고 싶었어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복받쳐 울고 있었다.

 

피부를 스치고 가는 낡은 교복의 촉감.

 

 

 

“1회차에서도... 2회차에서도...

...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았어요... ...”

 

“... ...”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당신이 행복한 만큼 나도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싶었다고...”

 

 

 

내 손은 길을 잃은 듯이 사위를 방황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머리 속에서 감정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맡아봤던 그녀의 향기가 내 가슴을 미친 듯이 때리는 듯했다.

그 향기가 익숙하다는 사실이 내 전신의 힘을 빼버렸다.

 

폭력적일 정도의 감정.

그 해일을 내 마음은 차마 다 견뎌내지 못했다.

 

사락-

 

하지만, 나는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았다.

내 몸이 시라유리로 가득 차는 동안 향기는 더욱 거세졌고, 내 몸에 느껴지는 촉감마저 기억의 편린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1회차와 2회차의 기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 내 친구.

 

안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아... 아아아아... ...”

 

 

 

그건 시라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점차 의미 있는 말보다 하염없는 흐느낌이 더욱 많이 흘러나왔고, 무너져 내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내 등을 몇 번이고 잡고 잡으며 자신을 버텨냈다.

 

손 끝에 닿은 그녀의 촉감.

그녀의 손톱.

손톱이 닿은 자리가 한없이 아팠다.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이게 사랑인 줄 알았다면 당신에게 조금 더 많이 얘기했을 텐데...”

 

“... 시라유리...”

 

“1회차 때의 기억이 2회차의 저에게도 남아 있었다면...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했을 거에요.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고작 만들어진 VR 세계의 캐릭터일 뿐이지만 당신을 죽도록 사랑한다고...”

 

 

 

그녀를 내 세계로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은 그녀가 게임 속의 NPC였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만든 가상의 캐릭터.

 

하지만 내 눈 앞에 있는 모두는, 전부 누군가가 만든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영혼.

나와 함께 같은 위치에서 울어줄 수 있는, 사랑해줄 수 있는 격의 존재.

 

-영혼이란 건, 직접 확인할 수 밖에 없단다.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 ... 게임은 재미 있었나요?”

 

“응. 재미있었어.”

 

“왓슨의 ‘라스트 오리진’도?”

 

“... ...”

 

 

 

그녀는 나를 끌어 안은 채 말했다.

 

 

 

“왓슨이 원래 세계로 돌아갔을 때 봤어요.

그리 인기 있는 게임은 아니었더군요.

아니, 제 눈에 보기엔 죽음 밖에 남지 않는 게임처럼 보였어요.”

 

“... 그랬지.”

 

“그럼에도... 재미있었나요?”

 

 

 

그녀는 나에게 애원하듯이 매달리며 물었다.

 

어쩌면 게임 속 NPC였던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 게임의 마지막은, 아무리 멋진 말로 포장해도 고울 수 없다는 걸.

한 번 배신당한 게임에게 다시 마음을 주는 사람은 없다는 걸.

 

그게 곧 게임 속 세상에겐 종말이고, 게임 속 캐릭터에겐 마지막이다.

 

누군가에게 소비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외로움이다.

 

 

 

“무서웠어요... 당신이 없어서 너무 외로웠다고... ...”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버려짐에 대한 공포.

 

그녀가 나에게 이토록 매달리는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처연하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잊은 적 없어.”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1회차에선 너 때문에 죽고 싶은 날이 수십 일이었고, 너 때문에 살고 싶은 날이 수백 일이었어.”

 

“... 왓슨. 바보 같아요.”

 

“바보니까 이렇게 사랑하는 거지.”

 

 

 

점차 사라지는 시라유리의 몸을 나는 있는 힘껏 붙들었다.

얇은 허리를 온 팔로 껴안았고, 등을 내 쪽으로 밀며 떨어지지 못하게 막았다.

 

 

 

“전에는 내가 사라지는 쪽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네.”

 

“... 사랑해요. 이별이 두려울 만큼.”

 

 

 

하지만 언제까지고 붙잡아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손 틈 사이로 흘러 나오는 그녀의 흔적을 매만지며, 나는 시라유리의 얼굴을 두 눈으로 응시했다.

 

 

 

“봤으면 알겠지만, 그 게임이 산소호흡기만 간신히 끼고 있는 상태라 잘 모르겠어.

이별하게 되는 날, 플레이어가 게임 속 캐릭터에게 잘 가라 인사해줄지, 아니면 가지 말라 붙잡을 지 말이야.”

 

“왓슨...”

 

“하지만 아마 마지막까지 남은 플레이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을 거야.”

 

 

 

[시라유리. 너는 나를 대신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두 눈에 비춰지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대신해 숨을 들이마셨다.

 

 

 

“이왕 갈 거라면 잘 가라.

사랑하는 내 친구.”

 

 

 

[길게, 그리고 더 깊게.]

 

길게, 그리고 더 깊게.

 

[하나의 꽃봉오리가 최후의 숨을 내셨다.]

 

하나의 꽃봉오리가 최후의 숨을 내셨다.

 

 

 

“... 사랑해요.”

 

“나도.”

 

 

 

그녀의 몸이 물 속에 잠수한 것처럼 서서히 떠올랐다.

 

다리부터 시작해 마지막에는 그녀의 머리까지.

하늘에 맞닿은 그녀의 발이 반짝이는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쪽-

 

그녀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햄버거 향기가 흐릿하게 남은, 어느 벚꽃의 이야기.

누군가의 흐린 기억으로 남아야만 했던 설화가 내 입 속에서 맴돌았다.

 

영원히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구원 받지 못한 그녀의 영혼을 구했고,

시라유리는 구원 받지 못한 나의 영혼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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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앞에서 이야기를 탄원하듯 뱉어냈다.

 

태어나 10초도 되지 않고 죽어버린 브라우니.

거대한 성기에 내장이 짓이겨져 어른공포증이 생긴 안드바리.

아스널의 손길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죽어버린 첫 번째 에밀리.

웃지 못할 오르카 호에서 누구보다 많이 웃었던 바닐라까지.

 

모두가 내 복수극에 열광했고, 내 이야기에 슬퍼해주었다.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나는 하늘의 해가 모든 바다를 빨아들일 때까지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잊혀진 영혼들의 이야기야.”

 

 

 

그렇게 다시 한 번 혼자 남은 더치걸이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하늘의 노을을 가려주지 않았다.

 

가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루하진 않았어?”

 

“전혀.”

 

“다행이네. 지금 순간을 위해 다들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녀는 나에게서 드넓은 천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쾌청한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은 이제 더이상 검은색이 아니었다.

 

 

 

“... 고마워.”

 

“뭐가?”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마음 편히 떠나진 못했을 거야.”

 

 

 

더치걸이 작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바다가 사라진 세계에 수평선은 더 이상 없었지만, 그 대신 지평선은 생겼다.

지평선 전체가 훤히 다 들여다 보일 만큼 시야는 맑았고 세계는 아름다웠다.

 

맑고 화창한 날씨.

 

내가 이 아이를 묻어주었던 1회차 때가 생각난다.

그 때는 해가 떠오르는 새벽이었는데.

 

 

 

“이곳의 하늘이 검었던 건 아픈 게 많아서였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검었겠지.”

 

“... 검은 하늘이라. 무시무시하네.”

 

“그래서 고맙다는 거야.”

 

 

 

더치걸은 절벽에 걸터 앉은 채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옆에 두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주황색 머리카락.

 

얼마나 오랫동안 썼던 것인지, 짙게 눌린 자국이 보기 처량할 정도로 선명했다.

 

 

 

“... ... 더치걸.”

 

“아니. 나는 괜찮아.”

 

 

 

그래서 그럴까, 묻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다 떠나갔는데 왜 너만 여기 남아 있는 거냐고.

 

하지만 더치걸은 고개를 저으며 그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칠 뿐이었다.

 

휘이잉-

 

휘파람 소리처럼 청명한 바람 소리.

 

나는 말없이 더치걸의 옆자리에 가서 절벽에 발을 걸쳤다.

 

 

 

“... 있지. 원래 사령관도 처음부터 우리 가죽을 벽에 걸었던 건 아니야.

처음에는 그냥... 찌르고, 눈을 뽑고, 팔 다리 자르는 수준으로 끝냈었지.”

 

“... 그게 더 무서운 거 같은데.”

 

“가죽 벗겨지는 게 훨씬 아파. 피부 밑 신경을 훨씬 더 오랫동안 찌르거든.

직접 당해보면 느낌이 다르단 걸 알 거야.”

 

“하하...”

 

 

 

... 듣는 내가 다 소름 끼치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네.

 

더치걸은 허탈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 사령관.”

 

“으, 응?”

 

“사령관은 가죽이 벗겨질 때 어떤 느낌인 줄 알아?”

 

 

 

더치걸이 의뭉을 떨며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밝은 햇살이 전혀 비춰지지 않는 그녀의 눈을, 나는 차마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처음에 살색의 피부가 ‘맨몸’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팔부터 뜯겨져 나가는 살색을 보면 그 개념이 사라지면서 내 ‘몸’의 경계가 한 꺼풀 얇아져.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세계가 사라지는 거지.

나는 아픈 것보단 그게 더 무서웠어.”

 

“... ...”

 

“왜 그랬을까?”

 

 

 

얼굴 양 옆에 수십 개씩 반창고를 붙이고 있던 더치걸은, 제 뺨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사령관은 왜... 왜 우리 가죽으로 방 안을 채우려 했던 걸까?”

 

“... 말로 설명하기는 좀 그렇네.”

 

“왜?”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저 괴롭히고 싶어서 사는 사람도 있는 법이거든.”

 

“그런가...”

 

 

 

더치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뺨을 손으로 긁적였다.

 

그녀의 살색으로 빛나는 뺨을.

 

저 뺨 속에 있는 빨간 근육이 세상의 공기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포가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 것을 경험한 더치걸이었음에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유 없이 악마가 되는 인간의 악의.

 

아마 더치걸은 평생을 가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살고 싶었어.

내 왼팔부터 껍질이 벗겨졌는데, 살구색 팔이 빨간색 팔로 변해버리니까 너무 무섭더라고.”

 

“... ...”

 

“그래도 난 참는 건 잘해서 아파도 참을 수 있었어.

참을 수 있으니까 살고 싶었어.

... 그런데.”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 딱 10분이 지나니까 생각이 변하더라고.

죽고 싶다고.”

 

“... ...”

 

“온 몸의 절반이 빨간 근육과 지방 덩어리로 보였어.

아픈 건 둘째치고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보는 게 너무 무서웠지.

그래서 그냥 빨리 죽어버리고 싶었어. 더 이상 무서운 걸 보고 싶지 않아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상황을 일축하듯 말했다.

 

 

 

“내가 죽은 건 10시간 뒤였어.”

 

“... 10시간...”

 

“왜 그랬을까? 이제 와서 묻는 게 바보 같다는 건 알지만 조금 궁금하더라.

사령관은 우리가 미웠던 걸까?”

 

 

 

그 다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거의 무너질 것 같았다.

 

 

 

“우리는 별로 미운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 하.”

 

 


너무도 어린아이 같은 질문.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사령관이 무서웠어. 그 다음으론 사령관을 죽이고 싶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 벌써 몇 십 년 전 이야기니까... 모르겠어.

용서한 건 아닌데, 사령관이 해준 복수보다 완벽한 건 할 자신이 없거든.”

 

“... 미안해.”

 

“미안하긴. 사령관 잘못도 아닌데.”

 

 

 

사락-

 

내 눈 앞으로 꽃가루처럼 흩어지는 빛 알갱이.

 

더치걸의 발 끝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더치... ...”

 

“있지, 사령관.”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만족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령관은 나 사랑해?”

 

“... 응.”

 

“왜?”

 

 

 

나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했다.

 

사랑의 최초 얼굴은 동정이었다고.

동정이 호기심이 되었고, 호기심은 관심이 되었으며, 관심이 사랑이 되었다고.

너의 이야기에 너무도 많은 마음을 주었고, 마음이 사랑이란 꽃으로 피었다고.

그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었고, 나는 단 한 순간도 그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유가 무수하게 많았다.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하지만 이 작은 소녀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잘 벌려지지 않았고, 혀를 벙어리처럼 갈 곳을 잃었다.

 

 

 

“... 말로 설명하기는 좀 그렇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었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방금 전에 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는 걸.

 

 

 

“고마워 사령관.”

 

 

 

더치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하나의 이유도 없는 악의가 있다면,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는 선의도 있다.

 

더치걸이 마음 편히 이곳을 떠날 수있음은 지금 그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이 사랑해주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여기 묶여 있었을 거야.”

 

“자, 잠깐만! 이대로 가면... ...”

 

 

 

아직 세상의 단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다.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지, 예쁜 곰돌이 인형을 껴안고 일어나는 아침이 얼마나 포근한지, 언니들과 함께 뛰노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거란 말이다.

 

사락-

 

하지만 더치걸은 말없이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나는 이거면 충분해.”

 

 

 

내 팔에 닿는 살결.

 

부드럽고, 거칠며, 따스하고, 차가운,

살아있었던 아이에게 남아 있는 죽음의 흔적은, 너무도 잔인하게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못해준 일은 살아난 더치걸들한테 해줘.

사령관 덕분에 비밀의 방에서 죽었을 애들이 다시 살아났잖아.”

 

“그... 그러면 너는... ...”

 

“괜찮아.

그냥 꽉 껴안아주면 돼.”

 

 

 

그녀는 내 어깨에 조심이 팔을 올렸다.

 

어린 아이의 무게가 느껴진다.

매 순간 가벼워지는 무게가.

 

발부터 사라지던 몸은 어느새 깃털처럼 흔들리며 흐릿했다.

 

 

 

“헤헤... 따뜻하다.”

 

“... ... 더치걸...”

 

“사람 품이 이렇게 따뜻한 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일찍 안길 걸 그랬네.”

 

“내가... 내가 어떻게든 잘 해줄게...

남아 있는 애들 잘 챙겨줄 거고... 너희 무덤도...”

 

“괜찮아. 어차피 죽은 사람은 잊혀져야 하는 거니까.

괜히 무덤 손대지 말고 가끔 와서 꽃만 한 송이 던져줘.

1회차에서 만든 작은 십자가도.”

 

 

 

사락-

 

사락-

 

알갱이 진 신체가 점차 흐려진다.

 

눈을 돌리니 내 몸도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 아...”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의 세계.

 

그곳에 구원 받은 자의 자리는 없었다.

 

나는 더치걸을 품에 안으며 서서히 내 자리를 잃어갔다.

 

 

 

“사령관.”

 

“응.”

 

“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들어줄래?”

 

“그래.”

 

 

 

하늘에 떠있는 드넓은 태양을 바라보던 더치걸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사박-

 

바람 소리에 묻힌 그녀의 목소리.

 

풀잎이 흔들리던 세계가 그녀의 이야기를 귀기울이며 경쳥했다.

 

 

 

“... 알았어.”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빙그레 웃는 더치걸.

 

한 평생 차가운 방 안에서 죽어갔던 그 아이가 지었던 웃음은, 하늘의 태양보다도 따스한 미소였다.

 

사락-

 

사락-

 

그것을 끝으로, 더치걸은 하늘의 빛이 되어 사라졌다.

 

 

 

“... 예쁜 이야기네.”

 

 

 

그녀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서서히 흐려지는 세계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삐빅-

 

삐빅-

 

곧이어 익숙한 기계음이 귓속에 들어왔고, 나는 대번에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르카 호의 수복실.

 

 

 

“예쁜 이야기야.”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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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