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






얼마나 걸었을까, 해가 조금 더 수평선 쪽으로 숙인 것을 보니 1시간 언저리는 지난 것 같았다.

 

지금 오르카 호가 정박해 있는 곳은 제주도 인근 해역. 에메랄드 빛깔이라고 하기엔 조금 모자라지만, 그에 못지 않게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곳이다.

 

가볍게 고개를 돌리면 섬 중앙에 널따랗게 솟아오른 한라산이 눈에 들어오고 사락거리는 바람 소리가 풀잎 사이에 인다.

 

말수를 줄이면 저벅저벅 발소리가 몇 십 배는 증폭되어 들리는 평화로운 섬.

 

나는 한때 올레길이라 불렸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발목까지 자란 풀잎들, 제법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바다의 수평선 위로 우두커니 서 있는 섬을 보며 걷다 보니, 발바닥으로 둔중한 통증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안 힘드니, 리리스?”

 

“전혀요.”

 

 

 

내 앞에서 뒷짐을 진 채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리리스. 저리 꿋꿋이 앞장서는 리리스를 보니 약한 소리는 못할 노릇이다.

 

이번에도 나만 힘든 모양이지. 발등을 벌레처럼 사각거리는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운동을 하기는 해야겠지...’

 

 

 

별의 아이가 힘을 빼앗아 가지만 않았어도 날아다닐 수 있었을 텐데.

 

무겁게 느껴지기만 하는 몸을 보니 문득 그때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걸으면 휴게소가 나타날 거에요. 다음 휴식은 그때 가서 하죠.”

 

“하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데?”

 

“진짜 조금만 더요.”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더 강하게 쥐는 리리스.

 

예전에 애들이랑 에베레스트 등산을 갔다가 저 말을 믿고 크게 당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믿어줘야 할까?

 

아니지. 질문이 잘못됐다.

 

이건 내가 믿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안 믿어준다고 내 운동을 끝내줄 리가 없지 않은가? 명령권이 사라진 시점에서 선택지는 내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도 뭐, 제주도 올레길이 에베레스트 등산 코스마냥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기억의 초침은 조금 더 예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부모님은 제주도에 집 짓고 사는 게 꿈이셨는데.”

 

 

 

나도 꼴에 한국인이었다고, 발걸음을 땔 때마다 왠지 모를 뭉클함이 밀려 왔다.

 

누군가는 제주도를 보고 되게 이국적이라 하겠지만, 오르카 호 사령관에겐 아니다. 

 

제아무리 제주도가 이색적이라 해봐야 전세계를 순방 공연하듯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어야만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이색적이겠나?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거대한 한라산과 푸른 바다. 구름이 산등성이에 끼어있는 모습을 볼 때면 괜한 향수만 짙어진다.

 

 

 

“이 섬에요?”

 

 

 

불숙, 리리스가 예상 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상해?”

 

“이상하다기보단... 두 분에겐 너무 부족한 장소인 것 같아요.”

 

 

 

리리스가 바닥에 널브러진 돌덩어리 잔해들을 보며 말했다.

 

부족한 장소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섬이긴 하지만 이곳도 엄연히 철충이 휩쓸고 간 곳. 주변의 풍경은 내 기억 속 제주도보다 조금 어지러져 있었다.

 

높다랗게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은 죄다 박살이 나고, 간간히 남아 있는 전통 돌담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쓸쓸한 섬.

 

멋진 장소가 아니라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리리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도 재건 작업을 계속 이어가면 괜찮아지겠죠?”

 

“그러길 바래야지.”

 

 

 

들려오는 말소리를 줄이니 걷고 있던 지평 너머에서 타박,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건 작업이 한창 이뤄지고 있는 곳. 마침내 리리스가 말한 휴식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휴식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털컥-

 

포크레인, 레미콘 같은 중장비들이 삐삐 기계음을 기침 소리처럼 뱉어대며 움직이는 공사터.

 

한창 자연 속을 걷고 있던 와중 문명의 흔적이 눈앞에 나타나니 기이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유, 하루 죙일 공투로 상차하고 있었는데, 텐이 와서 몇 삽 푸니까 금방이네.”

 

“거 공구리는 그쯤 칠하고 와서 좀 쉬지, 그래. 오늘은 야리끼리할 수 있다고 들었단 말이지.”

 

“구루마에 옮기는 것만 하고.”

 

 

 

물론... 가장 이질적인 건 저 걸걸한 공사장 말투를 서스럼 없이 내뱉는 스틸라인 대원들이었지만.

 

아이들이 보지 못할 돌담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상황을 보고 있던 나와 리리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돌담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스틸라인 애들이 적응력이 좋긴 좋네.”

 

“적응하지 못한 스틸라인 대원은... 외부 작업으로 차출되지 못하니까요.”

 

“그 말이 맞지만... 너 저번에 그 일 얘기하는 거지?”

 

 

 

리리스는 조용히 자세를 고쳐 잡고 작게 한숨을 내셨다.

 

스틸라인이 투입될 만한 전쟁이 일어날 일이 없어진 지금, 대다수의 스틸라인 대원들은 편의점 알바나 영화관 안내직원 같은 각종 편의시설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럽게도 못하는 사람 역시 있는 법. 저번에 리리스가 편의점에 생리대를 사러 갔을 때, 알바로 있었던 브라우니는 완전히 굳어버려 계산하기까지 30분이 넘게 걸렸던 적이 있었다.

 

군기가 아직 다 안 빠진 탓인지, 아니면 그냥 직속 경호대장이란 거물을 상대하기 힘들어 했던 건지.

 

똑같이 편의점 알바를 해봤던 경험자로서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진다.

 

 

 

‘만약 내가 알바 하던 중에 갑자기 국무총리가 온다고 하면...’

 

 

 

...팔짱을 끼고 쭈그려 앉아 있는 와중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심지어 그런 양반이 가슴에 금뱃지를 반짝이면서 편의점 속옷을 사 가겠다 하면?

 

그 자리에서 안 쓰러진 게 용하다, 브라우니.

 

 

 

“저는 그 브라우니를 겁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주인님. 편의점에 들린 것도 그 시간에 생리대를 파는 곳도 여의치 않아서 그랬던 것일 뿐이고요.”

 

“...그 이유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야.”

 

 

 

리리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전쟁영웅이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브라우니들이 이 애 앞에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졌어요. 지금쯤이면 저희가 가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래. 가자.”

 

 

 

돌담 너머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살핀 리리스가 내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대고 있던 돌담이 울퉁불퉁한 탓에 등이 배겨 왔다. 그 잠깐 사이를 쭈구려 앉았다고 다리도 저리고.

 

운동 부족으로 살았던 사람의 말로인 게지.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온 인간의 운명인 거고.

 

내가 나타났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 저기서 야리끼리하고 있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은 당장 들고 있던 구루마를 집어치우고 자리를 치워야 할 것이다.

 

한 자루에 몇십 킬로그램씩 하는 시맨트 포대도 몇 개씩 이고 도망가야 할 거고.

 

그러는 꼴을 보이기 싫어서 말도 없이 슬쩍 나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 모든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중에 여기 카페가 완공되면 그때나 한 번 생각해 보지 뭐.

 

인적이 드물어진 때를 노려 다시 발걸음을 옮긴 나와 리리스는, 이번엔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 위로 올라섰다.

 

 

 

“확실히 철충에게 망가진 곳도 사람의 손길이 닿으니까 한결 편해지네요.”

 

“난... 발 아파서 모르겠다.”

 

“주인님도 이 정도는 버틸만 하시잖아요. 뭣하면 제가 업어드릴까요?”

 

“됐다. 야.”

 

 

 

다리를 앞으로 뻗는 리리스의 무릎이 몇 배는 가볍게 느껴진다.

 

그에 반해 내 무릎은, 아까부터 연신 산소를 갈구하고 있다. 폐가 쿵쿵 뛰고 있는데 포장이고 자시고가 내 알 바인가? 그나마 숨 쉬는 건 살만하니 그걸 위안 삼아야겠다.

 

원래 운동이란 게 그런 거지 뭐.

 

반쯤 완성된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마감 처리가 안 되어 있는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이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페에 어울리는 지리를 고른다 했더니, 확실히 해안선의 식물 군집들이 지금까지 중에 가장 예쁘게 형성된 것 같다.

 

 

 

“예쁘긴 예쁘네.”

 

“그렇죠? 스틸라인 대원들에게 이런 미적 센스가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의자 하나를 손으로 집어 앉아 리리스가 구색만 만들어 놓은 카운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가지고 왔다.

 

간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자, 찌부둥한 발바닥이 국수 가닥이 풀리는 것마냥 늘어졌고, 아픈 허리도 흐느적거리며 힘이 빠졌다.

 

물론 허리가 아픈 이유와 발이 아픈 이유는 조금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거다.

 

리리스가 가지고 온 두꺼운 흰색 머그컵을 손에 쥔 채, 나는 창가 밖의 풍경을 보았다.

 

철썩-

 

고요하기 그지없는 장소.

 

철썩-

 

바닷가의 바위에 파도가 거품으로 화하는 철썩임만 들려온다.

 

 

 

“평화롭네.”

 

“아름답고요.”

 

 

 

자기 것까지 가지고 온 리리스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컵, 안에 담긴 황토빛 커피는 달콤한 라떼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차가운 회색의 콘크리트 마감이 창문 밖의 초록색 수목과, 하늘을 물감처럼 찍어 길게 펼쳐놓은 듯한 수면에 기이하게 섞이며 독특한 하모니를 발했다.

 

방금 전까지 공사 현장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쁜 장소.

 

예전에 홍대에 이런 인테리어가 인기였던 적이 있었는데, 애들이 그걸 알고 이렇게 만들었던 걸까?

 

 

 

“......”

 

 

 

그럴 리가 없겠지.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한 다음, 리리스에게 물었다.

 

 

 

“리리스.”

 

“네.”

 

“여기는 왜 데리고 온 거야?”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란 거 알잖아. 우리 사이에 아마추어 같이 왜 그래?”

 

 

 

리리스가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다물었다.

 

 

 

“네가 아는 지 모르겠는데, 제주도 올레길은 빨간색, 파란색 깃발을 따라 걷게 되어있어.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러지 않았지.”

 

“조금 산책로를 비틀었을...”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이런 거 아니야?”

 

 

 

다시 한 번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

 

 

 

돌아오지 않는 대답.

 

왜 저러는 걸까? 예전 같았으면 그 이유를 계속 캐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리스가 지혜로운 여자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녀가 저렇게 행동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고.

 

나는 바깥의 바다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제 와서 나에게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생긴 걸까? 아니면 어디선가 긴박한 사건이 터진 걸지도.

 

생각하던 와중 답변이 들려온 곳은 뒤쪽 콘크리트 벽 너머에서였다.

 

 

 

“안식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폐하.”

 

“그래. 잘 보내고 있지.”

 

 

 

들려오는 말투에서부터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씬 풍겨온다.

 

아직 유리창이 붙지 않은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선을 맡겨 부드럽게 뒤쪽으로 눈을 돌렸다.

 

윤기 흐르는 금발이 콘크리트 벽 너머에서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오늘 산책로를 잡은 게 아르망이었구나?”

 

“긴히 해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호대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워 올리며 다가오는 아르망이 리리스를 슬쩍 흘겨 본 뒤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여유로움이 넘치는 몸짓과 부드럽게 흘러 나오는 기품. 하지만 리리스는 그런 아르망이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주인님께 더 이상 짐을 짊어지우지 마세요. 아르망 추기경. 주인님께선 이제 쉬셔야 합니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경호대장님.”

 

“경호대장이 아닙니다. 교황전(戰) 이후로 그 자리는 내려놓았다 말했을 텐데.”

 

“저는 여전히 추기경인지라, 잠시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지요.”

 

 

 

리리스의 날선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는 아르망이 조심스럽게 나에게로 다가왔다.

 

교황과의 싸움 전과 하등 다를 것 없는 옷차림. 붉은 케이프가 바람에 넘실거리니 하얀 블라우스가 수줍게 고개를 들이민다.

 

누군가는 그때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지만, 일말의 삶도 변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별의 대다수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아르망 역시 후자의 영역에 더 가까운 대원이었고.

 

어쩌면 그런 사람들에게 이 차가운 별은, 자신의 삶처럼 약간의 변화도 겪지 않은 일상에 불과한 곳일지 모른다.

 

여전히 위험과 생명에 대한 위협이 산재해 있는, 그런 위험한 별.

 

 

 

“얼마 전 제주도 인근에서 테러 행위가 발각되었습니다. AGS를 이용한 사보타주 솜씨가 꽤나 독특하더군요.”

 

“다친 애는 없고?”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단순 사고였을 가능성은?”

 

“AGS의 내부 기판에 손을 본 흔적이 있더군요. 일정 시각이 되면 자폭하도록 시스템이 변해있었습니다.”

 

“일정 시각이라... 그러면 스케줄을 파악하고 특정 인물을 노렸다는 건데. 누굴 노린 거지?”

 

“마침 그것 때문에 폐하를 불렀습니다.”

 

 

 

아르망이 자신의 패널을 나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테러가 일어난 시각은 폐하께서 주무시고 계시던 때라 폐하를 노린 것은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그럼 철충이 한 짓은 아니란 건데. 그때 그걸 처음 목격한 사람이 누구지?”

 

“C-77 홍련 작전관이었습니다.”

 

“홍련... 임신한 대원에겐 임무 배정이 안 가도록 하라 했을 텐데, 그게 안 됐나?”

 

“아뇨. 홍련 작전관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함선 밖에 있었던 건 단순 산책겸 운동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스케줄 상으로도 자유 시간이었으니 어디에서 뭐를 하고 있었든 이상하진 않았죠.”

 

“...꽤 불쾌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애를 배고 있는 임산부가 테러 행위의 최초 목격자라는 사실이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게 홍련이라고.

 

꼼꼼하기라면 둘째가기 서러운 홍련이기에 그 당시 산보 가는 것 역시 일정표에 쓰여져 있었을 것이다.

 

즉, 조금만 관찰하면 홍련이 그때 그 장소로 나올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거라는 뜻.

 

 

 

“사보타주. 홍련 작전관. 이상이면 제 의중을 파악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무슨 말 하는지 알겠네.”

 

 

 

나는 아르망이 건넨 패널을 다시 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에겐 180도 격변한 이 세계가, 누군가에겐 여전히 변함없이 지긋지긋한 세계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이제껏 자신을 이끌어 온 삶의 관성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몸을 맡길 수 밖에 없는 곳일 지도 모른다.

 

 

 

 

“몇 가지 용의자를 세워봤지만, 저희가 보기에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만한 바이오로이드는 몇 없습니다.”

 

 

 

분노, 불신, 원망, 외로움, 질투.

 

그런 감정들이 여전히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세계.

 

변함을 느낄 수 없으니, 변하지 않고 누군가를 사냥하려 하는 아이들이 아직 남아있는 곳이다.

 

 

 

“엠프레시스 하운드.”

 

 

 

일상을 누리기엔, 이 별은 아직도 차갑다.

 

 

 

“아르망.”

 

“예, 폐하.”

 

“오랜만에 몸 좀 풀자.”

 

 

*

 


다음화:  https://arca.live/b/lastorigin/61207592?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