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리리스는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직접 사령관의 경호를 나가는 날을 제외하면, 정확히는 경호를 나갔다가 퇴근한 이후에도 감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화면을 살피는 일은 이미 새로운 일상으로 시간표의 한 귀퉁이를 당당히 차지했다. 리마토르가 병실에 발이 묶임에 따라 리리스 자신에게 큰 이득이 되리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여러 사람이 그를 찾아오게 만들어 괜히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모양새가 되자 리리스는 계산 궤도를 수정해야만 했다.

 

“여태까지 찾아온 인물은 칸 대장, 아스널 대장, 에밀리, LRL, 안드바리, 나이트 앤젤, 아쿠아인가. 장성 계급이 둘, 부관도 하나라.”

 

오르카호를 이루고 있는 세력 중 못해도 20%, 크게 잡으면 30%가 리마토르에게 포섭되었다고 판단한 리리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치코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미트파이 외에도 솜씨가 좋은 하치코의 손맛에 따라오는 컴패니언의 자부심을 느끼며 그녀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인물 한 명에 눈독을 들였다.

 

“스프리건 공작 이후로 저쪽도 눈치를 챘는지 감시해도 캐서 나오는 게 없네. 그래도 이 한 명만 있으면 얼마든지 불씨는 다시 지필 수 있어.”

 

리리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스노우 페더에게 그 인물에 대한 감시 상황을 보고하라고 연락했다. 리리스의 연락을 받은 스노우 페더는 즉각 보고를 올렸다. 귀에 낀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손을 뗀 그녀는 공손히 모은 손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어떤 입장인지 모르는 제3자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스노우 페더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언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공자가 자로에게 한 말이 명문인 거죠.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정말 울림이 있지 않아요?”

 

“한국어로 풀이해도 훌륭하지만 원문 그대로 읽을 때 더 울림이 있는 것 같군. 未知生 焉知死, 긴 문장을 단 여섯 글자로 압축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야.”

 

“한문이 갖고 있는 표의문자 특유의 압축성은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오죠.”

 

그 시각 리마토르는 병상에서 아스널과 논어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빈손으로 찾아올 수 없다며 <순자>를 들고 온 아스널 덕분에 리마토르는 어제 <맹자> 강의를 한 데 이어 병상 제자백가 특강을 열 뻔했다. 때마침 아스널의 뒤를 이어 찾아온 칸이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누우며 침대 옆에 있던 논어를 꺼내들자 화제의 흐름도 바뀌었다. 그렇게 리마토르와 아스널은 철학을 주제로 뜨거운 대화를 시작했고, 칸은 옆에서 가끔 한 마디씩 보내며 아직 깁스를 풀지 않은 리마토르의 왼팔을 껴안았다. 그가 대화하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얄궂게 웃더니 그의 뺨에 자신의 볼을 밀착하고 부비적거렸다.

 

“저기... 칸?”

 

“왜?”

 

“그, 아스널도 있는데 이건...”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렇지 아스널?”

 

“그럼. 그 정도의 애정표현은 허용범위 안이지.”

 

갑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바로 볼을 붉히며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칸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넘겼다. 아스널까지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을 받자 리마토르는 말도 더 못 꺼내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칸이 자신의 볼에 그녀의 볼을 문지르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수많은 인원 앞에서 강의할 때와 자신과 연애할 때의 모습 사이에 항공모함 몇 척 정도는 오고갈 차이가 있는 그를 보며 칸은 쿡쿡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쑥맥으로 있을 거야.”

 

“크흠,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이 있어야죠.”

 

리마토르의 변명에 칸은 그의 한쪽 볼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기는 걸로 응수했다. 가볍게 그의 볼을 잡은 손을 살살 흔들면서 칸은 리마토르의 말을 반박했다.

 

“전에 희연이랑 연인 관계로 있었던 건 연애가 아니고?”

 

“그것도 원래대로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라요. 저 좋다고 먼저 이야기하는 거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보험 가입하라는 말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의심부터 들었어요.”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대답을 듣자마자 폭소했다. 뜻밖의 대답이었기에 칸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리마토르의 뺨에서 손을 거두며 그리 생각한 이유를 물었다.

 

“참나, 대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였는데?”

 

“뭐... 경험이죠. 학창시절 내내 인기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말도 안 돼. 당신이 인기가 없었다고?”

 

칸은 리마토르의 말에 물음표를 달았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반문했다. 아스널도 리마토르가 인기가 없었다니 이해할 수 없다며 칸에게 동조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쓰게 웃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반복했다.

 

“10대 때도 그렇고, 남들 다 연애하고 지낸다는 20대 때도 전 대학원에서 연구하며 살았으니까요. 학부 과정 4년에 석박사 통합과정 6년, 그것만 해도 벌써 10년이에요.”

 

“이해가 안 되네. 이렇게 멋진 남자한테 눈길을 안 주다니. 이래서 구 인류의 미적 기준이 비틀렸던 건가?”

 

칸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농염하게 미소 짓자 리마토르는 얼굴에 홍조를 한 겹 덧댔다. 둘의 멜로드라마를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아스널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리마토르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학부와 대학원에서는 뭘 배운 건가?”

 

“이것저것 많이 배웠죠. 학부에서는 철학 전공하면서 상담심리학도 공부했으니까요. 대학원에서는 롤스 철학을 연구했는... 으윽...”

 

대학원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던 리마토르는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칸이 걱정하는 눈길을 보내자 그는 괜찮다고 손을 휘휘 저었다. 델x트 주스 한 잔으로 목을 축인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널과 칸에게 대학원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

 

“대학원... 진짜 고생했어요. 성문환 교수님이 제 지도교수님이셨는데,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거라면 뭐든 다 익히게 하셨죠. 엄청 혹독하게 굴리셔서 관둘까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어요.”

 

“대체 뭘 배웠기에 그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부터 이해해야한다면서 형이상학부터 가르치셨죠. 사회철학을 지도하신 분이 왜 형이상학까지 가르쳤나 궁금하실 수도 있겠는데, 제가 학부생일 때는 이미 철학과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한참이나 지난 시기였어요. 학과 교수는 겨우 세 명에 학부생도 전체를 다 모아도 40명이 안 될 정도였거든요. 그러니 교수 한 명 한 명의 수준이 엄청나게 농축되었죠.”

 

“교수진이 전부 괴물급 스펙이면 뭐하는가. 후학을 양성할 길이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수준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학문인데 취급이 너무 박했네.”

 

“취직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인문대학이 갈려나가는 시기였으니까요. 그나마 성론대는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는 대학이었으니 그렇게나마 유지라도 가능했죠.”

 

아스널의 말에 리마토르는 자신을 향한 조소를 날렸다. 곱씹어보면 철학이 먹고 살기 어려운 학문으로 취급받는 건 지금도 다르지 않을 텐데, 그가 그럴듯한 교수직함이라도 받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오르카호의 생활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칸은 생각에 잠긴 그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그래서 형이상학까지 공부해야했던 거야?”

 

“네. 형이상학하면서 논리학도 봐야했고, 그러면서 분석철학도 봐야했어요. 원문으로 배우는 게 최선이니 프랑스어랑 독일어도 따로 공부해야했죠. 추가로 유럽계 언어를 공부하는 김에 라틴어도 공부하라고 교수님께서 주문하시고 빡빡하게 검증하셨으니 라틴어도 욕을 바가지로 해가면서 공부했어요.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었죠.

 

심지어 석박사 통합과정이라서 석사 논문은 쓸 필요가 없는데 성 교수님은 석사 논문을 요구하셨으니... 대학원을 전액 장학금 처리해주셔서 망정이지, 만약 제 돈 내고 다니라고 했으면 당장 도망쳤을 거에요.”

 

리마토르는 그 시절이 생각났는지 몸서리를 쳤다. 카페인 없이 몸이 지탱이 안 될 정도로 피로에 젖어서 논문을 찾아 주석을 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 집약하는 논문을 써서 가져가도 논문심사에서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삶. 차라리 잊고 싶었던 기억까지 되찾아버린 현실이 야속하게 느껴졌기에 그는 허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지금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그렇게 공부한 게 전부가 아니었던 거야?”

 

“당연히 아니죠.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공부는 시작에 불과했어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싹 다 원전으로 읽고 인간에 대한 제 주장을 논문으로 써내야 했으니까요. 

 

제가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인데, 저 때 이후로 사후세계를 믿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이데거는 죽으면 찾아가서 멱살 잡을 거에요.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해서 글을 써놓으니 칸트랑 헤겔처럼 주장 자체가 난해한데 이어 해석 난이도가 곱절로 올라가요. 그거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담담히 말하던 리마토르의 목소리에 점차 감정이 실리다가 끝내는 그 시절의 감정이 올라왔는지 말을 흐리자 칸은 그가 어떤 삶을 보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의 반응을 지켜보던 아스널은 안드바리가 두고 간 초코바를 한 입 물면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한문 이야기는 안하는군. 한문은 대학원생 때 배운 게 아닌가?”

 

“그건 학부 때 배웠어요. 학부 3,4학년 때 동양철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대학원 생활 내내 서양철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죠. 그래도 한문은 몇 번 해보니까 금방 할 수 있어서 편하게 공부했어요.”

 

“그것 참... 성문환 교수가 보통 독종이 아니었네.”

 

칸이 말을 덧붙이자 리마토르는 과거의 쓴 기억이 듬뿍 우러난 억지미소를 지었다. 과거에 교수님이 이런 말을 했다면서 운을 띄운 그는 기억에 선명히 남은 과거의 발언을 읊었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네. 이런 시대에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1류가 되라는 말이지. 철학자라는 직업이 고사하는 시대에 의지를 갖고 박사학위까지 밟았는데 2류라면 너무 서럽지 않겠나?”

 

“...그래서 그렇게 혹독하게 굴린 거야?”

 

완벽주의로까지 비치는 성문환 교수의 말을 들은 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철학이라는 학문도 분과가 넓은 만큼 그 중 한 갈래를 붙들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긴 시간을 바쳐야 하는데, 시대적 특수성을 이유로 기존보다 몇 배는 넘는 공부를 시켰다는 사실에 그녀는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보면 참 그대도 걸물이라는 생각이 드네.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빼먹지 않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에 한문까지 다 할 줄 아는 능력자가 된 게 아닌가. 게다가 사회철학과 형이상학을 심도 있게 공부했고, 그걸 제대로 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대단한 능력의 반증 아닌가?”

 

아스널은 여태까지 본 리마토르의 인상과 방금 그가 한 말을 종합해서 결론을 지었다. 그 말을 들으니 칸도 막연히 그가 대단하다는 인상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걸 느끼고 한 마디를 보탰다.

 

“맞아. 상담심리학도 공부했다면서.”

 

“공부만 했지 자격증을 취득한 건 아니에요. 결국 반쪽짜리인 셈이죠. 그리고 박사까지 따고도 교수 다는데 실패했으니 삼안 들어간 거 아니겠어요.”

 

둘이 치켜세워줌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겸손처럼 보이지만 대학원생 시절의 노고가 얼굴에 얼핏 드러난 그의 기척을 읽은 칸과 아스널은 동시에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이래서 대학원은 신중하게 가라는 거구나...’

 

 

그가 준 교훈 아닌 교훈을 새기던 중, 칸은 문득 리마토르의 과거에서 보았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들여다본 기억의 첫 부분에서 그의 이름을 알아낸 순간이 스쳐지나가자 그녀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성문환 교수가 당신이 박사 학위 취득하면 자기 후임으로 꽂아준다고 했잖아?”

 

“아, 그랬었죠.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대학이 폐교되었어요. 2차 연합전쟁이 절정에 달할 무렵이라 여파를 피해가지 못했었는데, 그때 부모라는 자들이 근 10년 만에 연락을 했어요.”

 

“....무슨 일이었는데 그랬어?”

 

“삼안 연구소에 한 자리 꽂아주겠다고 그러더군요. 자신들이 삼안 간부인데 자식이 백수면 체면이 안 산다는 게 이유였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거절하고 싶었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했죠.”

 

이상이 현실과 맞붙는 일은 많지만 이기는 일이 드물다는 애석한 법칙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지나간 과거는 무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순수한 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빛바랜 열망을 돌이켜 본 리마토르는 휘발된 감정이 다시 돌아오는 걸 느꼈다.

 

감정은 가벼웠을 시기의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것들이었지만 시간을 넘어 돌아온 곳은 그때보다 훨씬 더 무겁고 두터워진 자기 자신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곁에서 잃어가며 깨달은 무게, 두 사람분의 피로 지워진 좁은 사고의 틀이 남긴 잔해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리마토르는 잔해를 거머쥐었다. 예리한 바늘이나 유리조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섭게 선 날이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그는 묵묵히 받아들이며 과거에 지은 죄를 현재의 둘에게 털어놓았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전 많이 미숙했어요. 철학을 업으로 삼는다고 하면서 굳건한 이분법에 스스로를 가두고 경계를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그러니 동면 전에 제가 진행했던 연구들은 전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해요.

 

인간은 이성과 감정이라는 큰 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 대로 감정을 넘겨짓죠. 철학을 공부하면서 저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은 제 부모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정작 저는 그렇게 닮기 싫은 부모의 형상을 하게 된 스스로를 보지는 못했어요. 심연을 바라보다가 심연에 먹혀버린... 악업의 괴물이 되었었죠.”

 

리마토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말에서 회한이 묻어나자 아스널은 그의 기억을 읽었을 때 방문한 지식의 방에서 본 막대한 지식들이 결국 가리켰던 건 리마토르 자신이었는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칸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리마토르의 안에 차올라있던 이중 삼중의 속죄하고픈 비통한 감정이 거칠게 출렁여 손에 전해졌다.

 

“많이 힘들었구나, 당신.”

 

칸은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포옹을 예상치 못한 리마토르는 잠시 몸을 움찔 떨었지만 칸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봤기에 내가 말할 수 있어. 당신은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성장한 만큼 더 폭넓은 기량을 최선으로 끌어내고 있지. 지나간 일이 자충수로 다가올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그 일을 뉘우치며 현재를 살아왔으니까 이제는 과거의 짐을 내려놓아도 돼. 고생 많았어.”

 

“.....”

 

리마토르는 답을 하지 않았다. 칸은 그의 얼굴을 보는 대신 말없이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걸 반복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자 칸은 괜찮다고 속삭였다. 청산한 줄 알았는데 계속 그를 붙잡고 있던 과거의 속죄가 진행형에서 완성형으로 시제를 바꾸었다.

 

“우리는 과거에 어떤 선택을 한 걸 후회하네. 다른 선택지를 골랐으면 어땠을까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유를 기억하지 못할 뿐 그때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던 걸세. 그러니 과거의 죄업을 반성하되 거기에 현재를 두지는 말게나. 업보는 받아들이고 청산해야하지만 그대는 충분히 속죄를 한 것 같군.”

 

칸의 위로를 지켜보던 아스널도 그에게 격려를 더했다.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를 통해 지켜보던 리리스는 이어폰을 빼며 여태까지의 생각을 정리했다.

 


 

“과거의 악업이라고 본인이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리마토르가 과거에 구 인류에 해당했다는 가설은 이제 100% 검증됐어. 주인님이 확보하신 물증에 리마토르 본인의 진술까지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겠지.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주인님을 위협하고, 주인님이 우려하신대로 리마토르가 오르카호에 구 인류의 재림을 보여준다는 연역추론을 이끌어내지 못해. 전에 했던 가짜뉴스 공작으로 스프리건을 고문했다는 정황증거를 잡아내기는 했지만 주인님이 이걸로는 안 된다고 하셨고... 어제 맹자를 강의하면서 역성혁명을 이야기한 걸 보고하니 강의 내용을 확대해석하지 말라고 하셨고...

 

분명 극한상황에 몰아넣으면 이성으로 쌓아올린 위장이 무너지고 감정의 본성이 드러날 텐데, 역시 감시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는 건가...”

 

리리스는 손으로 볼을 괴면서 생각의 활로를 찾아 판을 벌렸다. 리마토르가 시위대에게 린치당하도록 방치한 책임을 물어 사령관에게 침대에서 격렬히 혼났던 날, 당분간은 감시를 통해 정보를 캐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리리스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상당히 제한되었다. 그렇지만 감시만으로는 처음에 사령관과 자신이 노린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본성으로 검증한다’라는 전략을 아예 쓸 수 없었기에 그녀는 사령관의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답답함을 느꼈다.

 

“분명 주인님이 유사시에는 선 조치 후 보고하라고 하셨지만,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지금이 그럴 상황은 아니니까. 아무래도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쓸 수 없는 것 같네.”

 

머릿속 바둑판에 늘여진 흑과 백의 패싸움을 확인하며 최선의 방안을 고민하던 리리스는 곧 꽃놀이패를 찾았다. 사령관이 건 감시라는 단서조항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라서 아껴두고 있었지만, 그것 외에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페더, 감시 대상과 접촉해서 리마토르에게 찾아가도록 상황을 조성하렴.”

 

“언니, 지금 제가 갑작스레 찾아가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어요.”

 

“직접 접촉이 아니라 간접 접촉도 방법이지. 아우로라에게 케이크 주문 배달을 부탁하면 좋을 거야. 결제는 사령관님 명의로 하는 거 잊지 말고.”

 

“대상의 상태가 안 좋은데 이럴 때는 안전을 우선시하는 게-”

 

“페더. 주인님을 위한 일이란다.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뜨리지 마렴.”

 

“....알겠어요.”

 

스노우 페더와의 연락을 끊은 리리스는 다른 자매들이 맡은 업무를 잘 하고 있는가 확인했다. 경호 업무에 들어간 페더와 하치코를 제외한 펜리르와 포이가 감시를 잘 이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올리자 리리스는 칭찬을 남기고 화면을 돌렸다.

 

“이번 일은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네, 리마토르. 대처방법에 따라 스프리건의 후속 기사가 올라갈지 말지가 결정될 테니까.”

 

리리스는 감시 카메라가 비추는 병실 안의 리마토르에게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남기며 작업을 계속했다. 아스널이 준비한 막대과자로 커플 게임을 시작한 칸과 리마토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다음에 사령관과 동침할 때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기억에 새겼다. 물론 그녀가 받게 될 막대는 과자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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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나왔던 설정 정리 겸 잠시 쉬어가는 에피소드. 가만히 생각해보면 스프리건의 찌라시 사건이 터진 이후 리마토르와 더불어 중심에 서 있었지만 여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 있지. 다음 편에서는 그 인물이 등장할 건데, 같이 나올 철학자로 칼 포퍼나 소쉬르 중 누구를 주제로 할까 고민했지만 등장할 예정인 인물처럼 에피소드 중에서 한 번 언급은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헤겔을 골랐어. 난해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쉽게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


사족으로, 이번 편에 나온 철학과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전반적으로 실제 과정에 과장을 가미했어. 학부 과정에서는 보통 3학년 이상일 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춰서 공부하는데, 강의에 따라 원서를 보는 경우가 있어도 그 언어를 익히는 걸 요구하는 정도는 아니야. 그렇지만 대학원 과정에서는 원서를 볼 일이 대폭 늘어나기에 범용성이 높은 한문이나 독일어, 프랑스어 같은 언어는 익혀두면 편해. 언어를 완전히 익히는게 강제되지는 않지만 지도 교수에 따라 언어 습득이 반강제가 되기도 하더라.



완결을 정해두기는 했는데, 거기까지 가자니 아직 남은 이야기랑 등장하지 못한 철학자가 많이 있네. 시간이 걸려도 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할게. 오늘도 부족한 글을 읽어줘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