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이번 화부터는 1인칭으로 씀)


리앤이 가져다 준 도넛 상자와 반지 케이스를 번갈아 노려보며 나는 고뇌에 빠져 있었다. 방금 전 무심코 예쁘다고 했던 말, 불과 몇 주 전 지브롤터 해전이 끝나고 나서 리앤이 날 부축해 줬을 때의 그 두근거림, 그리고 처음 만났던 그날 나를 스스럼없이 대해줬을 때까지. 내가 리앤에게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라는 한 가지의 질문이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복수를 끝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삿된 감정을 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내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왜일까. 왜 리앤에 대해 생각할수록 진정할 수 없는 걸까. 한 시간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좀처럼 명확한 해답은 도출되지 않고 오히려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다.


도무지 내 머릿속 우동사리로는 정답을 찾을 수 없어서 패드를 들고 오르카넷에 접속하여 여러 가지 키워드를 입력해 보았다.

'예쁘다', '두근거림', '홍조', '마음이 진정되지 않음' 등등.

조금 기다리자, 검색 엔진이 내놓은 답은 다름 아닌..





 '사랑' 이었다.


"이런 미친 시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키워드를 추가하거나 빼도 결과는 어김없이 똑같았다.  "Блять..(빌어먹을)" 패드를 내던진 후에 나는 그대로 얼굴을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주 깔끔한 답이 나왔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이유였는데, '나는 애초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었다.


우선 나는 두 번째 인간이라는 아주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업무를 탁월하게 수행한들 결국은 2인자에 불과했고, 아주 작은 실수라도 있을 시에 나는 곧바로 머리에 납탄이 박히거나 참수, 심하면 아예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최후를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가장 발목을 잡은 것은 펙스 회장의 자식이라는 것 그리고 자매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었다. 물론 전자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그 노인네 아들이 된 것은 아니었고 엄마가 나를 올바르게 키워 주셨다는 알파의 변호 덕분에 동정표를 살 수는 있었어도, 후자의 경우는 나를 숙청할 때 가장 큰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 인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녀들이 오르카 구성원들에게 끼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장 합류 초창기에 사과하러 돌아다닐 때도 일부는 레모네이드들에 대해 여전히 날이 서 있었으니.


(회상)

"저는 오메가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같은 바이오로이드를 세뇌해서 그런 짓을 하다니. 더구나 제가 그걸 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화가 나요." 컴패니언의 스노우 페더 씨.


"델타는 저를 포함한 다른 시스터들에게 인간 가구로 만든 것도 그렇고 잔학한 짓을 많이 저질렀죠. 그걸 생각하면 저도 부아가 치밀지만 겨우 참고 있어요." 오드리 씨.


 "감마 그 여자 때문에 주인님이 입은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고나 계시는 겁니까? 자기 함대에 공격을 퍼부어서라도 싸움을 하려는 미친 여자를 제가 어떻게 용서하라는 건가요?" 리리스 씨도.


이러한 여론은 내가 직접 레모네이드들과 싸울 것을 맹세하고 지브롤터 해전에서 승리하여 감마와 제타를 붙잡는 데 성공하자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남은 두 명이 가장 큰 화근덩어리였으니.


그런 내가, 시한폭탄이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가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거기다 리앤은 내게 친구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 사령관님을 더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도 어쩌면 겉으로는 나와 잘 지낼지 몰라도 마음속 어딘가에선 여전히 나를 혐오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애초에 나는 환영받지 못할 손님이었고, 그렇기에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은 없다. 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래. 잡생각은 일찌감치 접고 내일을 위해서 잘 준비나 해야지.." 도넛 상자를 냉장고에 넣고 대강 씻은 후 나는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리앤의 얼굴은 눈을 감아도 계속 떠올랐다.





악몽을 꾸었다.


이번에는 과거의 일이 아닌, 조만간 일어날 수도 있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나는 팔이 뒤로 포박당해 갑판에 무릎 꿇려져 있었고, 양 옆에는 처형당한 레모네이드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를 처형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리앤이었다.


"...."


"리앤. 빨리 쏴."


그녀는 내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텅 빈 듯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동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빨리 죽여. 네 손에 죽는 거면 괜찮으니까."


리앤은 눈물을 겨우 참아가며 조용히 공이치기를 내리고 손을 방아쇠로 가져갔다. 


"미안해.. 미안해 모리아티.."


"괜찮아."


굉음과 함께 납탄이 뇌에 박히는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내 의식은 점점 흐려져 갔다. 


"고마웠어. 그리고, 사랑해.." 꿈속의 나는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허억!"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이부자리는 땀에 가득 젖어 있었다. "왜 하필 그런 꿈을.. 근데 지금 몇 시지?"


시간을 살펴 보니 오전 7시 54분이라는 절망적인 숫자가 찍혀 있었다. 악몽의 내용을 곱씹기도 전에 곧바로 대포 발사하듯 일어나 빠르게 샤워를 하고 회의실로 달려갔다. 늦지 않게 도착해서 문을 열었고, 안에는 지휘관들과 사령관님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늦어서.. 허억.. 죄송합..니다..허억.." 나는 간신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두에게 사과했다. 시간도 제때 못지키는 무능한 부사령관이라는 경멸의 시선을 보낼 것 같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부사령관님, 안색이 많이 창백하신데 괜찮으세요?" 사령관님이 가장 먼저 내 안부를 물었다.


"창백해요? 제가요?" 옆에 걸려 있던 거울을 바라보니 확실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밤 사이에 식은땀을 많이 흘린 탓일까. 


"우와. 안색 파리한 거 봐.."


"거기다 저 식은땀은 대체.."


아스널 준장님의 말을 듣고 다시 거울을 보니 몸을 깔끔하게 닦고 나왔는데도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와이셔츠의 등 부분에서도 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고 환기구로 순환되는 공기 때문에 몸이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윽. 추워.."


"작은 주군의 용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니, 오늘 회의는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최근 몇 주간 회의만 계속했으니 아무래도 지친 것 같소만."


"동의한다. 회의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니."


무용 그리고 칸 대장님 모두 날 염려해 주는 말을 했지만 여기서 쉬겠다고 하면 신용이 깎일 수도 있었기에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어 겨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쯤은.. 어서 진행하시죠." 내 자리로 발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몸이 나른해진 나머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갑자기 왜 이러지.." 그와 동시에 머리도 어지러웠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데, 의무실 가시죠."


"전 괜찮습니다. 뼈 아작나고도 살았는데 이런 걸로 안 죽어요.."


"...." 레오나 대장님이 나를 날 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


"제발 말 좀 들으라고 좀!!" 그리고 그녀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딸꾹."


"으의예?"


"박력이 장난 아니군.."


"누가 지금 죽는댔어? 컨디션 안 좋아 보이니까 쉬라는 거잖아! 그냥 하루이틀 정도 쉬라는 건데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거야! 여러사람 피곤하게!!"


레오나 대장님이 화내는 건 여러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고성을 내는 것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레오나 대장님,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아는-"


"잘 아는 사람이 지금 이런 꼴로 회의실 바닥에 쳐 드러누워 자빠질라고 그래? 몸 아프면 회의실 오지 말고 치료부터 받아야 할거 아냐! 부사령관 빠진다고 회의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얘기한 거 듣고 나서 다음 회의 때 참석해서 같이 조율하면 되잖아! 이 잠수함에 자기 말고 지휘관이 없어 뭐가 없어?!" 그녀의 잔소리는 마치 어머니들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내 표정은 어느새 혼나는 강아지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지금 당장 의무실 가, 부사령관!" 레오나 대장님은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레오나의 승리네."


나는 조용히 "가겠슴다.." 하고 벽에 기대어 의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사령관님 포함 여타 지휘관님들도 따라왔다.


"돌겠네 진짜.."




미하일 심리 묘사를 더 해볼려고 1인칭으로만 해봤는데 괜찮은지 댓글로 적어줘

레오나 마망 대사는 김사부 2에서 수쌤 화내는 거 패러디임

그리고 델타전은 언제 나올까요? 알려드리지 않스빈다!